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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별난 처방전 / 박경대

부흐고비 2021. 4. 23. 12:43

아내는 이십여 분 전부터 자가 치료 중이다. 평소 치료에 도움을 주는 친구가 여럿 있지만, 오늘은 그 분야에 역시 일가견이 있는 딸아이가 엄마를 돕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벌써 삼십여 년도 더 오래된 일상적인 모습이라 걱정도 되지 않고 무덤덤할 뿐이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막 시작하는 축구 경기를 보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이 없는 낯선 번호였다. 끊을까 하다 혹시나 하고 받았더니 뜻밖에 “할아버지”라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외손자였다. 누구 전화기냐고 물었더니 자기 거라며 자랑이다. 학교가 파하면 학원과 축구교실에 다니고 있으니 제 어미가 장만해준 모양이다.

주방에 있던 아내가 외손자라는 말에 얼른 다가와 옆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 귀를 기울이니 속삭이며 통화를 거드는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삭사하셨어요? 보고 싶어요, 금요일 날 외갓집에 갈게요.’라며 손자는 딸아이가 시키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옆에 있던 아내는 손자와 통화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잠시 후, 내가 곰살맞게 대하지 않는다며 전화기를 뺏다시피 가져가고 말았다.

아내는 아직 말을 잘 구사할 줄 모르는 손자를 배려하여 단답형의 질문을 많이 하였다.

‘학교 선생님이 좋더냐? 네 키가 반에서 큰 편이냐? 학교는 몇 시에 마치느냐? 짝꿍이 여자냐? 예쁘냐? 축구경기 때 위치가 어디냐?’ 등 아내의 궁금함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내의 말솜씨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외손자에게 묻는 말을 들으면서 어찌 저렇게 써놓은 글을 읽듯 술술 말이 나오는지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몇 마디 하던 손자는 대답에 부담을 느꼈던지 딸애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목석같은 두 남자의 전화기는 말 잘하는 두 여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제 통화가 한없이 길어지리라.

삼십여 년 전, 당시 아내는 웬일인지 힘이 없고 머리가 아프다며 수시로 누워 지냈다. 병원에 다녀도 차도를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아침을 먹으면서 보니 아내는 평소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출근은 하였으나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전화해 보았더니 통화 중이었다. 10분 후, 20분 후 다시 전화를 걸어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무려 두 시간이나 불통되니 온갖 상상이 떠올라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조퇴하여 집으로 가는 내내 가슴은 방망이질하였다. 마음속으로 별일 없기를 바라면서 방문을 박차고 들어서니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웬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 손에 수화기에서는 친구의 수다가 들렸다.

걱정은 한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아내는 무려 세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전화기를 번쩍 들어 방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달래었다. 아내는 그래도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다음에 만나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자하곤 끊었다. 왜 이리 일찍 퇴근하였는지 궁금해 하는 아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화가 났지만 아픈 아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아내는 힘들다면서 침대에 몸을 맡겼다.

아프다는 아내를 보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 영양제와 한약을 먹어도 약발이 듣지 않았고, 기를 수련한다는 곳에도 가보았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퇴근한 나에게 저녁을 차려주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집안 형님이 오셨다가 아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셨다.

다음 날, 형님이 전화하셨는데 퇴근하면 병원에 왔다가라고 하였다. 아내 문제이리라 짐작했지만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였다. 형님은 약을 건네면서 아내의 긴 전화 통화를 이해하라고 하셨다. 아내는 결혼하고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즐거운 통화를 하다 보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희한한 처방이었지만 신경과 전문의인 형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그날부터 가족 모두의 이해 하에 편안히 전화할 수 있었다. 그 처방은 참으로 신기했다. 불과 일주일이 나나자 아내는 생기가 돌았고, 한 달 후에는 긴 계단도 쉬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글쓰기는 그럭저럭 칸을 메우는 나지만 전화는 오래 해도 5분을 넘기지 못하고 1~2분 정도면 끝이 난다. 도대체 할 말이 없다. 술과 잡기로 즐기는 게 많아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적은가 보다. 하지만 아내는 본론에 앞서 인사만으로도 20분~30분은 너끈하다.

축구경기의 전반전 종료 호각이 울렸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거실에 나와 보니 아내는 오십 분이 지나버린 아직 딸아이의 도움으로 치료에 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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