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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양이 발톱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4. 30. 08:48

고양이는 미물(微物)이다. 미물 중에도 사고능력이 있는 영악한 동물이다. 말귀를 알아듣고 술 취한 주인의 목숨을 구하고 불에 타 죽었다는 개보다는 못하지만, 사철 갇힌 우리 안에서 먹고 배설하는 일만 하는 감정 없는 토끼보다는 낫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계(靈界)를 넘나들며 원한의 복수를 한다는 속설이 아니라도 안광을 번뜩이는 섬찟한 눈이 요상한 괴기(怪奇)를 발하고 있어 정이 안 간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인 감정이고 사실은 더 구체적인 나만의 이유가 있었서이다.

열한 살짜리 나에게 전쟁은 공포였다. 조그만 시골읍 신작로가 이어져 내려오는 피난민 대열, 날마다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다가 토끼 아홉 마리를 한자리에서 쏴 죽인 인민군들의 난폭함과 폭격 총소리, 죽는다는 무서움 그것이었다.

그 무렵 밤마다 고양이가 우리집 토담 담 용구새 위에서 울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듯 바락바락 울었다. 밤새도록 고양이가 운 다음 날이면 영락없이 비행기 폭격이 심해서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부러졌다. 끔찍했다. 인민군 시체, 피난민 시체, 그때 내 눈에 보이는 주검은 모두가 고양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공포가 싸였다. 어린 생각이었지만 고양이 울음소리는 죽음을 부르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났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고양이와 죽음, 그 둘의 연상은 계속되고 있다. 먼저번 고양이를 기르는 데 실패 보고 다시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런데 찬창 문을 여닫고 볼일 다 보는 쥐가 있고, 집 안 구석구석 좀 쑤시듯 쑤셔놓는 배짱 좋은 쥐도 있다. 게다가 툭하면 자식까지 줄줄이 낳아 거느리고 시위하는 아주 괘씸한 쥐가 있어서 맹세코 안 기른다던 고양이를 다시 사왔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천리 방방곡곡 쥐의 피해란 부지기수다. 놀라운 번식력으로 곡식을 축내는 것은 물론 건물을 도괴 시키고 전염병을 옮기고. 혼자 생각이지만 쥐를 소탕할 방법이란 쥐가 정력이나 강장 성인병에 좋다는 성분이 있나를 알아내는 일이다. 연구가 시작되어 확인되는 날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각설하고 우리집 늙은 쥐는 임신부여서 그런지 무우, 배추, 파, 마늘, 굴비 등 훔쳐먹는 식품이 다양하다. 궁리 끝에 쥐덫을 놓았다. 새벽마다 기대에 차서 들여다보면 먹이로 걸어놓은 멸치만 날름 따먹고 종적을 감췄다. 기가 찰 일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시궁쥐 한 마리 때문에 노심초사를 하다니 단번에 요절을 내리라 독한 마음을 먹고 쥐약을 풀었다. 인정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당근에도 풀고 라면에도 풀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약물을 발라둔 쪽은 고스란히 남겨 놓고 안 바른쪽만 용용 죽겠지 하며 다 갉아 먹었다. 내가 수돗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살곰살곰 기어 나와 물을 마시지만 쥐보다 내가 먼저 놀라 주저앉는 꼴이니 할 수 없이 다시 고양이를 사온 것이다.

노르레한 털이 등어리를 둘렀고 목덜미에서 가슴께로는 하얀 목도리를 폭신하게 두른 미녀측에 듬직했다. 나비라고 이름했다. 미모(美毛)에다 훤칠한 키가 곱상이어서 ‘나비양’이라 했다. 나비양은 점잖고 우아한 외양과는 달리 좀 촌스러운 데가 있다. 고운 목소리로 야오옹 하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목소리로 냐아옹이다. 아마 사투리를 쓰는 모양이다.

고것이 우리집에 오고부터 조금씩 정이 붙기 시작했다. 지겨운 쥐들을 모두 잡아 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그러나 고양이는 제사에는 마음 없고 젯밥에만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만 졸졸 따라 다녔다. 어디든지 앉기만 하면 무릎 위로 기어오르고 커피라도 마실 양이면 저도 따라 입맛을 다시고 혀로 내 손을 핥아 주었다. 신문 보는 손을 자근자근 씹기도 하고 발을 내밀어 장난을 청하기도 한다. 그 발길이 바단결이다. 얼굴에 스쳐도 괜찮을 만큼. 그래서 발가락을 펼쳐 보았다. 단풍잎처럼 생긴 다섯 발가락이다.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뒷발은 발가락이 넷이다. 발바닥에 도톰하게 살이 많아서 뛰어다녀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인 모양이다.

그런데 고양이에게 사나운 발톱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고양이는 나와 놀 때는 절대로 발톱을 펴지 않았다. 아마 마음대로 폈다 접었다 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어는 날 저녁 상머리, 응석이 늘 대로 늘어 밥상 위까지 넘보다가 급기야는 생선 접시에 손이 가는 것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 치려는 순간 고양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손등을 할퀴고 말았다. 두 줄로 긋고 간 상처에서 피가 솟고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빗자루를 들고 쫓아갔지만 날쌔게 도망치고 말았다.

여태까지 쥐 한 마리 잡아놓지 못한 것이며 아무 데나 치르는 대소변의 노르꼬름한 냄새에까지 한꺼번에 역겨웠고 울화통이 치밀었다. 손등에 머큐롬을 바르며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것은 나지 고양이가 아니었다. 언제나 이 모양이다. 사람에게는 고양이보다 더 무서운 발톱이 있지만 그것을 아무 때나 쓰지 않는다는 사실. 고양이처럼 폈다 오므렸다 하는 재주가 능한 사람일수록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고양이에게 발톱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언제나 이 망각증 때문에 억울해도 웃을 수 있었고 미워도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발톱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생존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있는 것. 다만 할퀴고 덧나고 아픈 자리에 머큐롬을 바르듯 용서를 배워가며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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