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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예수 부처님 / 반숙자

부흐고비 2021. 4. 30. 08:50

우리 803호 병실은 3인용이었다. 봄부터 시름시름 팔 개월을 앓다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내가 을지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11월도 저문 늦가을이었다.

일주일에 걸친 종합 진찰결과가 담석증으로 판명되었으나 너무나 체력이 약해진 탓에 선뜻 수술 날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내 옆 두 침대에는 중2짜리 볼이 통통한 여학생과 50대 중반인 듯 싶은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모두 교통사고 환자였다. 우리는 금방 친했다. 그곳이 병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어제는 801호실 환자가 위암 수술 도중 죽어 나갔다. 언제 어떻게 죽음이 내게 닥칠지 모르는 절박한 상태여서 환자들은 서로서로 따뜻했고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이 귀여운 소녀는 골이 좀 띵해도 내 옆에 와 기댔고 생리진통에도 베개를 들고 아주 내 침대 속에 들어와 같이 앓자고 졸랐다. 내가 노상 들고 있는 묵주알이 곱다고 제 목에 걸기도 했고 하느님이 더 유명한가 부처님이 더 유명한가 묻기도 했다. “아주머니, 대답해 주세요. 나는 더 유명한 사람을 믿을 테야요.” 밝고 순진했다. 늘 터무니 없는 뗑껑 때문에 우리 병실은 웃음바다였다.

12월 4일로 담낭 절제 수술일이 결정되었다. 준비의 하나로 2일 전인 12월 2일 밤에 수혈을 했다. 당직 간호원 한 사람뿐인 8층은 고즈넉했다. 그날이 마침 서울특별시 민방위 훈련 일이어서 사방은 암흑과 정적뿐이었다. 전지불로 수혈 주사를 놓고 희미한 촛불 한 대 밝힌 침대 머리는 섬찟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자주빛 선혈이 고무호스를 통하여 뚝 뚝 떨어지고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핏방울이 커졌다 작아졌다 요술을 부렸다.

옆 환자는 일찍이 잠든 모양인지 잠잠했다. 소녀만 대퇴부에서 발끝까지 기브스한 무거운 왼쪽 다리를 의자에 받쳐 놓고 내 침대에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푸욱 주무세요. 제가 안 자고 지킬게요.” 아무리 침대에 가서 편히 자라고 일러도 막무가내였다. 아주머니가 아픈데 제가 어떻게 잠이 오겠느냐고 우겼다.

우리는 침묵한 채 핏방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방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 났는지 “아이구 아파 엄니, 엄니, 나는 죽네.” 고함을 쳤다. 밖에서는 이따금씩 여기저기서 조명탄이 터졌다. 조명탄이 터질 때마다 소녀의 실루엣이 벽에 출렁였다.

“아주머니, 수술할 때 마취에서 안 깨어나면 어떻게 하죠.” 근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죽는 거지 뭐, 편안히.” “싫어요. 죽는 거는 무섭고 싫어요. 나는 아주머니가 좋아요. 무지무지 사랑해요. 안 죽는다고 약속하세요.”

소녀는 조그만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안았다. 눈물이 빙그르르 돈, 맑은 눈빛 속에서 착하디착한 순백의 영혼을 보았다. 밤이 깊었다. 스팀이 꺼졌는지 냉기가 스몄다. 시계는 새벽2시. 소녀는 앉은 채로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은 수혈 후유증으로 으슬으슬 오한과 메스꺼움 때문에 온종일 고생을 했다. 그날 밤 수면제를 준다는 간호원의 말에 괜찮다고 해 놓고는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새벽이 가까이 올수록 미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엄습해 왔다.

죽음이 왔을 때 내가 남길 것은 무엇인가. 삼십 구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입술은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깎아 세운 벼랑에 한발로 서 있는 듯 암담하고 처절한 고독이 밀려왔다.

그냥 앓다가 죽더라도 수술을 취소할까.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벽 앞에 내가 얼마나 불충하고 미소한 먼지의 존재인가를 아프게 인식하는 순간, 절재자에 대한 절실한 신뢰가 무릎을 꿇게 했다. “저를 태어나게 하신 분이 계시듯이, 저를 떠나게 하실 분도 계시옵니다. 당신이 ‘오리와 동산’에서 간곡히 빌었듯 그렇게 조촐하고 하얀 마음 모두어 비오니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하시옵소서.”

수술 날이 밝았다. 침대 시트로 나신을 가리고 이동 침대에 눕혀 수술실로 향하는 데 소녀가 다가왔다. “아주머니, 이 묵주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기도 많이 할게요.” 소녀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는 호스를 꽂아 빈 링겔 병에 연결시켜 오른쪽에 차고 링겔 주사병은 왼쪽에 찬 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수술실로 가는 것이다. 복도에는 동병상련의 이웃 환자들이 나와서 무사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나는 어젯밤과는 달리 담담한 심정이었다. 오전 열 시에 시작한 수술은 오후 세 시에 의식을 찾게 되었다. 가물가물한 눈앞에 다투어 손잡는 이웃 환자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때 난데없이 콰당하며 달려 나온 소녀. “예수 부처님 감사합니다. 예수 부처님 감사합니다.” 소녀는 내 가슴에 엎드려 엉엉 목놓아 울고 있었다.

아무리 예수님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아주머니는 살아날 것 같지가 않다고 했다.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숨조차 가빠져서 죽을 것 같은데, 예수 부처님을 한꺼번에 불렀더니 살려 주신 거라고.

나는 가슴이 저려와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저 간절한 소원을 어찌 물리칠 수 있으셨을까. 나는 어쩌면 이리도 큰 사랑 속에 사는가. 넓은 우주, 세 평 남짓한 병실 안에 잠시 마주본 인연이 신의 가슴을 두드려 생명을 구함은 얼마나 큰 억겁의 은총인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영리를 떠난 순수한 마음으로 얼마나 간곡히 매달려 빌었는가가 문제 아닐까. 나는 지금도 분홍빛 로사리오를 알알이 바칠 때마다 온 몸과 마음으로 내 생명을 지켜준 귀여운 소녀를 생각한다. 다함 없는 애정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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