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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좋다 / 윤경화

부흐고비 2021. 5. 4. 12:56

마을 사람들과 밤 산책을 나섰다. 달이 손에 잡힐 듯한 산기슭에 멈춰 서자 밤하늘이 통째로 가슴에 스며든다. "좋다."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꽃처럼 터진다. 말수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심지어 글을 쓰는 사람도 함께 터뜨린다.

말복을 지난 산마을의 달밤, 선선한 바람이 좋고, 운수납자도 홀린 구름이 좋고, 그 사이의 무애한 달이 좋아 환장할 것 같은 그 마음을 담은 한마디. "좋다." 늙수그레한 경상도 아지매들의 담백한 감탄사에 나는 반하고 말았다. 인간이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 내면에서 유로하는 순도 높은 감정의 확실한 표현이 아닌가. 무의식의 저변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까지 긁어 올리려는 나의 서글픈 몸부림에 비하면 가슴이 뻥, 뚫리는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절기에 밤 산책을 즐긴다. 해발 육백 미터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을 따라 삼십도 가량의 기울기로 이어지는 길은 몸과 마음에 긴장감을 주어 좋다. 사람들은 약속하지 않아도 저녁밥을 먹은 후 고샅길 여기저기서 큰길로 나와 행선을 하듯 걷는다.

허벅지와 장딴지가 팽팽하게 당기고 단전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 오장육부를 윤회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호흡은 거칠어진다. 어느새 말은 잦아들고 무아에 이른다. 주변의 사람과 사물, 자연, 소리 모든 것이 홀로, 스스로 자유롭다. 밤 산책의 매력이다.

사람들은 젊은 날 학문과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벗을 사귀며 꿈을 향해 치달았다. 일생 중 완전한 몰입의 시절이었다. 당시는 고통과 갈등, 좌절이었던 순간을 지금은 그 시간이 치열한 떄였다고 토로한다. 그토록 빠져들었던 시간을 돌아보며 숨고르기를 하는 사람들이 달밤의 산책에 매료되어 그 맛을 한마디로 '좋다.'고 한다.

좋다.

당신과 나, 누구에게나 힘이 되는 말,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말, 잘못을 용서해주고 싶어지는 말, 아픔도 잊을 수 있는 말, 자주 들어도 물리지 않는 말, 무시로 그리워지는 말. 그래서 사람들은 구족具足하다고 생각할 때 저절로 이 한마디를 뱉는 것인지도 모른다.

목성균 선생의 수필 <고모부>에도 좋다는 말이 나온다. 선생의 조모는 저녁상 앞에서 사나운 풍세 속에 식구 중 누군가 나가 있지 않고 함께 있다는 사실에 튀장 냄새 한 가지만으로 진수성찬이라고 한다. 더없이 구족한 순간을 참을 수 없어 결국 "참, 좋다."를 한숨처럼 토한다. 더없이 절제되고 아름다운 감탄사다. 사람이 두루 만족하다고 할 때 기실은 진정 원하는 것은 한두 가지만 있어도 포만감을 맛본다. 그래서 '좋다'는 감탄사는 인간의 맑고 소박한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마을 사람들은 대개 퇴직자들이다. 오미자보다 더 다양한 생의 맛을 품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인간의 일생이 예삿일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하지만 생은 우리의 소소한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좋다고 할 때의 말끝은 잠자리가 날갯짓하듯이 자유로운 떨림이 있다. 은연중에 해냈다는 자긍심과 설렘이 있기 때문일 게다. 마을 사람들이 뱉은 "좋다."의 느낌은 실제 의미의 범위를 넘어서는지도 모른다. 마치 하안거에 비지땀을 흘리던 어느 선승의 벼락같은 깨달음을 알리는 탄성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순을 넘어 일흔의 세월을 품어 발효시킨 세계가 달 밝은 여름밤을 만나 선승의 화두가 열리듯 터졌던 것일까.

'좋다.'는 고해苦海라고 이르는 세상을 여행하는 길목에서 목로주점처럼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감동의 언어다. 대단할 것도 없는 조우에도 '좋다.'가 끼면 신이 나고 기가 산다. 나 역시 늘 그래 왔다. 내가 감동한 것들은 참으로 평범해 별로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겨우 보통 수준을 조금 넘어서는 것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신이 나는 때가 더러 있었는데 '좋다'의 힘인 줄은 몰랐다. 그냥 우리 편이고 좋았으니까. 정작 대단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쉽게 좋다고 하지 않는다. 많은 노력과 정성을 바치고도 기를 펼 수 없다. 늘 모자란다는 생각 때문이다. 조금만 부족해도 어느 날 아득히 멀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대단한 것은 불편하고 조심스러워서 좋다고 할 수 없다. 모순되게도 대단한 것을 바치고 있는 것 역시 '좋다'의 힘이다.

모처럼 이웃과 밤 산책을 나섰다가 활짝 핀 감탄사 '좋다.'를 새롭게 만났다. 진정 좋은 것이 무엇인지 보일 것 같다. 나보다 앞서 내려가는 이웃들의 뒷모습에 답이 보인다. 그들의 느린 걸음걸이. 청색 달개비 꽃에 내려앉은 달빛, 이따금 들리는 개짓는 소리, 계곡을 타는 물소리. 나의 숨결이 앉을 수 있는 이 모두가 '좋다.'의 거처다.

언제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그들 앞에 설 때 분신술을 하듯 '좋다'는 세계를 채울 것이다. 저만치 앞서 가는 이웃의 춤사위에 어리는 풍류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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