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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보다 축제를 구경하는 행렬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때가 있다. 석 달에 걸쳐 보기 드물게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던 모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나의 느낌도 그와 같았다. 최고의 트로트 가수를 뽑는 음악경연 대회였는데 어디를 가든지 일주일에 한 번 벌어지고 있는 이 대회가 화제였다. 방송을 놓친 날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인 기이한 현상이 더 흥미로웠다. 그 속에 나도 있었다.

TV가 시간 도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주부들에게는 집안일을 미루게 했고, 학생들에게는 숙제를 미루게 했고, 어린이들은 밥숟가락을 든 채 영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기가 일쑤였다. 지식과 교양, 드라마와 스포츠, 다양한 분야의 다큐멘터리는 물론 지방과 국제사회의 정보를 망라한 뉴스 등을 알려주는 역할을 가장 먼저 한 영상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공영방송의 시청률이 한 자리 숫자에 머무는 수난을 겪고 있다. 그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필요한 정보를 손바닥 안으로 불러와 개인과 개인 간의 소통을 자유롭게 하는 스마트폰의 등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무궁무진한 기능과 무엇보다 쌍방향 소통이라는 탁월한 소통방식이 탑재되었다는 것은 관심을 끌 수 있는 큰 매력이다. TV는 이처럼 앞서가는 과학의 발달과 시청자들의 변화된 욕구를 미처 충족시키지 못해 외면을 받던 차에 '시청자와의 공감'이란 최고의 명제를 성취한 음악경연 프로그램이 탄생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심야의 방송임에도 시청률이 30퍼센트에 육박할 만큼 인기를 누리다 최고 시청률을 35.7%까지 끌어올렸다. 안방에 앉아 고급스러운 쇼를 보는 맛에 시청자들은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날을 기다렸다. 출연진들은 십 대에서 사십 대까지의 남성인데, 유소년부와 신동부, 그리고 직장부와 현역부, 타장르부로 나뉘어져 있다. 노래는 물론 출연자들의 출중한 재능과 다양한 이력은 노래에 맛을 더한 풍성한 무대로 꾸미기에 충분했다. 기성가수들에게서 보지 못한 신선함은 트로트에 대한 이미지 변화를 불러왔다. 어느 원로 가수는 트로트는 '확실한' 세대교체라고도 했다.

나에게는 십대에 누릴 법한 놀이와 대중문화에 대한 추억이 없다. 학교와 집, 일에 묻혀 사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맞는 정서와 대중문화의 경험이 내 인생에서는 빠져 있다. 특히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공간에서 친구와 놀아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 지금도 결핍과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가요 한 곡도 멋스럽게 부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재미없는 사람 쪽에 속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란 사람은 흥이란 것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지내던 터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있다. 화제의 프로그램(내일은 미스터트롯)을 보자마자 시쳇말로 *'금사빠' 현상이 일어났다. 경연이 거듭될수록 재미뿐만 아니라 관심의 폭도 넓어졌다. 무엇보다 직설적인 노랫말의 어감에 묻어 있는 우리 정서의 맛은 가히 일품이다. 차진가 하면, 달콤하고 부드럽다. 또한 걸쭉한가 하면, 구수하고, 칼칼하다. 무대 위의 경연 참가자들은 어절마다 씹어 맛을 음미하듯 맛깔나게 리듬을 탔다. 방청석의 관객들과 심사위원들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발화發火하고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모두가 청춘이었다. 그 속에 흥과 한의 무늬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내 청춘의 문장도 소환되었다. 새벽 다섯 시에 출근하는 사람이 자정을 넘겨가면서 TV 앞에 앉아 있었더니 급기야 아침엔 코피까지 쏟았다.

과연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걸까? 새로운 스타가 풍년이다. 갑자기 신흥 스타들에게 팬덤이 형성되고, 문화 평론가는 무명이었던 그들을 숨어 있던 보석으로 평가하며 특징을 분석한다. 나도 그들의 기사와 다양한 정보에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드러나지 않을 때는 우리와 유사한 일상을 살았고, 뉘 집 아들이거나 손자였으며 오빠, 동생이었다. 다만 그들은 꿈을 놓지 않고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이 다르다. 대중은 그들을 알아보고 하룻밤 사이에 기꺼이 영웅으로 옹립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영웅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트로트는 일본 강점기 때 생겨났다. 서양음악 폭스트로트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정서에 맞는 음악 장르로 자리매김한 지 백 년 가까이 되었다. 그 이후 한국전쟁과 산업화시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굴곡진 삶에서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마다 들불처럼 일어나 위로를 주었다. 대중예술의 한 장르로서 부정하지 못할 트로트의 힘은 노랫말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이번 경연 프로그램 중에도 '작곡가 미션'이 있었다. 결승에 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곡을 부르는 일이다. '역전인생'. '딱풀'. '찐이야' 등의 신곡에 담겨진 메시지는 현 사회 현상의 무늬를 오선지에 담고 있었다. 그중에 '찐이야'의 '찐'은 진眞의 센소리로 '진짜'라는 뜻을 가진 인터넷의 은어라고 한다. 경쾌한 리듬과 상당히 직설적인 노랫말로 구성된 진정한 사랑을 고백한 노래다. 이 곡은 발표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에 진입했다. 아이들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흥얼거리고, 모처럼 젊은이들의 차에서도 스피커 볼륨이 높여진 것을 자주 목격했다.

때마침 몇 년 전부터 지속되고 있던 불황에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을 뒤덮고 있었다. 한국은 2월부터 5월 초까지 전쟁 못지않은 참화를 겪었다. 국민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 수준의 일상으로 전환되었다. 생명체를 뿌리내릴 수 없는 무중력 세계로 옮겨놓은 듯 불안한 상황을 견디는데 트로트 음악경연은 큰 위안이 되었을 듯하다. 흥과 한이 교직이 된 트로트에 서나 달 동안 기방 출입하는 건달보다 더 빠져 지냈다. 돌아보니 국가재난 수준의 어려움 속에 나 역시 직격탄을 맞으면서 심리적으로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환란 속에서도 꿈을 믿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그쪽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내 인생에서 누락되었던 청춘의 문장도 있었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듯 허허로운 가슴이 그 문장 속의 코피 쏟던 열정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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