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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너뱅이들 두말가웃지기 논배미를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새참을 나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큰길가 주막에서 막걸리 한 되를 받아 들로 향했다. 젓가락은 주전자 주둥이에서 딸랑거리며 나를 따랐고 김치 나부랭이 담긴 접시에선 곰삭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경지정리를 하기 전의 논두렁은 다만 논과 논 사이를 경계 짓는 것에 불과해 마치 실뱀처럼 좁고, 구불구불했다. 본래 논두렁은 두 사람이 비켜 갈 정도는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식구가 늘고 사는 것이 팍팍해지자 모 한 포기라도 더 꽂을 요량으로 논은 두렁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내가 양손에 물건을 들고 곡예 하듯 논두렁을 지나 아버지가 일하시는 논에 도착하면 막걸리 주전자는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워워” 소를 세우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논두렁으로 나오셨다. 막걸리는 술잔에 하얗게 담기며 가벼운 거품이 일었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시기 전, 논에 막걸리를 흩뿌리며 고수레를 치셨다. 지신(地神)에게 식솔들이 많으니 수확을 많이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으리라. 소는 논두렁에서 느릿느릿 풀을 뜯고 아버지는 목이 말랐던 듯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한 잔 한 잔 드실 때마다 “어, 좋다”를 후렴구처럼 되뇌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달게 음식을 드시는 걸 보지 못했다. 나는 옹송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가만히 치어다보며 미래의 목표 하나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맛있는 막걸리를 꼭 먹어보리라. 아버지는 막걸리 주전자를 다 비우고서도 밥 한 그릇 비우고 일어서는 듯 술기운이라곤 없이 소고삐를 다시 잡았다. 아버지의 소몰잇소리가 너뱅이들에 드높았다.

아버지는 자주 막걸리에 취해 저녁 먹을 시간을 성큼 지나 집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하수구 앞에 주전자 목구멍에서 막걸리가 쏟아지듯 힘겨운 삶의 구토물들을 게워내곤 하셨다. 차마 뱉지 못하고 술로 삼킨 궁핍의 멍울들이 하수구 앞에 낭자했다. 삶이 물 흐르듯 순탄치 못하고 아버지의 속을 뒤집고 역류하고 있었다.

막걸리가 아버지의 삶을 가볍게도 무겁게도 했는지, 술을 드신 날 아버지의 표정은 슬픔 아니면 기쁨, 그것들이 교차하기도 했다. 얘기를 하다 울기도 했고 기분이 좋은 날엔 노랫소리로 우리를 실실 웃게도 하셨다.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아 노래를 부르다가 노랫가락에 당신의 설움이 겨운지 끝내 노래에 흐느낌을 싣고는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하셨다.

막걸리와의 인연은 논두렁에서 도시의 길바닥으로 옮겨와 있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에서 노조결성의 문제로 파업에 돌입했다가 사업장에서 쫓겨났다. 노조원들은 회사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가족들까지 동원된 두 달에 걸친 농성이었다. 아이를 업고 혹은 아이의 손을 잡고 전경들과의 몸싸움도 감수하며, 다리가 아프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농성을 계속했다. 교통체증을 일으키고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흘깃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지탄(指彈)이 온몸에 아프게 박혔다. 노조결성을 방해하려는 회사보다 행인들의 시선에 더 설움이 북받쳤다. 잠을 자지 못해 핏발 선 눈, 긴 수염, 추레한 차림새로 길바닥에서 대오를 이루고 앉아 빵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때로는 한 잔의 막걸리로 헛헛한 가슴속을 달래며 서로를 위로했다.

어쩌면 그들의 막걸리는 혈맹(血盟)과도 같은 것이었다. 승리를 다짐하며 부딪히는 한잔의 막걸리에 비장한 각오들이 차오르곤 했다. 막걸리는 사람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막걸리는 주막뿐만 아니라 산판에서 고깃배 위에서 논밭에서 공사장에서 범부들의 웃음이 되고 위로가 되고 시장기를 채우는 끼니가 되었다. 막걸리는 범부들의 삶을 관통하는 술이었다. 막걸리는 혈통이 있는 술이다. 막걸리의 혈관에는 ‘민초’라는 이름의 피가 흐르고 있다. 민초의 피돌기로 그들의 심장은 뛰었고 민초의 혈통으로 무한의 결속과 동질감을 느꼈다. 대량해고의 두려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배짱은 민초의 혈연으로 뭉쳤기 때문이었다. 길바닥에서 벌이는 그들의 저항은 현대판 민란(民亂), 그것이었다.

한편,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길바닥에 앉아 마시는 막걸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 좋다”를 연발하며 마시던 그 맛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울었던 지난날의 막걸리 맛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달픔을 잊을 수 있는 맛, 현실의 벽에다 머리를 짓찧어도 아프지 않을 맛, 현실도피에 기대고 싶은 맛, 아마도 그 언저리쯤은 아니었을까.

긴 파업 기간으로 노조원들은 지쳐갔고 예금통장의 잔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사측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긴 노조원들은 하나둘 동료들을 배신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직장은 가족의 밥줄이다. 밥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가장은 그리 많지 않다. 비굴한 것도 부당한 것도 참아야 하는 밥줄의 횡포를 알면서도 과감히 그것을 끊고 돌아설 수 없는 아버지의 자리. 동료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을 감수해야만 하는 그들의 고뇌 또한 가볍지 않았으리라. 복귀자들을 가벼운 배신자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음을 가장인 그들도 차가운 길바닥에서 절감하고 있었다.

동료의 배신과 점점 불리해져 가는 판세로 막걸리 통은 더욱 늘어만 갔다. 어느새 막걸리는 그들의 또 다른 동지(同志)가 되었다.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울분을 들이키며 서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남아있던 노조원들은 애써 불안을 감추려 막걸릿잔을 부딪치며 “단결 투쟁”을 외쳤지만 흔들린 막걸리 통에서 술이 새나가듯 노조원들의 복귀는 나날이 늘어갔다. 복귀한 노조원들의 자리에 넘어진 빈 막걸리 통들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조원들의 해고와 정직, 감봉 등의 불이익만 당하고 두 달 동안의 파업농성으로 얻은 건 상처뿐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가슴 아프지만, 더욱 가슴 아픈 사실은 집에서 다섯 살 딸아이가 한 손 주먹을 불끈 쥐고서 가냘픈 목소리로 투쟁가를 불러댄다는 것이었다. 내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길바닥에 앉아 빨간 띠 머리에 두르고 막걸릿잔 부딪히며 투쟁가를 부르던 아빠를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이 땅에서 아버지의 삶은 끊임없는 밥줄과의 투쟁이었음을 언제쯤 그들은 알게 될까. 그 삶의 틈바구니에서 텁텁한 막걸리는 아버지에게 육덕 좋은 넉넉한 친구였고, 목마르고 답답할 때 시원한 석간수가 되어 주었다는 걸 삶의 중허리쯤에서는 알 수 있을는지.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 되었다. 가끔 남편은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올 때 막걸리를 들고 들어온다. 목이 마른 듯 시원스레 막걸리를 마시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의 농주(農酒)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추억일 뿐 남편의 막걸리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다. “이 동지, 한잔합시다. 단결 투쟁.”

이제 인생의 동지로서 그와 담담하게 마주 앉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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