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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노란 서점 / 김인선

부흐고비 2021. 5. 10. 09:16

늙으면 햇살 잘 드는 공터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로 서점이나 하며 살고 싶다. 판매를 하진 않을 테니 정식 서점은 아니겠고, 굳이 용도를 말하라면 책 읽는 어른들의 문화공간이라 할까. 다 늙어서 웬 책이냐고 물어오면, 세상 이야기 두루두루 나누면 그게 다 책 얘기지, 라고 말할까 한다.

일생이 소박했으니 집이 클 필요는 없겠고, 꽃들과 다감했으니 유일한 사치는 그런 것에나 부릴까 한다. 이왕이면 오솔길을 내어 책을 읽으러 오는 길이 산책길이면 좋겠고, 노란 물감으로 멋을 부린 집 주위로는 키 낮은 해바라기를 심어 아예 ‘노란 집'이라 불리면 더욱 좋겠다.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도 이만큼 노랬을까 생각하면서 먼 나라 화가 흉내로 짜릿한 기쁨도 맛보겠지.

이름도 벌써 찜해 두었다. ‘노랗게 익어가는 생각’이다. 서점이라는 흔한 이름도 아니하고 해바라기 씨앗처럼 영근 생각의 꼬투리를 살짝 붙잡은 티를 내야지. 관념을 깨는 생각의 사각지대에 엉뚱 발랄한 노란색으로 시선을 받게 하다가 급기야 들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충동 한번 던지는 거다. 기껏 어릴 때 별명이에요, 해도 좋겠고, 오래 익은 것은 노랗더라는 소견을 말해도 좋겠지. 아무려면 어떤가. 동화책 먹는 노란 여우(동화 <책 먹는 여우>를 이름)에서 따온 듯 그저 책과 함께 물들고 싶은 것을.

​ 멋쩍은 바람이 있다면 시간이 들어오도록 적당히 외로우면 좋겠단 거다. 고독은 두렵지만 외로움은 선택적이라, 그건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외로운 시간을 사야 하는 까다로운 벗을 위해 조금의 빈자리를 남겨 둬야지. 하는 일이라곤 책에 쌓인 먼지 가끔 털어주고, 종일토록 햇살놀이 하듯 책이나 읽는 거다. 눈은 침침해져 글자도 더듬거리고, 지혜도 영락없어져 심오한 경지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책 넘기는 일로 하루를 넘기는 일은 얼마나 황홀할까.

좀 늦지 않았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시름없이 안락한 마음을 위해 책날개를 늦게 달았다고 말해야지. 그래도 서운한 것 같으면 백세시대에 이만하면 청춘이라고 꼬장꼬장 허리를 펴 보여야지. 책과 한 몸이 되고자 했던 한탸영감(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 주인공 이름)처럼 위트도 지닌다면 더할 바 없겠지만, 그리 되려면 세상을 책으로 보는 착란까지 감안해야 하니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다.

손님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서점. 커피집도 흔하고 PC방도 흔한데 책이 있는 공간은 너무도 적어서, 그게 이상하게 내 일처럼 신경 쓰여서, 희미한 점 하나 찍듯 책방을 여는 거다. 세상의 한 모퉁이에는 이렇게 따스한 공간도 있다고, 오래된 책처럼 구석에 있어도 나는 상관없겠네. 어쩌다 소문이 난다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겠지. 스무 살 청년이 오면 다소 열띤 젊음을 되찾아 그 시절에 읽으면 좋을 불멸의 문학을 권하리라. 젊은 날에 새긴 놀라운 문장 하나 기막히게 떠오른다면 그깟 젊음이 부러울까.

누군가의 마음자리에 차 한 잔 권하듯 책을 권하고 싶다. 차를 마시듯 책을 마시면 찻잎이 펴지듯 글은 몸속에서 피어나겠지. 차 한 모금으로 입속을 헹구듯 담백한 글줄마냥 나를 비울까. 버리고 버려서 시집처럼 얇아져야지. 맑은 것만 담아서 찻잔처럼 담백해져야지.

손등이 거칠어져도 좋으니 이왕이면 곳곳에 내 노동의 흔적을 심어두고 싶다. 운동으로 노동을 택하겠다는 조용한 속내 그때에도 변함없다면 기꺼이 나를 움직이겠네. 푸릇한 숨결을 고스란히 글로 일궜던 박경리의 손등처럼 박완서의 호미처럼, 손으로 경작하기를 글 같이 섬기겠네. 글이 삶이고 삶이 글이었다는 어느 고전 문구처럼, 마음밭 서성이던 글자 섬길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향한 펜 끝, 스스로 퇴고된 시간의 도움으로 삶은 홀가분하겠다.

생각해보니 쥐꼬리만 한 월급 꼬투리에도 한 권의 책을 샀던 어리보기였다. 책 속에 답이 있다는 문구를 고스란히 믿기야 하겠냐만, 곁에 둘 벗으로 책을 택했으니 어리석은 생애였어도 참으로 감사하다. 혼자 간직하던 것을 세상과 나눈다면 자식들도 흉보지 않겠지. 서럽지도 않겠다, 책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시간은 책 읽기 좋은 시간. 돌이켜보니 그것은 평화였네. 사람들이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돌아서서 혼자 느끼는 고요함에 견줄까. 아, 나는 돌아와 쉴 곳이 있는 사람이구나. 소스라치는 기쁨을 위해 오늘도 하던 일 멈추어 책을 읽어야지.

욕심이 있다면 한 삼 년 해보는 것인데, 늙은이 주책이라고 나무란다면 슬그머니 간판을 내려야지. 간판은 내려도 무허가 꿈은 계속 꾸어야지. 그러나 지금도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데다 좁은 방에 책과 함께 있자니, 이 삶이 혹 그것 아닌가에 생각이 미친다. 아무려면 어떤가. 생각이 익지 않아도, 굳이 가을밤이 아니어도, 사시장철 독서등(燈)을 켠 노랗고 은은한 꿈이 있는데. 갖고 싶다, 꿈같은 그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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