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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름짓기 -닿소리 / 강돈묵

부흐고비 2021. 5. 19. 19:50

구강공화국(口腔共和國)에는 다섯 고을이 있었다. 고을마다 씨족이 모여서 살았는데, 그들은 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건실하였다.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현실에 잘 적응하는 삶을 꾸려나갔다. 힘을 키우기 위해 소유하는 법이 없었고, 서로의 마음을 읽어가며 행복만을 추구했다. 물론 고을마다 땅의 모양이나 형질이 달라 생업에 차이가 있고, 그들의 됨됨이나 개성도 현격한 특징이 있었다. 씨족이 다르다 하여 서로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옹졸함은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함께 하며 어려움을 풀어가기도 하고, 조화롭게 절충하는 데에도 능숙하였다. 간혹 의견이 달라 다투기는 하였으나 별달리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다른 고을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일에 그리 열중이지 않았다. 모두가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심성을 가졌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생활 습관이 조금 차이가 있어도 자신들과 같아지기를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어떨 때는 뼈 없이 좋기만 하여 고을이 잠자는 듯이 고요했다. 그렇다고 무능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에 맞는 일에 충실히 임하는 부지런함이 특징일 정도로 근면하였다.

다섯 고을의 구분은 철저히 지형에 의존하였다. 언덕 위에 성처럼 버티고 서서 언제나 기도(氣道) 고개를 넘어오는 바람을 맞는어금둑, 풍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넓은 들판에 위치한 혓들. 국경선 부근 우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한 입술뜸, 깊은 골짜기에 날카로운 돌덩이가 뾰쪽뾰쪽 솟아 있는 잇뫼, 그리고 구강공화국의 맨 안쪽에 둥근 바람골이 있는 목굼골. 이렇게 다섯 고을이었다.

다섯 고을의 주민들은 자신을 스스로 인계(人界)에서와는 다르게 ‘글ᄍᆞᆼ’라고 불렀다. 서로 지칭할 때는 개별의 이름이 없어 손가락이나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이 글ᄍᆞᆼᄂᆞᆫ’으로 칭했다. 처음에는 굳이 나댈 일이 없어 각자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이름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깨달아 갈 즈음, 이웃 나라 문화에 익숙하고 구강공화국에 관심이 많은 최대감과 마주쳤다.

최대감은 머리가 명석하고, 중국문화에 밝은 통역관이자 외교 전문가였기에 구강공화국의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었다. 고을마다 내력을 살피고, 주민들의 개성을 파악하는 데에 여러 날을 보낸 그는, 날밤을 새우며 주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모든 닿소리 글자는 부음(父音)이라 하여 초성으로 쓰일 수 있음과 몇몇은 종성의 자리에 나타나 굳이 거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직 여덟 개만이 맡아도 충실히 받침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경탄하면서 대단한 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어서 모계(母系)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았다. 자음의 이름을 짓더라도 부(父)와 모(母)의 사이에서 태어났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부모를 떠나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은 자식은 없음이었다. 천(天 ‧)ᆞ, 지(地 ㅡ), 인(人ㅣ). 모계의 뿌리가 된 셋 중에서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을 기본으로 취해 이름을 짓기로 틀을 만들었다. 그래서 모든 닿소리의 이름은 ㅣ 앞에 부음으로, ㅡ 아래 자음으로 놓기로 하였다. 결국 구강공화국의 주민들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다. ‘ㄱ(기윽), ㄴ(니은), ㄷ(디읃),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읏), ㆁ(이응)’으로 하고, 굳이 받침으로 꼭 필요치 않은 것들은 부음만으로 제구실을 하게 두었다. 이 원칙에 따라 나머지는 ‘ㅈ(지), ㅊ(치), ㅋ(키), ㅌ(티), ㅍ(피), ㅎ(히), ㅇ(이), ㅿ(ᅀᅵ)’라는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

이름을 받자 그들은 모두 만족하였다. 더러는 왜 나는 돌림 자를 따르지 않았느냐, 왜 내 이름은 불안하게 외자이냐며 투덜댈 법도 한데, 그러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작명을 마친 최대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웃 나라의 문자로 표기해 보았다. 이웃 나라 문화에 익숙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도저히 적을 수 없는 것이 넷이나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소리(役)와 뜻의 음(末, 衣, 箕)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뜻의 음은 통째로 옷을 뒤집어씌워 마침내 구강공화국 주민들의 이름이 완성되었다. ㄱ(기역 其役), ㄴ(尼隱), ㄷ(디귿 池末), ㄹ(梨乙), ㅁ(眉音), ㅂ(非邑), ㅅ(시옷 時衣), ㆁ(이응 異凝), ㅈ(之), ㅊ(齒), ㅋ(키 箕), ㅌ(治), ㅍ(皮), ㅎ(屎), ㅇ(伊), ㅿ(而). 이 중 부음으로 초성 자리에만 쓰이던 것도 마침내 자음으로 종성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자 이들도 자연스럽게 한 자가 보태져서 두 자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나 품격을 간직하고 대접받기를 소망한다. 구강공화국의 주민들이 아무리 너그럽다 해도 이런 욕심마저 없었을까. 나름의 존재감을 가지고 주위 것들과 교류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이들은 내 가족보다 다른 이들에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손안에 쥔 재물보다 머릿속을 채우는 즐거움에 만족하고, 주위를 휘두르는 힘을 갖기보다 함께 울고 웃는 자리를 좋아했다. 그래야 공화국의 온전한 평화가 유지되고, 서로의 대접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이기에 차서 제 것만을 챙기는 우매를 저지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기의 분심이 일어 주위에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였다. 나 하나를 내려놓음이 전체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욕심을 부렸더라면 분란이 일어나고 그들의 평화가 깨졌을 것은 뻔하다. 아쉬워도 참고 묵묵히 기다리니 모두가 행복하게 되었다.

인간처럼 참지 못하고 욕심만 채우려는 어리석은 존재가 또 있을까. 지금도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며 주위를 힘들게 하는 자들의 소굴이 시끄럽다. 참으로 바라보기에 역겹다. 안타까움에 입을 최대한 벌려 본다. ㅏ ㅓ ㅗ ㅜ ㅡ ㅣ. 자연스럽게 닫힌다. 지구상에는 구강공화국과 같은 나라는 더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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