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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스피린 한 알 / 김상영

부흐고비 2021. 5. 22. 06:04

고추가 화근이었다. 독이 오른 고추는 한물이 되자 벌겋게 달아올랐다. 눌어붙기 전에 얼른 집어 먹어야 하는 화력 센 불판 같은 고추밭이었다. 붉고 튼실한 고추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 손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풍요로운 농사여서 좋다곤 하나 사흘 도리 따야 하는 고추라 몸이 지쳤다. 무더운 날씨에 고랑에 쪼그려 앉아 포대기를 채우다 보면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는데 더디기는 흡사 명절날 귀성 차량 막히듯 했다.

불룩해진 고추 포대기를 들어내 경운기에 싣는 것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명색이 뜀박질을 즐기며 체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아 온 체면에 빌빌댈 수는 없었다.

“엉거주춤하면 다친다, 배때기에 딱 붙여야 허리가 온전하니라.”

방학을 맞아 고추밭에서 이리저리 나대는 손주에게 시범을 보이면서 강조하던 안전수칙이었다. 근데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갑자기 허리가 뜨끔하였다. 한 해마다 다르다더니 나도 이젠 나이가 든 탓인가, 마음은 청춘이나 몸은 이미 석양인가. 왼쪽 허리뼈 부근 근육이 불에 덴 듯하였다. 곧추서기는 가능하나 몸을 굽힐 수 없었다. 악! 소리 나게 아팠다. 자고 나니 더했다. 주사 한 방 맞아야겠다 싶어 차에 오르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운전석 출입문에 부딪히는 머리를 억지로 숙여 넣으려니 신음이 절로 나왔다. 등받이에 처박히듯 삐딱하니 앉아 왼쪽 다리를 손으로 쳐들어 벌벌 떨며 집어넣었다.

근육이 아픈데 병원에선 X ray를 찍자 했다. 눕기 힘 드는 걸 알기나 할까, 좌로 구르고 우로 젖힘을 거듭하다 보니 죽을 지경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아야! 소리가 절로 나건만 어느 개가 짖나, 환자 말을 건성으로 듣고 욕보이는 꼴이었다.

“앉으세요.”

의사 선생이 뼈 사진을 들여다보며 권하는데 앉을 수가 없었다. 꺼벙한 자세를 보고도 앉기 거북한 줄 몰라주니 섭섭했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양해할 일이나 내 몸이 편찮으니 원망이 앞섰다.

주사와 물리치료를 마치고 약을 탔다. 통증은 약간 무뎌졌어도 여전히 괴로웠다. 특히 잠잘 때가 문제였다. 어찌 누울까 궁리하고, 어떤 자세로 일어날까? 머릴 굴렸다. 오줌이 마려워 도저히 못 견딜 지경에 이르러야 일어났다. 하나 둘 악! 해야 서졌다. 변기 앞에서도 담에 결린 듯 경련이 올 때면 오줌발이 찔끔찔끔했다. 하도 비비고 두들겨 허리께가 얼얼했다. 수납장을 짚고 서서 앓는 소릴 참는 내 꼴이 고약했다. 한심한 꼴을 보다 못한 아내가 침을 권했다. 그래, 몇 방이면 거뜬할지도 몰라.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 발과 손에 침 세례를 받았으나 차도라고는 일 푼어치도 없었다. 왼쪽이 아야 한데 오른쪽을 찌르며 나무라는 격이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후텁지근한 나날이었지만, 고추 택배를 늦출 순 없었다. 고춧가루 방앗간은 시오리 먼 장터에 있어 아내 혼자는 벅차다. 병원이나 방앗간이나 순서대로니 지루하기가 매일반이었다. 찡그린 표정이 보기 싫었는지 아내가 보건소 쪽을 보며 턱짓했다. 옳다구나 싶어 슬쩍 맞은편 보건소에 들어섰다. 실내가 쾌적하기도 하려니와 안마의자가 있어서다.

“허리가 좀 아야 합니더.”

직원이 보이자마자 나는 지레 미안하고 면구해서 고해 올렸다. 면민들이 수없이 갈마들었을 시커먼 안마의자는 면민들 때깨나 끼었을 것 같았다. 그런들 무슨 대수랴,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아랫도리에 바짝 힘을 넣어 안마의자에 조심조심 몸을 앉혔지만, 허리는 나 죽네! 아우성쳤다. 서서히 등을 밀착시킨 뒤 1단을 눌렀다. 종아리를 감싼 가죽은 시늉만 한 채 합죽합죽하고, 동글이 두 개만이 강도 높게 등짝을 쭉 내리그었다. 슬슬 두드려 줄 때쯤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2단은 어떨까 싶어 누른 게 사단이었다. 순간 허리가 활처럼 튕겼고, 나도 모르게 악! 소릴 내지르고 말았다. 아픈 힘줄을 정확히 눌러 내린 것이다. 내다보는 여직원 표정이 묘했다. 덧정 없단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그러긴 해도 그날 나는 여러 번 그 고통을 감내하였다. 마약처럼 묘한 쾌감이었다. 아픈 델 자극해대면 부항 뜨듯 효과를 볼 것 같기도 하였다.

다음날은 마을회관 낡은 안마의자에 앉았다. 보건소에 비하여 심하다 싶을 만큼 등을 밀어 올려 감당이 불감당이었다. 울퉁불퉁 쥐어박는 꼴이, 캄보디아의 꽃다운 안마사가 무릎 위에 허리를 올려 시소를 태우는 것보다 더했다.

안마를 자꾸 해서 덧났을까, 허리가 여전히 무지근한데 약은 떨어졌다. 어쩔 거나, 조바심 끝에 냉장고 속 묵은 약봉지 중에서 아스피린 한 알을 찾아 삼켰다. 근데 이럴 수가 있나, 자고 났더니 정말 신통방통,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젖은 짚단 태우듯 찌뿌둥하던 몸이 개운해졌다. 아스피린이 진통, 소염, 해열에 직방이라더니 마음마저 쾌차한 듯 비로소 가을이 상큼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 격이었다. 갈증이 심할수록 물맛은 달단 생각도 들었다.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듯이 시련을 겪어봐야 뭘 알게 되는구나 싶었다. 막걸리 한 잔으로 부자간 갈등을 푸는 노랫말처럼 아스피린이 딱 그런 역할이었다. 꼰대처럼 후진 세대지만 바라건대 한 알의 아스피린처럼 산뜻하게 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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