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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물안개가 촉촉이 귓불에 내리는 초여름 아침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낮은 목소리, 사랑의 귓속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크고 빠르고 높은 목소리는 일시적인 긴장과 공포를 유발할 뿐 마음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낮고 느린 목소리로 속삭이면, 뜨거운 입술이 닿기도 전에 귓불의 솜털들이 바르르 한쪽으로 쏠리다가 일어서고, 그러는 사이 사랑의 최면술은 시작되는 것이지요.

배추벌레처럼 자근자근 사랑하는 이의 귓바퀴를 깨물면 밤마다 달팽이관 깊숙이 이명처럼 휘파람새가 웁니다. 어느새 목덜미엔 마취제가 퍼지듯 마구 물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닌지요. 낮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고, 그 모든 사랑의 이력서는 귓속말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억이라는 것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요.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때늦은 후회와 통증이 수반되기도 합니다. 대개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의 사랑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크고 높은 격한 어조의 목소리로 변질되었기 때문이지요.

초심의 사랑이 이따금 개처럼 귀를 쫑긋 세우다가, 자꾸 간지러워 목을 움츠리다가, 격렬하게 개처럼 물어뜯다가, 입술을 비껴지나 자꾸만 항문 쪽으로 돌아서서, 돌아서서 개처럼 아랫도리만 포개다가, 결국에는 거짓말처럼 귓속말이 세상을 망치고, 마침내 그 모든 사랑의 마지막은 귀싸대기를 얻어맞고 고막처럼 터지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봄날의 투견대회는 섬진강변 군부대 옆 공터에서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의 둥근 철장 속에서 열립니다. 마치 사랑싸움이 질투와 환멸을 넘어 급기야 사생결단의 극한 전쟁으로 치달은 연인들처럼 말이지요. 그때 사랑하는 이들의 눈빛은 오직 싸우기 위해 태어난 투견종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침내 가죽이 고무줄처럼 축축 늘어지는 중견의 불독과 황소도 물어 죽인다는 검은색 핏불테리어라는 개가 생사를 건 일전을 치릅니다. 두 눈에 번쩍 할로겐램프가 켜지자마자 오직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개들은 그야말로 개처럼 전쟁을 시작합니다.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너덜너덜 불독의 온몸에는 검붉은 모란꽃들이 피어나지만, 그렇다고 쉽게 돌아서서 꼬리를 감출 불독이 아니지요. 용케도 숏다리의 불독이 핏불의 목울대를 필사적으로 물었으니, 이미 전투는 끝장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불독의 근성이란 게 한번 물면 상대가 먼저 죽을 때까지 죽어도 놓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미 승패는 끝이 났지만 싸움개들의 유전자적 증오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핏불테리어의 대머리 개주인이 항복의 하얀 타올을 던지고는 철장 속으로 뛰어들어가며 소리를 지릅니다. 흰 타올의 긴 혓바닥으로 세상의 욕이란 욕설을 다 내뱉으며 뜨거운 물을 퍼붓고 쇠파이프를 휘두릅니다. 불독의 주인도 달려들어 꼬리를 잡아채지만 어금니 앙다문 요지부동의 불독, 이미 충견이 아닌 불독(不dog)의 치명적인 어금니의 자물통은 열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개들처럼, 사랑한다면서도 끝장을 보려는 인간들의 핏줄 속에 내장된 유전자적 증오는 대체 얼마 만큼일까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개 주인 둘이 달려들어도 싸움을 말릴 수 없는데, 핏불테리어의 두 눈이 허옇게 뒤집어지는데, 그때서야 슬슬 눈썹이 짙은 구경꾼 하나가 철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개 사육의 대가인 벙어리 박씨였지요.

그는 두 사람을 개에게서 떼어내고는 먼저 마치 애무라도 하는 듯 불독의 열꽃 피는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몇 번을 쓰다듬더니 왼손으로 슬쩍 불독의 찢어진 귀를 들추고는 귓구멍 가까이 입술을 풍로처럼 오므리며 무어라 무어라 귓속말을 건네는 것이었지요.

사실은 말이 귓속말이지 벙어리 박씨가 무슨 말이야 했겠습니까. 다만 푸웃 풋, 귓속에다 귓바람을 넣으며, 푸웃 풋 사랑의 풀무질을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불독의 핏발선 두 눈에 아른아른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모락모락 섬진강 물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철커덕, 불독의 견고한 아래턱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분노와 증오의 불독이 벙어리 박씨의 낮은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벙어리 박씨의 소리 없는 귓속말에 질질 붉은 침만 흐르던 섬진강이 다시 흐르고, 군부대 사격장의 총소리마저 거짓말처럼 멎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이들이여! 귓속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행여 사랑싸움을 하더라도 철장 속의 투견처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다보면 싸울 일도 많겠지만, 그렇더라도 오직 싸우기 위해 태어난 개처럼 싸우지는 말아야겠지요. 분노와 증오의 날카로운 이빨일랑 뽑아버리고, 행여 싸우더라도 문득 정신을 가다듬고 먼저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이의 귓속에 처음처럼 봄바람 같은, 섬진강 물안개 같은 귓바람을 불어넣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사랑의 구멍에는 푸웃 풋, 열쇠 모양의 귓바람이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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