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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지리산 이야기 / 이원규

부흐고비 2021. 5. 22. 18:16

실로 먼길을 돌아 지리산에 왔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자 모성의 산이다. 그만큼 크고 높고 깊고 넓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말은 몇 생을 걸지 않고서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리산을 잘 모른다는 말이 언제나 정답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과 자연이 그러하겠지만 알 듯 잘 모르겠고, 가까이할수록 멀어지고, 멀어질수록 어느새 가까워지는 경이로운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한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내 고향 경북 문경에서 대구, 서울을 지나 지리산까지 오는 데 35년이 걸렸으며, 이제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에 안긴 지 겨우 6년이 지났다. 자본주의와 도시적 욕망의 삶이 환멸과 권태였다면, 아주 작은 산촌이나 강촌의 지순한 삶은 종교보다 높은 연민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연민 없이는 나는 너의 거울도 아니요, 너는 나의 뿌리도 아니다. 결국 만물동근(萬物同根)의 ‘나는 너’라는 경지를 단 한 번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진리는 현대인들의 가파른 생의 수첩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마다 지리산의 이 고을 저 고을로 이사를 다녔으니 지리산과 섬진강의 지수화풍을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동안 지도에는 잘 나오지도 않는 10가구 미만의 아주 작은 마을, 군불 지피는 토방을 고집하며 살았다. 그러니 집이라고는 가난한 농부들이 도회지로 떠나거나 독거노인이 돌아가신 빈집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러한 빈집도 한때는 누군가의 애인의 집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집은 바로 누군가의 ‘옛 애인의 집’이다. 그 빈집에 들어가 군불을 지피는 것은 일종의 기도와 같았으며, 그 시간은 바로 참회의 시간이었다. 세상도처 두두물물이 법당이요 교회 아닌가. 그리하여 연민에 가득 찬 기도와 참회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상적인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지리산은 모처럼 조용하다. 지리산 사람들도 겨울잠에 들어 조용하고,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도 발길을 끊어 조용하고 조용하다. 지난 15일부터 산불방제 기간이 시작돼 입산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저잣거리처럼 소란스러웠던 지리산 종주 길은 다시 산짐승들에게 돌아갔다. 지리산이 지리산다워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리산을 망친 것은 지리산 사람들과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지리산에 살지도 않고, 지리산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지리산을 아끼고 사랑한 것이 된다. 지리산 사람들은 지리산을 팔아서 먹고살고,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자주 찾은 만큼 지리산을 황폐화시키고 지리산 사람들을 오염시켰다.

늘 바라만 볼 뿐 굳이 지리산에 오르지 않는 할머니의 삶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 종주를 몇 번 했다느니, 지리산의 어디가 전설 속의 청학동이며, 그 어디가 절경이라는 등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도 함부로 지리산을 들먹이지만 지리산은 아무 수식이 필요없는 그대로의 지리산이며, 그 산에 기대어 한몸으로 살아가는 앞집 할머니가 바로 지리산이고 노고단인 것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언제 어느 곳이든 조용히 왔다가 흔적도 없이 가시라. 굳이 지리산의 명소와 명인을 만나려 하지 마시라. 명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 망쳤으며, 명인은 대개 속세의 허명으로 지리산을 상품화하는 장사치에 불과하니 조용히 찾아와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거닐다 가시라. 스스로 지리산의 푸른 눈빛을 닮은 명인이 되어 돌아가시라. 섬진강변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지리산을 바라보다가 배고프면 재첩국이나 한 그릇 드시고 제발 그냥 가시라. 그러면 발자국을 따라 그대가 사는 처소까지 말없이 동행하는 지리산을 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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