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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 춤 / 권남희

부흐고비 2021. 5. 23. 07:54

"환갑잔치 날 받은 사람은 넘의 환갑잔치 안 간다는디."

단골에게서 점을 치고 온 게 분명한 어머니의 말투는 강하기까지 하다. 이미 이모부 잔치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아버지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대꾸도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아버지는 들뜨고 흥분까지 한 얼굴빛으로 이모부 회갑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월평리로 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떠난다. 휙 바람이 일었을까. 아버지가 심어 둔 백목련 꽃송이가 투둑 떨어진다. 두고 온 부모형제 보고 싶은 마음에 때마다 얼마나 섧겠냐는 해설까지 덧붙이곤 한다.

​ 어머니와 함께 도착한 저녁나절의 월평리는 동구밖까지 잔치분위기가 넘실거리고 있다.​ 너른 마당에는 목련꽃 핀 나무 사이로 천막이 몇 개 쳐져 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불빛과 함께 덩실거리고 있다. 백일이 막 지난 아들을 안고 있는 나까지도 어깨짓에 달막대고 이곳저곳을 더덩실 떠다닌다. 흥이 고조된 마당은 술단지와 통돼지와 노래에 흠뻑 취해 밤을 밝혀야 성이 풀릴 듯싶다. 나는 어울릴 또래를 찾느라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다 비슷한 또래의 사촌 언니, 형부가 무리져 있는 골방으로 자리를 잡아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시끌시끌한 마당이 궁금하여 귀가 맞지 않아 한 쪽으로 일그러진 골방 문틈을 내다본다. 도시에서 만나지 못하는 이런 축제 같은 마당놀이에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낀다. 가을 환갑 잔칫날을 받아 둔 아버지도 분명 천막 친 마당놀이를 꿈꾸고 있으리라. 훈감한 집안 풍경에 목말라하는 아버지는 어머니 집안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기에 초대손님은 모두 이모들과 이모부, 사촌 육촌등 어머니 친척들일 게 분명하다.

​ 마당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는 갑자기 뭐라 형언할 수 없이 가슴이 미어지는 충격을 받고 만다. 잘 마시지 못하는 술 몇 잔에 휘청거리는 아버지가 보였던 것이다. 못 볼 것을 본 양 고개를 돌리다 나는 다시 어버지를 훔쳐본다. 눈물이 솟아 고개를 돌리고 다시 또 훔쳐보기를..,

​ 하얀 목련꽃 아래 춤 굿이 벌어진 마당에서 난생 처음 춤추는 아버지를 목격한 것이다. 동네사람들과 이모부와 이모들, 삼촌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는 무리에서 절름거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춤을 추는 아버지, 의족을 낀 다리 때문에 깨금춤인 듯, 동작이 끊어지는 매듭춤인 듯, 떼춤꾼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아버지는 한 마리 까치다.

​ 사람들은 노랫가락을 따라 빙빙 돌고 너울춤을 추다 어깨춤을 추고 이모들이 나비춤을 추는 그 밤 귀퉁이에서 아버지의 춤 그림자만 유난히 크게​ 담벼락 쪽으로 휘청거린다.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춤, 살풀이 춤을 추듯 몸짓하는 아버지의 그림자는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슬픔의 일인극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안고 있는 아들의 얼굴로 나의 눈물이 마구 떨어져버린다. 나는 아이를 안고 방을 나와 불빛이 없는 곳으로 가 목련꽃 흔들리다 떨어지곤 하는 바당을 바라본다. 가족과 헤어지고 한국전쟁 중에 다리를 잃었던 아버지의 한이 풀린다면 밤새 아버지의 춤은 이어져야 할 것이다.

​ 그동안 나는 너무 아버지에게 무심했다는 자책이 쇠망치처럼 나의 등을 후려친다. ​아버지의 고독에 고개를 돌린 채 도망치듯 결혼하여 떠나버렸던 딸이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마지막 같은 이별을 생각한 것인지 모든 시련과 고독을 원고지 몇 권에 담아 나에게 맡겨두었다.

​ 이모부 잔치에서 신명을 불어냈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 목련나무 아래 줄줄이 국화꽃을 심는다. 마당에서 꽃과 함께 춤을 추며 잔치 한판 벌일 생각으로 여름 내내 얼마나 분주했던가. 하지만 손님들 맞을 방까지 새집 설계 도면에 넣고 헌집을 허물어버리던 날 아버지는 과속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버지가 꿈꾸던 시간들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 꽃을 두고 어디갔단말여. 조금만 참지. 별이라도 기대고 살아서 꽃을 봐야지."

어머니는 느닷없는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3아 꽃봉오리를 쓸어안고 가을 내내 눈물을 흐렸다. 불길함을 담은 꽃은 모두 꼽힌 채 태워지고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에 꽃을 바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모습이다. 결코 잊지 못하던, 황급히 떠나느라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던 첫 부인을 만난다면 걸어줄 꽃 목걸이는 챙기신 것일까.

​ 목련꽃 피는 어느 해 4월 나는 집 마당에 피어있는 목련을 보다가 꽃봉오리가 모두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걸 꺠닫는다. 애초 북극지방 꽃이었다는 목련이었으니 북향으로 기우는 건 당연한 것을...​ 늘 고향을 그렸던 아버지의 춤은 꽃봉오리 속에서 그렇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흰빛은 꺾음 춤사위로 일렁이고 전장터에서도 한쪽 다리로 살아남았던 용감한 전사, 꽃으로 뒤덮여 떠나버린 아버지가 안타까워 내 가슴속에서는 꽃들이 춤을 추는 계절을 만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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