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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떡국 / 강호형

부흐고비 2021. 6. 3. 09:04

나는 본래 떡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월 초하루-하얗게 눈도 쌓여 눈이 부신 아침에, 잘 닦아 번쩍이는 놋대접에 담아 갖가지 고명을 얹어 내는 떡국도 보기는 좋았지만 왜 그런지 당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걸 먹지 않으면 나이 한 살을 못 먹는다는 바람에 억지로 먹곤 했다. 그랬던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떡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나이 때문이라면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할 나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당장 열 살을 더 먹는 한이 있어도 한 그릇 더 먹어보고 싶은 떡국에 얽힌 사연이 있다.

6‧25사변으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께서 살림을 하시게 되었다. 시골에는 일이 많았다. 남자보다도 여자들 할 일이 더 많았다. 절구질, 맷돌질, 네다섯 끼씩 해 나르기 외에도 잡다한 일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할머니께서는 잠시도 쉴 짬이 없으셨다. 여섯 식구가 날마다 벗어던지는 빨래를 빨고, 풀 먹이고, 다듬고 꿰매고… 물자는 귀하고, 옷감이라야 무명이나 광목이 고작이던 때라 해진 곳은 다른 천을 덧대어 기워야 했다. 게다가 사대봉제사에 명절을 합하면 제사만 해도 한 달에 한 번꼴이었다. 어느 날, 등잔 밑에서 버선을 깁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눈이 침침하신 듯 자꾸 끔벅이면서,

“난 인제 죽을 때가 됐나 봐.”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연세가 이미 칠순이셨다. 할머니는 버선짝과 바늘이 들린 양손을 힘없이 치마폭 위에 내리면서 측은한 눈으로 이윽히 나를 건너다보시는 것이었다. 순간, 내 가슴속에는 뜨거운 물줄기 하나가 찌르르 흘러내렸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등잔의 심지를 조금 돋우었을 뿐이었다. 불꽃이 일렁이는 바람에 할머니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할머니는 다시 일손을 움직이시면서,

“너도 그 옷 벗거라.”

하셨다.

“아직 더럽지도 않은데요?”

“이가 있어서 자꾸 긁적거리니까 그렇지. 잿물에 삶아 빨게 어여 벗어.”

“뒤집어서 밖에 내놓고 자면 다 얼어 줄을 걸요 뭘.”

“어여 벗지 못해? 자꾸 긁적거리면 에미 없는 자식이라고 남들이 없신여겨!”

노기마저 띤 듯한 할머니의 말씀이 또다시 가슴을 쳤다. 어느 날인가는 누이동생의 머리를 빗기고 계셨는데, 창호지 위에 긁은 이가 뚝뚝 떨어졌다. 참빗을 잡으신 할머니의 손에는 거뭇거뭇 검버섯이 돋아 있고, 너무도 힘겨운 일을 하신 탓인지 손목은 부어 있었다. 부은 손목 때문에 할머니의 손놀림은 어줍어 보였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난 인제 죽을 때가 됐나 봐.” 하시던 말씀이 자꾸 귀청을 때렸다.

“에그머니! 이게 웬일야.”

보리알 같은 이가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혀를 끌끌 차시면서,

“할미마저 죽으면 이 가엾은 것들은 어쩌누!”

아픈 손목이 그렇고 보니 절구공이는 왼손으로 잡으셨다. 맷돌질도 왼손, 밥을 푸는 일도 왼손이었다. 견디다 못해 아버지께서 밥을 지으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절구질을 하고 동생이 맷돌질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할머니의 일을 다 해낼 수는 없었다.

그런 할머니 곁을 떠나 나는 서울로 갔다. 서울서 학교에 다니면서 많이도 집 생각을 했다. 개나리가 피어도 집을 생각하고, 눈이 쌓여도 집이 그립고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못 견디게 그리울 때는 달을 바라보며 식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집에는 자주 갈 수가 없었다. 아직 버스가 없을 때라 어쩌다 한 번이라도 집엘 가려면 달리는 군용 트럭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매달려 타야만 했다. 어느 땐가는 목적지에 차를 세워주지 않아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다가 손바닥과 얼굴을 몹시 다친 일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집엘 가면 제일 반가워하시는 분이 할머니셨다.

“날마다 숲 밖을 내다보구 내다보구 해도 안 오더니……”

웃으시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고였던 할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어버이’의 뜻도 가지고 있는 ‘친(親)’자는 어버이가, 먼 데 간 자식이 오나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 바라보는 모양을 상징한 글자라고 한다. 立‧木‧見-親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선 어버이의 마음은 어버이만이 알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글자를 볼 때마다, 검버섯이 돋은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숲 밖을 내다보셨을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그 어느 해 봄이었다.

모처럼 집엘 가서 밥상을 받았는데 이상한 음식이 올라 있었다. 내가 잠시 주저하는 기미를 보셨던지 할머니께서는,

“떡국이랍시고 끓인 것이 그렇구나. 못 먹겠거든 밥을 주랴?”

하시는 것이었다.

“웬 떡국은요?” 정월에 한 건데, 혹시 내가 올까 하고 남겨 두셨다는 것이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날마다 물을 갈아 부었건만 하 오래되니까 그 모양이구나.”

진달래가 피었을 때이니 몇 달 동안 그 일을 하셨단 말인가!

떡국은 풀어져 죽이 되었고 곰팡내도 몹시 났다. 그러나 나는 말없이 그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걸 먹으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한께 삼켰는지 모른다. 할머니께서는 내가 떡국 먹는 것을 보시면서 나이 한 살 더 먹이는 것이 대견하셨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도 가시고, 나는 나이 먹는 것이 두려운 중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런 떡국 한 그릇만 더 먹을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


강호형 수필가:

경기도 광주 출생, 1988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수필집: 『돼지가 웃은 이야기』  『행복을 디지인 하는 부부』  『붕어빵과 잉어빵』  『빈자리』

수필선 『바다의 묵시록』  『20세기의 전설』  『정류장에서』 등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황의순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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