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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비가 퍼부었다. 이른 새벽 비는 그쳤고, 고층에서 내다보는 도시는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앞산이 힐끗 보였다 사라졌다. 바람과 안개가 적절히 섞여 나를 홀렸다.

속세의 번잡한 아침이 오기 전에 서둘러 도시를 빠져 나갔다. 경부고속도로 문수·옹천 IC를 빠져나와 들길을 달렸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지만, 여느 시골과도 같은 익숙한 풍경이기도 햇다. 써레질을 마친 논 군데군데 모판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모내기 철이란 걸 알았다. 풀내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풀들이 제법 웃자랐고 숲은 한창 물이 올랐다.

멀지 않은 산들이 묵직했다. 구름인 듯 안개인 듯, 산허리쯤에 걸려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마음이 바빠졌다. 구름 속에 들기 위한 조급함이었다. 구름이 일 듯 흥하게 일어나는 ‘운흥雲興’을 찾아가는 길. 저 구름은, 저 안개는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선물이다. 길은 어느새 큰길을 벗어나 좁고 구불텅해졌다.

울주군 반계마을에 들었다. 안개에 푹 싸인 마을은 적막하다. 판타지처럼 신비롭다. 실루엣으로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와 골목골목 사람의 흔적을 지운 안개, 이따금 들리는 대화 소리와 짐승 소리가 없었다면 스산한 기운에 떠밀려 영락없는 폐마을과도 같았다. 어디선가 도깨비가 ‘번쩍번쩍’ 줄줄이 나타나 나를 홀릴 것만 같다. 금이고 은이고 수북이 쌓인 동굴을 알려줄 것도 같고, 이상하고 요상한 이야기를 흩어놓으며 도깨비 저들만 아는 세상 어디론가 데려가 줄 것도 같다.

마을을 지나니 안개 속에 이정표가 흐릿하게 나타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알리는 반가운 이정표다. 어느 즈음에 주차를 하고 부지런히 발품을 판다. 떠도는 자에게 발품은, 고단함이 아닌 무한한 활력이 된다. 공空으로 누릴 수 있는 그곳만의 풍광과 운치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같은 것이다. 도착지까지 잘 닦여진 길이 있어, 차로 편히 오른다면 분명 그곳의 운치나 감흥을 놓치고 마는 막대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래서일까. 몸 편히 닿았던 곳들은 하나같이 그저 그랬거나, 기억에서 빨리 멀어졌다.

운흥동천으로 몸을 들이자 막 걸어온 세상이 딴 세상처럼 멀어진다. 비켜난 시간들이 한없이 멀어지는 동안, 지금은 온전히 운흥동천의 시간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온통 젖었다. 나무와 풀과 사방의 냄새까지. 젖어서 더 향기롭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짖는 새소리도 아주 맑게 젖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또 어떠랴. 한 줄 빛도 스며들지 못하는 우거진 숲,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는 건강한 소음이다. 세상 어떤 잡소리도 침범하지 못한다. 움직임을 잠시 멈춘다. 육신의 골짜기 골짜기가 맑아지고, 정신 구석구석까지 시원해진다.

슬금슬금 일어나는 안개는 우거진 숲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무리지어 몰려다니다가 저들을 목격한 한 인간의 몸을 에워싼다. 이내 눈이 멀어진다. 습한 한기와 묘한 두려움은 절제할 수 없는 흥분을 일으킨다. 와글거리는 이 숲만의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 결박의 숲에서, 나는 대자연 속 미미한 존재로 모든 것을 누린다.

한차례 바람이 불고, 바람이 떠미는 대로 나는 거센 물살을 겁 없이 건너간다. 숲을 벗어난 젖은 인간이 걸어간다. 길에는 막 건너온 개울물이 찍히고, 축축한 걸음엔 육신에서 떨어져 나온 그간의 애환이 소멸한다.

걸음과 걸음이 모여 어느 산모롱이에 다다른다. 누가 쌓은 것인지 작은 돌탑이 섰고, 옆엔 너럭바위 두 개가 쉬어가라 이른다. 고개를 드니 산은 여전히 구름에 들어 침묵이다. 길은 점점 험해지고, 드물게 찍힌 인적에 또 다른 인적을 더하며 몇 걸음 더 오른다. 산비탈에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석축이다. 걸음이 빨라진다. 거친 돌길 끝에서 축대 위로 올라선다.

운흥사 터는 경남 양산시와 울주군 경계에 있는 천성산(옛 원적산) 골자기 기슭에 안겨 있다. 천성산은 운치가 좋아 예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렀고, 승가僧家에서는 ‘천 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곳千聖出世之地’이라 했다. 그래서일까. 신라의 고승 원효는 승려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절을 이곳에 지었다.

절터 입구엔 오래된 서어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온몸에 덕지덕지 낀 이끼는 비가 온 후라 더욱 푸르다. 거대한 풀밭의 출렁거림에 한참 넋을 놓는다. 돋아난 쑥은 어른 키만큼 자랐고 개망초, 쇠뜨기, 강아지풀, 그령, 질경이가 제각각의 자리에서 뿌리를 내렸다. 우거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사람의 기척이 멀어지니 다시 제자리를 찾아 들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풀들의 군락에서 인간은 그저 이방인이다.

바위 넘어 풀밭엔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그 속에서서 안개는 점점 더 깊게 성장한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앞의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비를 맞은 육신에 엄청난 고단함이 밀려온다. 첨벙첨벙 물 휘젓는 소리, 무엇인가를 짓이기는 소리, 당장이라도 눕고 싶은 이 막연한 고단함은 대체 무엇일까. 온몸에 근육통이 일고 관절 마디마디가 쑤시고 시리다.

나무 앞 바위에 몸을 기댄다. 바위의 한기가 몸 구석까지 스민다. 다듬잇돌처럼 가운데가 자연스럽게 굴곡진 바위가 어떤 쓸모처럼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스윽 훑으니 매끈하다. 이 바위는 필시 대단한 역사를 지닌 것이 분명하다.

아주 천천히 둘러볼 요량으로 풀밭에 든다. 이제 나도 안개에 파묻혀 풍경에서 흐릿해지거나 사라질 것이다. 잡풀 군락에 발을 얹는다. 발목을 낚아채는 풀들을 달래고, 천천히 조금씩 나도 풍경이 된다. 원초의 자연에 다시 길이 열리는 순간이다. 간간이 남은 석축이 안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사라진다.

산기슭에서부터 몇 단의 평지가 보인다. 대웅전 터로 보이는 중간 평지엔 주춧돌 몇 개가 선명하게 남았고, 잔디가 뿌리에 뿌리를 더해 아직도 대代를 잇는다. 주춧돌 앞엔 오래되고 늙은 감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풍파와 환난을 모질게 겪었던 탓일까. 쭈뼛하게 키만 키운 나무엔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꽃조차 피지 못했던 것 같다. 감나무는 옛 운흥사의 번성을 회상하는 노승의 뒷태 같은 모습으로 쓸쓸함을 더한다. 가뭇없이 사라진 세월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감나무를 보고 있으니 연민의 마음이 인다.

바람이 불고, 비는 더욱 거칠게 쏟아진다. 운무가 휘몰아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다시 사방을 살핀다. 길을 잃었다. 더는 나아갈 수 없어 주출돌에 주저앉는다. 굳이 길을 찾으려 들지 않는다. 때 되면 바람이 불 것이고, 길이 보일 것이니….

운무가 몰려가고 풀이 흔들린다. 저 아래 너른 풀밭 한가운데 어렴풋하게 석조물 하나가 보인다. 풀밭과는 어울리지 않는 회색빛 물확(수조)이다. 바닥엔 주먹만 한 구멍 한 개가 뚫려 있고, 사방엔 명문이 새겨졌다. 흐릿한 글자들 속에 간간이 깊이 새긴 글자가 보인다. ‘片手金汝往 戊申年 三月 日 水石桶 都監 ㅇㅇ 淸風法雲視편수금여왕 무신년 삼월 일 수석통 도감 ㅇㅇ 청풍법운시’. 무신년(1728년), 조선 영조 4년 3월에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창건 후 여러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사찰이었다. 양산 통도사보다 컸고, 천여 명의 스님들이 수도했기에 쌀 씻는 물이 반계마을 하류까지뿌옇게 물들였다고 한다. 운흥사 터는 난세에 피난지로 복거지촌福居之村이라 불렸던 길지였다. 고려 말에 지공指空선사가 중창했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기거하며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네 차례나 만나 휴전 회담을 했다. 그러나 국난을 피하지 못한 운흥사는 불길에 휩싸였고, 1614년(광해군 6년) 대희大希선사에 의해 다시 모습을 갖추었다. 조선 후기엔 동학의 교주 최재우가 이곳에서 머물며 도를 깨쳤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운흥사는 오간데 없고, 저 푸른 풀밭 속에 주춧돌과 축대, 몇몇 석조물만 누워 겨우 절터의 자취만 알린다.

운흥사 폐사에 대해선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말 고종 12년(1875년)에 일어난 민란을 제압하기 위해 없앴다는 것과, 운흥사에 은거한 최재우가 동학농민전쟁에 실패하면서 관의 탄압을 받아 폐사되었다는 것, 조선시대 한지 제작으로 과중한 부역이 내려지자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떠나는 바람에 폐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어느 이야기도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내 짧은 생각은 한지 생산의 과중한 부역에 맞춰진다.

불교를 숭상했던 신라와는 달리,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었다. 가혹한 정책에 수많은 사찰이 폐사되고, 승려는 노비보다 못한 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 운흥사도 빗겨갈 수 없었다. 조정에 종이를 만들어 바치는 대표적인 부역 사찰로 겨우 명맥을 이었다. 운흥사 터에 유독 큰 수조가 남아 있는 이유다. 절터에서 발견된 큰 수조는 닥나무 껍질을 벗겨 물에 불리기 위해 담구어 두었던 물확이다.

운흥사는 사찰의 역할보다 종이 생산소에 가까웠다. 종이를 청나라 조공품으로 보내면서 스님들의 지역紙役은 더욱 가중되었다. 매일 관료들은 종이 생산을 닦달했다. 승려들은 매일같이 닥나무 껍질을 벗겨 잿물과 함께 가마솥에 삶고, 삶은 닥나무 껍질의 검은 외피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해 백닥을 만들었다. 백닥이 걸쭉한 죽이 될 때까지 방망이로 두드리고 짓이겨 닥풀과 물에 고르게 섞었다. 그 후 발(틀)로 수십 번 일렁거려 한 장 한 장 종이를 떴다. 수차례 물질로 생산된 종이는 바람에 말린 뒤, 티끌이나 오물을 제거했다. 마지막으로 종이를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윤택이 날 때까지 두드렸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종이 양을 맞추기 위해 승려들의 노역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종이 생산은 시간도 일손도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수행이나 염불은 뒷전이고, 한낱 부역꾼으로 전락한 승려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부역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과중한 부역을 이행하지 못한 승려들이 연행되기 시작했고, 승려들은 절을 떠나 더 깊은 곳으로 은신하기에 이르렀다.

서어나무 앞 바위가 매끄럽게 굴곡진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생산한 한지를 올려놓고 다듬이질을 하거나, 닥나무로 바위를 치던 닥돌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밤낮없이 이어진 다듬이질에 종이는 더 질기고 윤택해졌을지 몰라도 승려들의 몸엔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운흥사는 그런 곳이었다. 마냥 고즈넉하고 고요한 절터가 아닌, 누군가의 고통이 스며든 곳, 그래서 절터 입구에서부터 공간적 아픔이 먼저 전해지는 곳이었다. 감히 아름답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곳.

절터를 떠돌다 동남쪽 산비탈 아래에서 또 다른 수조를 만난다. 절터 한가운데의 것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산그늘에 가려져 구석까지 발품을 팔지 않으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선행자들 대부분이 절터에는 물확 한 개가 전부라고 했다.

나는 분명 두 개의 수조를 확인했다. 내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수조엔 나무 그늘이 들었고, 그 아래 들고양이 한 마리가 비를 피해 웅크리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뒷산으로 달아났다. 고양이가 떠난 수조를 한없이 바라본다. 아무런 명문도, 문양도 없이 마른 돌이끼와 거칠게 다듬은 정 자국만 지문처럼 남았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이르렀을 때, 가금 아주 드물게 시간과 장소가 주는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아프거나, 떨리거나, 혼미해지거나, 아니면 어떤 단어, 어떤 물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운흥사 터가 그런 곳이다. 빈 허공에서 느끼는 처연함을 넘어서는 감정의 혼란, 돌로 만든 수조의 거친 표면을 보면서, ‘첨벙첨벙’ 낡은 종이 발을 부여잡고 ‘우물 정井’ 자를 쉴새 없이 그리며, 물질에 온 정신을 집중했을 고승의 거칠어진 손을 떠올린다. 그런 손을 꼬옥 잡아주고 싶은 마음에 수조를 매만진다.

이제 ‘사지寺址’는 ‘사지死地’로 변하여 풀밭에 들었다. 한때는 수많은 승려가 기거했다는 절의 흔적은 고작 물확 2개와 석축과 기와조각, 주춧돌 몇 개가 전부다. 우리가 문화에 무지했을 때, 문화적인 것보다 먹고사는 것이 시급했을 때, 누군가는 이곳을 찾아 쓸 만한 것과 돈이 되는 것을 함부로 거둬갔을 것이다. 그것이 어디로 가 어떻게 위치하고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빈곤했던 과거의 단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어디에서 영원한 적멸을 꿈꾸는지 모르나,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말 없는 그것들도 원래의 자리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풀밭 사이로 보이는 기와나 깨진 그릇 조각이 반갑다. 아무것도 없는 풀밭이라지만 이 얼마나 많은가. 절터를 상징할 만한 서탑도, 석등도, 부도도 하나 변변히 남아 있지 않은 초라한 절터라지만, 꼭 무엇이 뚜렷이 남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빈 절터에서 어찌 눈으로만 위안을 얻으려 하는가. 없으니 허전하고, 없으니 쓸쓸하고, 없으니 초라하다는 마음은 버리고 다시 저 빈 공간을 보라. 그윽해지는 찰나의 부유함, 비워진 것에서 그윽해지는 순간을 보라. 허허벌판이 이 너른 풀밭에서 느끼는 공허와 적막, 적멸, 황량함. 넉넉히 누릴 수 있는 공간적 느낌은 이곳 운흥사 터가 유일할 것이다. 천년의 시간이 머무르고 있는 저 풀밭에 나는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종種으로 섰다. 같이 호흡하고, 같이 흔들리는 종으로.

신발을 벗고 천년의 그때처럼 다시 첫발을 들인다. 발바닥에 닿는 풀의 감촉이 연하다. 풀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온몸으로 달려들어 나는 금방 젖고 만다. 너도, 나도 같은 자연의 한 점 존재가 되었으니 소곤거리는 풀들과 벌레들의 말이 멀지 않다.

무성한 풀밭에 안개비가 내리고, 자욱한 안개 사이로 모든 것은 실루엣으로 존재한다. 절집은 오래전 쓰러져 없어지고, 인적이 사라진 곳에 사람의 흔적은 미미하게 남았다.

절터를 500여 m 내려와 왼쪽 산기슭 부도밭으로 오른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이다. 숨겨진 공간을 찾아가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거진 숲, 얼굴에 서리는 거미줄을 걷어내느라 애를 먹는다. 비가 오는 날 인적 끊긴 숲길을 오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늦봄인 듯 초여름인 듯한 계절에 야생에서 만나는 각종의 것들은 감당하기 힘들다. 송충이, 지네, 뱀,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도록 싫은 것들을 눈앞에서 숱하게 목격하게 된다. 대숲이 우거지고, 바닥을 더듬으며 만나는 기와 조각에 흥미를 더해갈 무렵, 음침한 숲 주변에 민묘 여러 기가 나타난다. 음지 진 곳의 묘들은 떼가 자라지 못해 섬뜩하다.

음침한 숲길을 걷다 순간 눈을 찡그린다. 강렬하게 빛이 쏟아진다.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 무릉도원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빛은 돌담 안으로 모여들었다. 흐린 날씨임에도 한 곳만 환하다. 대숲 우거진 평지 가운데 부도 몇 기가 정갈하게 놓였다. 그야말로 은둔의 누리다.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고 한참 돌담 밖을 서성인다. 바람이 불자 서걱대는 대숲 소리가 시원하다.

부도밭으로 발을 들인다. 커다란 부도 4기와 수조, 여러 모양의 유구가 정갈하게 놓였다. 운흥동천엔 모두 7기의 부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2기는 운흥동천 입구 시적사에 있으며, 그 외의 부도를 모아 대형맷돌, 좌대, 사리탑의 기단석, 건물의 지대석, 석조 등과 함께 이곳에 안치한 것이다. 부도 1기의 행방은 알 수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어느 고승의 넋이 이 부도 속에 들었을까. 모두가 몸을 사리고 운흥사를 떠나갈 때, 끝까지 남아 노역도 구도의 길이라 여기며 온몸으로 감당했을 노승의 넋이 담긴 듯하여 마음이 숙연하다. 육신은 사라졌어도 그가 닦은 고행의 삶은, 심연의 세계가 되어 저 한아름 부도 안에서깊게 출렁일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한아름이요, 마음의 눈으로 온 누리가 되니 그의 자비가 온 누리에 깃들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흘러왔을까. 바람에 스치고, 빗물에 쓸리면서 부도는 조금씩 제 몸을 깎아낸다. 언젠가 먼 시간에 이르렀을 때, 이 부도도 흔적 없이 사라져 완전한 적멸의 시간에 이르겠다.

부도 한 편엔 꽃무늬가 새겨진 사리탑 기단석이 있다. 규모가 대단하다. 둘레에 연화문, 국화문, 당초문, 보상화 등의 꽃무늬를 선명하게 새겨놓았다. 누구의 사리탑이기에 이리도 정성스레 만들었을까.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그 향기를 전할 듯한 꽃에서 왜 자꾸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떠오르는 것일까. 절제된 사실적인 꽃에 언젠가는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날아들어 충만하게 시끄러울 것만 같다. 도굴꾼들은 어찌 이 아름다운 기단석을 그냥 두었던가. 나는 돌에 핀 꽃에서 아주 오래된 법향을 맡는다. 꽃들이 떠받드는 이름 없는 부도를 바라보는 동안, 무한의 시간이라도 아깝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사라탑 오른쪽엔 수조 1기가 놓였다. 운흥사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수조엔 명문이 새겨져 있다. ‘片手自明 雍正十年 壬子二月 日 造成白月 都監大玄堂務 明遠편수자명 옹정십년 임자이월 일 조성백월 도감대현당무 명원’. 편수 자명이 옹정 십년 임자 2월 일에 보름 동안 조성하고 도감 대현은 업무에 힘쓰면서 영원히 밝힌다는 내용이다. 옹정은 청대 세종의 연호로, 옹정 10년은 1733년경이다. 그러니 수조는 조선시대 영조 9년경에 제작 완성된 것이라는 뜻이다.

멎었던 비가 다시 쏟아진다. 빗소리와 대숲 서걱이는 소리가 한순간에 귀를 멀게 한다. 너무 소란하여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 소리에 서서히 지배당하고 만다. 영원히 가지고 싶은 시원하고 화끈한 대자연의 소리다. 부도밭의 허공은 한없이 너그러워 이 소란한 소리를 다 담고 출렁댄다.

조밀한 대밭 사이를 한참 쏘다니다 부도밭을 내려왔다. 반계계곡 시원한 물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잠시 바위에 앉는다. 몸은 젖었고, 신발을 벗으니 퉁퉁 불은 발이 볼썽사납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눅눅하고 후덥지근했던 몸이 한순간에 서늘해진다. 이 좋은 물을 두고 그냥 내려갔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녹음이 짙은 이 빡빡한 숲에서 느끼는 청아한 감촉과 소리와 향기가, 오랫동안 온몸을 휘감았던 처연함을 씻어낸다.

한때는 구름이 일 듯 성하게 일어났을 운흥사는 지금, 풀이 빼곡이 들어찬 ‘초흥사草興寺’가 되어 다시 생명의 움을 틔운다.

 

글,사진 박시윤 지음, 디앤씨북스 펴냄


경주 감은사 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속초 향성사 터 – 그리하여, 오래오래 눈이 내렸다 / 박시윤

고성 탑동리 절터 –볼 것 하나 없으면 어떠리 / 박시윤

울진 구산리 절터 -바람이 흔들면 못 이긴 척 따라 나섰다 / 박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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