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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부흐고비 2021. 6. 3. 13:20

혼자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물은 눈앞에서 두세 번 꺾이며 떨어져서 소(沼)에 잠긴다. 영국사 가는 길, 숨이 찰 즈음에 삼단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높지 않고 물줄기도 새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도 둘레가 크기 않고 깊이도 얕다. 작고 조용한 폭포, 오히려 쉬기에 편안한 느낌이다.

평상처럼 편편한 바윗돌에 홀로 앉아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들의 투명한 초록으로 천지가 눈부시다. 물은 연신 떨어져서 포말로 퍼지고 소는 그물을 받아 안는다. 물은 소에 이르나 한 쪽이 터져있어 또 어디론가 흘러내린다. 그러니 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마냥 그대로이다. 품었으나 다시 흘려보내니 소는 편안해 보인다.

소는 그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이끼 낀 돌들, 떨어져 겹겹이 쌓인 나뭇잎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 듣는다. 나는, 오래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이끼 낀 돌멩이도 부식된 나뭇잎도 보이지 않고 마침내 물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있다. 오래 듣고 있으면 물소리는 귓속으로 들어와 가슴에서 잦아진다. 천 길 물속 같은 적막에 묻힌다. 물은 분명 소리를 내며 흐르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나의 감각, 시각과 청각은 닫혀버린다.

내 삶의 그 어디쯤에서 들었던 물소리들을 기억한다. 오래전 어느 새벽 팔공산골짜기에서 처음 물소리를 만났다. 2월 하순이었지만 산속의 밤은 길고 밤새 산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푸르스름한 새벽에 산책을 나섰다. 산을 내려가다가 길 아래 깊은 골짜기에 길게 누워있는 계곡을 보았다. 어렵사리 내려갔더니 수면이 얼어붙어 있었다.

추위도 잊은 채 쪼그리고 앉았다. 얼어붙어 울퉁불퉁한 수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데 가느다란 물소리가 들렸다. 얼음장 아래서 졸졸졸 물이 살아서 흐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어떤 정감이 가슴에 일었고, 그것은 다시 눈으로 뜨겁게 번졌다.

또 한 번 예사롭지 않은 물소리를 만난 적이 있다. 지리산자락 산청에서였다. 그즈음에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물은 불어나있었다. 뒤틀고 굽이치며 흐르는 물살은 보기에 무서울 정도였다. 물살이 셌지만 흐르는 물에 발을 잠그며 높은 웃음소리로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었다.

돌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되는 집에 들게 되었는데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모두들 잠이 들고 오직 물소리만이 깨어있었다. 콸콸콸, 천둥이 치는 듯 산을 가를 듯 물은 밤새 고함을 질렀다. 밖으로 나갔다. 큰 돌을 골라서 앉았다. 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한정 없이 흘렀다. 그런데 오래 앉아있으니 소리가 없어졌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밤은 깊고 고요하였다. 그 밤 내 가슴에는 조용한 눈물이 흘렀다.

팔공산골짜기에서 가느다란 물소리를 만나 무언지 모를 정감에 휩싸이던 그때 나는 세상물정 모르던 스물세 살이었다. 산청의 계곡에서 거센 물살을 보라보며 밤을 보낸 때는 삼십대가 저물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리고 세월을 또 훌쩍 뛰어넘어 오늘 다시 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던가. 영국사 사는 길에서 물소리를 다시 만나 가는 길도 잊고 일행도 잊고 상념에 잠긴다. 물소리에 잠긴다.

스물세 살, 주어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두어 달 쉬겠다고 산에 들었다. 그 푸른 새벽에 들은 얼음장 밑의 물소리는 설익은 고민에 빠졌던 나를 어떤 새로움으로 이끌어준 것 같다. 산청의 거센 물살은 그 시절 나를 뒤흔들던 고뇌와 갈등을 씻어 보내고 가슴에 평화를 채워주었던가 싶다. 그런 시간을 가진 후 스물세 살의 나는 염세에서 벗어났고 삼십 대의 나는 스스로를 가지런히 다듬었다.

눈물이 핑도는, 가슴이 촉촉하게 젖는 어떤 시간을 그렇듯 물소리로 만났다. 새로움, 새 힘, 평화를 물소리에서 얻었다. 물은 언제나 흐르고 여기저기서 물소리를 만난다. 여느 땐 무심히 흘려버리는 소리를 특별히 유정하게 들었던 것은 그때 내가 삶과 마주서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던 까닭이다.

오늘 다시 물소리는 특별하다. 나의 내면에 머물러있으나 견뎌내고 내보내야하는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하필 왜 물소리일까.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까닭이고 그러면 맑게 갠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수직으로 떨어져서 수평을 이루는 그리고 흘러가는, 낮아지고 내보내며 평온해지는 물의 몸짓을 본다. 소리가 있으나 그 소리마저 버리고 마침내 고요해지는 물의 마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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