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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밤길 / 김선화

부흐고비 2021. 6. 9. 12:28

당시, 우리 동네에는 같은 학년 중학생이 그 애들뿐이었다. ‘숙이’와 ‘식이’. 그들은 꼬박 3년 동안 5리길이나 되는 학교에 함께 다녔다. 초등학교시절부터 꼽으면 어언 9년간이다.

학교가 파해 집에 올 때면 가로등도 없는 길이 그들을 가다렸다. 냇물을 건너고 들길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오려면 부엉이소리 간간 들려오는데, 식이는 숙이와 나란히 걷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붙이지 않았다. 늘 저만치 앞에서 걸었다. 숙이도 식이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조용 뒤에서 걸었다. 묘하게도 둘 사이는 늘 한결같은 거리가 유지되었다. 숙이로서는 그 고정된 거리가 종종 의문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길이 갈려 어엿하니 중년의 강을 건너는 그들. 꼬박꼬박 동창회에 나오는 교양미 넘치는 숙이가 식이의 안부를 묻는다.

“갠 어디서 뭐해먹고 산다냐? 통 얼굴도 안 보이고?”

그 말을 식이의 조카 되는(동급생) ‘태’가 받는다.

“그래 뵈도 숙이를 지켜주느라고 그렇게 다녔디야. 여자의 몸으로 무서워할까봐 같이 다니기는 해야겠는디, 제 걸음이 워낙 빨라 잠깐잠깐 기다려 5미터를 유지하고 걸었다는 거여.”

아! 이 얼마나 눈물겨운 배려인가. 아닌 게 아니라 식이의 몸이 좀 날렵하였던가. 철봉에 한 번 매달리면 50바퀴쯤은 거뜬히 물레질을 하고나서야 내려오던 친구다.

30여 년 간 숙이 가슴에 아슴아슴 남아있던 그림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바보 같은 자식! 그때 말하지.”

숙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창회의장 안엔 폭소가 터졌다. 이어, 가만가만 심호흡을 하며 걸음을 조절하던 식이의 행동이 한껏 미화되어 꽃으로 핀다.

세상엔 거리조절을 잘못하여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빈번한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그 어두운 길에서 유지해온 거리 5미터, 그리고 그 길에 깔아놓은 아름다운 침묵. — 시방 내 상념의 숲, ‘매우 떨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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