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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릉지대 / 김선화

부흐고비 2021. 6. 9. 08:32

비행기 떼가 날아왔다. 배경은 부엌에서 안방에 이르려면 흙으로 된 단 네 칸을 올라야 하는 초가이다. 부엌엔 부모님이 밥을 짓고 계셨던가. 빗장 열린 부엌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고 토방으로 통하는 샛문도 열려있다. 그런데 한미 훈련 때 티브이에서나 보았음 직한 전투기들이 마당 상공을 날고 부엌으로도 들어와 샛문으로 삐져나가는 등 우리 집에만 집중적으로 몰렸다. 낮게 비행하는 관계로 조종사의 얼굴도 보였다. 샛문 층계에 있다가 겁을 먹고 주저앉은 나에게 비행기 안에서는 정찰 중이니 괜찮다는 말이 우렁우렁했다. 순식간에 겪는 일이라 놀라웠지만 흥미롭고 듬직했다. 머리에 닿을듯하다가 유유히 빠져나갈 땐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정밀사진기에 몸을 맡긴 것처럼 그들이 우리 집을 세세히 훑는다고나 할까. 그만큼 위험지역일 수 있다는 의미도 동반됐을 터인데, 특유의 굉음과 상반되는 안정감이라니. 심지어 작은 초가의 안전을 위해 대거 동원된 전투기 떼의 군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꿈이었다. 며칠 지났는데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보슬비에 옷 접는다고 요즘 자주 들썩이는 핵 문제에 나도 적잖이 동요되었나 보다. 비행기의 군무가 있었던 집터는 지금 군의 영역에 들어있다.

옛집에서 서북쪽으로 우뚝한 계룡산 상봉엔 공군부대가 있다. 하여 거시서 나고 자란 우리들에게 비행기 소리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었다. 비행기마다의 특성도 몇 가지는 안다. 천천히 낮게 날고 있는 정찰기는 점잔미가 풍겼고, 고공 횡단을 하는 제트기는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 멋스러운 띠를 남겼다.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은 헬리콥터가 산에 닿을 듯 커다란 주머니를 달고 가는 것이었다. 그걸 보며 신기해하는 우리들을 향해 아버지의 설명이 따랐는데 군인들 식량을 싣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군수품을 운송하는 정경이었던 것이다.

상봉에선 날마다 한낮에 저음의 나팔소리가 울렸다. 어른들은 정오에 울리는 뚜~~~소리를 오포(五包)라 했는데, 누구네 아버지 어머니 할 것 없이 그 소리를 따라 점심때를 지켜 집을 향했다. 우리들은 그 소리를 기점으로 저수지 방둑에 나가 서서 뒷산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곤 했다. “아부~지~~~, 진지 잡숴~유~~~.” 말문이 트이면서부터 발성 연습은 제대로 한 셈인데 그럴 때면 아버지도 흥겹게 응수해 주셨다. “그~~랴~~~.” 구수한 화답이 들려오지 않으면 누구도 그냥 돌아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저수지 물살은 덩달아 출렁거렸다.

뒷산 정상부에서 흘러내린 곡선은 볼수록 은근하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어머니의 풍만한 가슴이다. 그래서 비 온 뒤 봉우리 쪽으로 감도는 뿌연 구름은, 마치 어머니의 불은 젖이 돌아 넘치는 것 같았다.

집 위로 숨이 차게 오르면, 중턱 구릉을 사래 긴 스물세 층의 계단밭이 휘돌아갔다. 부모님이 일일이 돌을 쌓아 만든 황토밭이었다. 워낭소리와 함께 젊은 날의 아버지 숨결이 배인 그곳에선 모든 농작물이 세 이랑을 넘지 못했다. 그래 봬도 그 땅에 참외 수박을 심고 원두막을 지어내 유년의 정서적 기반을 이루게 한 곳이다. 거기서 골짜기를 하나 건너 좀 평평한 지대에는 세 개의 자갈밭이 있었는데, 참깨․ 메밀 농사로 장단을 이루던 어머니의 호미질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자그락거린다. 동생들도 그 일대로 소를 끌고 가 뜯기며 갖은 해찰을 하고, 나는 어린 동생을 업고 오르내리며 날마다 샛젖을 먹였다.

그 지점에서 다시 구릉 하나를 끼고 돌면 고요히 숨어 지내기 좋은 요새가 나왔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가파른 언덕에 난 소로여서 위태로웠지만, 아버지는 그 길을 이용해 등짐을 져 날랐고, 어머니는 머릿짐을 여 날랐으며, 우리들은 동네 최고의 물맛 가재 샘에서 한 주전자씩 물을 떠 날랐다. 딱히 샘이랄 것도 없이 겨우 주전자 하나 들락거릴 정도의 보에서 물을 뜨고 가재 가족이랑 놀았다. 샘 아래위로 열 뙈기가 넘는 모래밭이 역시 우리들 11남매의 생명줄이 되어주었다. 굳은살 박인 손으로 그 많은 땅을 일구는 부모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바, 그 덕에 우리 형제들도 웃음이 헤프다.

그 시절의 우리 집 주식은 호밀이었다. 산간 박토에서 잘 자라는 장점만큼 운반과정의 노고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을 도정하여 밥을 짓고 빻아서는 밀개떡을 해 먹었는데, 밥도 개떡도 시커먼 식량을 아이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한 중에도 나는 잔뼈가 여물도록 산길을 오가며 책상만 한 수평 바위 하나를 점찍었다. 용모 준수한 사람처럼 잘 생긴 바위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 평생 교단에서 윤리를 가르치는 남동생은 중학생 시절 웅변원고를 그곳에 올라 산을 뒤흔들었고, 나는 젖먹이 동생을 내려 잠시 쉼을 하며 고쳐 업곤 하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호밀꺼럭이 싫어서 집을 나왔다. 맡아 놓은 바위는 이 다음 뜻을 이룬 뒤에 반드시 돌아와 사색의 장으로 해후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고향으로서의 그 땅은 오래 보전되지 않았다. 불과 몇 해 뒤, 지역민들이 모두 이주를 해야만 하는 운명을 맞은 까닭이다. 공군부대가 계룡산 정상부에 있었다면, 지금은 3군 본부 ‘계룡대’가 대거 그 일대를 채우고 있다. 국군의 날엔 창공에서 한 차례씩 곡예도 벌어진다.

이처럼 그 지역 산마을 사람들과 비행기는 오래 전부터 연이 닿아 있다. 한국전쟁이 치열 할 때도 주요역할을 한 부대라 한다. 그러한 잠재의 너울이 꿈자리까지 따라다니는 것일까. 이즈음도 눈을 감으면 상실의 시간 저 편에서 초가 한 채가 손짓한다. 옛 장터 길에서 바라보면 동편 산마루쯤에 있던 보금자리. 높은 언덕을 오르고 마당에서도 오르고 올라 산밭에 가 닿던 소박한 요람. 안마당 바깥마당도 턱이 지고 텃밭도 오르거나 뛰어내려야 하던 층층으로 이루어진 지대이니, 이웃과 이웃 간의 곡선은 어떠하였으랴. 집집마다의 형체는 이미 사라진 마을이지만, 잡목 속에 들었어도 그 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산자락에서 이어지는 구릉이 큰 몫을 한다. 그것을 화선지에 그려 넣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덥다. 그러면서 시나브로 부드러운 지형을 닮아 매사 원만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한 시대 그 일대에서 호흡한 사람들의 숨결을 머금고 있는 내 바위는, 지금쯤 두터워져 가는 이끼를 달싹이며 기다림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려나.



* 김선화 수필가:
<월간문학>수필 등단(1999년). <월간문학> 청소년 소설등단(2006년).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수필문우회, 한국문학비답사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위원. 선수필 기획위원. 군포중앙도서관 수필강의.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대표에세이문학상. 대한문학상 등.
수필집: <둥지 밖의 새> <눈으로 보는 소리> <소낙비> <포옹> 등, 청소년 소설: <솔수펑이 사람들> <바람의 집>, 동화집: <호두도둑 내 친구>. 시집: <인연의 눈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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