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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찔레꽃의 노래 / 김영인

부흐고비 2021. 6. 11. 09:00

5월은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이라 한다지만 사실 5월만큼 힘겨운 달도 없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지나면 곧이어 스승의 날 , 부부의 날이다. 여기에 집안의 대소사까지 겹치게 되면 그야말로 허리가 휘어지도록 한 달이 내내 버겁다. 더군다나 올해는 작년부터 불어 닥친 불황으로 경제가 더욱 어려우니 그저 내 가족 하루 무탈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보통 서민들이 바라는 오늘의 현주소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5월로 접어들면서 몇 번이나 지갑을 여닫으며 주판알을 튕겼는지 모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조그만 자영업을 하는 남편은 은행대출이 용이하지 않아 몇 번이나 일감을 놓쳤으며 그나마 약간의 여유 돈을 예치해 둔 통장도 그 이자가 대폭 삭감되는 바람에 나는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가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낯간지러운 행사는 제쳐두고 어버이날만큼은 내 형편껏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시어머니 생신과 석가탄신일까지 한꺼번에 겹치다보니 그 하나하나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버이날 그 날도 그랬다.

며칠 전 시어머니 생신을 맞이해 겸사겸사 시골에 다녀온 나는 아침 일찍 안부전화만 드리고 집 부근에 사는 친정어머니를 뵈러 나섰다. 무엇을 드리나 생각하다 문득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평소 어머니가 즐기시는 과일과 고혈압이 있는 어머니께서 상비약으로 늘 준비하는 청심환 그리고 봉투에는 제법 도톰한 금액을 넣어 어머니께 드렸다.

“ 아 대학 등록금 맞춘다고 니도 힘들었을 텐데 뭐할라고...”

말씀은 그렇게 하였지만 흐려진 말꼬리에서 환한 미소가 뚝뚝 묻어났다. 자식은 많고 먹을 것은 부족했던 지난 시절, 그 시간들을 모질게 살아왔던 어머니에게 나의 작은 정성은 하나의 기쁨이고 보람이며 또 다른 보상의 의미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 모습을 기억하며 지갑을 열어보았다. 월말이 되려면 아직도 까마득한데 어느새 얄팍해진 지갑. 어쩌지 어떡하지 그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만 원짜리 지폐 열 장을 헤아려 봉투에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받은 만큼 돌려주네. 너 얌체구나.’ 어디선가 나 더러 얌체, 깍쟁이, 너야말로 진정한 이기주의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어린이날에 이제 손자라 해보았자 모두 직장에 다니니 챙겨줄 아이라곤 우리 집 뿐이라며 아이들에게 오 만원씩 주고 간 친정엄마의 온화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애써 모르는 척 태연한 척 지갑만 불끈 쥐었다.

친정어머니 댁에 가니 두 올케는 이미 다녀갔고 수영에 사는 작은 언니가 마침 와 있었다. 방 한쪽에는 두 올케가 만들어온 밑반찬과 선물들이 즐비하게 있었고 하얀 봉투 서너 개도 눈에 뜨인다. 어머니는 선물을 일일이 풀어 보이며 이건 누가 무엇을 해온 것이라고 자랑을 주저리 늘어놓는다. 이때 옆에 있던 작은 언니가 가지고 온 선물을 살짝 내밀었다. 백화점에서 구입하였다는 효도신발과 투피스 한 벌 그리고 봉투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있었다.

내 머리는 순간적으로 수 십 만원 하는 효도신발과 백화점의 고가 의류와 작은 언니가 내민 봉투의 금액을 합산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효도신발을 신어보며 발이 참 편하다며 이젠 어디든지 갈 수 있겠다고 활짝 웃으신다. 웃는 모습이 마치 하얀 찔레꽃을 닮았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지갑을 거머쥔 손에서 땀이 삐질 밀려 나왔다.

우리 집과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친정어머니, 어머니는 이틀이 멀다하고 우리 집에 오신다. 당뇨와 고혈압이 있어 매일 한, 두 시간은 넉넉하게 걷는 어머닌데 나는 왜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였을까? 갑자기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실망스러웠다. 작은 언니인들 경제적으로 걱정 없고 풍족해서 그랬을까. 올해 구십이신 어머니. 이제 살아본들 얼마나 사실까 하는 애틋한 마음은 혹시 아니었을까. 언니의 선홍빛 사랑 위로 보잘 것 없이 초라한 내 모습이 자꾸 투영되었다. 아니 더 은밀히 말하자면 금액보다, 선물보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저울질 한 내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다음날, 청소를 해도 걸레로 바닥을 박박 문질러도 못난 내 모습을 달랠 길 없다. 향 진한 원두커피로 못난 속을 달래는데 친정어머니께서 오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몇 해 전 내가 선물한 구두를 신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구두는 굽이 약간 있어 불편하다며 신지 않는 신발이었다.

“내 어제 수선집 가서 굽 잘라냈다. 자르면 못 신는다고 하더라만 이거 니가 선물한 신발인데 아까워서....”

근원도 모를 뜨거움에 울컥 목이 메였다. 어머니는 진작부터 내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못난 마음도 감추고 싶은 나의 초라한 마음도 다만 모른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댁으로 돌아가시는 길. 굽을 잘라낸 구두를 신은 어머니의 걸음이 자꾸 뒤뚱거린다. 발이 불편한 만큼이나 어머니의 마음은 깊고 푸를 것이다.

“엄마! 조심해서 가이소....조심해서 들어가이소오.”

횡단보도를 향해 소리치는 나를 향해 힐끗 돌아보는 어머니.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데 찔레꽃 한 송이 참 곱게도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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