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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걸레 / 배종팔

부흐고비 2021. 6. 10. 14:40

제16회 시흥문학상 우수상

시월의 가을볕이 베란다 창틈으로 날아들어 건조대에 닿는다. 빨래 건조대엔 제 할 일을 다 끝내고 한가하게 햇빛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는 옷들이 서거나 누워 있다. 한동안 늦가을의 쌀쌀함을 막고 몸의 온기를 데워주고 반듯하게 맵시도 나게 해 주었으니 이제 맘껏 가을볕의 휴식을 즐길 수 있지 않느냐며 뽐내는 듯하다. 건조대 한쪽 귀퉁이에 널린 천 조각에 무심히 시선이 닿는다. 아내의 베이지색 면바지를 자르고 덧대어 테두리따라 촘촘히 꿰맨 걸레다. 근 오륙 년을 아내의 다리와 동고동락하다 옷의 수명을 다해 박복하게도 걸레가 되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누빈 세월에 닳아 올이 성기고 때깔마저 잃어 주위 옷들의 눈을 피해 제 스스로 한데로 나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걸레에 별스런 애착이 간다. 척박하고 궂은일이 자신의 타고난 역할인 양 불평 없이 묵묵히 견뎌내는 아내의 삶과 무척 닮아 있다.

아내와 딸아이가 팔랑대며 현관문을 나서면 집안엔 휑하니 그리움만 남는다. 나는 그 그리움의 흔적을 주우려 방마다 걸레질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처음에 꽤 서툴고 어색했던 이 일이 제법 몸에 배어 익숙하다. 건조대에서 걸레를 걷어 물을 적신다. 걸레에 물기가 촉촉이 스며들면 내 손은 다시 아내의 무릎과 만난다. 걸레의 위쪽에 볼록하게 나와 올이 해지고 구멍이 드문드문 난 곳이 아내의 무릎이 닿아 있던 천 부분이다. 아내는 얼마나 많은 삶의 길을 고독하게 걸었기에 저토록 무릎 부분이 휘고 굽어 올마저 엉성할까. 나는 애써 베란다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려 짐짓 딴청을 부린다.

걸레는 늘 아이 방 문턱부터 넘는다. 의자 옆 뱀 똬리 틀듯 벗어놓은 딸아이 활동복을 만난다. 고등학교 이니셜이 선명하다. 밤늦도록 책을 붙들고 있은 듯 찌든 땀 냄새가 아직도 남아 코끝으로 파고든다. 청춘을 담보 잡힌 번민과 고뇌의 말들이 바닥에 차곡차곡 어룽져 있다. 걸레가 오진 알곡을 모으듯 하나하나 주어 올 속에 감춘다. 삶이란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당장은 힘들고 고달픈가 보다. 곳곳의 창틀과 책장을 파고든 걸레는 거실에서 간식 부스러기와 음료수의 끈적한 물기를 만난다. 머리카락들도 소복소복 걸레 밑으로 달려든다. 찌든 냄새에 배인 가족의 체취를 맡으며 이때만큼은 가족과 일체가 되는 행복감에 몸을 떤다.

안방 화장대 앞에 서둘러 벗어 던진 양말 한 짝에 눈길이 멎는다. 엄지 아래쪽이 유난히 바깥쪽으로 휜 아내의 발 형상을 하고 있다. 발을 닮아 양말마저 기형이다. 아내는 발품을 들여 일을 하는 학습지 교사다. 집집마다 얼마나 바삐 서둘렀으면 저토록 양말 한쪽이 휘어 올까지 마모되었을까. 삶의 햇살이 모든 이에게 골고루 비치지 않듯, 때로는 응달진 곳을 고독하게 쉬지 않고 걸어야만 겨우 한 뼘 햇볕의 혜택도 누릴 수 있는 시기가 있나 보다. 양말 올마다 아내의 삶의 무게가 느껴져 가슴 한쪽이 빈 동굴처럼 허전하다.

방마다 깃든 온갖 사연과 얘기들을 담아 한껏 부풀려진 걸레는 어느새 거무튀튀한 흑갈색으로 변해 있다. 늦가을의 물에 손이 시리다. 빨래판 위에 걸레를 올려놓고 쓱쓱 비누질하여 어깨에 힘을 싣는다. 빨랫대야 안은 온통 재색 땟물로 채워진다. 움켜쥐고 쥐어짤수록 땟물 속에 웅크린 걸레가 참았던 울분을 토해내듯 잿빛 물을 마구 뿜어낸다. 한때 아내의 삶도 맑은 빛이라곤 없는 구정물 속에 갇혀 걸레처럼 부유한 적이 있다. 먹빛 대야 안에서 접히고 구겨지며 이리저리 휘둘리고, 때로는 찬물과 뜨거운 물을 번갈아 맞으며 삶의 냉혹함을 홀로 맛보았다. 신분의 비약적 상승을 꾀하며 시작한 나의 지난한 공부는 기약이 없었고, 경제적인 부담은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되었다. 입신출세의 달콤한 기대에 부풀어 남편의 후광 한번 받지 못하고 온갖 집안 대소사는 아내의 차지였다. 빠듯한 삶에 부대끼면서도 내 책값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이 없는 방에서 걸레질할 때 무슨 생각을 하며 그 황량한 시간을 견뎌 냈을까. 말수가 적고 근심을 속으로 삭이는 편이라 내색은 않았지만 딸아이라는 연결 고리가 없었다면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게다. 삶에는 자신의 의지와 꿈과는 상관없이 이겨내지 못할 한계가 불쑥불쑥 끼어든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으리라. 속절없이 일어나는 걸레 거품은 아내의 각다분한 삶이 우려내는 눈물처럼 보인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는 사막의 선인장 잎처럼 지독한 열기와 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때가 있나 보다. 가장의 책임을 단 한 번도 닦달 않고 내 삶을 스스로 갈무리하도록 묵묵히 기다려 준 아내가 고맙다. 나는 구정물 속으로 손을 넣어 아내의 무릎 부분 천을 가만히 움켜쥔다.

찌든 때가 좀처럼 빠지지 않을 것 같은 걸레도 시린 손을 참고 의욕적으로 박박 문지르니 하얀 거품을 쏟아낸다. 진흙에서 연꽃이 피듯 구정물 속에서도 무지갯빛 거품이 이는가 보다. 이젠 비누칠 한 번에도 거품이 풍성하게 인다. 우리네 삶도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잿빛 거품은 묽어지고 풍성하고 하얀 거품이 일기에 살만한가 보다. 집착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영어를 가르치는 프리랜서 강사가 되었다. 오랜 공부 경험 탓인지 여기저기서 강의의뢰가 들어왔다. 아내가 덩달아 들떠서 좋아했다. 구두 뒤축이 닳도록 또 다른 꿈을 좇아 쉼 없이 뛰었다. 지금의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호사까지 누렸다. 속 깊은 딸아이는 여태 옷 투정 반찬 투정 하나 없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 주었다. 대야 가득 부푼 하얀 거품들을 바라본다. 어느덧 아픈 기억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거품엔 한낮의 가을볕이 풍성하게 물든다. 꿈은 때때로 또 다른 꿈을 잉태하고, 그 꿈이 현실이란 거품으로 환생한 것 같다.

걸레를 빨 땐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걸레에서 소중한 땀내가 난다. 방과 거실에 밴 나름의 일상과 체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삐뚤어진 양말이 해지도록 분주히 걷는 아내가 거품 위로 아슴아슴 떠오른다. 귀익은 발자국소리가 또르르 거품 아래로 미끄럼질 친다. 딸아이의 번민과 고뇌의 말들이 거품 막 속에 갇혀 내 눈을 애타게 바라본다.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아이가 생그레 웃으며 솟아오르다 거품 저편으로 미끄러진다. 우리 삶도 거품처럼 때론 마술을 부리기에 힘든 시기를 견디며 살아내는가 보다. 삶의 아픈 경험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살 수 있음을 깨닫는다.

크고 작은 거품이 문득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살을 맞대고 의지하며 부부 혹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연과 혈연의 고리로 엮어져 있다. 서로 어깨를 맞대어 경계가 없는 듯 보이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거품은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로 믿고 의지 하되 때론 혼자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도록 눈감아 주고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거품 속에서 아내가 해맑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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