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어떤 표정 / 배종팔

부흐고비 2021. 6. 10. 12:33

스산한 가을날 오후, 짙은 가을빛에 이끌려 비탈진 돌계단을 오른다. 아내와 보름 만에 나선 산행길이다. 돌계단 양옆 단풍나무 잎사귀에 가을 햇살이 뛰논다. 산의 형상이 물고기라면 눈의 자리에 암자가 있다. 암자를 지나 몇 발짝 오르면 화강암으로 된 돌부처가 토굴 속에 광배를 끼고 앉아 있다. 가슴 한켠에 불심이 자리한 건 아닌데도 그의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에 매번 발목이 잡혀 아내와 나란히 서서 합장하며 숨을 고른다.

오늘도 두려움 반, 경건함 반으로 그를 쳐다본다. 삶의 행적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가 서늘하여 매번 그의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이제 무뎌질 만도 한데 표정이 깊고 무거워 도무지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 보름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손톱달처럼 눈을 내려뜨고 나를 꾸짖는 듯 근엄한 표정이다. 보름 전 그의 눈빛은 숨 고르는 내 등을 토닥이며 어루만지는 온후한 어머니의 눈길이 아니었던가. 한데 오늘은 끝내 참지 못해 회초리를 든 엄한 훈장의 표정으로 내 잘못한 무언가를 추궁하는 듯하다. 곰곰이 되새겨 보니 비단 이 번뿐만이 아니다. 봄볕 완연한 어느 날엔 세상의 온갖 고통을 홀로 견뎌낸 등신불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토굴 주위로 희끗희끗 싸락눈이 분분한 날엔 무언가 마뜩잖아 불만에 찬 표정으로 합장하는 양손을 부끄럽게 했다. 또 어떤 땐 ‘괜찮아’ 하며 후덕한 눈길로 침잠하고 설운 마음을 감싸안아주지 않았던가.

상념의 무게가 자꾸 어깨를 짓눌러 걸음이 늦어진다. 앞서 가는 아내를 쫓아 그의 표정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묻는다. “말 없는 돌부처에 어디 별다른 표정이 있겠냐.”며 그녀에겐 언제나 똑같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의 다양한 표정의 원인이 왠지 내 탓인 듯하여 또 한 번 묵상에 잠긴다. 벌레를 쫓는 새의 날갯짓도 잦아들고 산그늘이 길어져 굴참나무 밑동을 타고 흐른다. 돌부처가 등 뒤로 멀어질 즈음, 여태 부대껴 살면서 아내의 표정은 내게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겨 본다.

평소 말수가 적고 감정의 기복이 없는 터라 자신의 생각이나 의중을 잘 내색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늘 머리가 복잡하고 상념에 곧잘 잠기는데 아내는 남의 일이나 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 어쩌면 겉으로 보기엔 항시 묵묵한 돌부처의 표정과 닮아 있다. 하지만 살을 맞댄 세월 탓인지 기쁨이나 설운 마음 심지어 회한이나 불만 한 조각조차도 놓치지 않고 읽어 낸다. 그만큼 사람의 표정은 변화가 있어 심중을 가늠하기 쉽다. 하지만 돌부처는 침묵과 무표정으로 일관하기에 되레 수많은 의중이 숨어 있는 듯하다. 중국의 기예 ‘변검’의 변검술사처럼 지나칠 때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그가 내게 그 연유를 알아내라는 숙제를 배낭 속에 쑥 집어넣은 듯하여 산을 오르는 내내 상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얼굴은 그 사람의 살아온 이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 사람이 지은 삶의 농사의 결실이며 살아온 내력에 그만큼의 책임을 지운다. 반면 표정은 현재형이다. 사람의 표정은 현재의 감정과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투명한 창과 같다. 그만큼 표정은 그 표정의 근원인 심중에 닿아 있어 꽤 진실해 보인다. 하지만 무생물은 감정이라곤 없어 표정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돌부처의 무표정이 내게 던지는 의미가 컸다. 표정이 없다는 건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보는 이가 그 표정에 의미를 덧씌울 수 있으니 말이다. 사물에 내 마음이 투영되어 그 사물이 내 표정을 드러내는 현상을 착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보름 전 돌부처의 후덕한 인상은 육신의 기가 쇠해 입맛을 잃은 어머니와 따뜻한 저녁 한 끼 함께 한 후 옷 한 벌 사드린 날의 내 마음이었고, 세상 짐을 혼자 진 듯한 등신불의 표정은 반년에 걸쳐 정성을 들여 만든 영어 책이 출판사의 거절로 지독한 고독에 지쳐 있을 때의 내 심정이었다. 또 오늘의 표정은 보통의 삶을 바라는 딸아이에게 미래의 큰 꿈 하나 없다며 매몰차게 몰아붙인 어젯밤의 내 욕심이 빚은 헛헛함과 미안함 때문이리라. 내가 그의 표정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내 표정을 본 셈이다. 또 다른 내가 표정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투영되어 나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서둘러요. 어둑살이 내렸어요.”

아내의 소리가 상념을 깨운다. 숲 언저리엔 벌써 땅거미가 깃들어 저뭇한데 산등성이의 노을은 오늘따라 붉고 선연하다. 돌부처가 노을을 휘장처럼 두르고 빙긋이 웃는다. 마치 선생이 숙제를 잘 해낸 학생의 등을 다독이듯.


배종팔 수필가 :

경남 김해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2007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거미」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토지문학제 대상, 개천문학상, 시흥문학상, 농어촌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수필집: 《명품 가방과 칼국수》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샅바 / 류영택  (0) 2021.06.11
걸레 / 배종팔  (0) 2021.06.10
칼 / 장미숙  (0) 2021.06.10
고추밭 연가(戀歌) / 장미숙  (0) 2021.06.10
초록의 도道 / 장미숙  (0) 2021.06.0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