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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면증 / 곽진순

부흐고비 2021. 6. 14. 14:02

내가 다니던 G여고 앞에는 자그만한 서점 하나가 있었다. 봄 부터 초겨울까지 서점 정면 벽에 등을 기대고 자던 걸인이 있었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웃는 모습으로 잠들고 있었는데 입술사이로, 누렇게 변한데다 부러진 앞니 하나가 보이기도 했다. 서점 앞은 버스 승강장이라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옷차림이 말쑥한 중년부인이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바로 저 사람이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그 부인의 얼굴은 잠 못잔 사람처럼 핼쓱하고 피로해 보였다. 그 사람의 말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 곳이 어디든 쉬이 잠들 수 있는 사람이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들이 잠드는 시각에 잠 못이루는 사람이 아닐까.

오늘처럼 잠 안오는 밤에는 유난히 그 거지가 생각난다.

오늘은 어떻해서든 잠을 자 보아야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눈을 감자마자 어, 내가 현관문을 잠갔던가, 잠갔겠지 머리속이 금세 이분된다.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현관문을 내다본다. 현관문은 성벽처럼 굳게 잠겨있다. 그러면 그렇지.

불을 끄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난데없이 눈앞에 허연 종이 한장이 펼쳐진다. 연금 고지서이다. 무슨 연금을 매달 그렇게나 많이 내라고 하지? 고수익자도 아닌데. 어디다 알아보아야 할까 .동사무소? 연금관리공단? 구청복지과? 연금관리공단일 거야. 근데 금액을 어떻게 깍지? 깍을 수나 있을까. 콩나물값도 아닌데.

파마한지 닷새도 안돼 머리가 늘어져버렸는데 미장원에 다시 가서 해 달래야 할까? 시간도 없는데 두달을 더 버틸까? 너무 지저분해 보일 탠데.... 의외로 섹시해 보일 수도있어. 에이 모르겠다. 내일 생각하자. 눈을 찔끔 감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잠이 오기를 기다린다.

허사다. 줄기에 따라 나오는 감자처럼 이어지는 생각들. 김 선생은 왜 나만 보면 입을 한 자나 내밀고 나갔을까. 은영이 돌잔치에 안가면 안될까... 지루한 시간이 될텐데. 영화<데미지>가 괜찮다고 하던데 언제 볼까? 제레미 아이언스의 뇌쇄적은 눈빛을 꼭 봐야 하는데. 근데 욕조물은 왜 시원스럽게 안빠지지? 욕실 문지방 타일은 왜 금이가고 떨어져 나가냐고....

나는 지치고 괴로운 나머지 잠 자는 걸 포기한다. 어둠속 어딘가를 노려본다. 그러자 거짖말처럼 스르르 눈이 감긴다.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야, 왜 너 숙제 안했어? 포켯몬스턴지 만스턴지에 빠겨서 왜 공부는 뒷전이냐고? 너 병신될래!"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아니다, 옆집 여자가 앙칼지게 내지르는 소리다. 지금이 몇시인데, 잠은 영원히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슬리퍼를 찍찍 끌고 가는 어느 행인의 발걸음 소리. 칵, 가래침 밷는 소리. 텔레비전이 쩌억, 책상다리가 뚝, 하는 온갖 소리들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어느새 유리창이 희붐하게 밝아온다.

온 밤을 꼬박 새운 것에 대한 한탄하고 한숨 짓지만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받을 수는 없다. 레퍼토리만 다를 뿐 밤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다.

뜬 눈으로 상념에 휘둘리면서 시간이 하루, 이틀, 넉달, 1년, 2년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따금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흐리멍덩한 눈, 핏기 없는 입술, 누렇게 뜬 얼굴이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 같다.

왜 잠 못 드는 것일까. 내 무의식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큰 일을 앞둔 사람도 아니고 집안에 중병환자가 있어 시름에 겨운 사람도 아니고 엊그제 실연당한 사람도 아니다. 도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동네 약사가 불면증 의문을 조금 해소해 주었다. 어느날 엄마와 함께 동네 약국에 갔다. 약사가 말했다.

"미스 곽이 엄마를 닮으셨군요."

나는 의아해서 약사를 보았다. 그때까지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약사가 설명했다.

"엄마가 걱정 많이 하고 예민하게 생기셨어요."

약사는 내가 빈번히 수면제를 사가는 것이 엄마를 닮은 날카로운 성격 탓에 잠 못 이룬다고 여기는 듯했다. 전혀 근거없는 소리만은 아닌듯 싶다. 나는 어느 사람이 던진 하찮은 말 한마디를 예사로이 받지 못하고 수십번 분석하며 괴로워 하기도 한다.

수면제 이상으로 불면증 환자를 혹하게 하는 것은 술이다. 그것은 아주 강력하고 집요하게 불면의 밤을 유혹한다. 나는 실제로 달콤한 와인을 한 두잔 마시고 달게 잔 적도 있다. 어쩌면 술은 수면제 보다도 숙면에 더 효과적인 음료인지도 모른다. 수면제는 지속적으로 복용하다보면 더 이상 효능이 발생하지 않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술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술은 마실수록 더욱 당기고 그 양도 늘어나서 제어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등산, 수영, 자전거 타기, 요가,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명상.... 불면을 치유하기 위해서 갖은 시도를 해보았다. 결코 나아지거나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때 부터인지 불면을 수족처럼 여기기로 한다. 잠 못 이루는 밤, 밤이 주는 온갖 것을 향유하기로 한다. 이들을 응시하고 귀를 기우린다. 일층 화단의 측백나무 가지에 거미가 집 짓는 소리가 들린다. 화단 어딘가에 찌르레기가 도움닫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린 사랑초가 밤새 꽃을 틔우는 지난한 소리도, 술취한 행인이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해독해 보려한다.

밀려오는 상념을 애써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혼하고 십년이 안돼 홀로 된 친구에 대해 생각 하고 첫새벽에 악다구니쓰는 옆집여자를 이해해 보려고도 한다. 그리고 나를 버리고 떠난 옛애인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많은 밤들을 오로지 숙면으로 일괄했다면 어찌 됐을까. 살 잘 붙는 체질인 나는 피둥피둥 부담스런 외양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둔감하고 무기력한 영혼과 정신을 소유했을지도 모르겠다.

불면의 밤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은 내 영혼과 정신을 훨씬 깊고 진하게 채색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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