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백전백패 / 노정애

부흐고비 2021. 6. 25. 08:28

결혼 22년이 넘었다. 부부간의 전쟁을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승리한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진 기억만 있다고 했더니 시간 있으니 싸워서 이기고 쓰면 되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승리는 무슨 비기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부전승(不戰勝)이 손자병법의 중심사상이라고 했던가. 여전히 나는 그의 상대가 못된다. 살면서 그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낸 적은 없다. 반면 나는 두 번 이혼이라는 말을 했다가 대패했다.

결혼 6년차가 되었을 즈음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댁이 있었다. 시아주버님의 사업실패는 시댁 집이 채권자에게 넘어가고 다른 형제들에게 엄청난 금전적 피해를 주는 등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편은 부도내고 해외로 도피중인 형에게 빚을 내서 계속 뒷돈을 보내주고 있었다. 제 앞길 걱정 안하는 그가 답답해서 시어머니께 하소연이라도 하면 형제간에 이간질 시킨다고 날벼락이 떨어졌던 때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쪽박 찰 날이 멀지않았기에 비장의 카드를 쓰기로 했다.

이혼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살고 있는 집을 쪼개서 얻을 수 있는 서울 변두리 집을 알아보고, 직장을 구해두고, 이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알아두었다. 그가 이혼은 절대 안 된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항복의 백색 깃발을 기대하며 결전을 준비했다.

이혼하자고 했다. 그간 준비한 카드를 모두 보여주었다. “왜?” 그의 물음에 시댁에 쌓였던 설움의 보따리를 풀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당신까지 미워질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내자고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이혼해야 되겠네. 문제가 나에게 있다면 고쳐보겠지만 부모형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난 그들을 못 본척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니 네 말대로 이혼하는 게 옳은 것 같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나는 단칼에 나가 떨어졌다. 며칠 후 내가 백기를 들어 항복했다.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여자의 말을 못 알아듣는 답답하고 한심한 사람이라는 최후의 일격으로 분풀이를 했다.

한심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일까? 그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남녀 차이에서 야기되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실제적 방법들을 조언했다는 존 그레이가 지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과학적 분석과 실증적 사례로 남녀 간의 차이를 풀어낸 남녀 심리학 개론이라는 앨런 피즈, 바바라 피즈의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등 남녀 간의 차이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물론 나도 읽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알아야 이해도 할 수 있었다. 두 바보온달이 따로 없었다.

10년쯤 흐른 뒤 다른 문제로 발끈해서 이혼이라는 말을 했을 때 지식으로 무장한 그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역시나 나는 졌다.

내가 남편에게 쓰는 필살기는 이제 이혼이 아니다. 책 읽고 공부도 했으니 그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안다. 늘 배운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를 치르듯 일해서 처자식 먹여 살리는 그가 가여워 내 마음 깊이 측은지심 깔아둔다.

가끔 아이처럼 투덜대고 짜증부리는 그의 엄살을 달랜다. 힘들겠다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사랑한다고 안아도 준다. 끔찍이 싫어하는 따발총 잔소리는 최대한 자제하고 집이 휴식처가 될 수 있게 편안하게 해준다. 그의 약점이 되는 아킬레스건은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기꺼이 칭찬한다.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줄 때 더 열심히 뛰기 때문이다. 제 성질에 못 이겨 부리는 까탈과 심통은 내 기꺼이 받아 주리라. 속으로 ‘돈도 못 벌고 늙으면 두도 보자’고 생각할지라도 “당신이 최고”라는 칭찬의 립 서비스쯤이야 못할까. 그러면서도 새해 부탁은 “올해도 빡세게 많이 벌어다 주세요.”다. 남편은 이 말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평화로운 시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싸움의 불씨들은 늘 생활 속에서 스파크를 일으켜 큰 불로 번지곤 한다. 그런데 이 남자 내가 싸움의 그물을 던져도 좀체 걸려들지 않는다.

내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짜증을 부리면 “오늘 우리 마님이 왜 이리 심기가 불편하실까?”라며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마님 눈 밖에 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는 영락없는 돌쇠다. 밖에서 자신은 돌쇠라며 마님을 하늘처럼 받들고 산다고 말 하지만 집에서는 왕인 그가 이럴 때는 기꺼이 돌쇠가 된다.

외출로 살림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다 밤늦게 귀가해보니 지방 출장 갔던 남편이 일찍 귀가해서 가스레인지 광나게 닦아놓고 설거지도 말끔히 해두었다. 미안해하며 “전화하지 그래요.”라며 눈치를 보는 내게 “나가면 실컷 놀아야지 뭘 전화를 해”라고 해서 더 미안하게 했다. 물론 그 뒤 나갈 일이 있으면 언제 올지 모를 그를 위해 집안 정리 해두고 나간다. 낮은 소리일수록 설득력은 높아지는 법.

영국에 혼자 살고 있는 누나에게 아프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누나가 고생했던 이야기에 나이차이가 많아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줬다고 한참을 말했다. 내 입에서 도와줘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제야 돈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도 어렵다는 말은 차마 못하게 하는 그는 능력자다.

사춘기를 맞은 큰아이가 밖으로만 떠돌아 내 속을 태울 때 아이에게 실컷 잔소리를 퍼붓고는 남편에게 “저것도 시집가서 자기 닮은 자식 낳아봐야 내 심정을 알지”라고 푸념을 했다. 그는 “당신은 사랑하는 딸이 그렇게 고생 하는 꼴을 보고 싶어?”하고 해서 내 말문을 막아버렸다. 말이 씨가 될까 무서워 두 번 다시 그 말은 하지 못한다. 나를 한 방 먹인 그 순발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뿐이다.

언젠가 우리나라 제약회사에서 몇 년을 연구해 발기부전 치료제를 시판하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천억 시장 운운하는 구매력에 놀라 옆에 있는 그에게 “당신 같은 남자가 저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럼 난 죽는 거야”라고 했다. 장난기 발동한 나는 남편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나 좀 죽여줘요”했더니 그는 내 손을 잡고 더 은근한 눈길로 “난 사랑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라고 받아쳤다. 역시 그는 고수였다.

내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이 남자와의 싸움에서 나는 백전백패(百戰百敗)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데 무슨 싸움을 걸어보겠는가.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능력 / 정유순  (0) 2021.06.25
호위무사 / 황진숙  (0) 2021.06.25
아버지의 지게 / 정성수  (0) 2021.06.24
달챙이 숟가락 / 정성수  (0) 2021.06.24
회창(檜倉) / 김남천  (0) 2021.06.2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