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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호위무사 / 황진숙

부흐고비 2021. 6. 25. 08:31

낮달이 이울자 그림자가 물러갔다. 호위하던 무사들이 하나둘 처소에 든다. 내걸린 문패도 알전구도 없는 칸막이 거처에 발걸음을 부린다. 길 위를 점령한 된바람이 따라 들어와 무사들을 사열한다.

양털에 뒤덮인 어그 부츠가 회상에 젖어 있다. 폭설이 내린 지난겨울, 눈 속을 뒹굴며 만끽했던 환희의 순간을 되새김질 중이다. 동면에 들었던 샌들이 슬며시 눈을 뜬다. 서늘한 기운이 달려들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는 듯 몸을 웅크린다.

하루를 견뎌온 흔적들은 어둠을 타고 밀려온다. 접힌 시간으로 뒤축이 무너진 운동화는 뻣뻣한 힘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끈까지 풀어헤친 채 맥을 못 춘다. 쉰내 나도록 길을 누빈 구두는 연신 잠꼬대다. 돌부리에 걷어차인 비애로 꿈속을 헤매나 보다. 발가락의 자유를 부르짖던 슬리퍼는 정작 여기저기 끌려다니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거처에 들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한뎃잠을 잔다.

어차피 생은 불안정한 거라고 하이힐이 가늘고 긴 실루엣을 도도하게 드러낸다. 발가락이면 어떻고 발꿈치면 어떠냐며 내딛기만 하면 그만이란다. 숯 무더기에 묵은내를 내주던 등산화가 조무래기들의 몸짓을 굽어본다. 주어진 노역을 다 한 그는, 이곳에서 터줏대감이다. 작정하고 가풀막과 너덜겅을 오르내렸기에 누구보다 세상 물정에 밝다. 유행에 뒤처지면 구석으로 밀려나는 것은 한순간이다. 멀쩡한 육신으로 방치되느니 닳고 닳은 밑창으로 숫제 바닥을 쓸고 가더라도 신발로 남고 싶다. 등 떠밀리고 싶지 않아 마음 졸이지만 뭇사람들의 인심은 야박하기 그지없다.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되거나 운이 좋으면 헌 옷 수거함에 사장되어 재탄생될 날을 기다린다.

바닥에 붙어산다고 남루를 모를까. 지난날, 불분명한 행로로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허랑방탕 갈지자로 헤매기도 했다. 폭염 속 아스팔트 열기에 정신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이불 삼아 두멧길을 건너는 날에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뒹굴기 일쑤였다. 수없이 꺾여야만 나갈 수 있는 시시포스의 형벌 앞에 방패막이가 되어 앞코가 찌그러지는 일쯤은 축에도 끼지 못한다. 밑창에 돌이 끼이고 침이 박히는 상처쯤은 애써 모른 척 덮어두어야 했다.

상표를 떼지 않은 말끔한 새 신발은 알지 못한다. 끌고 온 무게에 겨워 긴장감을 놓아버리면 뒤집혀 널브러지거나 짓밟힌다는 것을, 제 살 닳는 것이 아까워 엎어져 시위해 본들 내일이면 툭툭 치는 발길질에 다시금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을.

내게도 반평생을 동행한 무사가 있다. 세상의 벼랑에 선 스무 살 언저리에 그를 만났다. 가족이라곤 삽화 한 장이 전부였고 해진 종잇장에 의지하기엔 현실은 암담했다. 사고의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가 요구하는 금액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뛰어든 상대방보다 배달을 위해 운전 중이던 내가 과실이 크다고 했다. 경찰서의 의자마저 죄인 심문하듯 딱딱하게 굴었다. 경황이 없어 벗겨진 신발을 찾지 못한 내 발을 떨떠름하게 쳐다만 봤다. 컴퓨터의 자판은 볼 것도 없다며 화면 가득 죄목을 채워 나갔다.

숨이 막혔다. 생의 바닥들이 모여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보호자를 부르라고 했지만, 술로 하루를 사는 아버지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붉어진 눈시울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작은 소읍이다 보니 사고 현장에서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연락했나 보다. 그는 맨발로 떨고 있는 나에게 자신의 운동화를 벗어서 신겨줬다. 종일 그의 체온으로 데워졌을, 쿰쿰한 냄새와 습기로 가득 찬, 그의 운동화가 왜 이리 안온하게 느껴지던지.

지켜주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따라나섰다. 자갈밭에 굴러도 끄떡없을 단단한 심지에 믿음이 갔다. 헐벗고 옴지락거리는 발을 폭신하게 감싸줄 것 같았다.

그러구러 그와 함께 지나온 세월, 고된 날이 많았다. 철철이 갈아 신을 신발이 많지 않았기에 그의 운동화는 늘 최전방에 섰다. 맏이로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끌고 가느라 비틀거리는 날이 많았다. 더해진 지아비의 무게를 얹고 생의 능선에서 사투를 벌였다. 보증의 덫에 걸려 나뒹굴기도 하고 신용불량이라는 복병을 만나 진창에서 철벅거리기도 했다. 물웅덩이를 피해 간다는 것이 헛디뎌서 아킬레스건이 파열된 날은 병원에 몸을 부리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땐 그의 운동화도 실의에 젖어 되똥해 보였다.

힘줄이 한번 끊어진 발은 온전히 힘을 싣지 못한다. 통증으로 절뚝거리는 발에 호흡을 맞추느라 무게중심이 쏠린 신발은 쉬이 낡고 헤졌다. 작은 돌멩이에도 뒤축이 흔들렸던 그는, 스스로를 내팽개치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배 까뒤집고 해볼 테면 해보라며 세상에 항거하고 싶었을 터이다.

허나 그는 무사다. 하루를 벗어놓는 시간에 한숨처럼 불거지는 속내마저 침묵으로 재운다. 식솔들을 지켜내야 할 소임으로 무너지고 주저앉은 시간을 추스른다. 날이 밝으면 남편은 누구보다 먼저 일어난다. 매복한 적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시야를 확보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신발 밑바닥에 찰거머리같이 붙어서 거세게 저항하는 껌딱지를 단칼에 제거한다. 밑창 틈새로 숨어든 돌멩이를 끄집어내고 허를 찌르겠다며 냅다 박힌 압정도 뽑아낸다. 여기저기 흙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니는 진흙 잔당을 제압한 후, 제집인 양 묻어 든 얼룩을 지워낸다. 무기를 벼리듯 운동화 끈을 조이고 결의를 다진다. 가장이라는 이름을 방패 삼아 황막한 세상을 내달린다.

오늘도 종일 따라다니며 호위했을 무사들을 본다. 원 없이 뛰고 싶은 러닝화, 더 높이 치솟으려는 킬 힐, 광을 앞세우는 구두 등 그네들의 호들갑을 뒤로하고 고단한 삶을 꿰고 있는 그의 운동화를 들여다본다. 살아온 동선이 퇴적되어 살아낸 흔적으로 초라해질지언정 결코 멈추지 않을 발걸음이 듬직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써 내려갈 생애에 영원히 동행할 무사가 있어 외롭지 않다. 가만히 내 발을 그의 신발 속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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