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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형기 시인

부흐고비 2021. 6. 30. 09:00

 

               낙화(落花)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 이형기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고사(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 랑겔한스섬(랑게르한스섬, Langerhans islets) : 췌장에 불규칙하게 생긴 섬(島) 모양의 내분비선 조직으로 췌도(膵島)라고도 한다. 1869년 독일의 병리학자 파울 랑게르한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풍선 심장 / 이형기
심장을 만듭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색칠을 합니다.// 원래의 심장은/ 지난 여름 장마때/ 피가 모조리 씻겨 빠졌습니다.// 그리고 장마 뒤의 불볕 속에서/ 내 심장/ 빈 껍데기만 남은 그것은/ 허물처럼 까실까실 말라버렸습니다.// 이제는 쓸모가 없게 된 심장/ 구겨 뭉쳐 쓰레기통에 내버린 심장/ 한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심장을 달랍니다.// 드리고 말고요/ 어렵잖은 일입니다./ 당신의 맘에 꼭 드는/ 예쁘장한 심장// 어두운 가슴 속에/ 감추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쩨쩨하게 혼자/ 독점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 둥둥 하늘에 띄우는 심장/ 떠다니다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심장/ 오늘 나는 그 풍선 심장에/ 곱게 곱게 색칠을 합니다//

감기 / 이형기
미열 6도 7분의 홍조/ 더운 이마를 식힐까보다.// 아스피린과 산탄 엽총/ 그리고는 가벼운 흥분을 곁들인다.// 가늠자 위에서 떨고 있는/ 새 한 마리.// 방아쇠를 당기면/ 그러나 새는 이미 날아간 지 오래다.// 빈 총소리만 요란하다.//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의/ 감기를 앓는 기침 소리// 미열 6도 7분의 이마에/ 식은땀 같은 이건 뭔가.//

독감 / 이형기
겨우내 앓다가/ 겨우 한동안 고개 숙인 독감이/ 다시 도진 엊그제 그날부터/ 밤마다 마구간 마루판을 차대는/ 고독한 소란자/ 달구지꾼 아버지가 물려준/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보다도 늙은 나귀여/ 연거푸 쏟아지는 나의 기침이/ 네게는 온몸에 신열로 퍼져서/ 우리가 함께 잠을 설치는 요즘 며칠 밤/ 아니 옛날의 그날 밤/ 레이다처럼 정확하게 봄을 예감하고/ 피를 토한 아버지의 기침은/ 이튿날 어김없이/ 앞산을 진달래로 붉게 물들였기/ 내일이면 다시 진달래 피려는가/ 눈곱 낀 눈에도 열이 올라/ 숨가쁘게 코를 불고 퉁탕거리는/ 너의 옛날 그대로의 발작/ 융통성없이 말라빠진/ 아 이 처치곤란한 봄의 유산이여//

이명증 / 이형기
나의 귀는 소라껍질/ 꼬불꼬불한 미로의 터널이 그 안에 뚫려 있다./ 간교한 소시민 근성이 어느 날/ 그 안에 작은 악마 한 마리를 가두고/ 고막으로 출구를 봉쇄해버렸다./ 악마도 갇히면 별수없는 듯/ 힘없이 울어대는 날이 있다./ 앵앵앵 위잉위잉 이명증이여./ 다시 들어보니/ 아뿔싸 그것은 악마가 아니라/ 가을밤 모기처럼 쇠약해진 내 꿈의 흐느낌./ 그래도 제딴엔 안간힘을 다해/ 가증스런 소시민 근성의 추종자/ 나의 안면을 방해하고 있다./ 아 너 아직 명맥은 살아 있구나 꿈이여./ 병은 아니라고/ 다만 병적 증상일 뿐이라고 안심하라고/ 웃기는 동정적 진단이 떨어진 이명증이여.//

암세포 / 이형기
우리의 번영은 하늘을 찌른다./ 모든 성좌/ 모든 천체를 사정없이 덮치는/ 우주공간의 마라푼다―/ 우리는 하늘마저 약탈해버린다.// 일상의 때가 낀/ 티눈만도 못한 육안은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일편의 유리 조각과/ 그 위에 달라붙은 한 점 얼룩을 볼 뿐이다.// 가장 냉정한 제삼자/ 현미경이여 네가 말하라/ 밤내 폭죽이 터지는 우리의 축제/ 광란의 증식/ 그 홀연한 성운의 탄생을……// 우리에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폭탄처럼 자유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방지축/ 정체불명이다./ 그렇다, 우리의 그 정체불명의 침략성// 그러나 보라/ 평화는 오직 우리의 것이다./ 막강한 군기(軍旗)가/ 명정(銘旌)보다도 화려하게 나부끼는 우리의 점령지/ 그곳은 너의 안식을 보장한다.//

가슴 1 / 이형기
나의 가슴은 동굴처럼 비어 있다./ 흉벽이란 이름뿐/ 메마른 판자 한 장으로/ 겨우 뚜껑을 해 덮었을 뿐이다.// 그래도 낮시간엔/ 넥타이를 맨 신사복 차림의 그 속을/ 감히 헤쳐볼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것저것 풀어놓은 한밤중엔/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버린다./ 불가불 나 혼자/ 겁먹은 눈으로 들여다보는 심야의 공포―// 분명 거기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꿈도 추억도/ 심지어는 심장마저도 모조리 삼켜버린/ 악어처럼 크게 입 벌린 어둠/ 어둠 한 마리밖에는// 온몸에 오싹 소름 끼치는 찬바람이/ 지구 저쪽에서 불어오고 있다.//

등 / 이형기
나는 알고 있다/ 네가 거기/ 바로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팔을 뻗어도/ 내 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 어디/ 겨우 두세 번 긁어대면 그만인/ 가려움의 벌레 한 마리/ 꼬물대는 그것조차/ 어쩌지 못하는 아득한 거리여// 그래도 사람들은/ 너와 내가 한몸이라 하는구나/ 그래그래 한몸/ 앞뒤가 어울려 짝이 된 한몸// 뒤돌아보면/ 이미 나의 등뒤에 숨어버린 나/ 대면할 길 없는 타자(他者)가/ 한몸이 되어 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처럼//

엑스레이 사진 / 이형기
장안유남아(長安有男兒) 이십심이후(二十心已朽) ―이하(李賀)// 폐허의 풍경을 잡은/ 이 사진은 앵글이 기막히다./ 뼈대만 남은 고층건물/ 앙상한 늑골 새로/ 죽어서 납덩이가 된 도시를 보여준다./ 그 배경/ 담천(曇天)을 가로질러 모여든/ 까마귀 한 떼/ 무엇인가를 파먹고 있다./ 사람의 가슴이/ 가슴속에 흐르는 피가 붉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터지는 검은 먹물/ 그리고 폐허는 질척거린다./ 내일이면 함몰/ 다시 내일이면 늪이 될 폐허/ 수수께끼의 광선 엑스레이는/ 이처럼 오직 사실만을 증명한다.//

식인종의 이빨 / 이형기
굴을 한 접시 담은 그대 허벅지/ 한 오백 년 달빛이 밴/ 식인종의 이빨이 그대를 베문다./ 베물어도 미끈덕 빠져 버리는/ 한 마리 파충류/ 빈 접시 위에/ 그대는 그림자가 되어 눕는다./ 아니 무수한 파충류가 기는/ 진창이 되어 그대로 눕는다./ 진창에 박힌 식인종의 이빨/ 한 오백 년 벼르고 벼른/ 나의 정사는 몽정으로 끝난다.//

면도 / 이형기
면도를 한다./ 수염이 아니라 뭉툭한 입술/ 입술 뒤에 숨은/ 교활한 혓바닥을 슬쩍 눌러 버린다.// 슬쩍/ 그러나 깊이 전류(電流)처럼 뻗히는/ 잔인(殘忍)한 청결감(淸潔感)// 미처 아픔을 느끼기 전/ 미처 피가 배 나오기 전/ 말이 미처 말 되기 이전의/ 말의 그 속살의 단면( 斷面)// 흐려질라 햇빛을 막아라/ 빛없는 곳이라야 제빛이 살아나는/ 위험한 유혹이다 그것은// 유혹에 끌려 빗나가는 손/ 아니 나의 고의적(故意的) 실수/ 면도를 한다. 수염이 아니라/ 혓바닥이 아니라 말을 민다.//

무명의 사자(死者)에게 / 이형기
너에게는 얼굴이 없다./ 그러나 한밤중/ 불면의 창 너머로/ 너는 문득 달빛처럼 틈입한다.// 사람들은 네가 잠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사상도/ 너를 잠재우는 자장가가 될 수 없다./ 잠든 자를 도리어 흔들어 깨우는/ 너는 예고 없는 불청객이다.// 그때 얼굴 없는 네 얼굴을 바라보면/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눈/ 눈밖에 없는 것이 되어 무표정하게 웃는다./ 그 웃음 속에 깃든 달빛/ 달빛처럼 싸늘한 공포.// 걱정 말아라./ 내게는 공포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스페이드의 불길한 왕자처럼/ 파멸로 내닫는/ 아직은 건장한 각력(脚力)이 있다.//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는 죽을 리 없는 너/ 온갖 도시와 사원(寺院)과/ 사원 앞에 늘어선/ 눈곱 낀 한푼 줍쇼가 모두 너의 것이다.// 그러나 네 소유의 알짜는/ 한 줌의 재/ 한 줌의 바람/ 도둑이 마취제를 뿌리듯 오늘밤/ 내 침실에 그것을 뿌려라.//

그대 / 이형기
1./ 머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손목을 쥔 채/ 그냥 더워 오는 우리들의 체온......// 내 손바닥에/ 점 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 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2./ 이만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가 그대를 부른다/ 그대가 또한 나를 부른다.// 멀어질 수도 없는/ 가까와질 수도 없는/ 이 엄연한 사랑의 거리 앞에서/ 나의 울음은 참회와 같다.// 3./ 제야의 촛불처럼/ 나 혼자/ 황홀히 켜졌다간/ 꺼져 버리고 싶다.//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호수 /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같은 것을/ 단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강가에서 / 이형기
물을 따라/ 자꾸 흐를라 치면// 네가 사는 바다 밑에/ 이르리라고// 풀잎 따서/ 작은 그리움 하나// 편지하듯 이렇게/ 띄워 보낸다.//

비 / 이형기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져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모……./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비 오는 날 /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봄비 / 이형기
밤,/ 봄비가 창(窓)에 스민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이 젖는다.// 봄,/ 밤에 내리는 비/ 반(半) {옥터브} 낮은 목소리.// 물기가 배인 육신(肉身)의 무게를/ 가눌 길 없고나,/ 봄밤에 비 온다.// 먼 사람아 당신의 손길은/ 봄비와 같이 성가시다./ 잠 재워 다오.//

산비 / 이형기
산에 오는 비는/ 소리만 난다.// 먼 데서 또닥또닥/ 가슴을 두드린다.// 몰래 젖고/ 몰래 잠이 든다.// 단조로운 꿈을/ 되풀이한다.// 문득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운무만리(雲霧萬里)를/ 단숨에 난다.//

산 / 이형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귀로(歸路) / 이형기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길 / 이형기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들길 / 이형기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폭포 /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나무 / 이형기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 이형기
나뭇잎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세기 전의 해적선이 바다를 누빈다./ 나뭇잎만큼 많은 돛을 달고/ 그 어떤 격랑도 지울 수 없는/ 벌레 먹은 항적(抗跡)// 나뭇잎을 다시 들여다보면/ 나무가 뿌리채/ 그 밑바닥에 침몰해 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단말마의/ 손짓/ 잎사귀들이//

해바라기 / 이형기
황혼이로다./ 드디어 기우는 사직이로다./ 변방에는 도둑의 무리/ 잔을 들고 고기를 뜯을 때/ 바닥난 내탕금(內帑金)/ 바닥을 보는 황음(荒淫)이로다./ 해여/ 이제 막 숨을 거둔 해여/ 너를 향해/ 신들은 일제히 노래를 부르나니/ 오 바다/ 빛의 무덤/ 춤추는 어둠이로다./ 보라/ 어둠 속에 일륜(一輪) 해바라기/ 왕(王)도 비빈(妃嬪)도 도둑도/ 모조리 삼켜버린 탐욕의 꽃이로다./ 땅끝에 서는도다.//

코스모스 / 이형기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한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이름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어/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앉은뱅이꽃 / 이형기
앉은뱅이꽃이 피었다/ 작년 피었던 그 자리에/ 또 피었다// 진한 보랏빛/ 그러나 주위의 푸르름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풀꽃// 이름은 왜 하필 앉은뱅이냐/ 그렇게 물어도 아무 말 않고/ 작게 웅크린 앉은뱅이꽃// 사나흘 지나면 져버릴 것이다/ 그래그래 지고말고/ 덧없는 소멸/ 그것이 꿈이다/ 꿈이란 꿈 다 꾸어버리고/ 이제는 없는 그 꿈/ 작년 그대로 또 피었다//

석류 / 이형기
이 가을/ 석류가 익는다/ 익어서 반쯤 벌어져 있다// 실은 지난봄/ 어느 시인의 대뇌 좌우반구/ 그 뇌막에 퍼지기 시작한 작은 물집들/ 물집 모양의 종양들이 하나 가득 알알이 익어서/ 석류처럼 절로 벌어진 이 가을// 사람들아/ 와서 그 속을 들여다보아라/ 정원의 석류나무 그늘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흔들흔들 바람을 타고 가는 시인의/ 반쯤 열린 의식의 병소(病巢)/ 아니 그 꿈의 밀실을// 가을이 없는 킴벌리 광신의/ 깊이 감추어진 가을의 속살/ 눈부신 노다지가 거기 있다/ 그리고 또 늙은 창녀의/ 한평생이 담긴 보석상자가……// 밤이면 밤마다/ 머리를 쥐어뜯곤 하던/ 지난 봄부터의 가려움의 발작이/ 이제는 갈 데까지 가서 도리어/ 석류처럼 알이 찬 이 결정(結晶)// 그러기에 시인은/ 봄이 아니라 가을에 미친다/ 맑은 정신으로//

만개(滿開) / 이형기
한 시도 쉬지 않던 너의 발걸음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구나/ 벚꽃의 만개여// 더 이상은 갈 데가 없는 절대절명/ 그 팽팽한 긴장감의 한계에서/ 더러는 한두 잎/ 너의 종말을 예고하는 낙화// 아아 벼랑 끝에 선 자의 절망이/ 그 깊은 나락을 굽어보며/ 사치를 다한/ 마지막 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화자 어디선가 풍악도 울리는/ 휘황하게 너무나도 휘황하게 불 밝힌/ 가슴 저리는 슬픔/ 벚꽃의 만개여//

죽지 않는 도시 / 이형기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도/ 오늘은 또 거뜬히 살아나서/ 조간을 펼쳐든 스트랄드브라그* 씨의 아침 식탁/ 그것은 위대한 생명공학의 승리/ 인공합성의 디엔에이 주사 한 대가/ 시민들의 영생불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어진 채/ 오토바이의 엑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젊은 폭주족/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한 배를 그냥 덮어버린 노인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싸운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망치고 죽을 지경인 장의사 주인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파리를 날린다/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계산은/ 전설이 되어버린 도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누구도 제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 젊어도 늙고/ 늙어도 늙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폭삭 늙어서/ 온통 노욕과 고집불통만 칡넝쿨처럼 칭칭/ 무성하게 뻗어난 도시/ 실연한 백발의 노처녀가 드디어 목을 맨다/ 그러나 결코 죽을 수는 없는/ 차가운 디엔에이의 위력/ 스스로 개발한 첨단의 생명공학이/ 죽음에의 길마저 차단해버린 문명의 막바지에서/ 시민들의 소망은 하나밖에 없다/ 아 죽고 싶다//
* 스트랄드브라그 :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영생불사 종족의 이름

초상정사(草上精思) / 이형기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아무래도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연못에 구름이 스쳐가듯이/ 언젠가 내 작은 가슴을 고이 스쳐간/ 서러운 그림자가 있었나 보다.// 마치 스스로의 더운 입김에/ 모란이 뚝뚝 져버린 듯이/ 한없이 나를 울리나 보다.// 누구였기에/ 누구였기에/ 아아 진정 누구였기에......// 풀밭에 호올로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단 한 번 만난 사람을/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저 바람 속에서 / 이형기
귀를 기울이면 바람소리 들린다/ 이제는 철 지난 늦가을 바람/ 부질없이 울어대는그 헛된 소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웅장한 기념탑/ 탑을 에워싸고 수많은 군중들이 외치는/ 승리의 환호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그 소리를 불러내는 것/ 온갖 주검들의 생전의 모습이/ 환상이기에 더욱 생생하다// 그러나 밖을 내다보면 여전히 무인벌판/ 무성한 억새 시들어 나부끼는/ 저 바람 속에는// 깃발도 있다/ 훈장도 있다/ 잘려나간 팔다리와 모가지도 있다// 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 돌아가는 날개 없는 팔랑개비// 비어 있는 소용돌이가 있다//

구식여수(舊式旅愁) / 이형기
섬으로 갈까보다./ 지도를 펴들고 더듬는 뱃길……/ 가서 이렇게 살까보다.// 낮잠을 깬/ 섬의 선술집의/ 작부의 기둥서방의/ 선하품.// 아직 해가 지기는 이른/ 오후 네시쯤/ 또는 네시 반쯤/ 얼굴이 꺼칠한 가을 해바라기.// 육자배기나/ 목포의 눈물이나/ 떨어지지 않는 화투패나/ 또 무엇이나// 신문벽지의 빈대 핏자국이나/ 쌓인 담배 꽁초나/ 콜록 기침이나/ 또 무엇이나// 허세여 허세여/ 적막한 허세여// 이를테면 나노도(羅老島)의/ 외나로도(外羅老島)쯤으로 가는 구식여수(舊式旅愁)……/ 모조리 혼자 차지한 양/ 허세나 부리며 살까보다.//

가을 변주곡 / 이형기
가는 자 이와 같은 강물이 흐른다./ 철환천하(轍環天下)의 여수에 물든/ 전국(戰國) 각지(各地)의 저녁노을/ 인간의 소망은 슬프다고 하지만/ 여자들은 싱싱하기 배추포기 같다./ 사대부의 수레가 지나가며 훔쳐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여자들의 종아리/ 언제는 전국시대 아닌 때가 있었던가./ 그때나 이때나/ 여자들은 강에서 배추포기를 씻고/ 그때나 이때나/ 소국(小國) 노(魯)나라의 우리 집 뜨락엔/ 가을이 마지막 햇볕을 쏟고/ 그때나 이때나 슬픈 소망은/ 한결같이 하얗게 바래지고 있는 것을.//

그해 겨울의 눈 / 이형기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겨울의 비 / 이형기
모조리 떨고 나니 온다/ 겨울의 비.// 이젠 낙엽도 질 것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 빈 들판엔/ 남루를 걸친 계절의 신이/ 혼자 웅크리고 있다.// 머지않아 잠들 것이다./ 그리고 묻힐 것이다./ 그렇게 한 소절을 매듭짓는 의식……/ 눈이 내릴 걸 생각한다.// 눈물을 뿌릴 만도 하지만/ 눈물이 아닌 겨울의 비.// 어제는 오후 내내 바람이 불고/ 오늘은 이 차가운 인식이/ 목덜미를 적신다.//

기적 / 이형기
적도하의 밀림 속/ 코끼리의 시체 하나 썩고 있다.// 독한 냄새로 사방에 기별하는/ 이제야 혼자된 이 기쁨/ 거대한 짐승은 제 몸을 헐어/ 필생의 대향연(大饗宴)을 벌인다.// 오라, 바람아/ 햇빛아 미물들아/ 와서 먹고 마시고 취하라/ 여기 원래의 그대들 몫이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광란의 도가니/ 하늘도 벌겋게 달아오른 그때/ 홀연 코끼리는 온데간데없고/ 상아 두 뿌리/ 높이 모천(暮天)을 뚫고 솟는 기적!// 썩게 하라 나를/ 그리고 내일 아침/ 두 개의 송곳니만 남게 하라.//

낮달 / 이형기
새를 그린다/ 힘차게 퍼덕이는 커다란 날개/ 날개를 타고 가는 크레온의 곡선을// 그려놓고 다시 보니/ 새가 없다/ 다만 찢긴 날개 몇 짝/ 무참하게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그리려는 순간에 재빨리/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버린 새/ 모양이 없는 새/ 그리고 뒤에 남은 휴지의 구겨짐// 창밖엔 헛것처럼 달이 떠 있다/ 남은 도화지로/ 누군가 하늘에 오려붙인 새/ 새가 아닌 낮달//

독시법(讀詩法) / 이형기
시를 읽으면서 하품을 한다/ 내가 쓴 시/ 물론 네가 써도 아무 상관 없는 시/ 쓰고 나서 속으로 쾌재를 부른 시/ 누구나 첫눈에 이건 진짜/ 참 참기름/ 백 프로 보증의 딱지가 붙은 시/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이 개를 문 기삿거리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또는 달밤의 체조적 의의를 규명하는/ 스피노자의 안경알/ 둥근 세모꼴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만 시/ 케이에스 마크의 진짜 시/ 협잡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잡인금접(雜人禁接)의 쇠창살 안에/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갇혀 있는 시/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답게 황홀한 재주를 부린다/ 오 터지는 박수 갈채여/ 잘못은 매일 동물원밖에는 갈 데가 없는/ 너와 내가 그 속에 끼어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마비된 수치감으로/ 부푼 감동의 풍선에 슬쩍 바늘을 찔러/ 바람을 빼는 하품/ 간악한 배신의 하품을 하면서 시를 읽는다/ 내가 쓴 시/ 물론 네가 써도 아무 상관 없는 시//

루시의 죽음 / 이형기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은/ 빈사(瀕死)의 루시/ 어두컴컴한 마루 밑에 숨어서/ 루시는 주인인 나를 보고도 이를 갈았다./ 기억하라/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눈에는 눈 이빨에는 이빨./ 루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다만 증오/ 그 일점을 향해서만 타는/ 파란 백금 불꽃/ 일순 루시는 내 혈관을 뚫고 내닫는다./ 번뜩이는 칼날의/ 그 번뜩임처럼 황홀한 전율/ 루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독한 쥐약이다./ 기억하라 눈에눈 눈 이빨에는 이빨/ 아니다./ 그 투명한 극치를.//

먹통전화 / 이형기
전화가 고장났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덩이 작은 어둠이 되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먹통전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것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소문에 너무 민감했던 귀/ 하소할 게 너무 많았던 입을/ 꼼짝달싹 못하게 틀어막아버린다// 그래도 아직/ 할 말/ 들어야 할 소식 있으면/ 네가 네한테 말하고 들어라// 고장난 전화는 그러나/ 그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먹통/ 먹통 같은 묵비권 하나로/ 제 어둠을 지키고 있다// 혹시나 하고 만져보면/ 찬피 검은 두꺼비처럼 손바닥에 감응하는/ 그것은 분명 살아 있는 어둠/ 섬뜩한 어둠이다//

물거품 노트 / 이형기
나의 노트는 그 책장이/ 파도의 물거품으로 되어 있다/ 밤내 시를 써서 한 권을 채우지만/ 이튿날 보면/ 문자는 모두 떠내려가버리고/ 다만 펼쳐진 망망대해/ 그 속에서 나는 혼자 표류하고 있다//

바다 1 / 이형기
어젯밤 나는 바다를 죽였다.// 작살의 섬광 아래/ 바다는 온몸을 뒤틀면서/ 단말마의 소리를 질렀다./ 알고 보니 바다는/ 거대한 어둠의 흡반이었다./ 나를 덮쳤다./ 모든 길은 차단되고/ 동시에 모든 길은 개방되었다./ 작살은 불꽃처럼 춤을 추었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그 살기찬 오르가즘!// 어젯밤 나는 바다를 죽였다./ 교미를 끝낸 혹종(或種)의 곤충처럼/ 나도 함께 죽었다.//

바다 2 / 이형기
그 큰 바다를 다 가질 순 없다/ 알맹이 하나만 내게 다오/ 그러자 어디선가 뚝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이 세상 함대란 함대는 모두 나와서/ 싸워봐라 그리고 침몰해봐라/ 내가 이렇게 다만 한 방울로/ 그 바다 자초지종을 요약하리니//

바다무제 / 이형기
삽으로/ 밤내 바다를 퍼낸다.// 새벽녘에는/ 한 방울 땀으로 졸아들어/ 물결 새로 뚝 떨어져버리는/ 간밤의 쿨리[고력(苦力)]// 그 무명의 죽음 속에 응축된 바다를/ 바다가 삼킨다./ 쿨리의 혼령 플랑크톤/ 그 위에 아침 햇살이 퍼진다.// 오 참극이여/ 클라이맥스가 없는 되풀이/ 되풀이// 바다를 퍼내/ 바다에 보탠다.//

밤바다 / 이형기
날개 상한 갈매기들이/ 몸부림치고 있다. 솟구쳐 오르려고/ 그러나 이내 주저앉아버리는/ 밤바다/ 파도의 좌절.// 깨어보면 베개엔/ 끈끈하게 소금기가 배어 있다./ 멀쩡한 사지가/ 상한 날개보다도 무력한 나날의/ 뒤척이는 선잠.// 어디선가 개 한 마리 짖고 있다./ 방파제 너머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검은 그림자/ 침묵은 왜 방파제처럼 완강한가./ 정체불명인가.// 갈매기와 파도는 어느새/ 질식해버렸다. 어둠속에서/ 그러한 나의 밤바다 저쪽에/ 좌초한 폐선 한 척/ 괴물처럼 떠 있다.//

외톨 바다 / 이형기
바다를 말린다./ 햇볕으로 슬슬/ 바람으로 슬슬/ 그리하여 드러난 개펄을 또한/ 세월아 네월아/ 슬슬 말린다.// 이제는 하느님도 회수할 수 없는/ 하느님이 뿌린 공포의 표백제/ 무색 투명한 시간의 분말이/ 바다를 그 연골까지 속속들이/ 흡수해버린다.// 어느 날 사람들은/ 그 빈터를 사막이라 불렀다./ 모래 한 알마다에/ 말라버린 바다의 최종단위/ 운모질(雲母質) 반짝임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외톨 바다./ 외톨이 무수한 외톨 불러모아/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바다/ 갇힌 바다.// 그래도 바다에는 잔물결 인다./ 아니 잔물결 덮치는 파도/ 사구(砂丘)의 대이동/ 아니 파도를 뒤집는 소용돌이/ 타크라마칸의 모래 소용돌이/ 외톨 바다의 폭발!//

해일 경보 / 이형기
바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서버린 늦가을/ 텅 빈 일모(日暮)/ 일모(日暮)의 그때까지 숨을 죽인 채// 그러나 음모의 효모균은 퍼지고/ 퍼져서는 서서히 부풀어올라/ 육중하게 몸을 뒤트는 바다/ 자정이 넘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언젠가는 덮치리라./ 일거에 요절을 내고야 말리라./ 그리하여 지구를/ 다만 하나의 암벽으로 남겨/ 고립시키리라.// 그것은 선캄브리아대의/ 밤마다의 폭풍우 속에 싹튼 꿈/ 부유하는 코아세르바트의 무리가/ 저마다 하나씩의 눈이 되어 교환한/ 은밀한 약속의 방전(放電)// 40억 년 전의 그 전류에/ 귀를 앓는 사내가 밤을 새운다./ 잠자리 날개처럼 떨고 있는 고막의/ 단속적인 경련/ 해일 경보의 전광판이 명멸하고 있다.//

백치풍경(白痴風景) / 이형기
하느님은 오늘밤 톱질을 한다./ 사르륵 사르륵/ 실톱으로 켜는 나의 갈비뼈/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하얀 톱밥// 그 미세한 뼈가루가 떨어진다./ 하느님은 이따금 일손을 멈추고/ 안경을 고쳐 쓴다./ 훅 하고 톱밥을 불어낸다./ 갑자기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남미산(南美産) 흡혈(吸血)박쥐의 목마름/ 하느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바튼 기침을 한다./ 이제는 늙어 피가 마른 하느님/ 잠도 없는 하느님/ 그래서 오늘밤은/ 나의 갈비뼈나 썰고 있는 하느님/ 아 알겠다,/ 들판이 들판 위에 넘어져 죽어 있는/ 새벽마다의 서리/ 그 허연 백치풍경(白痴風景)을 이제는 알겠다.//

풍경에서 / 이형기
혼자 거닐어 외롭지 않구나/ 이 풍경.// 보람이 무너진 빈자리/ 길을 아무데나 트여 있는 거리에// 노을이 지는가,/ 일모(日暮)를 알리는/ 적막한 동굴 같은 종이 우는가.// 이제는 옛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인생은, 아/ 떠나서 뒤에 남는 뉘우침으로/ 인생은 산다.// 운다는 것이/ 도리어 한 오리 바람으로 통하는/ 이 풍경.//

하운(夏雲) / 이형기
해안선을 따라/ 그 둘레만큼 커다란 어망을 던진다./ 등허리가 밖으로 비어져 나와/ 육중하게 몸을 뒤트는 대어/ 그 비늘에 찬란한 금빛이 흩어질 때/ 바다는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놓치지 말아라/ 힘껏 당겨라/ 아니 뛰어들어라 뛰어들어라/ 빙빙 도는 바다/ 곧추서는 바다/ 숨찬 뒤범벅/ 가슴에선가 아랫배에선가/ 불끈 솟는/ 아아 욕망의 하운(夏雲)/ 구름따라 바다는 돌연 승천한다.//

뱀 / 이형기
너는 소리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번들번들 윤이 나는/ 긴 몸뚱이의 S자 만곡 교태를 부리면서// 그러나 그것은 유혹이 아니다/ 차라리 현기증/ 삼복 더위 한복판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차가운 섬광// 그때 너는 잠시 멈춰서서/ 가늘게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댄다/ 불꽃처럼/ 또는 불꽃 속에 숨어든 얼음의 혼령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너의 그 두 가지 말은 부르고 있구나/ 너의 작은 두개골을 짓찧고 말 돌덩이/ 아니 겁에 질린 인간들의 잔인한 발작을// 하지만 너는 언제나 살아 있다/ 죄지은 자의 가슴속에만 가득 차 있는 슬픔/ 슬픔이 키워낸 환상의 꽃그늘 아래//

보물섬의 지도 / 이형기
손바닥을 펴놓고 내일을 점친다/ 몇 가닥의 길을 고집스레 따로 뻗고/ 또 몇 가닥은/ 서로 마주쳐 종잡을 수 없는/ 보물섬의 지도가 그려진 손바닥/ 무성한 잡초 속에 흔적만 남은/ 오솔길처럼/ 잔손금은 잔손금 나름으로 어지럽다/ 그러나 아무리 얽히고 설켜도/ 모든 길은 한곳으로 통한다/ 로마가 아니라 로마의 폐허/ 손바닥을 벗어나는 낭떠러지 저쪽으로/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확실한 참사/ 추락의 일진풍(一陣風)/ 그때의 바람 한줌 움켜쥔 주먹으로/ 누군가 힘껏 책상을 내리친다.// 암 찾아야지 보물섬의 보물/ 길이 모두 그곳으로 통하는 낭떠러지/ 그 너머의 보물섬/ 해적이 그린 해골 표지의/ 보물 동굴이나 찾아야지 제기랄!//

분수 / 이형기
너는 언제나 한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버린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의 모순의 물보라/ 그 속엔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개 만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만 허무를 꽃피우는 분수./ 냉담한 정열!//

빈 들에 홀로 / 이형기
눈비가 오려나/ 호지(胡地) 일모(日暮)// 먼 산자락 넘어/ 구름은 가고// 정은 만 리/ 청노새 울음// 호지 일모에/ 눈비 오려나// 저녁 바람 분다/ 빈 들에 홀로//

소묘 / 이형기
산에 올 때마다 가을은 한 겹씩 옷을 벗는다./ 잘 익은 그러나 욕정엔 물들지 않은 그녀의 육체/ 팽팽한 탄력이 곡선에 눌려 더욱 뚜렷하다./ 말끔히 씻긴 안정(眼睛)/ 눈으로도 맡는 향긋한 내음/ 어떠한 장식도 완미(完美) 앞에서는 남루에 불과하다./ 차라리 낙엽처럼 떨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해마다 그녀의 나체를 보는 덴 실패한다./ 누구나 그녀의 슈미즈까지밖엔 볼 수 없을 것이다./ 전라가 되려는 그 찰나에 겨울이 덮쳐버리기 때문이다./ 악한은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때를 노리고 겨울은 지금도/ 저 풀숲 어디쯤에 숨어 있을는지 모른다.//

슬로비디오 / 이형기
날으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제논// 자 골인의 순간이다./ 승자여 너의 영광을 보라,/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맥없이/ 허우적거리는// 옆구리찔러 절받기로/ 슬쩍 옆구리를 찔렀더니/ 그도 장난삼아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또 무릎을 꾼다./ 일러 가로되 케이오의 순간이다.// 허구(虛構)로써 허구(虛構)의 껍질을 벗기는/ 슬로비디오/ 나는 그대들의 진실을 비웃고/ 거짓으로 죽으리라/ 하마처럼 크게 하품을 하면서// 자 절명의 순간이다./ 칼을 맞고/ 뒤로 몸을 뻗대는 나의/ 무용교본의 사진판 도해(圖解) 같은/ 슬로비디오//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1 / 이형기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밤에 또한 잠을 못 잔다./ 국산 수면제 스리나// 그 매끈매끈한 하얀 정제 속에는/ 꿈이 스며들 틈이 없고나.//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지만/ 때로는 너무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을수록 하얀 정제를……// 아아 내게서 꿈을 내쫓고/ 복용,/ 한 시간 전후에 동물적인 수면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은/ 잠에 취해서 꿈을 잊어버린다.//

위약(違約) / 이형기
1// 약속은 그것을 지켰을 때보다/ 어겼을 때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 그만 깜박 잊어버린 약속,/ 사후(事後)에 느닷없이 생각이 나서/ 혀를 차는 약속,/ 조금은 섭섭하고 조금은 아쉽고/ 또 조금은 죄스럽고 또 조금은……/ 혀를 차지만 역시 조금은/ 조금은 그 여운이 남는다.// 2// 벌을 서서/ 청소 당번이 된 날의 하학 종소리,/ 여섯시 정각의 데이트를 놓친/ 여섯 번째의 괘종소리,/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소리,/ 위약은 언제나 사후에 깨닫는/ 그 운명의 여운이다.// 3// 잠시 한눈을 파는 새/ 그 사람은 떠나가버렸다./ 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구나./ 그늘이 밝음을 일깨워주듯/ 위약이 나를 일깨워준 약속의 무게,/ 또 그만한 삶의 무게,/ 조금은 단념하고 조금은 뉘우치고……/ 하지만 역시 조금은 그 여운이 남는다.//

일기예보 / 이형기
한겨울/ 심야의 라디오 일기예보는/ 듣기 전에 이미 가슴이 설렌다./ 바람은 북동풍 초속 이십오 미터/ 심술로 퉁퉁 부은/ 천이십 밀리바의 저기압을 등에 업고/ 오호츠크 해로 지금 눈보라를 몰고 간다./ 모든 선박의 운항 금지를 명하는/ 폭풍경보/ 세상을 온통 꼼짝달싹 못하게/ 계엄령처럼 숨죽여 놓고/ 거동이 수상한 캄차카 반도는/ 공중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 혼자 미쳐 날뛰는 오호츠크 해/ 그리고 눈보라를/ 내 가슴에 가득 채우는 한겨울/ 심야의 일기예보./ 그것은 명왕성 저쪽으로부터/ 세기말의 감수성한테 보내는/ 은밀한 스탠바이 신호/ 지구 폭파의/ 디데이통보처럼 전율적이다./ 거덜나리니/ 내 기꺼이 거덜나리니/ 바람아 광풍아 석달 열흘만 불어라!//

정적의 개 / 이형기
정적은 이상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은 짖기만 할 뿐 보이지 않는 개/ 세상 온갖 소리가 모두 잠들고 나면/ 정적은 놈을 슬그머니 풀어놓는다./ 보이지 않는지라/ 딱히 어디라고 짚을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놈은 짖어댄다./ 짖는다고 했지만 때로는 신음 같고/ 또 때로는 비명 같은 그 소리./ 놈은 틀림없이 병들어 있다./ 소음은 귀를 막으면 꺼지지만/ 그 소리는 귀를 막을수록 날카롭게 아니 음침하게/ 지구의 밑바닥까지 울린다./ 실은 그 지구 밑바닥에서 혼자/ 병든 개 한 마리로 어슬렁대고 있는 정적/ 놈이 제 고독을 그렇게 짖고 있다./ 식, 꺼져라. 이놈의 개!//

징깽맨이*의 편지 / 이형기
여보게 친구/ 쇠붙이에도 혼령이 있다네/ 더구나 방짜쇠 구리와 주석을/ 대충 4대 1로 섞어 녹인 그 방짜쇠에는// 지리산의 물돌/ 물돌로 만든 틀에/ 방짜쇠 그 쇳물을 부어 굳힌 바디기에는// 바디기를 다시 불에 담궈/ 앞메 전메 센메/ 세 메꾼이 메질하는 늘품질/ 그리고는 바디기 가장자리를 두들겨 세워/ 시울을 만드는 돋음질// 다음은 부질일세 징 모양을 잡아주는/ 그러나 아직은 징이 아니야/ 혼령이 잠든 한밤중의 백치(白痴)// 눈뜨라 혼령아 징의 혼령아/ 중망치로 두드려 흔들어 깨우면/ 우웅 웅얼웅얼 무딘 울음 소리// 여보게 친구/ 혼령은 울음일세// 하지만 첫번 울음 풋울음은 설다네/ 익지 않았어/ 울음도 익어야만 제맛이 나서/ 남을 울리거든// 뜸들이듯 두세 밤 더 재우지/ 그동안엔 징 바닥의/ 익어라 익은 만큼 드러나는 나이테/ 상사를 새긴다네// 날이 새면 드디어 재울음을 깨울 차례/ 그렇지 깨우지 잠자는 울음/ 잠자는 혼령을/ 망치여 망치여/ 온몸에 전기가 통해 쩌릿쩌릿/ 손끝 떨리는 중망치여// 어쩌면 내 가슴속 울음을 몽땅/ 징한테 먹여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친구/ 울음말곤 혼령이 또 어디 있겠나//
* 징깽맨이: 징장(匠)의 자조적 호칭.

편자 / 이형기
좋은 칼을 만들자면 좋은 강철을 구해야 한다. 좋은 강철이란 오랫동안 음습한 골방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한 강철이다. 일생 일대의 명도(名刀)를 만들려는 도공(刀工)은 그래서 강철을 일부러 땅에 묻고 세월을 보낸다. 이 거짓말 같은 참말은 돈키호테의 나라 에스파니아의 총포 제작자들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거기서는 편자를 가리키는 Herraduras라는 말이 한편으론 성능 좋은 기병총의 총신을 뜻하기도 한다. 편자, 곧 총신인 것이다. 쉬르레알리즘의 은유처럼 당돌한 이 이질적인 양자의 결합에는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즉 에스파니아에서는 노새의 낡아빠진 그러기에 버림받아 녹이 슨 편자를 모아 질좋은 소총의 그 총신을 만들기 때문이다. 녹슨 쇠는 병든 쇠, 그 병을 가령 건성(乾性) 괴저(壞疽)라 한다면 녹은 까실까실 마른 채 허물어져가는 세포 조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병든 쇠가 병들지 아니한 정상적인 쇠보다 인성(靭性)이 강해서 편자 곧 총신이 되는 이 엄연한 현실! 번쩍이는 칼날의 냉혹한은 녹슬고 부스러져 파멸하는 강철의 실은 깊이 감추어진 본성이다.//

칼을 간다 / 이형기
칼을 간다./ 칼을 가는 소리 서걱서걱/ 이따금 날을 비춰보는/ 달빛.// 지난 여름/ 호열자가 휩쓸고 간 마을에/ 이제사 돌아온 1년 만의 가을이다./ 칼을 간다.// 죽은 자 곁에/ 살아남은 자의 죽음이 있다./ 밑바닥이 없는 가을의 밑바닥/ 눈이 있다.// 칼을 간다./ 칼을 갈 듯 그 눈을 간다./ 이따금 날을 비춰보는 달빛/ 가을을 간다.//

항복에 대하여 / 이형기
항복한 자는/ 두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든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하늘을 저 혼자 차지해버린다.// 손은 완전히 비어 있다./ 들었던 것도 내버리지 않으면/ 항복할 수가 없다./ 막바지에 몰려 벌거벗고 나선/ 겨울 들판의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실은 행복에서/ 내리긋는 한 줄만 덜어내면 항복이다./ 겨우 한 줄만 덜어내도/ 행복처럼 기를 쓰고 지킬 필요가 없는/ 항복의 축복.// 하늘에 새 한 마리 날고 있다./ 벌거벗은 겨울나무가 새가 되어/ 한 줄 덜어낸/ 항복의 그 가벼움을 날고 있다.// 아니다. 퇴로가 차단된 막바지/ 추락의 꿈이/ 하늘을 다 차지한 새 한 마리/ 두 손을 치켜들고 그렇게 날리고 있다.//

황혼 / 이형기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로 가공되기 이전의/ 원유 같은 목청으로//

 



이형기(李炯基, 1933년~2005년) 시인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태어났다. 진주농림학교를 거쳐 1956년 동국대학교 불교과를 졸업한 뒤 《연합신문》《동양통신》《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문화부장, 《국제신문》 논설위원·편집국장, 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등을 거쳐 부산산업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아 일하였다.
1949년 《문예》에 시 〈비오는 날〉, 이듬해에 〈코스모스〉 〈강가에서〉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최연소 등단 기록을 세웠으며,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 〈상식적 문학론〉을 연재하면서 시뿐 아니라 평론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한국문학가협회상, 문교부 문예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문학작가상, 윤동주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대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만해상 등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적막강산》, 《돌베개의 시》, 《꿈꾸는 한발》, 《절벽》, 《존재하지 않는 나무》, 수필집 《서서 흐르는 강물》,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평론집 《감성의 논리》, 《한국문학의 반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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