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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 심보선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 구만요. 가끔 엉켜 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 만하게 불 켜지는 창문들.// 3//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나’라는 말 /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오늘 나는 /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릎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年度)/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나는 시인이랍니다 / 심보선
오늘은 오랜만에 산책을 했지요./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요./ 당신, 그리고 당신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해./ 지난해의 친구들, 그중 제일 조용한 친구에 대해./ 내일의 미망으로 쫓겨난/ 희미한 빛들과 가녀린 쥐들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지상의 얼룩들 위로/ 나는 한껏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갔지요.// 중간에 아는 시인을 봤지만 모른 체했어요./ 시인끼리는 서로 모른체하는 게 좋은 일이랍니다./ 시인은 항상 좀도둑처럼 긴장하고 있지요./ 느릿느릿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들은 가장 사소한 풍경에서/ 가장 치명적인 색깔을 꺼내 달아나는 중이니까요.// 나는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에 대고 속삭였죠./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오늘 우리가 응시한 것들 중에/ 적어도 개와 아이는 움찔했겠지요./ 하지만 선량한 우리는 늘 말하죠./ 무서워하지 말아요. 우리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공간에 도착했어요./빈 상자와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쌓인 복도였죠./ 복도 끝에는 늙은 청소부가 바닥에 주저앉아 졸고 있었어요./ 반대편 끝에는 처음 보는 연구소가 있었는데/ 이름은 평화연구소였어요./ 나는 노크를 하며 생각했죠./ 평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어요.// 나는 낡은 철제 의자 하나를 펼쳐 앉았죠./ 그곳의 분위기는 오래전에 방문했던 예배당 같았어요./ 나는 거기 앉아 되도록 많은 것을 생각했어요./ 내가 까맣게 잊었던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지난 금요일에는 내가 시인이고 자시고/ 그냥 인간이고 싶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소원을 빌기 위해 두 손을 모았지만/ 어색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답니다./ 나는 문득 늙은 청소부에게 소리치고 싶었지요./ 어이, 아저씨, 금요일에 나는 인간이고 싶었어요!/ 나는 화들짝 깨어난 그에게 말하겠지요./ 놀라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갔어요./ 그동안 몸이 많이 아팠지만 이젠 괜찮아요./ 기침이 늘었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랐지만/ 숨 한번 크게 쉬면 지옥의 강철 문이라도 열어젖힐 수 있어요./ 아직까지는 입증할 수 있어요./ 나 자신에게, 늙은 청소부에게,/ 인간적인 용기가 꿈틀거렸던 금요일에게,/ 모든 것을 기억하려는 갸륵한 오늘에게,/ 바닥의 자갈들에게,/ 병색 완연한 영혼들에게,/ 내가 시인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알짜배기 시인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리고 물론 당신에게 나는 말합니다./ 잊지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슬퍼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시는 우리 사이에 벨벳처럼 펼쳐져 있어요./ 그것의 양 끝은 우리가 잠들 때 서로의 머리맡에 놓여 있어요.//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마침 내일이면 생일을 맞으실 어머니에게,/ 여동생에게, 남동생에게,/ 제수씨에게, 조카들에게도 말합니다./ 모두들 염려 말아요. 나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이여, 나는 시인이랍니다./ 부디 내게 진실을 묻지 말고 황금을 구하지 말아요./ 나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 줄 몰라요./ 그 둘이 마주했을 때,/ 무엇이 먼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는 줄 몰라요.// 그러니 사람들이여, 명심하세요./ 자고로 시인이란 말입니다./ 벌꿀과 포도주를 섞은 눈빛으로/ 술 취한 듯 술 취하지 않은 듯/ 사물을 조용히 관찰하고 오래오래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아내의 마술 / 심보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 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형 / 심보선
형은 어쩌면 신부님이 됐을 거야./ 오늘 어느 신부님을 만났는데 형 생각이 났어./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나한테 자율성이랑 타율성 외에도/ 신율성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쳐줬어.// 신의 계율에 따라 사는 거래.// 나는 시율성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해줬어./ 시의 운율에 따라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내 말에 웃었어./ 웃는 모습이 꼭 형 같았어.// 형은 분명 선량한 사람이 됐을 거야./ 나만큼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나보다 어머니를 잘 위로해줬을 거야./ 당연히 식구들 중에 맨 마지막으로 잠들었겠지./ 문들을 다 닫고./ 불들을 다 끄고.// 형한테는 뭐든 다 고백했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사는 게 너무나 무섭다고./ 죽고 싶다고./ 사실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슬펐을 텐데.// 그래도 형은 시인은 안 됐을 거야./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이것 봐, 지금 나는 형을 떠올리며 시를 쓰고 있잖아./ 그런데 형이 이 시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너무 감상적이라고 할까?/ 질문이 지나치게 많다고 할까?/ 아마도 그냥 말없이 웃었겠지./ 아까 그 신부님처럼.// 시가 아니더라도 난 자주 형을 생각해./ 형이 읽지 않았던 책들을 읽고/ 형이 가지 않았던 곳들을 가고/ 형이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형이 하지 않았던 사랑을 해.// 형 몫까지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끔/ 내가 나보다 두 살 더 늙은 것처럼 느껴져.// 그럼 죽을 땐 두 해 빨리 죽는 거라고 느낄까?/ 아니면 두 해 늦게 죽는 거라고 느낄까?/ 그건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그런데 형은 정말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모르는 일이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가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지./ 불행이라는 건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형보다 더 슬픈 사람이 되고/ 형은 감옥에서 시를 썼을까?/ 그것도 그때가 돼봐야 알겠지.//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했는데/ 결국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네.// 형 때문에 나는 혼자 너무 많은 생각에 빠지는 사람이 됐어./ 이것 봐. 지금 나는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시를 쓰고 있잖아./ 문들도 다 열어두고./ 불들도 다 켜놓고.// 형,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형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왜 형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던 거야?/ 왜 나는 슬플 때마다 둘째가 되는 거야?// 형,/ 응?//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 / 심보선
이 방의 천장은 낮다, 점프/ 하지 않아도 천장에 닿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속되냐/ 섀시 창문 밖으로 천장의 유혹을 간직하고/ 구름은 지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하면 가방을 열어/ 가방 모양의 공기를 마루 위에 쏟아내곤 했다/ 이야, 놀라워라 어린 자식들의 조건 없는 탄성이여/ 가끔씩 옛집을 생각하면/ 피융, 하고 양쪽 뺨을 스치며 앞뒤로 지나가는/ 기억과 망각의 총탄이여// 이 집 안방에는 그러고 보니 깊은 절벽이 숨어 있다./ 저 밑에는 도달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바닥/ 돌아보면 누이는 저만치 뒤에 있고 어머니는 더 뒤에 있고/ 더 뒤에는 무한의 더 뒤가 있고/ 더더더 뒤에는 그냥 장롱벽/ 거기 기대어 아버지/ 좌탈입망, 돌아가셨다/ 아버지 왼손에 쥐어진/ 위성TV 리모컨// 감자조림 미끼로 낚시질 가시던/ 빈 링거병 꽂고 누워 계시던/ 소싯적에 거 참 잘생기셨던/ 아버지, 망부 청송심씨후인/ 위패를 쓰다 난 으이씨, 하고 울었다/ 아버지, 어찌/ 죽음 갖고 아트를 하십니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옛집의 지하실/ 도망갈 수 있는 곳, 다시는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나는 낮은 천장 아래 홀로/ 소파 뒤에 바짝 등 붙이고/ 낮은 포복으로 몰려오는 미래를 빠끔히 내다보고 있다// 가족들은 이 집 어딘가에서 소식도 없이/ 각자 잘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아버지를 생각하며 / 심보선
아버지는 생전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다 거쳤다/ 산전수전(山戰水戰)까지는 아니고// 아버지는 어린 내게 영국식 영어를 가르쳤다/ 낫[nat] 놓고 놋[nɒt] 이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KBS라디오국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요청했다// 아버지와 나는 한 번도 술잔을 나눈 적이 없다/ 둘 다에게 엄습할/ 둘 다 견딜 수 없음을/ 어떤 적막함의 예감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는 평생 아버지식으로 살았다// 유학 시절 우울증 치료를 받을 때/ 상담사가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처럼 사는 거요// 상담사가 말했다/ 아버지처럼 살 수도 있어요// 그 자리에서 상담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임 놋 마이 파더!// 상담사는 아름다운 백인 여자였다/ 물론 그래서 죽이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생 아버지식으로 살았다/ 그게 비극으로 치닫으리라는 것을/ 식구들은 진즉부터 알았다/ 물론 아버지 자신도// 아버지는 프랑스식으로 떠났다/ 작별 인사도 없이 거만하게// 아버지는 불교식으로 떠났다/ 앉은 채로 숭고하게// 시에 아버지 이야기는 안 하려 하는데 쉽지 않다/ 시 말고는 아버지 이야기 할 데도 없다// 이 시에서 아버지를 열일곱 번 아니 열여덟 번 언급했다// 스무 번을 채운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효도도 애도도 불충분했다/ 다 아버지 탓이다/ 아니 내 탓이다/ 아니 아버지 탓이다 끝/ 끝내 스무 번을 채웠다// 역시 달라진 것은 없고/ 이 시는 그저 그렇고/ 나는 내 식으로 서럽고 서러울 뿐이다//
실향(失鄕) / 심보선
설 전날, 엄마랑 고모랑, 허름한 동네 식당에서 아구찜을 먹다, 남편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이 날을 명절이라 하기에는 처량하도다. 아버지, 하고/ 속으로 부르니 슬픔이 미더덕처럼 터져 맘 한구석이 크게 데이다. 식당/ 안쪽 골방을 보니 말로만 듣던 하우스라, 고향이 철천지 원수가 된 사내들,/ 거나한 도박판이라, 과묵한 패가망신의 영토라, 그들의 비루한 나날이 고모/ 랑 엄마의 청승과 도무지, 상관 없는 듯도 하고, 있는 듯도 하여라, 생선/ 가시를 퉤퉤, 발라가며 수다꽃을 피우는 두 여인네 사이에, 나는 한 마리/ 어색한 남정네, 후식이랍시고, 그것도 명절 선심이랍시고, 자판기 커피 홀짝/ 이며, 문틈으로 엿보이는 힘줄 돋은 손아귀들, 휙휙 뒤집혀 착착 붙는 화투패/ 들에게로, 생선뼈처럼 의뭉스런 눈길을 보내네. 밥 다먹고 기억 아득한, 골목/ 길 되짚어 고모댁네 들러, 설 전날이라, 까치설날이라, 명란젖이며, 만두며,/ 곶감이며, 점점이, 알알이, 주거나 받거니, 엄마랑 고모는 지극한 맛의 꽃패/ 를 마루 위에 펼쳐 보이시네. 바리바리 싸들고 집에 오는 길, 교통방송이 전하는/ 지혜의 말씀, 고향 가는 길은 돌아가는 길이 없습니다, 직진, 오로지 직진입/ 니다. 엄마랑 나, 직진으로 경부선 타다 판교 인터체인지에서 분당으로 빠지는/ 데, 이것은 영락없는 실향의 길이라, 남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할아버지도/ 없고, 할머니도 없는, 실향의 나라로, 엄마랑 나는 뛰뛰빵빵 뛰뛰빵빵, 오늘도/ 내일도, 하염없이 달려가네//
슬픔의 진화 / 심보선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 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 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어찌할 수 없는 소문 / 심보선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오래전 나의 마음을 비켜간 것들 어디 한데 모여 동그랗고 환한 국가를 이루었을 것만 같다 거기서는 산책과 햇볕과 노래와 달빛이 좋은 금실로 맺어져 있을 것이다 모두들 기린에게서 선사받은 우아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쉽고 투명한 말로만 대화할 것이다 엄살이 유일한 비극적 상황일 것이다// 살짝만 눌러도 뻥튀기처럼 파삭 부서질 생의 연약한 하늘 아래 내가 낳아 먹여주고 키워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 불쌍한 사물들은 어찌하다 이름을 얻게 됐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살아있음을. 내 귀 언저리를 맴돌며,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는 이 소문을,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잃어버린 선물 / 심보선
이별은 다른 별에서 온 전언/ 매일매일 죽는 우리에 대한/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다/ 믿을 만한 죽음은 항상 맨 나중 것이기에/ 네게서 받은 이상한 선물/ 다른 별에서는 사랑스런 생물이었고/ 이 별에서는 무서운 사물이었던/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했을까/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름도 없어 처량한 그것을/ 어느 날 밤에/ 무심코 떨어지는 유성/ 십 년 전에 멈춘 시계/ 내 손이 앉았다 떠난 어깨/ 먼 외계에서 멸망하고 있는 그것들이/ 길고 낮게 숨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들으면서 흐느껴 운 적이 있다//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 심보선
1//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집 안에 더 이상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푸른 형광등 아래/ 엄마의 초급영어가 하루하루 늘어갈 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네이션이 무슨 뜻이니?/ 민족이요,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던 단어였죠/ 그렇구나/ 또 뭐든 물어보세요/ 톰 앤드 제리는 고양이와 쥐란 뜻이니?/ 으하하, 엄마는 나이가 드실수록 농담이 느네요// 나는 해석자이다/ 크게 웃는 장남이다/ 비극적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해도/ 나는 정확히 해석하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큰 소리로 웃어야 한다// 장남으로서, 오직 장남으로서/ 애절함인지 애통함인지 애틋함인지 모를/ 이 집 안에 만연한 모호한 정념들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바람이 빠진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릴 때/ 풍경의 남루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꽃이 피고 지고/ 눈이 쌓이고 녹는다/ 그뿐이다/ 그리고 간혹 얕은 여울에서/ 윤나는 흰 깃털을 과시하며 날아오르는 해오라기// 오래 전에 나는 죽은 새를 땅에 묻어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다친 새들이 툭하면 내 발치로 다가와 쓰러지곤 하였다/ 지저귐만으로 이루어진 유언들이란 얼마나 귀엽던지// 한쪽 눈이 먼 이름 모를 산새 한 마리/ 이쪽으로 뒤뚱대며 다가온다/ 지저귐, 새의 발랄한 언어가 없었다면/ 그것은 단지 그늘 속에서 맴도는 검은 얼룩이었겠지만// 3// 나는 엄마와 가을의 햇빛 속을 거닌다/ 손바닥을 뒤집으니 손등이 환해지고/ 따사롭다는 말은 따사롭다는 뜻이고/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 가을의 햇빛 속에서/ 다친 새들과 나와의 기이한 인연에 대해 숙고할 때/ 세상은 말도 안 되게 고요해진다/ 외로워도 슬퍼도 엄마의 심장은 디덤디덤 뛰겠지만//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한 자살자는/ 몸을 던지는 순간에 점프!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심장은 멈추기 직전까지/ 디디덤 디디덤 엇박자로 명랑하게 뛰었겠지만// 그늘 속에 버려진 타인의 물건들/ 그 흔해빠진 손바닥과 손등들/ 냉기가 뚜렷이 번져가는 여생을 어색하게 견디고 있다/ 견뎌낼 것이다, 그래야만 하기에// 4// 내게 인간과 언어 이외에 의미 있는 처소를 알려다오/ 거기 머물며 남아 있는 모든 계절이란 계절을 보낼 테다/ 그러나 애절하고 애통하고 애틋하여라,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구나// 아아, 발밑에 검은 얼룩이 오고야 말았다// 햇빛 속에서든 그늘 속에서든/ 나는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 지금으로서는/ 내게 주어진 것들만이 전부이기에/ 지금으로서는//
종교에 관하여 / 심보선
1// 세기말을 지나 휘황한 봄날이다/ 귀를 틀어막은 청소부가 실패한 비유들을 쓸어 담고 있는데/ 꽃가루들은 사방에서 속수무책으로 흩날린다/ 눈물을 획책하고 있는 저 미세한 말씀들, 지금은/ 알레르기가 종교를 능가하는 시대라서/ 파멸과 구원이 참으로 용이해졌다// 2// 소식이라도 한번 주지 그랬니/ 난 너무 외로워서 아무 병에라도 전염되었으면 하다가/ 어제는 느지막이 강변에 나가 놀다 들어왔다/ 니가 돌려보낸 편지봉투 속에 편지지처럼/ 잘게 찢긴 달빛들이 물결 위로 흐르고/ 밤하늘에 빼곡하게 뜬 별자리들/ 그 하나하나에 일일이 귀의하고 싶더라/ 너를 잊기 위해 나 그간 여러 번 개종하였다// 3// 아침에 가출한 탕아가/ 저녁밥 먹으려고 귀가하고 있다/ 방랑의 증거로 꽃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사막에 나가면 눈이 너무 따끔거려요, 아버지/ 얘야, 거긴 사막이 아니라 그냥 공원 놀이터란다/ 어쨌든 내일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요/ 필요한 것은 단단한 다짐이 아니라 신용카드 몇 장// 4// 꽃가루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생의 신비여/ 십자가 위에서 으아, 기지개 피는 낙담한 신성이여/ 이제 내 몸엔 구석구석마다 가지각색의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 다들 사소해서 다들 무고하다//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 심보선
구름과 안개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그 둘을 설파할 때 내 몸은 기분좋은 기괴함에 젖어든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눈부신 곡예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어쩌다 등을 뒤로 굽혀 완벽한 원을 만들게 됐냐고 사회자가/ 물은 적이 있다/ 싸는 똥을 받아먹고 싶었죠/ 즉석에서 시범을 보이자 관객들은 박수 치다 말고 토했다// 구름과 안개에 골몰하느라 학업과 노동을 작파한 지 오래/ 내가 펄쩍 뛰었다 착지한 자리엔 음모陰毛가 수북이 쌓이곤/ 한다/ 내 몸이 점점 구름과 안개로 화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내 행방을 찾으려거든 땅 위에 떨어진 털들을 따라오/ 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이름이 무엇이고 거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간혹 나는 밤거리로 뚜벅 뚜벅 걸어나가 진열장에 비친 내 모/ 습을 바라본다/ 내 자신이 아득한 심연으로 되비치고/ 등 뒤의 어둠과 눈앞의 환함이 서로를 환대할 때까지/ 나는 일생에 걸쳐 가장 가난한 표정으로 거기 오래 서 있는다/ 그러고는 오묘한 정취에 젖어 달이 뜬 쪽을 향해 물구나무로/ 걸어가는 것이다/ 자정의 밤거리는 언제나 취객과 창녀로 북적거린다/ 내 둥근 몸을 통과한 달빛에 젖은 자들이여/ 나를 비웃든 경외하든, 그대들의 삶에 다산과 다복이 넘치기를// 또 간혹 나는 구름과 안개를 뚫고 달리고 또 달린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심심해져서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구름과 안개가 걷힌 거리는/ 지식 없는 선생이요/ 표정 없는 얼굴이기에/ 구름으로 다듬고 안개로 닦아야만 고독은 아름다운 자태를/ 얻는다고 믿는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굳이 유파를 들먹이자면/ 마음의 거리에 자우룩한 구름과 안개의 모양을 탐구하는 '흐/ 린 날씨'파/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 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별에 별 / 심보선
별에 별 나무가 자라고/ 별에 별 꽃이 펴요/ 별에 별 새가 날아다니고/ 별에 별 짐승이 울부짖어요/ 별에 별 이름의 나라들/ 별에 별 모양의 기념비들/ 별에 별 가게에/ 별에 별 물건들/ 별에 별 사람들이/ 별에 별 사랑을 나눠요/ 별에 별 이별도 하겠죠/ 별에 별 진실과/ 별에 별 거짓말이 만나니/ 별에 별 노래가 탄생하네요/ 별에 별 느낌이 충만해져요/ 별에 별 사건이 터질 거예요/ 별에 별 세상에/ 별에 별 일이 다 있다니까요//
오늘은 잘 모르겠어 / 심보선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는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퍼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축제 / 심보선
침과 재가 뒤섞인/ 희뿌연 새벽을 건너// 아침이 왔다// 간병인은 커튼을 열어/ 환한 볕을 병실로 들인다// 그는 생각한다// 가엾은 노인네// 결국 노망나셨네//
첫 줄 / 심보선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나날들 / 심보선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 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 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 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 들을 그리워 하며//
여, 자로 끝나는 시 / 심보선
안녕하세여, 어디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여, 우리 피시방에서 만났던가여, 아니, 전생이었던 것 같네여, 어떻게 지내셨어여, 전 오늘 좀 슬퍼여, 사실 애인이랑 막 헤어졌어여,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 뭘여, 제가 나쁜놈이지여, 저 위 좀 보세여, 저놈의 달은, 누가 자기 자리 뺏어갈까봐 낮부터 저러고 버티고 있네여, 참 유치하지여, 한 백 년 만인가여, 기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 해여, 다 어머니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도대체 누구냐고여, 몇 생 전이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른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왜 저보고 사는 게, 납치할 아이 하나 없는 세상의 유괴범처럼 황당하게 외롭다고 그랬자나여, 불어였던가여, 스페인어였던가여, 왜, R 발음에 세상에 모든 부조리를 우겨 넣은 듯한 언어로 말했잖아여, 그렇지여, 첫번째 생 다음은 다 후렴구이지여, 그렇지여, 신은 희로애락을 무한의 버전으로 믹싱하는 DJ지여, 그렇지여, 우리 인간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이나 출 따름이지여, 같이 커피나 한 잔 하실래여, 전 크림 안 넣어여, 하얀 게 뭉게뭉게 번져가는 걸 보고 있음 괜히 기분 나빠져여, 뻔한 성적 상상력에 지나친 예민함이라고나 할까여, 누구 기다리세여, 다행이군여, 요새는 뭐 하시나여,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 사실은 아무거나 쓰고 이거 시다, 그러고 있어여, 엊그저께는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이고, 이거 시다, 이거 이력서 아니다, 그랬지여, 취직은 몇 번의 후생에나 가능하다 여겨집니다여, 아, 제가 이상한 놈으로 보이나여, 님의 표정이 불편하다는 의사를 살짝 비춰주시네여, 그러세여, 붙잡지 않겠어여, 커피 값은 제가...... 아, 그래주면 고맙지여, 안녕히가세여,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여, 다음 생에 볼 수 있음 또 보지, 아님 말지, 여.//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필요한 것들 / 심보선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나날이 필요하다/ 물론 너의 손이 필요하다/ 너의 손바닥은 신비의 작은 놀이터이니까/ 미래의 조각난 부분을 채워 넣을/ 머나먼 거리가 필요하다/ 네가 하나의 점이 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단 한 발짝 떨어진 셈이니까/ 수수께끼로 남은 과거가 필요하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단 한 순간이 필요하다/ 그 한 순간 드넓은 허무와 접한/ 생각의 기나긴 연안이 필요하다/ 말들은 우리에게서 달아났다/ 입맞춤에는 깊은 침묵을/ 웅덩이에는 짙은 어둠을/ 남겨둔 채/ 더 이상 말벗이기를 그친 우리……/ 간혹 오후는 호우를 뿌렸다/ 어느 것은 젖었고 어느 것은 죽었고/ 어느 것은 살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우리……/ 항상 나중에 오는 발걸음들이 필요하다/ 오직 나중에 오는 발걸음만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그것인, 아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모든 것이……//
의문들 / 심보선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殮)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사람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봐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아니어도/ 혁명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을까/ 어떤 의문들이 이 세계를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기에/ 아이들의 붉은 입술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끝없이 옹알댈까//
나날들 / 심보선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 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 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좋은 일들 / 심보선
내가 오늘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있는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헤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흘려보내주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이상하게 말하기 / 심보선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손목시계 위의 시간을 읽는다/ 분침과 시침 사이에 펼쳐진 고요와/ 고요 아래 짹깍거리는 소요를 헤아린다/ 빛과 어둠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지는 오후/ 자라나는 애처럼/ 죽어가는 새처럼/ 나는 이상하게 말한다/ 나는 산책에서 상념을 지우고/ 길가의 낙엽더미에 왼손을 묻었다/ 내가 죽기 전에 미리 죽은 손/ 이라 말한다면 이상하겠지/ 내가 그녀에게 입 맞췄을 때/ 그녀의 머리는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입이 내 입 안에 향기 좋은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이 신기한 계절로 흐르나보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내 그림자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을 바라본다/ 내 그림자가 네 그림자보다 더 진했었지/ 라고 말한다면 서글프겠지/ 나는 마침내 고개를 떨군다/ 서글퍼서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꽃 한 송이가 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머릿속에서 온갖 꽃들이 시드는 오후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이상한 말들을 중얼대는 오후다/ 몇 시인가 시계를 들여다보니/ 고요와 소요가 정확히 반으로 나뉘는 시간이다//
나의 친애하는 단어들에게 / 심보선
단어들이여,/ 선량한 전령사여,/ 너는 내 사랑에게 “저이는 그대를 사랑한다오” 전언해주었고/ 너는 나에게 “그녀도 자네를 사랑한다네” 귀띔해주었지./ 그리고 너는 깔깔거리며/ 구름 위인지 발바닥 아래인지로 사라졌지./ 사랑하는 이의 웃음소리를 졸졸 따라다니며/ 나는 기쁨에 겨운 생을 살았지.// 단어들이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이여,/ 그 아들과 딸의 이름이여,/ 너는 태어나자마자 어찌나 빨리 늙어가던지,/ 너를 보면 곧바로 묘비 위의 이름을 알아채게 되지./ 사랑하는 이들의 사그라지는 이름을 읊조리며/ 나는 슬픔에 겨운 생을 살았지.// 단어들이여,/ 내가 그늘을 지나칠 때마다 줍는 어둠 부스러기들이여,/ 언젠가 나는 평생 모은 그림자 조각들을 반죽해서/ 커다란 단어 하나를 만들리./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나의 오랜 벗들이여,/ 하지만 나는 오늘 밤 지상에서 가장 과묵한 단어,/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서 잠시 멀어지고 싶구나./ 나는 이제 잠자리에 누워/ 내일을 위한 중요한 질문 하나를 구상하리./ 영혼을 들어 올리는 손잡이라 불리는/ 마지막 단어만이 입맞춤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 로 끝나는 질문 하나를.//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라고 믿어 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천사는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매혹 / 심보선
사랑하는 두 사람/ 둘 사이에는 언제나 조용한 제삼자가 있다/ 그는 영묘함 속으로 둘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둘만의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그는 슬픔의 옆자리로 자기 자신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모른다/ 신(神)이 낮과 밤을 가르는 시간을/ 두 사람이 신 몰래/ 서로의 영혼을 황급히 맞바꿔야 했던 시간을// 그 시간을 매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혹 이후/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 의해 빚어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게 영원히 빚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하얀 돌 위에 검은 돌"*을 올려놓듯이/ 사랑과 비밀을 포개놓을 수밖에//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목욕을 막 끝낸 여자의 어깨 위에 맺힌 물방울을/ 남자가 용기를 내 닦아주려 하자/ 더 작고 더 많은 구슬로 흩어지던 그것을/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한 줄기 미명과/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한 조각 어둠// 그런데/ 한 눈동자 안에 시작과 끝이 모두 있었던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거미줄처럼 서로를 이어주던/ 눈빛과 눈빛의 무수한 교차/ 그 위를 바삐 오가는 배고픈 거미처럼/ 새벽녘까지 끝날 줄 모르던 이야기/ 바로 그날 태곳적부터 지녀온/ 아침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환하고 낯선 하나의 세계//
* 세사르 바예호의 시 제목에서 인용.
음력 / 심보선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내어/ 나에게 말했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혀진 과거야.// 젊은 시절 어떤 여행길은/ 목적지가 있다기보다/ 서쪽으로/ 그저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지./ 그때 나는 노래했지./ 어제까지 돌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오늘은 돌 아래 누워 있네./ 어제까지 돌 아래 누워 있던 사람이/ 오늘은 그 옆에 또 다른 돌이 되었네.//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최대한 낮은 어조로/ 서쪽의 지평선을 읽었지./ 서쪽은 음력으로 어제의 동쪽이고/ 지평선은 하나의 완벽한 입체이니까./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영영 잊어버리고/ 미래에 펼쳐질 운명의 면적을/ 달 뒷면의 운석 자국처럼/ 느릿느릿 넓혀가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그것은 음력으로/ 인간의 아물지 않은 흉터이고/ 그때 그대의 사랑스러운 이름은/ 지상에서 반쯤 지워진 채/ 화석 같은 인광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던 거야,//
사랑은 나의 약점 / 심보선
당신은 내게 어느 동성애 운동가의 시를 읽어 준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를./ 내 언어가 결코 가 닿지 못한 슬픔의 세계가/ 밤하늘의 성좌처럼 선명하게 펼쳐진 시를./ 나는 고통스럽다./ 반은 질투심에, 반은 감화되어./ 그러나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한 명의 유순한 독자가 되어.// 시를 읽고 난 후 당신은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약점이군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의 위트 섞인 선의 아래에는/ 아주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내가 중산층 이성애자 시인이라는 사실./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가?// 나는 오늘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사람은 말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시가 '올해의 좋은 시'로 뽑혔습니다./ 내일까지 수상소감을 보내주세요./ 다른 사람은 말했다./ 아쉽지만 당신의 시는 대중 집회 장소에서 읽기는 다소 어렵군요./ 내일까지 소통이 좀 더 용이한 시를 보내 주시겠어요?/ 두 사람은 같은 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아주 문학적인 수상소감문 하나와/ 아주 대중적인 시 한 편을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기대하는 성실한 시인이자 선량한 시민이니까.// 그런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시에서 나는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 내가 한 줄기 따스한 입김을 후우, 당신의 귀에 불어넣자/ 당신은 활짝 웃으며 좋아요! 하고 수락했다./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지극히 평범하고 직설적인 말로/ 말하자면 전혀 시적이지 않은/ 기껏해야 두 문장 정도로 이루어진 말로 청혼을 할 생각이다./ 나는 안다. 전혀 시적이지 않은 그 두 문장이/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지을 것이다.// 또 하나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당신이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우연히/ 창밖으로 한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쪽동백나무 아래로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질질 끄는 기괴한 발걸음으로/ 떨어진 꽃잎들이 아름답게 수놓은 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노인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아니다. 사실 마주치지 않았다./ 그 노인은 내게 하나의 이미지였다./ 내가 대변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던져진 잿빛 가죽 포대였다./ 그 노인이 나와 눈이 마주쳤더라면/ 단 1초만 마주쳤더라면 나는 이렇게 썼을 텐데.//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 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픔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선율도 흐르지 않는가./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이여./ 나에 대해 노래해 달라. 나의 지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강점을 지녔노라고 제발 노래해 달라.// 당신이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웃으며 말한다./ 정말 좋은 시군요./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당신이 이야기한/ 나의 유일한 약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네요./ 그런데 내 사랑, 오늘은 내가 할 일이 너무 많군요./ 내일까지 당장 두 편의 글을 마감해야 해요!//
청춘 /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 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호시절 / 심보선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 하나가/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 그때는 좋았다/ 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 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 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 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 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 그때는 좋았다/ 격렬한 낮은 기어이/ 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 오늘의 탑을 높이 높이 쌓아 올렸다/ 그때는 좋았다/ 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 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좋은 일들 / 심보선
오늘 내가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을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노스탤지어 / 심보선
유물론자들은 일찍 죽는다/ 그들은 모순을 설파하지/ 자기 영혼에 불꽃을 던진 방화범/ 판관은 고민한다/ 후회는 양심의 증거인가/ 죄의 증거인가/ 法은 만졌을 때 더 차가운 것을/ 좋은 물증으로 택하지/ 그러나 음유시인은 노래한다/ 감미로운 이끼가 풍미하는 절벽/ 하품과 하품 사이에서 나고 죽는/ 산양의 일생/ 평생 되새김질할 만큼/ 뱃속에 가득한 無/ 기억의 치외법권에서 들려오는/ 영원한 헛구역질/ 뒤돌아보지 않으리/ 이 삶은 내가 살고도/ 내가 살지 않았으니//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 심보선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애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태양을 고심한다는 듯/ 빛 담벽에 줄줄이 드리워졌다 밤이 오면/ 고대 종교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사랑을 나눈 침대 위에 몇 가닥 체모들/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하는 사물들 간혹/ 비극을 떠올리면 정말 비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꽃말의 뜻을 꽃이 알 리 없으나/ 봉오리마다 비애가 그득했다/ 그때 생은 거짓말투성이었는데/ 우주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진리가/ 어둠의 몸과 달의 입을 빌려/ 서편 하늘을 뒤덮기도 하였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독서의 시간 / 심보선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을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소리 / 심보선
들어라/ 뱃속의 아기에게 시를 읽어주는 어머니여// 들어라/ 죽은 개를 야산에 묻고 묵념을 올리는 아버지여// 들어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한 것을 모두 증오했기에/ 자신까지 혐오하게 된 장자여// 들어라/ 실패한 자여/ 떠돌 만한 광야가 없어 제자리에서 맴도는 개 같은 인생이여// 들어라/ 늙은 어부여/ 고래의 내장 속에 어떤 어둠이 있었는지 잘 아는 이여// 들어라/ 거울 앞에서 얼굴의 얼룩을 노려보는 처녀여/ 언덕에 울려 퍼지는 변성기의 목소리를 사랑했던 이여// 들어라/ 한 개의 뼈만 남은 거대한 무덤이여/ 그 아래 흐르는 고요한 물줄기여/ 그 아래 쌓인 수만 개의 뼈여// 들어라/ 세상의 모든 뼈를 이어 붙여도 모자란 키 큰 허공이여/ 그 위에 부는 세찬 바람이여/ 그 위에 얹힌 무한의 허공이여// 들어라/ 인적이 드문 밤거리에/ 쨍그랑 병 하나가 깨지면 순식간에/ 모든 집의 불빛이 꺼지는 첨단의 도시여//
오늘의 야구 / 심보선
언제나 훈계조인 너의 키스/ 나는 입술로 듣고 혀로 이해할 뿐/ 당신은 후회가 너무 많군요/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늙어가는 눈동자 너머에 사는/ 늙지 않는 선수 탓이다/ 도무지 포수를 믿지 않는 투수처럼/ 너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너와 나 사이에 파탄이 파다해진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가, 그러나/ 오늘은 오늘의 야구에만 몰두하자/ 사구(死球)로 진루하는 타자는/ 아프면서 기쁜 표정/ 외야잔디에서 어리둥절한 새들도/ 날아오를 때는 여왕의 자태/ 우천으로 순연된 경기처럼/ 이별의 순서는 기약이 없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조각난 하늘 아래/ 우리는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나쁜 향기가 되어 간다/ 빗물에 젖은 우리의 발은/ 빗물에 젖은 베이스처럼 폭신해져 가고/ 오늘의 야구는 결국 오늘로 끝나버리고//
잎사-귀로 듣다 / 심보선
매혹의 순간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사랑은 모든 계획에 치밀하였노라/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에서/ 너는 내게 물었다/ 나무들은 잎사-귀가 너무 많아요/ 바람소리를 어떻게 견딜까요/ 너의 어리석음도/ 구름의 한계 안에서는 당당하여라/ 사랑은 삶을 과장하니 좋아라/ 너는 고풍스런 잠언이 배인 표정으로/ 잠이 들었고 어리석고/ 어리석었던 나는/ 불가피한 내일의 파국을 떠올렸고/ 내가 울기 전에/ 네가 먼저 운다는데/ 이별과 재회 중에 하나를 걸었노라/ 잠에서 깬 너는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개의/ 잎사-귀로 들었지요/ 먼저 운 것은 결단코/ 나였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리라//
잊지 못할 순간들 / 심보선
잊지 못할 순간들이 있다/ 은 아이보리 피아노 앞에서/ 바흐의 평균율을 가르쳐주던 그녀의 손가락/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음과 불이 한날한시에 태어나던 겨울날/ 나는 부러워한다/ 우정과 사랑의 세계에서 벗어난 노인들/ 그들의 그림자는 화살표처럼 여위어 간다/ 방향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나의 성(姓)은 조상 대대로 내려왔다 단지/ 후손의 쓸쓸한 이름들에 거처를 주기 위하여/ 오늘은 태양을 믿어 보자/ 내일은 바람을 따라가 보자/ 교훈도 광기도 없는 나날들/ 다만 잊지 못할 순간들이 다가온다/ 삶에 주사위처럼 내던져지는 그 결정적인/ 결정적인 순간들/ 나는 매일매일 행운을 빈다/ 고요한 태풍의 눈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비한 현상들 가운데서/ 이름을 알 길 없는/ 미래의 쓸쓸한 아들딸들을 떠올리며//
도시적 고독에 관한 假說 / 심보선
고양이 한 마리/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다/ 몸통이 네모나고 다리가 둥글게 말린/ 코끼리 같은 버스가/ 죽은 고양이 앞에 애도하듯 멈춰 있다/ 누군가 말한다/ 스키드 마크는/ 바퀴도 번민한다는 뜻이지/ 누군가 답한다/ 종점에서 바퀴는 울음을 터뜨릴 거야/ 새 시장은 계몽된 도시를 꿈꾸지만/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 그 증거다/ 멀리서 아련히 사이렌이 울린다/ 한때 그것은 독재자가 돋우는 공포의 심지였으나/ 이제는 맹인을 이끄는 치자꽃 향기처럼 서글프다/ 누군가 말한다/ 두고 봐/ 종점에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거야/ 하루 또 하루/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친구들과 죽은 자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 그 증거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고양이 한 마리 또 한 마리//
파종기 / 심보선
파종기 때 나는 아팠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사람처럼 구는 당신/ 그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때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손가락들이 흑백 위에서 서툴게 엇갈렸다/ 밤이 오면 천구의 안쪽을 스쳐 지나던/ 구름 하나가 불현듯 아주 낮아져서/ 내 비열한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온갖 신비로 어수선한 새벽 공기의/ 은색 표면 위에 나는 썼다/ 내가 세우지 않은 철탑들의 녹슬어가는 시간과/ 낯선 향유를 머금은 우유 빛 안개에 대하여/ 그리고 천사의 키는/ 무덤의 깊이 만큼이라고도 썼다/ 파종기 때 나는 아팠다/ 떠나던 그녀는 문 앞에 멈춰 서서/ 석양의 황금빛 역광을 오래오래 받고 있었다/ 그때는 하필 파종기였다/ 그 다음 해 마당에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았다/ 텅 빈 마당에 서서/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며 나는 울었다/ 파종기 때 나는 아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프지 않은 파종기는 없었다//
의문들 / 심보선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殮)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주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면/ 서랍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 봐 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왜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아니어도/ 혁명적인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을까/ 어떤 의문들이 이 세계를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의문들이 남았기에/ 아이들의 붉은 입술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고 끝없이 옹알댈까//
천 년 묵은 형이상학자 / 심보선
환상과 지식이 만나면 고통뿐이다/ 의자 위에서 심하게 훼손된 그의 인생을 보라/ 천 년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별은 두 배로 늘었고 달은 지구와 합쳐졌다/ 견고한 아름다움을 갈고 닦던 시절은 끝났다/ 구원을 깔끔히 포장해주던 하얀 손들도 사라졌다/ 마음은 온통 물컹해지고 뒤죽박죽 섞여/ 쾌락과 예의와 명철함이 구별되지 않는다/ 천 년 동안 그는 의자 위에 의자의 의지로 앉아 있다/ 앞산에는 천 년을 참다 터진 웃음처럼 꽃들이 만발하다/ 오래전 그 등산길을 죽은 아내와 거닐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태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이제/ 심장에는 나쁜 피조차 흐르지 않으니/ 우편배달부는 그를 낡은 인쇄물이라 했고/ 검시관은 잘린 신체의 일부라 했다// 그는 자신이 의자의 유령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의 몸은 의자로부터 분리되어/ 미분류 딱지가 붙은 상자로 옮겨져/ 영원한 어둠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상자 뚜껑이 닫히기 직전/ 영원하라, 형이상학이여, 의자에의 의지여!/ 그가 온 힘을 다해 절규해보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광인행로(狂人行路) / 심보선
길 위에서 나는 두려워졌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날 찝적댔다. 어젯밤 잠 속에선 채 익지 않은 꿈을 씹어 먹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병에 담아둔 꽃이 다 뜯겨져 있었다. 신물 대신 꽃물이 올라오고 발바닥에 혓바늘이 돋았다. 걸음이 떠듬대며 발자욱을 고백했다. 나는 두려워졌다. 아무 病 속으로 잠적하고 싶어졌다. 싶어서 마침 길가에 <藝人>이라는 지하다방이 있었다.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전날 샀던 시집을 한장 한장 찢으며 넘겼다. 나는 두려워졌다. 종업원이 유리컵에 물을 담아왔다. 거기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졌다. 맛을 보니 짭짤했다. 바닷물인가? 아님 너무 많은 이들이 코를 박아서 이미 콧물인가? 나는 두려워졌다. 산다는 게 꼭 누가 했던 말을 되풀이 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니 입김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내 안에서 줄담배를 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 심보선
내 육체 속에서는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내 육체 속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장모님이 한국에서 보내온 황지우의 시집을 읽었다/ 시집 속지에는 '모국어를 그리워하고있을 시인 사위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장모님이 나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문득 무중력 상태에서 시를 읽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져/ 욕조 물속에 시집을 넣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렇게 스무드할 수 없었다/ 어떤 시구들은 뽀골뽀골 물거품으로 올라와 수면 위에서 지독한 냄새를 터뜨리기도 했다// 욕조에서 나와 목욕 가운을 걸치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 안에 아무것도 안 입어도 되는 것일까?/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적으로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현 자본주의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아니, 사실은/ 그런 질문을 애초에 던지기라도 한 것인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고 있는데/ 사회운동가인 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마찬가지로 사회운동가인 애인 레슬러 집에서 동거 중이다/ 오늘 밤에 자기네 집에서 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 오해하는 것이 사실은 부담스럽다)/ 네 시인데 방 안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혁명이 일어나듯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태양 빛의 입사각에 정확하게 맞출 때/ 이 방은 제일 밝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같이 게으른 인간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데모 한번 한 적 없는 아내는 의외로 나의 좌파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심지어는 오늘 또 다른 사회운동가 아라파트도 오는 거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지난 대선 때 민중 후보를 찍었다)/ 지난번 우리 집에서 (위 섈 오버컴)을 다 함께 합창할 때도/ 아내는 옆에서 녹차를 따르며 잠자코 웃기만 했다/ 아내는 그러나 이혼을 의식화시키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럴듯한 열매 한번 못 맺는 나쁜 품종의 식물, 나를 가꾸며 삼 년 동안 잘 버텨왔다//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목욕 가운을 활짝 펼쳐 보이고 싶었으나/ 나는 그런 짓이 도덕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용납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블라인드의 각도를 고치며 아내는 투덜거렸다/ 더 밟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하지만 집세를 생각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당신,/ 내가 한 질문에 먼저 대답이나 하란 말이냐!/ 그러나 내가 어떤 질문을 아내에게 한 것인가? 질문을 과연 하기나 한 것인가?/ 를 난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하려 애쓰는 동안/ 태양 빛이 블라인드의 각도를 심각한 수준 이상으로 초월하였으므로/ 방은 속수무책 어두워져갔고 이내 모든 것이 암흑속에 잠겨버렸다// 암흑 속에서 무언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가끔씩 덜그럭거리는 무언가가 암흑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내가 깨어난 것은 놀랍게도 깜박이는 불이/ 2ㅡ>1로 진행 중인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레슬리 집에 와인이라도 한 병 사가야 되는 것 아니냐, 도대체/ 무슨 생각에 그리 깊이 빠져 있는 것이냐고 묻는/ 옆의 아내가 오늘따라 무척 예뻐보였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목욕 가운 펼쳐지듯 활짝 열려,/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을//
갈색 가방이 있던 역 / 심보선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의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 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마,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실어증 / 심보선
나이가 들수록 어휘력이 줄어든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인접적 자의성의 규칙에 따라 평소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훈련 삼이 적어보았다// 베짱, 베짱이/ 사슬, 사슴/ 측백나무, 측면/ 언니, 어금니/ 흠, 흠/ 마음껏, 힘껏/ 벨라, 지오//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생각할 때 다른 단어들도 숙고했을 것이다// 달, 해, 안개, 숲, 구름 …… 같은 것들// 버려진 단어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다// 시인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 TV에서 나오는 낱말 맞히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철없던 시절엔 실어증에 걸리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이 이루어졌다// 약을 먹는데 옆집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말이 안 나온다//
아침의 안이 / 심보선
자니 캐시가 흘러나오는 오를레앙의 카페에서/ 나는 한없이 안이해진다/ 커피를 몇 모금 마셨는데 첫 모금이 어제 일 같다/ 오늘 아침 빵 굽는 노인이 내게 말했다/ 생각은 멀어질수록 단 맛으로 변하고/ 빵은 멀어질수록 쓴 맛으로 변한다/ 그는 오로지 빵의 관점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그것을 나는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여겨왔다/ 아침은 특히 밤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 꿈의 뻣뻣한 뒷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는 적어도 오늘밤은 죽지 않을 거여/ 습관적이고 연속적인 순간들/ 쉽사리 떠오르는 과거들/ 사랑과 무관한 상실들/ 그런 것들을 떠벌리며/ 개자식들이 담배를 나눠 필 때/ 어쩌면 인생 전부가 여기서 간단히 끝난다/ 자니 캐시, 내가 명명한 오늘 아침의 이름/ 그는 안이하게 죽지 않았으리/ 아침은 그의 죽은 이마 위에서 뜨거운 빵이 되었으리/ 나는 카페 주인장에게 한국어로 말하고/ 그는 나에게 프랑스어로 말한다/ 이 노래 자니 캐시야?/ 위위, 자뉘 까쉬/ 우리는 낄낄낄 웃는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러니까 웃을 수 있다/ 처음 만난 두 명의 소년처럼/ 아침, 그 남자를, 그 여자를 잃어버렸다/ 하심! 사샤! 시몬! 로자!/ 나는 이제 모르는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잠에서 깬다/ 죽고 싶었던 순간들만 모아 다시 살고 싶다/ 커피 값을 지불하고/ 무조건 강기슭으로 향한다//
예술가들 / 심보선
우리는 같은 직업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똑같이 견디진 않아요./ 방구석에 번지는 고요의 넓이./ 쪽창으로 들어온 별의 길이./ 각자 알아서 회복하는 병가의 나날들.// 우리에게 세습된 건 재산이 아니라/ 오로지 빛과 어둠뿐이에요./ 둘의 비례가 우리의 재능이자 개성이고요.// 우리에게도 공통점이 있죠./ 죽고 싶은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 우리 중 누군가는 분명 요절할 테지만/ 정작 죽음이 우리를 선택할 땐/ 그런 순간들은 이미 지나친 다음이죠.// 버스 노선에 없는 정류장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볼 때의 어리둥절함./ 그게 우리가 죽는 방식이라니까요./ 보험도 보상도 없이 말이에요.// 사랑? 그래, 사랑이요.// 우리는 되도록 아니 절대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해요./ 검은 수사학, 재기 어린 저주, 기괴한 점괘./ 우리가 배운 직업적 기술이 사랑에 적용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지 않나요?// 옛날 옛적 어느 선배가 충고했죠./ 그대들이 만에 하나 사랑에 빠진다면/ 동백꽃이 지는 계절에 그러하길./ 그것은 충분히 무겁고 긴 시간이라네.// 간혹 우리 중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들려요./ 그러곤 아주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뒷이야기도요./ 우리의 사랑은 사내연애 따위에 비할 수 없어요./ 버스 종점에 쭈그리고 앉아 영원히 흐느끼는 이./ 이별을 하면 돌아갈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이./ 그 사람이 버림받은 우리의 처량한 동료랍니다./ 노동? 그래, 노동이요.//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 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 그가 경찰에게 몽둥이로 얻어터질 때/ 세 명의 피 흘리는 인간이 나타났다네요./ 그중에 겨우 살아남은 이는 조합원이고 죽은 이는 햄릿이고/ 가장 멀쩡한 이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조차/ 못 외우는 초짜 배우였다네요.// 남들이 기운차게 H빔을 들어 올릴 땐/ 저만치서 뒷짐을 지고 콧노래나 흥얼거리지만/ 우리는 사실 타고난 손재주꾼이랍니다./ 공장 곳곳에 버려진 쇳조각과 페인트로/ 불발의 꽃봉오리, 반기념비적인 바리케이드,/ 죽은 동지들의 잿빛 초상화를 담당하는 건 언제나 우리 몫이죠.// 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 사이/ 이를테면 시대와 작업대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서 길을 잇고 길을 잃어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건 고통의 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뭔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라고요./ 우리는 벤담의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해고됐다고요.// 우리는 이력서에/ 특기는 돌발적 충동/ 경력은 끝없는 욕망/ 성격은 불안장애라고 쓰고/ 그것을 면접관 앞에서 깃발처럼 흔들어요./ 그리고 제 발로 문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거에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지독히 외롭게.// 우리의 직업 정신은 뭐랄까./ 살고 싶다고 할까. 죽고 싶다고 할까./ 아니면 조금 유식하게 해방이라고 할까./ 네, 압니다. 알고말고요./ 우리가 불면에 시달리며 쓴/ 일기와 유서는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것을./ 생존? 그래, 생존이요.// 언제부턴가 우리의 직업은 소멸하고 있어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대체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는지./ 모든 공문서에서 우리의 이름 위엔 붉은 X자가 쳐져요.// 기억? 그래, 기억이요.// 나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천개의 눈 / 심보선
하얀 손 창백한 손/ 흐린 초점으로 보면/ 사라지는 은하계 같은 손이/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여자는 소파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다/ 오랜 윤회 끝에 한 천 년 만에/ 이 자세를 되찾았다는 듯이 누구에게도/ 이 자세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이/ 손의 주인이 말을 한다 고마워/ 너를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남자의 손은 여자의 얼굴에서 피어난 연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연못처럼 고요하다/ 둘에서 셋 아니면 셋에서 넷이 되었겠지/ 그 정도겠지/ 왠지 이 방의 가구들은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하다/ 부처가 방금 걸어 나간 적멸보궁 같다/ 이제 당신도 그만 나가보지/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자/ 여자는 바로 늙어가기 시작한다/ 그 자세 그대로/ 소파 위에서 이별을 반가사유하며/ 영원히 늙어가겠다는 듯이/ 남자는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사랑을 일용하였으나/ 생의 터럭 한 올조차 포기한 적 없다/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깊이 파인 흉터이듯이/ 무엇을 쥐었다 베었던가/ 생각은 안 나지만/ 손이 아주 아팠던 기억은 있듯이/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을 되돌아볼 것이다/ 숭고한 영감이라 부르든/ 가혹한 저주라 부르든/ 사랑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그 정도였다/ 이별하고 나자 남자의 손은 점점 평범해져갔다/ 환속한 중의 이마가 빛을 잃어가듯이//
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쓴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축복은 무엇일까 / 심보선
나는 아이가 없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 앞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얘야, 하고 불러/ 멈춰 세운다는 것은, 그때 저 앞에 정지한 그림자가/ 내게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룩임을 알아챈다는 것은/ 아이의 머리칼에 붙은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다는 것은/ 그것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거 봐라, 너를 좋아하는 나뭇잎이다/ 라고 말하며 웃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도 나를 닮은 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먼 훗날 내 죽음을 건너뛰고 나아갈 튼튼한 다리가/ 지금 내가 부르면 순순히 멈춰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내겐 시가 있다/ 내겐 시가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왔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군대 있을 때/ 아버지 장레식장에서// 바로 어저께 회의에서/ 내가 울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증거들/ 그들의 눈높이 아래서 몸부림치는 별빛들/ 한 편의 시가 별자리가 되려면/ 수천수만 명의 시인이 죽어야 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나는 자위를 끝내고 난 다음에 반드시 시를 썼다/ 그것은 마치 부활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당신이 있다/ 당신이 있다/ 나는 당신의 머리칼에서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 적이 있었다/ 당신에게 새 이름을 지어준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을 잊었지만/ 아이가 있었다면 아이에게 해줄 것들을/ 나는 당신에게 해주었다/ 나는 당신이 눈앞에 없을 때/ 허공에서 당신의 얼굴을 골라냈다/ 그것은 너무 쉬웠다/ 나는 당신 없는 허공을 당신으로 채워 넣는/ 청동 시계를 눈동자 안에 지니고 있었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당신과 사랑을 했다/ 당신은 아직도 내 나이를 모른다/ 내가 얼마나 죽음 가까운지 모른다/ 당신은 순진하고 서투른 열 손가락을 가졌다/ 당신은 내 나이를 셀 수 없다/ 당신은 내 나이가 아니라 죽음을 모르는 것이다/ 당신은 모른다// 축복은 무엇일까/ 아이가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는 축북일까/ 아니 그것은 그저 하나의 사실이다/ 나는 모른다/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사실을 소유한 적이 없다// 나는 안다/ 시를 쓰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나 대신 죽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어간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내 아이를 대신해/ 살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연인이 누군가의 행복을 대신해/ 슬퍼하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나의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해 사라지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축복은 무엇일까/ 당신이 나를 부를 때 생기는 귓속의 부드러운 압력일까/ 내 주위에 언제나 나를 좋아하는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당신은 나의 축복일까/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나는 당신을 소유한 적이 없다//
심보르스카를 추억하며 / 심보선
내게는 폴란드 고모님이 있었다./ 그녀는 4년 전 세상을 떴다./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했다./ 실은 생전에 만난 적도 없다./ 나와 공통점이라곤 같은 성에 같은 돌림자를 쓰고/ 둘 다 사회학을 공부했고 시인이라는 사실뿐/ 아, 둘 다 애연가라는 것도.//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달랐다/ 성별, 언어, 성격, 국적, 문체, 정치판..../ 그녀의 집에는 지도와 고서,/ 민속 수공예품, 모던한 모자,/ 잉크자국과 손때가 묻은 목재 테이블,/ 그 위에 깔끔히 정리된 육필원고.../ 내게는 없는 것들이 가득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밤새 침대 맡에서 뜬눈으로 그녀의 꿈을 지키고/ 그녀가 아침식사를 마칠 때까지/ 신문의 1면과 tv의 광고화면을 눈치껏 가려주는/ 그녀의 나이별 체취가 석회암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부드러운 침묵이 그녀의 집에 거주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처럼 잘 때 이빨을 갈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잠꼬대를 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왠지 그녀와 어울리는 것 같다./ 무수한 단어들이 그녀의 무의식을 흘러 다녔을 테니까./ 하지만 이빨을 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단어들은 내 것들과 달리/ 증오의 맷돌에 갈려 부서진 흔적이 없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생전에 그 소식을 접했다면 그녀는 말했을 것이다./ “ 한국에 내 조카가 있다고? 나처럼 사회학을 공부했고 시를 쓴다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꽤나 흥미롭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조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때/ 사람들은 실없는 농담으로 흘려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폴란드어로 씌어 진 그녀의 시에는/ 먼 나라의 모르는 조카에게 들려주는 비밀스러운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우리의 핏줄 안에는/ 우리의 피부 아래에는/ 같은 축복과 저주가 담겨 있단다./ 우리는 앎과 무지, 기쁨과 슬픔을 반죽해서 만든 빵이/ 시간의 선반 위에서 돌처럼 단단해지기를 기다린단다./ 그것의 반은 먹고 -- 이빨을 조심하렴-- 나머지 반으로는 성을 쌓는 거란다./ 우기에는 빗물에 부풀어 거대한 구름으로 솟아오르고/ 건기에는 햇살에 부서져 드넓은 사막으로 펼쳐지는/ 기이하고 경이로운 성을 짓는 거란다. 물론 평생에 걸쳐서 말이야./ 그리고 또 있단다./ 누군가 우리의 책을 읽는다면/ 그들이 망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누군가 우리의 무덤에 꽃을 바친다면/ 그들이 착각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행여나 그녀가 한국을 방문해 내가 찾아갔더라도/ 그녀는 나를 외면하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인사를 건네면 그녀는 유쾌하게 말했을 것이다./ “아하,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그녀가 정답게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는 일은 없었겠지만/ 우리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심오한 문학적 주제에 관한 장시간의 토론은커녕/ 기껏해야 폴란드와 한국의 날씨나/ 좋아하는 도시와 배우에 대한 짧은 한담이었을지라도/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내게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폴란드로 돌아가 시를 썼을 수도 있었다./ "내게는 내가 모르는 한국 조카가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그 시가 그녀의 시집에 실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녀가 죽은 지 4년이 넘었지만.//
심보선(沈甫宣) 시인, 사회학자
1970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인문예술잡지 《F》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문화매개전공 교수로 활동 중이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풍경〉으로 등단했다. 2009년 제16회 김준성문학상, 2011년 제4회 올해의 좋은 시상, 제11회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21세기 전망' 동인이다.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초》《눈앞에 없는 사람》《오늘은 잘 모르겠어》《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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