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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여백의 생리 / 정한모

부흐고비 2021. 6. 29. 09:10

언제나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즐겁다. 운동장은 하나의 화폭(畵幅)이다. 그 많은 여백(餘白)의 미(美)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풍경화라고 생각한다. 여름에서부터 봄까지 계절을 따라 바뀌어가는 자연현상(自然現象)만으로도 이 한 폭 그림은 아름다운 변화가 있다.

눈에 덮인 겨울 아침, 그 깨끗한 이부자리 아래 포근한 잠을 이룰 새도 없이 부지런한 강아지들 같은 아이들은 뛰고 넘친다.

낙엽이 소리 내며 굴러가고, 비둘기들이 잠시 학생처럼 내려와 나래를 쉬고 가는 가을의 오후도 있고, 장마에 갇혀 바나의 표정을 닮은 지루한 날이 개이면, 구름 그늘이 늙은 소사의 청소비처럼 쓸고 지나가는 분주한 여름의 대낮도 있다.

낯익은 아이들이 이별의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고 깨달을 무렵이면, 운동장엔 이미 낯 설은, 그러나 귀여운 새 아이들의 새로운 신발들로 채워진다.

이러한 봄이면 운동장 도 덩달아 신명 있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런 풍경들은 말할 것도 없이 대낮 그 넓은 마당을 채워주는 햇빛의 밝음까지도 운동장은 가장 예민하게 구별하면서 반사(反射)해 준다.

마당가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미루나무들도 단조로운 풍경에 변화와 움직임을 보태주지만, 매일 같이 운동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눈에는, 이러한 변화에서보다도 무표정한 공간과 교착(膠着)된 정지 상태 가운데 더욱 무궁한 운동장의 표정이 드러난다. 아이들이 가득히 흩어져 움직이는 휴게 시간에는, 어지럽게 구겨지기만 하던 얼굴도 무수한 억센 신발들이 일제히 교실로 철수(撤收)한 뒤면, 운동장은 순한 짐승처럼 잘 들리지 않는 글 읽는 소리에 그 늙은 귀를 기울인다.

하얀 체조복들이 무슨 응용미술(應用美術) 도안처럼 늘어서서 움직이는 원경(遠景)도 운동장의 일과(日課)에서는 없을 수 없는 청초(淸楚)한 모습일 수 있으나, 만국기를 느리고 포장이 펄럭이는 운동회 날은 호화로운 차림이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표정을 한다.

파장한 장판 같은 운동회 뒤 끝, 사람들이 즐거움의 찌꺼기만을 사과껍질과 함께 버려두고 가버린 다음, 달빛 아래 운동장은 피곤하게 늘어져 잠이 든다.

긴 여름방학 장마에 뼈가 드러나고 아무렇게나 길러진 수염같이, 풀들이 무성한 운동장은 버림받은 사람의 초췌(憔悴)한 모양 같아서 보기 싫다.

아이들이 돌아간 운동장같이 고요한 표정은 없을 것이다.

허탈(虛脫)과 같은 표정 또는 안식(安息)과도 같은 그 늙은 표정에는 다시 외로움이 깃들고, 운동장은 백지(白紙) 같은 기억을 더듬는다.

이 위에 뛰놀며 자라난 사람들,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이미 땅 아래 묻혀간 사람들을 생각도 하고, 총리(總理)가 되고 장군(將軍)이 된 우수한 사람들, 또한 그 아들이 다시 밟아주는 아래에서 항상 점잖이 누워 있는 운동장은 늙은 선생의 마음처럼 씁쓸하다.

밟고 간 무수한 신발들——자취도 남기지 않고, 지금은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는 발들을 쏟아지던 빗발의 기억처럼 아득히 더듬으며, 오늘도 운동장은 홀로 남겨진 채 어둠에 싸인다.

운동장엔 길이 없다.

백(百)미터의 직선(直線) 코오스도 이백(二百)미터의 타원(楕圓)의 트럭도 될 수 있는 모두가 길일 수 있으면서, 끝내 하나의 방향은 되지 못한다.

아이들은 이 길의 가능성 위에서 저마다의 길의 방향을 찾는다. 마침내 제 길을 찾은 아이들이 모두가 길일 수 있으면서, 끝내 하나의 방향일 수 없었던 운동장을 버리고, 제 길의 방향을 따라 떠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장은 남는다. 영원한 가능성인 채 끝내 하나의 존재도 생명도 될 수 없이 무수히 밟고 가는 발의 무게로 굳어지면서, 가장 분주하고 흥성스런 운동 속에 살면서도, 운동장은 끝내 이렇게 외로운 실재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봄이 오고 가을이 가고, 빗발이 지나가고 낙엽이 구르고, 눈에 덮이면서 영원한 별빛 아래 그 많은 발의 무게가 남겨놓은 여운을 반추(反芻)하며 순한 짐승처럼 누워 있는 운동장에, 오늘은 바람이 불고, 연한 먼지가 일고 있다.

창밖에 조용히 깔려 있는 운동장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마음의 평정(平靜) 같은 것을 느끼는 까닭을 생각해 본다.

나의 마음의 표정과 흡사한 것을, 나는 운동장의 표정에서 읽고 있는지 모른다. 운동장의 표정은 선생의 얼굴 같은 것이다.

학생들이 돌아간 빈 창에 기대어, 나는 오늘도 운동장을 내려다보면서, 흡사 나의 마음의 표정과 같은 것이 침묵 속에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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