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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쑥 캐러 놀러와 / 노정애

부흐고비 2021. 6. 29. 09:13

딸아이와 그림 전시회를 관람한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부터미널 전철역 입구에 야채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몇 개의 소쿠리에 담긴 소박한 야채들 사이에 어린 쑥이 보였다. 2월 중순인데 벌써 나온 것이 반가워 한 소쿠리 사들었다. 다음날 아침상에 쑥국을 올렸다. 지난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졌지만 집안에는 봄기운을 담은 쑥향이 번졌다. 한 입 뜨자 입안에도 향이 가득 퍼졌다. 덜컥 그 선배님이 보고 싶었다. 국을 먹는데도 자꾸 목이 메었다.

내가 수필 쓰는 것을 배우겠다고 문화센터에 갔을 때 선배를 처음 만났다. 수수한 차림의 선한 인상의 그녀는 늘 바빠 보였다. 몇 해는 가벼운 이야기만 하면서 지냈다. 인문학이나 의학,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기도 했다. 결혼 전 간호사로 근무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재력도 있고 강남 대치동에 산다는데 낡은 가방에는 책만 넘쳐났다. 외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명품백 하나 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에게 대신 수강료를 지불해주거나 문우들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면 항상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곤 했다. 이기적이고 속물인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느 해 봄에는 쑥떡을 한 박스 가져와서 ‘쑥이 지천이라 나눠먹어야지’라며 내려놓았다. 방앗간에서 바로 가져왔는지 떡은 따뜻했다. 경기도 광주인 시댁에 가서 직접 캔 쑥이라고 했다. 봄볕에 탄 손등이 쑥떡처럼 보인다고, 정성도 병이라고 농담을 했었다. 그렇게 가을이면 고구마를 박스째 배달시키고 철철이 수확한 농산물들을 교실에 이고 지고 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혼자된 시아버지를 모신다며 선배는 시댁으로 들어갔다. 보금자리를 옮기자 ‘쑥 캐러 놀러와’는 선배의 십팔번이 되었다. 봄이면 주변 사람들을 많이도 불러 모았다. 나도 가까운 사람들과 그녀의 초대로 놀러간 적이 있다. 선배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는 정말 쑥이 지천이었다. 쑥 캐기에 정신을 팔다보니 커다란 봉투를 채우는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을 들고 방앗간에 갔다. 우리가 봉투를 내밀자 주인은 알았다는 말만했다. 선배가 이른 아침에 가져다놓은 쌀은 널찍한 함지에서 잘 불려지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들은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다문화가정을 위한 복지센터를 짓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들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미술 심리치료사 과정도 공부중이라고 했다. 그녀다운 꿈이었다. 열정적인 그녀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랐다. 집으로 갈 채비를 하는 우리들에게 너른 텃밭에서 열무며 얼갈이, 비트 같은 농작물을 수확해서 친정엄마처럼 많이도 챙겨주었다. 방앗간에서는 방금 나온 쑥절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사람들과 나눠먹으라며 봉투가 터지게 담아준 쑥 절편은 한 손으로 들기도 어려웠다. ‘아무래도 선배는 봄 지나면 살림 거덜 나겠다’는 나의 농담에 괜찮으니 또 오기나 하라면서 크게 웃었다.

알아갈수록 속 깊은 선배의 매력에 어느새 푹 빠져 있었다. 세상을 품듯 사람을 품고, 나눔에서 행복을 찾는 선배처럼 되고 싶었다. 아들 셋인 그녀에게 서로 사돈을 맺자고 했는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봉사시간이 늘고 공부할 것이 많아져서 수필반에서는 더 이상 그분을 뵐 수 없다는 게 아쉽기만 했다.

초여름, 밥이나 먹자는 연락을 받고 선배를 만났다. 여전히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헤어지는데 가방에 커다란 봉투하나를 넣어주었다. 쑥 찰떡이었다. ‘냉동실에 넣어두고 간식으로 먹어’ 그녀의 쑥 사랑은 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입이 궁금할 때마다 야금야금 먹었더니 어느새 바닥이 드러났다.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소식을 전하자 내년에는 더 많이 해주겠다고 했다. 선배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쑥이 지천인 봄, 그녀는 투병 중이었다. 1년여 이상을 투병 중이던 지난해 가을, 늘 바쁘게만 지내더니 뭐가 그리 급했는지 서둘러 우리들 곁을 떠났다.

며칠 후 그녀를 좋아했던 글벗들과 산소를 찾았다. 산소는 살았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함께 쑥을 캐며 누볐던 곳들을 눈으로 홅으며 지나갔다. 아직은 저녁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겨울 끝자락이었지만 햇살은 따뜻하게 봉분을 덮고 있었다. 흙으로 덮인 무덤에 엉성하게 올려진 누런 잔디 사이로 어린 쑥 서너 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마치 우리들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쑥 캐러 놀러와’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듯했다. 우리들은 술 몇 잔을 올리고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오래 오래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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