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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느낌 아니까 / 손금희

부흐고비 2021. 7. 1. 19:15

느낌 잘 안다고 한다. TV속 예쁜 개그우먼은 극중 배우다.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날라리 여고생 역할을 할 수 있냐고 묻는 메니저에게 잘 할 수 있다고 하였다. 1년 놀아보아서 그 느낌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맥주에 머리감아도 되냐고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예쁜 개그우먼의 내숭 없는 대답에 TV를 보다 박장대소를 하였다.

요즘 소녀들이 맥주에 머리 감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30년도 더 지난 그때는 그랬다. 염색약이 흔치않아 아버지께서 전날 마시다 남겨놓은 맥주에 머리를 감으면 노랗게 맥주 색처럼 물이 든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참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학교생활에 잘 즉응하지 못하던 친구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쉬는 시간 교실 뒤편에 모여서 했던 말이다. 한참 호기심 많은 세라교복차림의 소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엿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께서 마시다 남겨놓은 맥주에 머리를 감았더니 정말 머리가 노랗게 물들었다는 둥 거짓이라는 둥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던 모습이 스친다.

개그우면의 능청스런 한마디가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심경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동영상이 아닌 스냅사진처럼 스치는 찰나들이 웃음소리에 묻어 날아간다.

얼마 전 아나운서 체험을 하였다. 화면발을 위해 볼그스레한 볼터치로 칙칙한 피부 톤을 가리고, 입술을 이슬에 젖은 꽃잎처럼 붉고 촉촉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쳐진 눈에 속눈썹을 붙여 눈이 평소보다 두 배 정도는 커진 것 같았다.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어색한 느낌 때문에 눈에 힘이 자꾸 주어졌다.

연출자의 사인에 맞추어 카메라가 돌아갔다. 긴장한 탓에 혀가 꼬이는 몇 번의 실수를 하고서야 끝이 났었다. 연출자는 매일 방송하는 프로 아나운서들도 실수를 한다며 일일체험자의 실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위로를 하였다. 여물지 못한 속에 비해 요란한 메이크업이 민망하고 쑥스러웠다.

문득 오래전에 만났던 지인이 떠오른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면 유독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녀는 아주 멋있는 여성이었다. 잘 차려 입은 옷과 튀지 않는 자연스러운 화장술은 청순가련하게 보였다. 그리고 우아한 몸짓으로 귀티를 더 하였다. 어디를 가나 주위의 시선을 잡았다. 그러나 이내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하였다. 순화되지 못한 거친 말투와 세련되지 못한 정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녀는 잘 차려입은 옷과 화려한 화장술로 자신감을 얻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런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고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녀가 이 순간 오버랩이 되다니 쓴맛이 입안에서 가시지 않는다.

눈을 치켜 뜰 때마다 밀려오는 어색함에 처음 속눈썹 붙였던 날의 느낌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풀 먹인 광목이불을 처음 꺼내어 덮던 날의 느낌 같았다. 할머니는 뻣뻣한 것이 가실가실해서 좋다고 하셨지만 움직일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뻣뻣한 것에서 전해지는 차가웠던 느낌은 어린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 지금처럼…….

처음 속눈썹을 붙였던 날은 결혼식 날이었다. 화장이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신기하였다.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뒤에 붙인 속눈썹은 화룡정점이 되어 낯설게 하기의 완벽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한 오빠의 손을 잡고 예식장으로 들어갔다. 오빠의 손은 따뜻하고 편안하였다. 하지만 오빠의 손을 물리고 다른 사내의 손을 잡았다. 돌아서는 오빠는 마주선 사내의 눈과는 달리 눈시울이 촉촉한 게 마치 봉선화를 곱게 들인 붉은 손톱 같았다.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을 즈음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얇은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는 어머니는 가을 산등성이에 피어난 구절초처럼 가냘프고 쓸쓸해 보였다.

울컥 소나기 같은 눈물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엔 곱게 한 화장이 번지는가 싶더니 속눈썹마저 떨어졌다. 화장을 고치며 다시 붙였던 속눈썹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생 처음 속눈썹을 붙였던 그날은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지난 봄내 햇살을 받으며 보일 듯 말 듯 피어있는 야생화를 찾아 다녔다. 몸집이 하도 작아 보기 쉽지 않는 꽃들은 돋보기의 일종인 루페로 보아야 했다. 크고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사로운 숨결이 허허롭던 마음을 덥혀 주었다.

몸을 낮추고 본 세상은 아름답고 고결하였다. 전혀 상상 하지 못하였던 숱한 생명들이 내 삶에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어 있다는 평범한 진실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어색한 속눈썹의 불편함에 잠시 기대를 걸어본다.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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