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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감히 도전장을… / 손금희

부흐고비 2021. 7. 1. 19:33

폐지 더미에 섞여있기에는 참 고운 책이다. 들고 갔던 신문뭉치를 옆에 놓아두고 폐지 위에 놓여 있는 동화책 한 권을 주워 이리저리 살펴본다. 누군가가 금방 내려놓고 간 모양이다. 찢어지거나 낙서가 남겨진 것도 아니고 그림도 큼직하고 표지가 무척 고급스러워 보인다. 속지를 들여다보니 활자가 크고 선명하며 그림들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어린이들이 보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진 창작 동화책이다.

‘누가 내려놓고 갔을까,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새 책을…….’

아깝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주변에 돌려 볼 어린아이가 없다. 슬며시 자리를 옮겨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놓고 발길을 돌린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네 살 많은 오빠가 처음으로 동화책을 두 권 사 주었다. 음악 감상과 책 읽기를 좋아하던 오빠는 아마도 어린 동생이 동화책 한 권 읽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헌책방에서 ?톰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사다 주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당연히 온 동네 아이들은 모여 뛰어 놀기에 바빴지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뜬금없는 오빠의 책 선물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좋았다. 하늘색 표지가 어쩜 그리도 맑고 깨끗하게 보이던지 한동안 손에서 내려놓지를 못했다. 지금도 그때 그 책 표지 만큼 맑은 하늘색은 몇 번 보지 못한 것 같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동화책을 개인적으로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학교에 갈 때면 가방에 넣고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책을 읽으려면 할머니는 집안일을 돌볼 수가 없었다. 톰의 모험이 어린 마음에 어찌나 아슬아슬하고 무섭던지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읽었기 때문이다. 한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고 또 읽고 하였다. 심지어 책을 베고 자면 머리에 내용이 더욱 잘 들어온다는 오빠의 놀림 말을 참말로 듣고 한동안 책을 베고 자기까지 하였다. 그런 동생이 측은 하였는지 오빠는 두어 달 쯤 지나 '비밀의 화원'이라는 책을 한 권 더 사다 주었다. 비밀의 화원을 읽을 때면 집안 가득 맑은 웃음소리와 향긋한 꽃 내음이 진동을 하는 것 같았다. 유년 시절의 독서는 그렇게 두 권의 책이 닳도록 번갈아 읽은 것이 전부였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우연히 친구 집에 들렀다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언니가 쓰던 방을 친구가 잠시 쓴다며 방으로 데려갔다. 개인 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는데 방의 크기에 또 한 번 놀랐다. 넓은 방에는 침대와 책상이 있고 큰 책장에는 제목만 보아도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여성잡지가 흔치 않은 시절임에도 언니는 매달 잡지를 받아 보았다한다. 그 여성잡지의 부록이 세계명작이었는데 언니는 그 책들을 방 한구석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신기하기도하고 어떻게 저 많은 책을 모았을까 다 읽어 보았을까 궁금한 눈길로 둘러보다 책 한 권에 사로잡혀 버렸다. 교과서보다 약간 크기가 크며 글자는 깨알 같고 이단으로 쓰여 있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대관절 누가 누구를 위해서 왜 종을 쳤을까 하는 궁금증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친구에게 얘기하니 흔쾌히 빌려주었다.

학교를 다녀와서 집안일을 도와가며 읽으려니 책장이 좀처럼 넘어가질 않았다. 잠자리 들기 전에 책을 펼치며 몇 장 읽지 않고 잠이 들기가 일수였다. 그림이라고는 한 점 없고 책은 왜 그리도 두꺼운지 흥미롭게 책을 읽기 시작하였던 것이 어느 순간 지겨워짐에 오기가 발동하여 꼭 다 읽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한 달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그 두꺼운 책이 겨우 삼일 동안의 일을 엮은 것이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번 일기를 쓸 때면 선생님께서 밥 먹고 학교 갔다 오고 잠자는 것 빼고 쓰라고 하시면 한 줄이나 두 줄을 쓴 후 더 이상 쓸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는 밥 먹은 것, 다음 날은 학교 갔다 온 것, 그 다음 날은 양치하고 잠잤다고 쓰면서 나름 머리를 굴려야만 겨우 하루 일기 분량을 대여섯 줄 정도로 채웠었다. 그런 15세 소녀에겐 헤밍웨이라는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막힘없는 문장과 개성 넘치는 인물 하나하나의 묘사력이 경이롭고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그 충격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를 거의 매일 학교도서관에서 보내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도서관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내려갔다. 한번은 종교 개혁자를 묻는 시험문제지에 위클리프가 아닌 에밀리 브론테가 지은 ?폭풍의 언덕? 주인공인 히스클리프를 적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고교입학을 위한 연합고사시험을 앞두고 친구들이 밤을 새워 가며 공부를 할 때 역시 밤을 새며 읽은 책의 주인공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다 언젠가는 헤밍웨이에 버금가는 작품을 한 편 쓰고 싶다는 욕구가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어쩜 편지들은 15세 소녀의 당돌한 도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폐지 속의 동화책도 꿈 많은 어린이의 디딤돌 역할을 충분히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지은이가 한없이 부럽다. 책의 맛을 알게 한 동화책 두 권과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한 권의 책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꿈을 꾸게 하기에는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도 채워지지 못한 순수했던 욕구는 채찍이 되어 껍질뿐인 글쟁이의 내면을 송두리째 담금질을 한다. 시들지 않는 꿈을 소박한 꿈을 누군가의 꿈을 대신하고 희망이 되어 줄 수 있을 때까지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 다가갈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화단에 핀 맑고 고운 코스모스의 가냘픈 몸짓도 어쩌면 다가올 겨울에 대한 도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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