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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과 원문


우리 선비들에게 가장 절실한 공부는 오직 하학下學입니다. … 이는 입으로 말해줄 수 없고 모두 실제로 힘써 공부하여 그 진위를 체험해야 합니다.

吾儒着緊用工, 專在下學. … 此不可以口傳, 都在着實用力, 以驗其眞僞.
오유착긴용공, 전재하학. … 차불가이구전, 도재착실용력, 이험기진위.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순암집(順菴集)』권8 「황이수에게 답하다[答黃耳叟書]」

 

 『순암집』은 순암의 문인 황덕길(黃德吉)이 편집하고 안경위(安景?)가 재차 편차하고 교정한 것을 저자의 5대손 안종엽(安鍾曄)이 1900년에 목활자로 간행하였는데, 모두 15책이다. 원집(原集)이 26권 14책이고, 연보와 행장이 부록 1책으로 붙어 있다. 순암 안정복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동사강목(東史綱目)』, 『열조통기(列朝通紀)』, 『잡동산이(雜同散異)』, 『임관정요(臨官政要)』 등 50여종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순암의 학문과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은 문집 『순암집』이다.

 

해  설


순암(順菴) 안정복이 72세 되던 해(1783년), 자신에게 간절히 공부의 방법을 묻는 제자 황이수(黃耳叟)에게 보낸 답장에서 한 말이다. 황이수는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다. 그는 형인 황덕일(黃德壹)과 같이 안정복에게 배웠고,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순암의 정갈한 순암연보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그 학문을 성재 허전(許傳, 1797~1886)에게 전했다. 순암의 수제자였던 셈이다.

후에 이토록 각별한 사승으로 이어진 제자, 이를테면 순암의 학문의 도를 전하여 결과적으로 성호학파의 학맥을 이은 황덕길에게 순암 안정복은 “우리 선비들의 절실한 공부는 하학”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입으로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에서의 공부를 통해 그 진위를 체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상의 공부와 그를 통한 진위의 체험은 수도사의 그것처럼 경건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것이지만 당장 실천할 착수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순암은 황덕길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학문하는 방법으로 글을 널리 읽되 반드시 자득을 중시할 것이며 많이 알아서 그것으로 덕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당시 주변에서 유행하던 것처럼 남들이 모르는 놀라운 일이나 기이한 이야기들을 주워 모아 많이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체험해야 하며 그러한 진실한 공부를 오랫동안 쌓아 자연히 이치에 관통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순암은 고원한 담론이나 신기한 학설을 찾아내는데 힘쓰는 풍토를 비판하며 몸과 마음에 와닿는 진실한 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고원한 담론과 신기한 학설! 이에 대한 비판은 한편으로 현대 학문의 관점에서는 생소하게도 느껴진다. 고원한 담론은 지적인 토론이 지니는 기본적인 성격이며 창의적인 생각은 앎의 세계에서 열어가야 할 활로가 아닌가?

순암은 학문이란 응당 당시의 폐단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암은 당시의 학자들이 성명(性命),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분변에만 골몰하여 오늘 배운 것을 내일 말하고 다니고, 스스로 자신의 학문이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꿰뚫었다고 자부하는 세태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순암은 그 귀결이 “기생이 예경(禮經)을 외우는 것”과 다름이 없어 전혀 유익이 없다고 일갈했다.

그는 퇴계가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우선으로 삼아 도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당시로서는 시의적절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의리의 설이 보편화되었으므로 ‘손으로 청소하고 시중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일들을 수행할 때라고 역설했다. 아직도 도의 근원을 밝힌다는 명분으로 도학(道學)에 골몰하는 것은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학문”이라고 매섭게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순암의 생각은 이십대에 작성한 『하학지남(下學指南)』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그는 하학을 해야한다는 주장의 말미에 “가만히 그 행실을 따져 보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면서도 상달을 모르는 것만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학문을 해도 덕성(德性)이 끝내 성립되지 못하고 재기(才器)가 끝내 성취되지 못하여 여전히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으니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그 취지를 설명한 바 있다.

그렇지만 “내가 평소 강론하고 들은 바를 말할 곳이 없고 오직 자네 형제에게 기대할 뿐”이라고 토로한 것에서도 보듯 순암의 몸과 마음에 와닿는 진실한 공부, 하학(下學)에 대한 간절한 주장은 당시에도 널리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다만 그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새긴 황덕길은 자신의 호를 하려(下廬)라고 했고 그 제자 성재 허전은 김해부사가 되어 경남의 여러 선비들을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는 ‘하학잠(下學箴)’도 있었다. 1900년대를 전후하여 성재 허전의 문집과 순암 안정복의 문집, 나아가 순암의 스승이었던 성호 이익의 문집이 차례로 그 지역에서 간행되었다.

마음에 와닿는 진실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시대인들 없을까?

다시 우리 시대의 학문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글쓴이 : 함영대(경상대학교 한문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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