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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에 나는 외갓집 툇마루 끝에 앉아 혼자서 시간 보내는 걸 아주 좋아했다. 그 마루 끝에 오래도록 앉아 있으면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곤 하였다. 굼벵이는 왜 썩은 초가지붕 속에 웅크리고 사는지, 매미는 왜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어대는지, 장마철 산에 나는 버섯은 왜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것일수록 화려한 빛깔을 띠는지, 단풍은 왜 산꼭대기부터 붉은 물을 들이면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지, 속이 벌어진 석류를 볼 때마다 왜 옆집 누나가 화들짝 웃을 때의 잇몸이 겹쳐지는지,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재미난 생각들이 꼬리에 고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동무들하고 어울려 노는 대신에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는 것도 싫지 않았다. 빗물이 마당에 크고 작은 왕관 모양을 만들며 떨어지는 것을 쪼그리고 앉아 살피는 재미도 꽤나 짭짤했던 것이다. 그리고 빗물이 고랑을 이루며 흘러 개울이 되고 강이 되고 더 멀리 가서는 바다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나 혼자 오도카니 시간을 보낼 때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동무들하고 망아지 같이 뛰어 노는 일보다 외톨이로 보내는 시간을 더 즐겼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지금 외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어릴 적에는 혼자서 이런 저런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외로워할 시간들을 점점 잃어버린 나 자신과 우리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2
내 젊은 외삼촌 방에는 자그마한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새 두 마리가 둥지 속에 낳아 놓은 알을 내려다보며 사이좋게 앉아 있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외삼촌은 그 액자가 친구한테 선물을 받은 것이라면서 은근히 자랑을 했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이발관 그림'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방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으면 늘 그 액자가 눈에 들어와서 나는 그림과 함께 거기에 적혀 있는 시를 속으로 몇 번씩이나 읽곤 하였다(그게 과연 어느 시인이 쓴 시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는 외삼촌이 시라고 그랬다.)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둘은 알뜰히 사랑했더랍니다.
영원토록 행복을 수놓으며
사랑의 초원에서 살았답니다.

아마도 결혼식 선물용으로 제작된 게 아니었을까 싶은 이 액자의 '시'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외로워 둘이라는, 이 밑도 끝도 없는 경구를 오랫동안 흠모하면서......

그리고 나는 학교를 마치고, 군대를 갔다 오고,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알뜰한 사랑과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며 살아왔다. 어디 비단 나뿐이랴. 이 땅의 대부분의 선남선녀들은 비슷비슷한 경로를 거치면서 영원히 사랑의 초원에서 살아가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하나가 외로워 둘이 되었으니,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랑의 초원은 영화 장면처럼 우리 앞에 저절로 펼쳐져 있는 게 아니다. 삶이란, 그 초원에 다다르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설혹 누군가 사랑의 초원에 다른 사람보다 일찍 당도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전쟁터는 외로움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곳에서 외로움을 즐긴다는 것은 정신 분열의 증세나 사치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삶이라는 이 끝없는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꿈꾸는 사랑의 초원이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물어 봐야 한다.

3
한 번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빼보려고 하다가 무척 애를 먹은 적이 있다. 책을 정리할 때 어찌나 빼곡하게, 어찌나 빡빡하게 책을 꽂아 두었던지 영 빠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손가락 끝이 벌겋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손이 아팠지만 책은 좀처럼 빠져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좁은 방, 좁은 책꽂이에 한 권이라도 더 많이 책을 꽂아 보려는 내 과한 욕심 탓이었다.

그 때 문득, 나도 빡빡한 책꽂이에서 빠지지 않는 한 권의 책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마를 치고 갔다. 그래, 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지금 그렇게 끼여 있는 것이었다. 아니면 약간의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고, 헐거운 틈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아등바등 만원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여기까지 달려온, 아직도 철들지 못한 까까머리 통학생이거나.

그래서 나는 좀 천천히 살아 보자는 요량으로 작년 봄에 10여 년 동안 정 붙이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글쓰기와 가르치기라는 두 개의 축에 의지해서 정신없이 달려온 내 삶을 느리게 가는 수레 위에 싣고 싶었다. 나는 정말 온몸으로 글을 쓰고, 온몸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좀 더 열심히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가르치는 일이 소홀해지고, 좀더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작정을 하면 알게 모르게 글 쓰는 이에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헐레벌떡 쫓다가 그 두 마리를 다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살아갈수록 외로워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잃어버린 나의 외로움을 찾는 길을 택하고 싶었다. 내가 몸에 꼭 죄는 바지를 싫어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그런 바지를 즐겨 입는 사람을 보면 더러 안쓰럽기까지 하다. 헐렁헐렁한 바지가 입고 다니기에도 여유롭고 벗을 때도 편하지 않겠는가. 외로움은 좀 헐렁헐렁할 때 생기는 게 아니겠는가.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는 일찍이 60년대 초반에 인간의 탐욕과 질투심이 결국은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거대 기업에 의한 대량 생산 체제가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현대 문명은 인간으로부터 외로움을 빼앗아 간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더 많은 것을 내다 팔기 위해 끊임없이 웅웅대며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도대체 인간은 외로워할 틈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윤이 인간의 외로움을 상쇄시켜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한낱 기계가 인간의 외로움을 어찌 알기나 하겠는가.

다가오는 21세기는 그동안 인류가 외로움에 굶주렸다는 것을 자각하는 세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외로운 일 좀 있어야겠다'는 말이 인류의 공동 구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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