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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오수(午睡)를 즐기다 맑은 새소리에 정신이 들어 창밖을 보니 겨울 햇살이 반짝이고 있다. 나는 숄을 두르고 뜰로 나선다. 싸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깃털이 하얀 새가 옆집 나무숲을 들락거리며 바쁜 날갯짓을 하다가 쏜살같이 앞집 정원으로 숨어버린다. 어찌나 잽싼 동작인지 잠에서 깬 내 눈으로는 쫓아가기조차 힘들다. 조금 전 무슨 꿈을 꾸었는지 생각이 아득해진다. 어딘지 먼 곳을 다녀 온 것 같기도 하고 꽃이 핀 들판을 헤매다 온 것 같기도 하고…….

뜰은 비참하리만큼 얼어붙어 있다. 모든 생명이 언 땅 속으로 숨어 버렸다. 할미꽃 순의 흰솜털만 흙 속에 묻혀 조금 보인다.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던 도라지, 매발톱은 흔적조차 없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그리며 지난 여름을 잠시 생각해 본다.

철쭉, 모란, 진달래 그리고 여러 빛깔의 풀꽃들이 이 정원에 피어 있었단 말인가! 지금 겨울 정원에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 꽃자리는 더듬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다. 할미꽃 솜털의 흔적만 보고도 자줏빛 벨벳 꽃잎을 그려보고 그 옆으로 보랏빛 도라지꽃과 진주빛 메발톱 꽃을 그려본다.

같은 매화나무를 보아도 그 나무의 역사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 아름다움이 다르게 느껴지듯이 그 있던 자리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과는 같은 흙자리를 보더라도 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달리는 차 속에서 얼핏 지나간 나무의 이름을 대며 그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아 있던 나는 그 나무가 보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나무에 관해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못 보는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외로워졌다.

달리는 차 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의 감미로움에 푹 빠져 있을 때 옆에서 "그 볼륨 좀 높이지." 하는 이가 있으면 순간 피부에 닿는 멜로디의 느낌이 훈훈하게 전달되지만, 반대로 "그 볼륨 좀 낮추지." 할 때는 마음이 곧바로 벼랑으로 곤두박질치며 갑자기 외롭고 쓸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런 경우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은 나와 과(科)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은 여러 종류의 과(科)로 나누어져 있다. 식물이라면 장미과, 가지과, 오이과, 라든지 동물이라면 고양이과 늑대과……, 이런 식으로 학자들은 나누어 분리한다. 인간도 같은 과에 속하는 사람이면 그 기질이 같아서 세상을 보는 눈과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 새를 좋아하는 사람들, 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함께 보고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세상에 살면서 제각기 다른 세계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외로운 일인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을 때면 더욱 그렇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렇게 물어 볼 때가 있다. 남편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서로 눈짓으로라도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해의 미소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신비롭고 기쁜 일일까?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세상의 크기에서 보고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만 선명히 보이는, 잘 들리는 세상이 따로 있다고 본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사람은 세상을 보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대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같은 나무라도 시인이 보는 나무와 목수가 보는 나무는 다르듯이.

불교에서는 사람이 지니는 육안(肉眼), 하늘 사람들이 지니는 천안(天眼), 불교 선현인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혜안(慧眼), 보살이 지니는 법안(法眼), 그리고 앞의 네 가지 안(眼)을 다 갖춘 부처의 불안(佛眼) 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눈은 육안에 그치고 만다. 안경의 도수를 높이듯 안목(眼目)을 높여야 세상을 깊고 넓게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세상을 눈으로 보는데 판단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은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잠시 잊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하면서 실망하고 가슴 아파 한다.

담 밑으로 무엇인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한발을 들고 동작을 멈추고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과연 고양이의 실체를 보고 있는 것인가, 과연 그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잠시 법구경의 우암품(愚闇品)중에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

"안 보이는 것은 없다. 내가 못 보는 것이다. 안 들리는 것은 없다. 내가 못 듣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은 없다. 내가 못 하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이 새로운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다. 얼어 죽은 한 포기의 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개미들의 행렬, 가느다란 풀벌레의 소리, 이런 것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이들을 찾아보는 노력을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나무에 귀를 대고 수액이 흐르는 소리를 탐지하려고 하고, 공중에 날아가는 새들의 발자국을 찾아보려고 한껏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글을 쓰는 일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안되는 일을 보이게, 들리게, 되게 하는 작업인 것 같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사는 세상을 넓혀가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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