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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 최연

부흐고비 2021. 7. 21. 10:48
번 역 문


아, 흥하고 망하는 것은 운수이고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행운이 작용한다. 어찌 사람만 그렇겠는가. 산천과 누정이라도 역시 그렇다. 예전의 황폐한 구릉과 끊긴 언덕이 지금 화려한 건물로 변하여 빼어난 사람들과 글 짓는 이들이 머무는 곳이 되었으니, 운수가 그 사이에 없었던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누정이 나를 통해 이름을 얻은 것은 만났다고 할 수 없고 나의 시가 또 정채를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 누정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의 이번 일을 계기로 함께 영원토록 남을 것이니, 만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조악한 시가 부질없이 장독을 덮을 만하다 한들 또 무슨 문제이겠는가.

 

원 문


噫, 興廢, 數也, 遇不遇, 幸也. 豈獨人然? 雖山川亭榭亦然. 昔日之荒丘斷壟, 今轉成華構, 爲高人騷客之攸芋, 數未始不存乎其間. 然斯亭之假吾得名, 不可謂之遇也, 吾詩又不能發輝精彩, 豈非亭之不幸? 而吾之猶托茲事而俱永, 則是不可不謂之遇, 而亦不可不謂之幸也. 若爾, 吾之惡詩, 雖漫醬瓿, 其又何嫌?

-최연(崔演, 1503~1549), 『간재집(艮齋集)』 11권, 「집승정기(集勝亭記)」

 

 

해 설


예천(醴泉)에 집승정이라는 누정이 있었다. 여러 승경(勝景)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다는 이 누정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1541년(중종36) 여름 이 누정의 주인인 안승종(安承宗, 1484~?)은 자신과 같은 해에 생원시에 입격한 작자를 초대하며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한다. 당시 휴가를 청하여 성묘하러 병산(屛山)에 갔던 작자는 서울로 돌아갈 때 예천에 들러 주인과 함께 이곳에 오르게 된다.

오르고 보니 과연 절경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누정은 아래로 땅이 없는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으며, 소라처럼 푸르게 솟아오른 산들과 옥처럼 맑은 물줄기가 쏟아지는 시내가 시야로 다투어 들어왔다. 여기에 앉으면 남쪽 지방의 승경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경관뿐이랴. 이곳에는 청해군(靑海君) 이우(李堣)와 군수(郡守) 문경동(文敬同) 등 당대 거장들의 시가 남아 있었다. 주인은 훌륭한 경관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시까지 모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름이 될 만한 경관이 없는 것도, 이름을 붙일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름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승경을 단 몇 글자로 포괄하여 형언하기 어려웠거나, 마음은 경관을 탐닉하고 정신은 술과 시에 빠져 이름을 붙일 겨를이 없었으리라. 작자는 이와 같이 유추하고는, 감히 할 수 없다며, 이름을 지어달라는 주인의 청을 사양한다.

함께 갔던 이들과의 술자리에서 주흥이 점차 거나해져 걷잡을 수 없어질 무렵, 작자는 문득 붓을 휘둘러 ‘집승정’이라고 썼다. 이름이 될 만한 승경이 많아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면 그 승경들이 모여 있는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명명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까. 집승정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지어진다.

그날 대취하여 자리를 파한 이후로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작자는, 같은 해 가을 집승정의 열 가지 풍경을 소재로 시를 지어달라는 주인의 청에, 잊고 있던 여름날의 기억과 마주한다. 그 당시 자신의 행동이 놀랍고 부끄럽다고 하면서도 주인이 보낸 시재(詩材)에 시를 붙이고 집승정의 명명에 얽힌 사연을 기문으로 적는다.

‘고을 성의 새벽 나팔 소리[郡城曉角]’, ‘산사의 저물녘 종소리[山寺暮鍾]’, ‘먼 숲의 흰 안개[遠林白煙]’, ‘긴 다리의 낙조[長橋落照]’, ‘당동의 봄꽃[堂洞春花]’, ‘학봉의 가을달[鶴峯秋月]’, ‘노포 목동의 피리소리[蘆浦牧笛]’, ‘전탄의 고기잡이 불[箭灘漁火]’, ‘북산을 지나는 비[北山行雨]’. ‘남천에 날리는 눈[南川飛雪]’

당시 주인이 작자에게 보낸 시재는 위와 같고, 이는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구봉령(具鳳齡) 등에게도 전해져 집승정의 경관을 노래한 시로 각각 그 문집에 전한다. 꼭 맞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 시들의 내용을 조각조각 연결해보면 계절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집승정과 그 주변 경관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백여 성상의 시간을 거슬러 당시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작자가 위 기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인의 ‘이름을 좋아하는 병통[好名之病]’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이름에 대한 주인의 욕망은 누정에 이름을 붙이고 주변 경관을 시재로 한 시를 얻게 했으며, 결국 명사들의 문집에 남아 영원히 전할 수 있게 한 셈이다.

영원에 비기자면 순간에 불과한 삶을 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영화는 잠시 땅을 점유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살이야 모두 다 한때의 일이고 덧없이 흘러갈 뿐이지만, 그때를 증거할 수 있는 표지가 남아 다른 시공간 속에 사는 이가 그 시공을 엿보아 그 삶의 흔적을 알 수 있다면 그래도 그 생은 조금이나마 유의미해지지 않을까.

마음에 쏙 드는 경관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그 가운데서 평생 마음을 나누고 가눌 사람을 만나기는 더 어렵다. 작자가 생각한 ‘집승’이라는 말에는 훌륭한 경관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람까지 포함되고, 그 무게 추는 사람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이 승경 속에서 세상을 사절하고 혼자만 즐긴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시문으로 어울렸기 때문이다. 주인의 그림에는 승경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그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과 그들이 마음을 나누었던 흔적인 시문이다. 이것이 안승종이 집승정을 평생의 호로 삼았던 이유이리라. 훌륭한 경관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람까지 모여 있는 이 공간에서 사는 것이 나의 삶이고 나의 이름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절경만이 훌륭한 경관은 아니고 천하의 명사만이 훌륭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 몸을 부치고 있는 공간과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나에게만은 가장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 늘 주변에서 당연하게 만나왔던 대상들의 가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순간 내 삶의 격도 높아진다.

글쓴이 : 강만문(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간재집>은 몇 가지가 있다.

① 艮齋集 : 조선 중기에 최연(崔演)이 쓴 시문집. 많은 부분이 일실되어 일부만이 전한다. 최연이 평소에 회포를 읊은 시를 수록했으며, 동지상사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명승고적과 그때의 감회를 적고 있다. 12권 6책의 목활자본. 

艮齋集 : 조선 중기에 이덕홍(李德弘)이 쓴 시문집. 왜적에 대한 방어책과 생활 태도에 대한 신념을 적고 있다. 본집 74, 속집 53책과 필사본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216

艮齋集 : 조선 후기에 최규서(崔奎瑞)가 쓴 시문집. 최규서의 성장 과정과 교우 관계 및 정치 경력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로 사용되고 있다. 157

艮齋集 : 조선 후기에 채징휴(蔡徵休)가 쓴 시문집. 1934년 후손 채충석(蔡忠錫)이 간행하였다. 42책의 석인본.

艮齋集 : 조선 말기에 전우(田愚)가 쓴 시문집. 구한말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도학적 관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목록 1, 원집 4321, 속편 168책과 별집 15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7438

簡齋集 : 조선 중기에 변중일(邊中一)이 쓴 시문집. 차운시와 행장, 묘갈, 정려 후기 따위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군무에 종사하면서 나라를 걱정한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21책의 목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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