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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문인수 시인

부흐고비 2021. 7. 29. 09:09

꼭지 /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하관 / 문인수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앞과 뒤 / 문인수
포항 공동어시장 구판장 비닐 좌판 위에/ 이제 막 죽은 문어 두 마리가 잘 펴져 있다. 而 而/ 雨 雨, 길게 빠져나가는 슬픔은 이제 뉘 몫인지./ 한 마리, 아직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놈/ 제 몸이 현재시각 무엇인지 급히,/ 그러나 참 느리게 한 군데도 빠뜨리지 않고 다 만져본다./ 치명으로 가는 저 열렬한 활동이라니,/ 뒤에서 누가 날 보는 것 같다./ 목전에서 잠시, 혹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의 아픈 기억 속에서라든지 아무튼/ 건조과정을 거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식당의자 /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 지체 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 문인수
너를 간직하려 한다./ 눈을 감으면 여러 가지 냄새가 몰린다. 버려져/ 바닥에 뒹구는 것들, 이 여러 가지 냄새를 음미하며 눈을/ 감으면/ 몸을 떠난 이름들이 비로소/ 가슴 깊숙이 들어와 가만히 가라앉는다.// 악취는 가련하다.// 썩은 생선 대가리며 삶은 고양이, 녹슨 쇠사슬...... 무두/ 질의 어둠이 어둑, 어둑, 더러운 거리를 절일 떄 한 떨기!/ 자두 파는 어여쁜 소녀가 지나간다.// 향기가 "죽인다."/ 저 장미 백만 송이를 따 끓여낸 영롱한 눈물 한 방울의 고요,/ 이것이 향수다. 마지막으로 번지는 영혼의 반경이여,/ 사랑은 참 힘이 세다.//

낡은 피아노의 봄밤 / 문인수
낡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아이들이 자라 스무살이 훨씬 넘는 동안 또 몇 년/ 뚜껑 한번 열린 적 없을 것이다. 피아노 속은 지금/ 콩나물 대가리가 다시 수북하게 자란 저녁일까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언제나/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채 저도 헌집, 무겁게 내려앉은 피아노는/ 컴컴한 벽돌조 양옥 같다. 문턱처럼 걸리거나/ 저녁노을처럼 걸리는 감정들은 뜰에, 저 서너 개/ 큰 독에다 묻었겠다. 잘 삭혔을까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어두워진 것처럼 꽉 다문 입,/ 속은 구린내나겠지만/ 흉금이란 그러나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록하게 글썽이는 것,/ 반짝반짝 올라가 하염없이 공중에 쌓인 소리,/ 뚜껑 밤하늘엔 별 총총 수심도 많겠다. 명멸, 명멸, 명멸,/ 사소하게 일일이 다 접으며 또 그렇게/ 겨울 보냈으리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기나긴 눈보라 주먹만한 눈발,/ 피아노는 폭설 창고일까 기쁨이거나 슬픔,/ 저 목련 폭발 환한 야음이다. 야반도주처럼 훨 훨,/ 봄날은 또 사정없이 날새누나. 두 팔 벌려 무너지듯/ 누가 이 피아노를 한번 힘껏 눌렀겠다.//

오후 다섯 시 -고, 박찬시인 영전에 / 문인수
내가 한 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 부음을 듣는 순간 더러 그렇다./ 그에게 내가 지긋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갑자기/ 밑돌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 낡은 읍성 같다.// “조금 전, 오후 다섯 시에 운명했습니다.” 2007년 1월 19일./ 그의 이마 쪽 초록 머리카락 한 줌,/ 염색이 아니라 섣달/ 시린 바람 아래 웬 생풀처럼 나부낀다./ 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 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 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

미완이다 / 문인수
​어딜 멀리 갔다가 되돌아가는 길인가 보다./ 인각사 돌부처 한 분이 천 년 비바람에 많이 닳았다./ 거의, 한 덩어리 바위에 가깝다.// ​그 앞에서 찍은 내 독사진이 있다./ 왕복 어디쯤서 만나 잠시 겹친 것일까, 들여다보니/ 둘 다 미완이다. 지쳐/ 돌아가는 길이 함께 적적, 막막할 뿐이다.//

         봄날은 간다 4절 / 문인수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 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남행하게 된다 / 문인수
서울은 객지의 총 본부 같다, 투덜대고 싶다./ 서울역에 내릴 때마다 대뜸 낯설다. 대낮인데도 덜컥,/ 저물 것처럼 왁자지껄하다.// 이제 저 엄청난 인구가 모두 널 모를 것이니, 뭐든 짊어지고 너 혼자 걷게 될 것이다./ 마음을 에워싸는 먹물 같은, 노숙 같은 그늘이 당연/ 전국에서 가장 크고 침침하고 눅눅할 것이다.// 집에 가고 싶거나, 집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서울 가면 풀린다. 서울역에 내리면 곧장 그길로 되돌아가려는 마음이 바로 집이다./ 탈출하라, 늦어도 당일 일몰 전 오후 4시를 넘지 마라.// 유동인구 속에서도 여지없이 들킨다. 사방 천 리가 적막한/ 그 어둠의 투망이 대로상에서 하필 널 덮칠 것이다.//

주산지 / 문인수
허리까지 물에 들어간 양버들 여러 그루가 다 늙도록, 썩어 자빠지도록 나오지 않고 있다/ 눈보라, 비바람의 세월을 뚜벅뚜벅 걸어 여기 당도한 보폭이겠다/ 저 악산 늠름한 전모가 물에 비쳐 온전하지만 가파르다, 사납다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까지도 물오리 한 마리를 풀어 금세 다 지우시는/ 어머니, 이승에 홀로 남아 지금 깊으시다/ 잘 섞였으므로, 사랑이란 말조차 이 일대의 바닥없는 고요를 이루는데/ 금세, 물에 녹아 풀릴 것처럼 한 사내가/ 카메라를 자동셔터로 맞춰 세운 뒤 애인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

유등연지 / 문인수
9월 유등마을 연지엔 연잎들이 모두 나와 물을 덮고 있다. 누가 물가 풀섶에 빛바랜 운동화 한 켤레를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저런, 낡은 죽음의 이미지조차도 이쁜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짧게 사라진다. 배고프다 문득, 연잎에 이는 한바탕 소나기 소리가, 그런 바람의 비늘이, 달빛 냄새가 궁금하다. 아, 꽃지고도 많이 남은 초록 날짜들이 남몰래 빨아먹는 슬픔이 있다.//

고인돌 공원 / 문인수
저것들은 큰 웅변이다./ 시꺼먼 바윗덩어리들이 그렇게/ 낮은 산자락/ 완만한 경사 위에 무겁게 눌러앉아 있다. 그러나/ 인부들은 느릿느릿 풀밭을 다듬다가 가장 널찍한/ 바위 그늘로 들어가 점심 먹고 쉰다. 쉬는 것이 아니라/ 나비 발 아래마다 노오란 민들레/ 낮별 같은 꽃이 연신 피어나느라, 반짝이느라/ 바쁘다. 지금 아무것도 죽지 않고/ 죽음에 대해 허퍼 귀 기울이지도 않으니 머쓱한/ 어른들처럼/ 군데군데 입 꾹 다문 바위들/ 오래 흘러왔겠다. 어느덧/ 신록 위에 잘 어울린다.//

동강에서 울다 / 문인수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 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동강의 높은 새 / 문인수
동강 높이 새 한마리 떴다./ 저, 마음에 뚫린 구멍, 꼭 그만하다./ 산의 뿌리가 다 만져진다.// 단 일획 깊이 여러 굽이 새파랗게/ 일자무식의 백 리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정선,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 / 문인수
비 뿌리네 어떤 마을 앞에 서 있네 이 깊은 골짜기 거대한 귓속 같네 큰길에서 가지치고 가지친 샛길, 길 끝엔 한 채씩 집 매달렸네 찌든 허파꽈리 같네 발등에다가 이 마을을 얹고 있는 뒤엣산 몹시 험하네 비안개에 가려 다 보이지는 않지만 높겠네 더러는 팔 뻗어 밀쳤음직도 한 앞엣산, 그러나 끄덕않았을 앞엣산, 그래서 또 호미 걸고 기어오른 비알밭 감자꽃 핀 앞엣산, 앞엣산 더 험하네 더 높겠네 다만 물소리 물소리 빠져나가네 저 물소리 다 닳아 빠지겠네 닳지 않겠네//

땅 끝 / 문인수
끝났다./ 모든 길은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 땅 끝 마을 땅 끝에다가 슬쩍/ 발끝을 갖다 대보고는 씁쓸히 웃는다./ 가파른 언덕 아래/ 밤바다 파도 소리가 폭풍을 안고 거칠다. 지느러미,/ 부레가 없는 지난날의 절망 따위여/ 포말, 포말,/ 캄캄하게 에워싸며 파랑치던 야유를 기억한다./ 다시 출발하자고 막 돌아섰으나/ 질풍노도라는 말, 혹은 말,/ 저놈의 갈기를 잡고 올라타 본 적 없다./ 나는 한 번도 부려먹어 보지 못한 세월,/ 세월이 끝내 준 것이라고는 도대체 청춘뿐이다./ 지금은 늙어 아무것도 자멸하지 않고/ 땅끝마을 왔다가 돌아가는 초행길이지만/ 땅끝과 발끝,/ 말단끼리는 서로 참 돈독한 데가 있구나/ 소싯적부터 오래 잘 알고 지낸 사이 같다.//

모량역의 새 / 문인수
떠나지 마라, 먼 타관은 춥다. 작고 따끈따끈한 널/ 얼싸안고 여기 이대로 계속 짹짹거리고 싶다.// 이 농촌 득녘, 간이역 대합실 중앙기둥 윗부분엔/ 직경 한 뼘 남짓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난로 연통 뽑아냈던 자리일 것이다. 장작이든 톱밥이든/ 연탄이든 때며 불기를 둘러싼 몇몇 사람의 손바닥들,/ 그 가난한 화력으로 밀고 간 시절은 슬픔 몇 섬일까/ 연기는 다만 장삼이사 사라질 뿐, 그늘 그을린 것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역무원도 두지 않은 빈 역사, 가을바람에도/ 되게 썰렁하다.// 한때 불을 문 저 또렷한 기억, 새까만 입구가 못내 아깝다./ 나는 저 입 다문 적 없는 모음 깊이 무슨 새 한 쌍을 슬쩍,/ 속닥하게 들여놓고 싶다. 더 이상 누구 떠나지 마라.//

모량역의 운임표 / 문인수
기차에 묻어오는 묻어가는, 바람이 많다/ 철로를 가린 측백나무 울타리와 울타리 너머 너른 들판/ 누런 벼농사에 바람이 많다. 손금같이 들여다볼 수 있는 편도/ 오십리, 왕복 백 리 간에 볏단처럼 묶지 않고도 한때 잘 묶여/ 무임승차로 오가는 바람이 많다. 운임표 중에/ 서울의 청량리도 보인다. 있으나마나,/ 공연히 보인다 면도 연도 통하는 것 없다. 다만 한/ 땅내 안쪽으로 지금은 가을, 바람이 많다.//

말라붙은 손 -인도소풍 / 문인수
땔감으로 쓰는, 건디기라는 쇠똥덩어리가 있습니다./ 쇠똥에 찰흙과 지푸라기 같은 걸 잘 섞은 다음/ 커다란 쟁반만하게 주물러 널어 말려 쓰는데요,/ 이 일은 주로 여인네들이 합니다. 그러니 이 쇠똥덩어리 마다엔 어김없이/ 눈 깊어 안타까운 그늘,/ 그 무표정한 얼굴의 야윈 손자국이 낭자하게 말라붙어 있지요.//

빨래궁전 -인도소풍 / 문인수
야므나 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으로 숨어버렸는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먹구름 본다 -인도소풍 / 문인수
새벽 차가운 거리에/ 人道 여기 저기에 웬 누더기 이불들이 시꺼멓게,/ 뭉게뭉게 널려 있습니다.// 저 한 군데/ 이불자락이 자꾸 꼼지락거리더니 아,/ 젖먹이 아기 하나가 앙금앙금 기어 나오는군요./ 노란 물똥을 조금 쨀겨 놓고/ 제 자리로 얼른 기어듭니다.// 너무도 참 자발적 동작이어서/ ‘서식’이란 말이 뇌리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퍼뜩 떨어집니다.// 아기가 단숨에 기어든 이 바닥은 사실/ 이역만리 보다 멀어서/ 그 어떤 여행으로도 나는 가 닿을 수 없고요,/ 멀어서인지 잠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굴곡을 안에서 묶는 오랜 이불속 사정이/ 그나마 한 자루 그득하게 꿈틀거리며/ 먹구름, 먹구름 흘러갑니다.//

​바다책, 다시 채석강 / 문인수
현지의 어느 작은 마을 호텔 앞에서 그날 새벽/ 할 일 없는 한 사내와 손짓 발짓/ 상통하며 이 건디기불을 피워 봤는데요, 나는 문득/ 함께 못 온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돈 번다고 혼자 고생만 하는/ 늙은 아내의 월급 봉투에도 물론 이런 손자국/ 무수히 말라붙어 있는 거라 생각하면서, 매운 연기를 피해/ 이리 저리 고개 돌리며 자꾸 이 사내와 함께 찔끔거렸습니다.//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마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2박 3일의 섬 / 문인수
2박 3일 일정으로 섬에 들어갔다./ 섬은 허퍼 한 번도 섬을 구경하지 않았다.// 바다가 바다를 구경하지 않듯이/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를 구경하지 않듯이/ 갈매기가 갈매기를 구경하지 않듯이/ 수평선이 수평선을 구경하지 않듯이/ 통통배가 통통배를 구경하지 않듯이/ 일몰이 일몰을 구경하지 않듯이/ 별빛이 별빛을 구경하지 않듯이 또한/ 그 무엇도 다른 무엇을 구경하지 않듯이// 바삐 바삐 어구를 챙기는 어부들,/ 한 팀 꽉 짜인 저 바다./ 어깨 너머 기웃거리다 머뭇거리다 가는/ 나는 섬, 2박 3일 떠돈 섬이었다.//

섬 / 문인수
수평선 멀리 두근두근/ 작고 예쁘게 바라보이던 섬,// 섬에 도착하니 어!// 그 섬 없어져 버렸다//

 

                                            앉아보소 -이수동 53.0/45.5cm, 1992 / 문인수

- 거, 앉아보소/ 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쿨럭거리는 사내 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 더러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

경운기 소리 / 문인수
그 집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 할아버지, 점심 때 집에 왔으나 할머니가 아직 오지 않아/대강 챙겨 자시고 다시 부지런히/경운기 몰고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아랫마을 갔다가 부랴부랴 집에 와 보니 에고, 이 양반/ 맹물에 밥 말아 그냥/ 밥 떠 넣고 장 떠 넣고 한 눈치. 할머니 못내 속이 상해서/ 쯧, 쯧, 평소처럼 일 거들 요량으로 한참 걸어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와락 달려들어 영감! 영감님을 얼싸안아 일으켰으나/ 119 구급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숨을 거두어 묻은 흙 묻은 손.//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 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이 말/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 별사가 따로 있다.// 무쇠팔 경운기 모는 소리도/ 먼 길 소실점처럼 이랴, 이랴…… 멀어져간다.//

각축 /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 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 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만촌(晩村) / 문인수
태어나 자란 곳을 고향이라 한다면 인생말년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산 그 곳은 무엇이라 하나.// 나는 지난 1987년 2015년 현재까지 여기/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서 산다.// 이 도시의 골목길에도 지금 구석구석 민들레가 돌아온 봄이다./ 나는 요즘 자주 그 무엇인가 서운하여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느릿느릿 돌아보는 곳,/ 晩村, ‘늦이마을’이라는 이 우리말 풀이가 참 좋다.//

어느 봄날 / 문인수
​언덕 아래, 무심코 오줌을 누다가/ 이런, 매화 만발한 소리를 들었다.//

여름밤 / 문인수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싹 터져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짱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가을걷이 / 문인수
달구지/ 타고 갈 때/ 나락단 거두러 갈 때/ 막바리 그득 싣고 돌아올 때/ 첨벙첨벙 물로 건너는/ 건너다가 슬며시/ 물 마시는/ 소/ 기다렸다가 또/ 칸 한 칸/ 징검다리 건너는/ 물잠자리/ 뒤에 뒤에/ 아버지//

겨울 강 / 문인수
바람은 이제 엷은 살얼음으로 깔리면서/ 뻘밭 위에다가 덜렁 거룻배 한 척 올려놓고는/ 또 거기서 나와 처마 끝으로 어둑어둑 번져 가더니/ 이번에는 굴뚝 끝에서 오래 머리 풀고/ 몸조심하거라……. 자주 편지하고……./ 이르며 사람들은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땅 끝에 이르러/ 집을 짓고 낳은 자식들의 날개를 깊이 품노라 사람들은/ 저 갈대 숲으로 드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모로 누우며//

겨울 강변에서 / 문인수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을 들여다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 숲 말아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눈 내린 날의 첫 줄 / 문인수
비쩍 마른 검둥개 한 마리가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네 발바닥,/ 뜨고 닿는 동작이 순서대로 다닥다닥 바쁘다.// 꽃 자국나는 바닥과 병 뚜껑 따는 것/ 같은 허공이 지금/ 일직선으로 길게 달라붙는 중이다.// 브라더미싱./ 어머니 재봉틀 소리 멀어져가는 것 같다.// 저 개, 방향을 꺾어 이번엔 또/ 가로로 자를 댄 듯/ 내 눈썹 위를 오래 긋는다.// 지평선에도 박음질 자국이 만져질까,/ 나는 자꾸/ 멀쩡한 데를 공연히 스스로// 봉하는 것 아니냐. 하긴,/ 상처 아닌 행로가 어디 있을까.// 날지 못하는 흰 날개, 양쪽 경치는/ 그저 차디차다. 어딜 가나/ 벗어재낄 수 없는 틈바구니,// 이것이 길이다. 나는 무심코/ 저 개를 한참 밀고 있구나.// 이쪽저쪽 끌어다 붙여 마음이 모처럼/ 광활한 아침이다./ 무수히 꿰맨 흉터,/ 여기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 개 한 마리가 첫 줄 타자처럼 새까맣게 지나간다.//

꽃 / 문인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진 A4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종이도 죽는구나.// 그러나 입 꽉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나왔으면 그// 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번 멀리 던져다오.//

드라이플라워 /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는다./ 말린 장미 . 안개꽃 한 바구니가 전화기 옆에/ 놓여 있다. 오래,/ 기별 없다. 너는 이제 내게 젖지 않아서/ 손 뻗어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허물, 먼지 같은 시간들./ 가고 없는 향기가 자욱하게 눈앞을 가릴 때/ 찔린다. 이 뾰족한 가시는/ 딱딱하게 굳은 독한 상처이거나 먼 길 소실점,/ 그 끝이어서 문득, 문득 찔린다./ 이것이 너 떠난 발자국 소리이다.//

말 걸지 말아라 / 문인수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밝은 구석 / 문인수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내가 사는 이 도시, 동네 골목길을 일삼아/ ㅁ자로 한 바퀴 돌아봤는데, 잔뜩 그늘진 데서도/ 반짝! 긴 고민 끝에 반짝, 반짝 맺힌 듯이 여럿/ 민들레는 여하튼 또렷하게 웃는다./ 주민들의 발걸음이 빈번하고 아이들이 설쳐대고/ 과일 파는 소형 트럭들 시끄럽게 돌아나가고 악, 악,/ 살림살이 부수는 소리도 어쩌다 와장창, 거리지만 아직/ 뭉개지지 않고, 용케 피어나 야무진 것들/ 민들레는 여하튼 책임지고 웃는다./ 오십 년 전만 해도 야산 구릉이었던 이곳/ 만촌동, 그 별빛처럼 원주민처럼 이쁜 촌티처럼/ 민들레는 여하튼 본색대로 웃는다./ 인도블록과 블록 사이, 인도블록과 담장 사이,/ 담장 금 간 데거나 길바닥 파진 데,/ 민들레는 여하튼 틈만 있으면 웃는다. 낡은 주택가,/ 너덜거리는 이 시커먼 표지의 국어대사전 속에/ 어두운 의미의 그 숱한 말들 속에/ 밝은 구석이 있다. 끝끝내 붙박힌 '기쁘다'는 말,/ 민들레는 여하튼 불멸인 듯 웃는다.//

벽의 풀 / 문인수
풀들은 어떻게 시멘트를 삭이는가, 사귀는가/ 이 도시의 4차선 도로변을 따라 높이 둘러쳐진 옹벽엔/ 오래 전부터 깊은 금이 구불구불 길게 가 있다/ 이 거대한 위압 아래가 한동안 고요한 때가 봄이다/ 상처에 자꾸 손이 가고 슬픔이 또 새파랗게 만져지는 것처럼/ 금간 테를 디디며 풀들이 줄지어 돋아나 자란 것이다/ 산야의 풀들에 비해 물론 몹시 지저분하고 왜소하지만/ 명아주 바랭이 참비름 강아지풀 같은 제 이름, 초록/ 정강이의 제 중심을 잘 잡고 있다/ 생이 곧 길이어서 달리 전할 말이 없는 풀들/ 흙먼지며 매연, 저 숱한 차량들의 소음까지도 꽉 꽉 다져 넣어/ 밟으며 빨며 더듬더듬 더듬어 풀들은 또 풀들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천산북로, 누더기 몸들이 누대누대 닦아가고 있다//

비 / 문인수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빗소리 모아 듣다 / 문인수
아무도 안 오고 저, 빗소리 모아 듣다./ 커다란 목련 나무에 이제 여나문 개째 꽃망울 툭, 터지는가/ 운문사 내원암 이 사발 속 같은 골짜기,/ 산빛 흐릿흐릿 잠긴다./ 대숲 또한 묵직하게 시꺼멓게 잠긴다./ 두루 다 잠가놓고/ 끙, 절 들어가 앉는 거 느껴진다./ 저 목련,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핀다고?/ 아니다, 자꾸 흰 돌멩이 하나 올려놓듯 등 달 듯 그렇게/ 몇억 겁게 한 송이씩 꽃피는 것 같은 봄날,/ 나도 저 빗소리 모아 오래 탑 쌓고 있다.//

뿔의 뿌리는 슬프다 / 문인수
돌들은 단단하고도 뾰족하게 밟힌다./ 유심히 내려다보이는 돌들의 이마에는/ 터질듯한 긴장감이 있다.// 적의의 뿔일까.// 돌들을 하나씩 뒤집어본다/ 그 뺨엔 마를 날 없는 날짜들이 깊이 젖어있다./ 슬픔으로 된 뿌리인 것 같다.//

뿔 시퍼렇게 만져진다 / 문인수
책상 모서리에 허리가 떠 받혀 오래 아프다./ 아시다시피 모서리의 안쪽이 구석이고/ 구석의 바깥쪽이 모서리인데/ 이 단단한 명.암의 어떤 내용이/ 이 책상에서 불쑥 나온 원목의 어떤 일갈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날 일부러 한 대 쥐어박은 걸까/ 그러나 무슨, 악의에 찬 공격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벌목 현장의 열대 우림을 쩌억 갈라붙이며 우지끈/ 쓰러졌을 때, 그때 지축을 흔든 우레의 뿌리,/ 혹은 엄청난 수령의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저릿하다./ 그 여진이겠지만, 아직도 직진인 것 같다./ 창공을 찌르며 내쳐 홀로 가는 외뿔, 그런 정신이/ 노거수(老巨樹)의 망한 몸인 이 책상 어디에/ 책상으로 가부좌를 튼 오랜 시간 내내/ 그대로 옹이 박혀 있었구나 나는 종일 빈둥거렸으니/ 무슨 길을 잡아 열심히 공부한 것도 아니고/ 부질없는 근심들이 밀어 올린 외로움은 쥐뿔도 아니어서/ 병인 것 같다. 오늘 다시/ 떠 받힌 데를 들여다보니 멍이 다 들어 있다./ 드높은 우듬지 끝이 시퍼렇게 만져진다.//

달팽이 뿔 위에 / 문인수
마음공부 위해/ 사원 하나 세워야 한다면,// 달팽이 뿔 위에 세우고 싶네.// 이 나뭇잎에서/ 저 나뭇잎으로/ 느릿/ 느릿/ 느릿/ 움직이는 사원.//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태평무太平舞처럼/ 떠다니는!//

수장(樹葬) / 문인수
나무 한 그루를 얹어 심는 것으로/ 무덤을 완성하면 어떻까.// 평평하게 밟아/ 그 일생이 보이지 않으면 되겠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 뒤축이 다 닿은 족적은 그 동안/ 없는 뿌리를 앓아온 통점이거나 죄/ 쓸어모아 흙으로 덮는다면 잘 썩을 것이며/ 그 거름을 빨아 한탄 무성하면 되겠다.// 어떤 춤으로 벌서면 다 풀어낼 수 있겠는지/ 느티나무든 측백나무든 배롱나무든 이제/ 오래 아름다운 감옥이었으면 좋겠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 문인수
말 걸지 말아라.// 나무의 큰 키는/ 하늘 높이 사무쳐 오르다가 돌아오고/ 땅 속 깊이 뻗혀 내려가다가 돌아온다./ 나갈 곳 없는/ 나무의 중심은 예민하겠다./ 도화선 같겠다./ 무수한 이파리들도 터질 듯 막/ 고요하다.//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젓고 있느냐.// 비 섞어, 서서히 바람 불고// 나무의 팽팽한/ 긴 외로움 끝에 와서 덜컥,/ 덜컥, 걸린다./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 저 나무 송두리째/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나무는 폭발한다.//

안개 / 문인수
기차의 기인 꼬리가 막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아무런 구멍도 나지 않는다./ 아 마음의 자욱한 준령,/ 이 그리움 통과하지 못하겠다./ 쿵쾅거리는 몸만 제자리 뜨겁게 만져진다.//

얼룩말 가죽 / 문인수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 마다 법에/ 덜커덕, 덜커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가 이제/ 침침하게 미끄럽게 거의 다 지워져/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어떤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히/ 풍금처럼 흐르는 저, 母法이 있다.//

싸우는 소 / 문인수
소 눈은 검고 커다랗다/ 싸우니까 더 커다랗다/ 와- 와- 떠드는 사람들 소리에 뿔을 맞대고 있지만/ 소의 두 눈은 점점 더 커다랗게 껌뻑, 껌뻑, 슬프다 서로/ 미안, 미안하다고 한다//

지네 -서정춘전(傳) / 문인수
어머니는 그때 만삭에 가까웠다./ 아버지와 어떤 사내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사코 싸움을 말렸는데 그만/ 누군가의 팔꿈치에 된통 떠받쳐 벌러덩 자빠져버렸다.// 나는 태중에서부터 늑골 아래가 아파 몹시 울었다. 세상에 툭, 떨어지자/ 냅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잠시도 그치지 않고/ 새파랗게, 새파랗게 질리며 울었다./ 1941년생, 나는 아직도 피고름 짜듯 가끔, 찔끔, 운다.// 난 지 삼칠일 만에 늑막염 수술을 받았다./ 난 지 두 돌 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마부 아버지와 형들은 모두 거구였지만 배냇앓이 때문일까, 젖배를 곯았기 때문일까, “나는 평생/ 삼단(三短)이다. 체구가 작고, 가방끈이 짧고, 시인 정 아무개의 말처럼/ '극약 같은 짤막한 시'만 쓴다.”// 가난이야 뭐 본래대로 바짝 웅크린 채 견디면 된다.// 당시엔 당연히 가슴 쪽에 나 있던 수술자국이 이 시각,/ 왼쪽 등뒤 주걱뼈 한뼘 아래까지 와 있다. 생각건대,/ 이 징그러운 흉터야말로 몸을 두고 공전하는 기억이지 싶다, 궂은 날,/ 지금도 수천의 잔발로 간질간질간질간질 세밀하게 기면서/ 씨부럴,/ 썩을놈의 슬픔이 또, 온다, 간다.//

매미소리 / 문인수
나무들은 나름대로 전원 각기 적소에 서 있다/ 그리움은 그러나 혼자 살지 못하고/ 지하공장에서 올라온 것처럼 일사불란한 작업 중이다/ 암흑에서 뽑은 강철심같은 것 무수히 내지르고 있다. 나무들이 내/ 는 금속성은 듣기에도 어째 거북하지 않다./ 질긴 그 노래로써 요새/ 숲을 새로 짓고 있다. 수북하게 부풀어 오른 녹음이/ 거친 산악을 한 번식/ 해일처럼 거대하게 흔들어보곤 한다. 무공해 신도시는/ 튼튼하다. 삼나무 고사목이 나무들의 공중전화 부스처럼, 송신탑/ 처럼 장대하게 서있다. 팽팽한/ 신경섬유 같은 것,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틀어/ 의미망이라 한다. 빗방울, '나비바람' 한 점에도/ 숲은 널리 젖거나 고봉으로 다시 설렌다. 누가 울었다, 봐라/ 저녁 노을 또한 왕창,/ 전 세계적으로 한꺼번에 울창하게 걸린다//

나방 / 문인수
갈색나방 한 마리가 이틀째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한 쪽 벽에,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에 납작 붙어 있다./ 오체투지하는 것 같다./ 천장에서 방바닥까지의 거리를 재는 듯/ 그렇게 날개를 쫙 펴 붙이고 있다./ 그러다 잠든 걸까, 숨조차 멎은 것 같다. 그새/ 문밖엔, 뜰엔 목련꽃 더 많이 터져 올라 눈부신데/ 절방에 들앉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아득한 하늘 아래, 어둔 땅 위에/ 나도 양팔을 벌린 채 힘껏, 가만히 누워 배긴다./ 풍경소리, 대바람소리, 잘 마르지 않는 과거가, 슬픔이 있다.//

오징어 / 문인수
억누르고 누른 것이 마른 오징어다/ 핏기 싹 가신 것이 마른 오징어다/ 냅다, 불 위에 눕는 것이 마른 오징어다// 몸을 비트는 바닥을 짚고 이는 힘/ 총궐기다/ 하다못해 욕설이다// 잘게 씹어 삼키며/ 무수한 가닥으로 너를 찢어발기지만/ 너는, 시간의 질긴 근육이었다// 제 모든 형상기억 속으로/ 그는, 그의 푸른 바다로 갔다//

홍탁 / 문인수
홍어회는 술안주다./ 어두운 마음이/ 검은 발자국처럼 납작 숨죽여/ 비닥인 놈, 씹는 중이다./ 잘 삭힌 독(毒),/ 아니, 살짝 썩힌 생(生)이다. 그리움은 절대로 눈앞에 다가오지 않고, 오지 않는 것만이 그리움이어서, 오래 기다리는 마음은 망하고 상해서/ 역하다. 한방 되게 쏘는 일침,/ 가책이 있다.// 퇴폐 또한 맛이다.//

배꼽 / 문인수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정낭 지붕 위 조// 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 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저 할머니의 슬하 / 문인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엔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만금이 절창이다 / 문인수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며 걸어 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 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저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 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그림 같다, 사정없이 계속/ 셔터를 누른다. 여인네들… 여 나문 명 누더기 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치듯 벗어 놓으며 저 할머니, 꺼질듯 첫/ 일성을 토한다. "어매 징한 거, 참말로 죽는 거시 낫것어야" 참말로, 정색이다. 말짱/ 카메라에 박지 못한 것, 철컥- 가슴에 와 박히는 것, 뭉툭한 뒤축 같은 것,/ 늙은 연명이 뱉은 저 말이 절창이다.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정월 / 문인수
농촌 들녘을 지나가는데 춥고 배고프다/ 저 노인네 시린 저녁이 내 속에서/ 등 달 듯 등 달 듯 불을 놓는다/ 꽃 같은 불 쪽으로 빈 들판이 몰린다/ 거지들 거뭇거뭇 둘러앉은 것 같다/ 발싸개 벗어 말리며 언 발 녹이며/ 구운 논두렁도 맛있겠다/ 그 뱃속 깊은데 실낱같은 도랑물 소리/ 참 남루한, 어두운 기억을 돌아오는데도/ 피를 맑히는/ 이 땅의 神이옵신 그리움이여//

2월 / 문인수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 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3월 / 문인수
아직은 바람이 차다 하면서/ 누가 밤중에 깜깜한, 찬 부엌으로 내려갔다/ 군불 한 소끔 더 때고 들어왔다/ 잉걸 화롯불도 새로 들여온 것 같았다/ 나도 선잠을 걷고 화롯불 앞에 쪼그려 앉고 싶었던 것처럼/ 방금 자리 뜬 저 아이들처럼/ 이글이글 올라온 이 한 무더기 동백꽃 쬐보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은 또 먼 땅 속에서 두런두런거리는 것 같다/ 아직은 때때로 바람이 차다//

4월 / 문인수
절을 에워싼 산 빛이 수상하다./ 잡목 사이로 여기저기 펄럭 걸린 진달래./ 단청 엎 질린 것 같다./ 등산로를 따라 한 무리/ 어린 여자들이 내려와서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조용 하라. 조용히 하라 마음이여/ 절을 에워싼 산 빛이 비릿하다.//

6월 / 문인수
풀물 들지 않은 풀이 없구나./ 우포늪 돌며 여러 풀 이름을 듣는다/ 개구리밥 물 갈대 창포 사초 부들 고랭이 생이가래 개여뀌 누운기장대폴/ 풀물 들지 않은 풀이 없구나./ 둑으로 올라와 풀의 전 세계를 본다/ 풀들은 제각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높고 낮은 키의 소수민족들/ 그 초록의 말씨가 조금씩 무더기 무더기 다르다./ 그러나 풀물 들지 않은 풀이 없구나./ 햇살 아래 바람 속 물이랑 위에/ 젖은 것 말리며 또 젖으며/ 저런 춤, 함성처럼 고요히 우거지고 있다.//

8월 / 문인수
헐티재 아래 속 빈 느티나무 한 그루 있다./ 늙은 이 나무는 지금도 아름드리 가지 하나를 힘껏 멀리 휘고 있다./ 생업이 오랜 무게가 그이 등뼈를 저러히 험하게 비틀어 놓았다./ 헐티재 하고 구비구비 똑 같다./ 오백 년 전부터 아버지는 등짐장수였다./ 그 긴 긴 피륙인 재를 걷어들이며 또 널어 말리며/ 시퍼렇게 추스르는 몸,/ 몸 들여다보니 아, 그의 棺이다./ 혹은 주린 마을 앞에/ 빈속의 느티나무 한 그루 오래 타오르고 있다.//

9월 / 문인수
무슨 일인가,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다/ 며칠째, 어디론가 계속 철수하고 있다/ 그것이 차츰 소규모다/ 버려진 군용 텐트나 여자들이/ 호박넝쿨의 저 찢어져 망한 이파리들/ 먼지 뒤집어쓴 채 너풀거리다/ 밤에 떠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몇몇 집들이 더 돌아와서/ 또, 한 세상 창문이 여닫힌다//

10월 / 문인수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11월 / 문인수
저것은 아직 주검이 아닐 것이다./ 전주 덕진공원 덕진호반에는 붉게 마른 연대들이 고개/ 꺾고 허리 꺾고 팔 다리 툭툭 꺾어 물속으로 서걱서걱 들어가는 중이다./ 바람 아래/ 무수히 나부대는 한 마당 도리깨질 같다. 한 바탕/ 행진 같다. 무성영화 같다./ 저것은 물론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이다./ 물 깊은 바닥 캄캄하게 쌓여 썩을 것이다./ 거기 또 불 질러/ 새로 한 세상 꽃 피는 법일 것이다.//

12월 / 문인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시린 먼지바람이 뿌옇게 산모퉁이 돌아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노을이 진다.// 미루나무 꼭대기가 오래 멀리까지 보고 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부터 어둑어둑 어둡다.// 발이 얼지 않도록 조금씩 흔든다.//

중심을 잡다 / 문인수
하늘이 잠시도 눈 떼지 못한다./ 강아지풀 하나가 왜 하필/ 이 거친 돌담장 위에 올라서서 하늘을 쓰고 있나/ 미루나무 큰 키가, 방올음산 꼭대기가 그러하듯이/ 상모 돌리듯 상모 돌리듯/ 제게 꼭 맞는 모자인 양 하늘을 쓰고 있다./ 가느다란 모가지며 정강이로 추는 춤,/ 폭우와 암흑의 나날이 상세하다./ 바람에서 뽑은 섬유질 같은 것/ 세 필로 적는 일대가 새파랗게 질기다./ 파란만장의 강아지풀 하나가 잠시/ 가만히 귀 기울이다가 다시 즐겁게,/ 즐겁게 하늘을 쓰고 있다.//

가시연꽃 / 문인수
방패 같은 커다란 잎이 우포늪 가득 착 발려 있다. 잎의 표면엔 무슨 두드러기 같은 가시가 섬뜩섬뜩 돋아 있는데,/ 그렇듯 제 뿌리참의 그 무엇을 무섭게 덮어 누르고 있다. 그런데 그걸 또 불쑥 뚫으며 솟아오른 꽃대궁,/ 창 끝 피칠갑의 꽃봉오리에도 줄기에도 그런 가시가 돋아 있다/ 저 온갖 적의와 자해의 시간이 오래 무더웠겠다// 그러나 누가 말할 수 있으리/ 마침내 고요히 올라앉은 만개滿開, 만 개의 캄캄한 문, 만 번은 또 무너지며 신음하며 열어제쳤겠다 악의 꽃, 저 길의// 끝// 오, 저 고운 웃음에 대해 숨죽여라 지금/ 소신공양 중이다//

매화 / 문인수
어느 처마 낮은 대폿집에 들고 싶다./ 따순, 분통 같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지분냄새 자욱하여 불콰히 취기가 오른다면/ 육자배기로, 흘러간 유행가로 질펀 흘러갔으면 좋겠다./ 젓가락 장단으로 아, 뚝 뚝 꺾어낸 억수장대비의 북채로/ 동백동백 같은, 늙은 작부의 상처 또한 붉게 씹으리./ 다시 한 사발, 여자의 과거사를 가득 부어 마시면/ 지리산, 악산 산 거칠수록 더 여러 굽이 굽이굽이 풀려서/ 그러나 물이 불어 시퍼렇게 자꾸 깊어가는 섬진강./ 저 긴 긴 목울대 치받치며 끄윽 끅 꺾이며 흘러가는 거/ 보라, 逆鱗 떨며 떨리며 대숲은 섧고/ 또 섧다 난분분난분분 매화 뿌린다.//

창포 / 문인수
창포를 보았다./ 우포늪에 가서 창포를 보았다./ 창포는 이제 멸종 단계에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 말을 슬쩍 못들은 척 하며/ 풀들 사이에서 창포가 내다본다/ 저 혼자 새초롱하게 내다보고 있다./ 노리실댁/소래네/닥실네/봉산댁/새촌네/분네/개야미/ 느미/꼭지/뒷모댁/부리티네/내동댁/흠실네/모금골댁// 소득골네/갈 잿댁 우거진 한쪽에 들병이란 여자도/ 구경하고 있다./ 단오날 그네 맨 냇가 숲에서/ 여자들, 수근대며 눈 흘기며 삐죽거린다./ 그 여자, 천천히 돌아서더니 그만/ 멀리 가 버린다 창포/ 긴 허리가 아름답다.//

동백 씹는 남자 / 문인수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우 눈 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 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작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 낄 낄 웃었다./ 그의 안색이 동백 독이 오른 것처럼 잠시/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파 냄새 /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색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 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독한 파 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 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힘 / 문인수
폭포 직전 물의 근육은 팽팽하다.// 이제 저 허연 광목 필 틀어잡고/ 남김없이 부서지는 물보라의 화염으로 당기는 것,// 개벽 당시를 본다./ 고요는 마침내 만발, 만삭을 푼다//

그립다는 말의 긴 팔 / 문인수
그대는 지금 그 나라의 강변을 걷는다 하네./ 작은 어깨가 나비처럼 반짝이겠네.// 뒷모습으로도 내게로 오는 듯 눈에 밟혀서/ 마음은 또 먼 통화중에 긴 팔을 내미네./ 그러나 다만 바람 아래 바람 아래 물결./ 그립다는 말은 만 리 밖 그 강물에 끝없네.//

통화중 / 문인수
​그곳은 비 온다고?​/ 이곳은 화창하다.​/ 그대 슬픔 조금, 조금씩 마른다.​/ 나는, 천천히 젖는다//

부처 / 문인수
​할아버지 먼 산 푸나무 하러 갔다가/ 참꽃도 한 아름 꺾어왔는데요,/ 우물가 큰 물독에 가득 채웠지요. 그때 참, 벅찬/ 할머니! 더 커다랗게 팔 벌려 합장 절했지요./ 노구 너머로 환한 그 마음,/ 자동으로 나타나 엄청 아름다웠네요.//

물빛, 크다 / 문인수
물은, 저를 물들이지 않는다/ 팔이 긴 물풀들의 춤을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무수한 물들의 앙다문 말을 한마디도 안 빼고 노래로 다 불러낼 뿐/ 물 아래 맑은 바닥, 어떤 의심도 사지 않는다// 물은 한결같다는 뜻, 그 힘이 참 세지만 저를 몰고 가는 게 아니다/ 하늘과 땅이 기울이는 대로 흘러, 적시며 먹이며 쌓이며/ 거기/ 아름다운 풍경으로 홀연 나타나 가로되// 아, 물의 동인(同人)이다, 봐라. 강이며 호수며 바다 바라보는 거대한 순간, 지난날들과 앞날들의 총화가 푸르다!/ 그대, 어찌 살고 싶지 않겠느냐.// 저 깊이를 두고 ‘물빛’이라 한다. 그러나/ 물은 저를 물들이지 않았다.//

새벽은 아직 / 문인수
새벽은 아직 어두운 시간이다./ 아직은 아무런 빛도 소리도 태어나지 않았다./ 오. 푸르른 인기척 하나 저기 다가오기 전./ 아직은 아무런 말도 사랑은 태어나지 않았다.//

적막 소리 / 문인수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 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 그런가보다. 여기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 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려 냅다 코 풀고 나니,/ 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 적막하다. 내 마음이 또 그걸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 저 소리들, 적막이 소리를 더 많이 낸다./ 또 그 소리에 그 소리인 부모님 말씀,/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홰치는 산 / 문인수
방울음산은 북벽으로 서 있다./ 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산/ 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갔다./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 낸 아버지,/ 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 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 집 뒤 동구 둑 길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 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울음산 꼭대기 솟아올라/ 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 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 내리며/ 수탉, 마당으로 내려서고/ 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

심우도(尋牛圖) / 문인수
황소 한 마리가 외양간을 꽉 채우고 엎드려 있는 것만큼/ 마음 든든한 광경도 없을 겁니다.// 그 날 밤 따라 검둥이란 놈이 유난히도 짖어댔습니다./ 한 십년 먹인 수캐였는데 매우 영리해서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었지요./ 한가지, 이 검둥이란 놈에겐 기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놈의 잠자리였는데요,/ 마루 밑에 마련해준 제 잠자리는 거들 떠도 아니 보고 늘 외양간에 가서 잤습니다./ 엎딘 소의 옆구리께에 턱하니 기대어 짚북더기에 코를 박고 잤는데요/ 그 날은 동네 암캐라도 쫓다 온 것인지/ 밤 이슥한 시간에 그토록 떠나갈 듯 짖어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야, 이놈 검둥아 그만 짖어라, 누운 채 몇 번 나무랐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자 개는 오히려 더 극악스레 짖어댔습니다./ 개 짖는 낌새가 이거 심상찮다 싶었는지/ 아버지는 대충 걸쳐 입고 방문 벌컥 열고 뛰쳐나갔습니다./ 소가 없어진 것입니다.// 텅 빈 외양간 앞에 텅 빈 아버지가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계속 아버지를 뒤흔들기라도 하듯 마구 짖어대던 검둥이란 놈이/ 땅에다가 코를 대며 삽짝 밖으로 냅다 달려나갔습니다./ 금세 아버지 앞으로 되달려오면서 미친 듯 짖어대는 거였지요./ 그러기를 수차례,/ 이윽고 아버지가, 알았다, 가자, 하면서 자전거를 꺼내 탔습니다./ 검둥이란 놈이 기다렸다는 듯이 휭하니 앞서 달려나갔습니다.// 소를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러하였습니다./ 검둥이란 놈은 동구 밖을 벗어나자/ 그때부터 짖지도 않고 가끔 땅에다 코를 대거나 아버지를 기다리거나 하면서/ 내쳐 적당히 달리기만 했다고 합니다./ 달이 기울고 어느 마을 첫닭이 울 무렵이었을까요,/ 우리 사는 곳에서 오십리나 떨어진 왜관 인도교에 이르러/ 마침내 도둑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다시 개 짖는 소리에, 혼비백산한 도둑은/ 그만 소의 고삐를 놓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고요./ 물론 검둥이란 놈이 한 입에 집어삼킬 듯 도둑의 꽁무니를 향해 돌진했지요./ 그러나 그때 우리의 소가, 크고 환하게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을까요?/ 아서라 됐다, 일평생 불같았던 아버지, 캄캄했던 아버지, 들끓었던 아버지가/ 일순 검둥이란 놈을 말렸다고 합니다.// 동녘 일출을 후광으로/ 아버지와 소, 검둥이란 놈이 한데 어우러져 돌아오던 그 아침의,/ 붉새의 들녘을 기억합니다.//

대숲 / 문인수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힌 유적 같은 것이다/ 그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하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 잘게 씹히거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굿모닝 / 문인수
나는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나는 그 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 째 굿모닝, 그런다. 한 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 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 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았거나 나는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쪽지보다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굿모닝, 그런다. 나도 웃으며 웬 무식? 그런다. 내가 겪은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당신이 내 눈 앞에 있다.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간통 /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단추 / 문인수
서둘러 옷을 입는데 단추 하나가 툭, 떨어졌다/ 민들레꽃만 한 장난꾸러기가 데굴데굴 굴러 침대 밑으로 숨었다/ 손전등까지 들고 찾느라 애를 먹었다/ 다시 단 단추가 한 줄 똑똑하게 만져져 기분이 참 좋다/ 내 마음에 돌아와 반짝이는 징검다리 별자리다//

공백이 뚜렷하다 / 문인수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단풍잎 엽서 / 문인수
버스가 잠시 고갯마루에 섰다./ 나는 활짝 창을 열었다./ 강원도라서 그럴까, 가을바람이 차다.// 곱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사뿐 날아들었다./ 와-내게 온 단풍잎,/ 나는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감기 조심해야 한다."// 엄마 목소리가 물든 이 빨간 엽서!/ 나는 얼른 창을 닫았다.//

흉가 / 문인수
종지부 같다/ 빈 까치집 한 덩어리가/ 잎 진 미루나무 높이/ 시커멓게 걸렸다.도대체 어떤 결말이/ 하늘 입구에다 외딴 구멍을 내놨나./ 바깥 사방이 흉흉하겠다/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는 맛이 없다. 대개/ 거칠고 쓴데, 저기/ 들어가 웅크리는 슬픔은 또/ 누구인지. 언제/ 둥근 종소리 날까,/ 그렇게 한번 깊이 울고/ 전소되겠다.//

범종(梵鐘) / 문인수
아가리 아래 또 우묵하게 아가리가 파였구나./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 커다랗게 공空을 무는/ 저것이 입맞춤이다./ 통하니 참, 혀가 없구나.//

별동별 / 문인수
얼마 전 TV에서 봤는데요, 평생 불면증을 안고 산 한 사내의 꼬리가 참 길었습니다. 그는 저녁에 가고 싶은 데가 있을 때까지 천천히 차를 몰고요, 이윽고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천천히 차를 몹니다. 새벽에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몰아넣을 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원을 보며 빙긋이, 막 운동하러 나서는 이웃 노부부와 마주치며 반갑게// 웃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그만 교통사고로 죽어요.// 와- 보세요, 저 별! 똥 누러 가는 속도로,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똥끝이 타는 속도로 별 하나가 이제 그리 급하게 자러 간 겁니다. 그러나 곧, 그러니까 수억광년 후쯤엔 또 반드시 제자리, 제정신으로 돌아와 반짝, 반짝이겠지요.// 좀 더 행복해질 때까지, 그는 다시 그렇게 자꾸 웃겠지요,//

벽화 / 문인수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 손에 몰려있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 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겨있는 것이겠다./ 흙손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처럼/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 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일생을 기울여온 사내의 집중이 확산일로에 있다.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찔,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 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飛階를 내려오는 사내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졌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창에,/ 석양의 길 건너편 장면이 그대로 액자 속에 담긴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서서히 발리고 있다.//

 



문인수(文仁洙, 1945년~2021년) 시인
1945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나 대구고를 나와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마흔 되던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대구시인협회장을 지냈다. 늦은 등단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한국 시단의 어느 누구보다도 시작(詩作)에 몰두해왔다. 그러한 문인수의 시에 대한 집중을 두고 주변의 동료 시인들은 “그의 삶은 마치 시마(詩魔)에 들려있는 듯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구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늪이 늪에 젖듯이》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그립다는 말의 긴 팔》 《적막 소리》 《달북》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등이 있다. 시인의 시풍은 서정적이고 사변적이면서 성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압축적이고 절제된 시어로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을 향해 따뜻한 시선과 연민을 드러내는 작품을 주로 썼다.

 

 

<詩境의 아침> 봄날은 간다, 가 - 대경일보

-문인수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 뒤쪽에 사촌동생 내외가 들어와 사는 전원주택이 있다. 이 집에, 남녀 종반 간 아홉 명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모였다. 누님 셋, 그리고 사촌형 내외, 우리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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