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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하림 시인

부흐고비 2021. 7. 26. 09:14

독신의 아침 / 최하림
안개 속으로 부드러운/ 가지를 드러내는 버드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옥수수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마루를 닦기 시작한다/ 책들을 치우고 의자를 옮기고/ 쓰레기통을 비운 뒤 구석구석/ 물걸레질하다 보면 현관으로는/ 햇빛이 들어와 물살처럼 고이고/ 바람이 산 밑으로 쓸리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철새들이 말하며 가는 것을 본다/ 순간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그리운 것들이 모두 집 밖에 있다.//

봄 / 최하림
영화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두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공기 조각들이/ 부서져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 얼음이 깨지고/ 버들개지들이 보오얗게 움터 올랐다// 나는 다시/ 왜 이렇게 봄이 빨리 오지라고/ 이번에는 저넌번 일들이/ 조금 마음이 쓰여서 외치고 싶었으나/ 봄이 부서질까 봐/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마음의 그림자 / 최하림
하염없이 먼 길을 걸어왔다 드문드문/ 나무들이 서 있었고 여린 가지들이/ 부러질 듯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언덕배기도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기 전의 원갑희(元甲喜)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섭섭치 않았다/ 옛날의 눈물이 무지개로 기일게 서산(西山)에 떠올랐다/ 시(詩) 라고들 그랬다//

말하기 전에, 나는 / 최하림
여느 때와 다르게/ 공기가 부풀어 오르고/ 담장이 유리빛으로 빛나고/ 들녘의 잡초들이 바람에 날렸다/ 어떤 관목숲으로도 서 있지 못하는/ 새들이 하늘과 물 속으로 갈앉았다/ 지상엔 지나간 시간의 상처뿐/ 십일월의 그림자들이 다도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잎 푸른 가지 속으로 들어가/ 내가 시름을 나눌 수 있는 의자와 책들 사물들/ 아직도 불켜 있는 스탠드와 불안하기는 하지만/ 서쪽으로 열려진 창문들/ 바람은 언제나 나직이 흘러갔지/ 풀숲들이 나직이 속삭였지/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 네 속에서 편안히 잠을/ 그러나 잠은 꿈일 뿐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멀리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나무와 돌 사이/ 언덕과 구렁 사이 죄와 벌이 서성거리고/ 나는 잘려진 도마뱀처럼, 시간들을 진행형으로/ 떠올리지 못하고 토막토막, 나누어 이해했다/ 엉클어진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 유리창을 깨트리고, 오오, 말하기 전에, 나는,/ 이대토록 상처투성인지 몰랐다/ 나는 말에게 버림받았다/ 버림받은 말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나무들을 비추고 이파리들을 비추었다/ 어떤 확신의 말도 나는 할 수 없다/ 파충류가 얼굴에 달라붙는다/ 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 들린다//

아내에게 / 최하림
시간의 빗살들이 간단없이 흘러가던/ 성북역 철로변에 쑥니풀이 돋아나는 계절이면/ 고통의 씨앗들이 자라나 슬퍼지면서/ 우리는 언덕을 보았지 높고 둥근/ 언덕에서는 잡풀 향내가 코를 찌르고/ 가끔씩 파열음 섞인 아이들 함성이/ 하늘을 울리고 넘어가려 하는 햇살의/ 엷은 미소가 비친 이마에서/ 그림자들 넘실거렸지/ 나는 그 이마를 손등으로 쓸며/ 쉴 새 없이 입술을 댔다/ 손발을 가만히 쥐기도 했다/ 가을이 향기롭지요? 저기로 가봐요./ 이리로 와봐요. 당신 손을 내 손에 얹어요./ 우리는 손잡고 긴 길을 걸었지/ 긴 이야기했지/ 끊어지려 하는 현의 떨리처럼/ 삶은 아프겠지만 서로가 제 자신의/ 아픔을 아파하고 아파하는 마음들이/ 기도가 될 때 안식은 찾아올 거예요/ 우리는 손잡고 계속 걸었지/ 누이 같은 여자여, 끊어지려 하는 목소리로/ 그대는, 그러나 노래하지 않았지/ 계속 보기만 했지//

아들에게 / 최하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들을 본다/ 아무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 지나가 버린 시간들/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서로 잘 어깨동무하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산다/ 비 내리는 둑에서/ 나뭇잎들은 푸르고/ 산색은 살아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슬픔 기쁨으로/ 밤을 걸어가고 가끔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날이 깊어간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지고 모든/ 사랑이 딱딱한 사물로 변해간다/ 내 손에서 따스했던 네 손이 사라진다/ 이제 나는 잃어버리게 될 시간들을/ 생각하고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물푸레나무가/ 우거져 있다 시간들이 우거져 있다//

즐거운 딸들 / 최하림
즐거운 딸, 바람쟁이 딸들! 그들 땜에 우리 집은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구름처럼 젖가슴이 벌어지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가지고 남자들을 라켓으로 바꿔치면서 그들은 신촌으로, 압구정동으로! 꿈에서도 남자들이 꽃다발 바치며 애달아해도 슬쩍슬쩍 눈 피하고 향기 피웠지 전화질했지 어려서부터 큰애는 바람쟁이여서, 숙제 끝나면 거울 앞으로 가, 땀 뻘흘리며 춤을 추었고, 둘째는 가끔씩 고장난 로봇춤을추었지 아름다웠지 그들의 춤은 목적이 없고 관객이 없으므로 그들 자신이 춤이고 즐거움이었으므로/ 꽃 같으고 나비 같은 처녀들이여! 춤추는 처녀들이여!/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어른들이 불러도/ 돌아보지 말아라 춤추며 가거라/ 너희들, 있는 세상, 벼락처럼/ 장미 피고 향기 넘치노니/ 어느 날 애인에게 바람맞고/ 자존심 상해할 때, 오매!/ 우리 딸 바람맞았네 놀릴지라도/ 기죽지 말아라 바람피워라/ 바람이 이 세상 생명이고 기쁨이니//

광목도로(光木道路) / 최하림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 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 본다/ 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 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 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 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 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 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 검은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길들은/ 보이지 않게 밤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추억이 짐짝처럼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 시간이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흘러간다/ 시간을 따라서 광목도로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이 있을 것이다/ 잠시 유숙할 집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만은 사랑이었고 배반이었던 여자도 어디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너를 버리고 달려간다/ 그래서 세상은 고통스럽고 일어서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하다/ 내 가슴은 사직처럼 무너져내린다/ 예감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밤으로 간다 잘 잇거라/ 한 번도 힘껏 꽃잎 피지 못하고/ 한 번도 힘껏 돌아보지 못한/ 가여운 말들아 내 딸들아//

집으로 가는 길 / 최하림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 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 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 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 고요/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 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 내 고요를/ 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어디로? /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떠난자를 위하여 / 최하림
오늘도 먼 데서 밤은 함뿍 내리고/ 바람마다에 우거진 숲이 부우연 머리를 흔드는데/ 손 하나 허공에 뻗을수 없이 적막이 내린다/ 내리는 적막 속에서 여인들이 소리없이 와/ 떠난 자를 그리는 슬픔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물 위에 밀리는 달빛을 보고 서 있다//

詩人에게 / 최하림
공동묘지같이 외진 골짝에서 바람이 불고 바다가 일어/ 거리의 군중들이 몰려 갈 적에/ 또한 피와 아우성으로 돌바닥에 깔리고/ 밤우리에 감금 당할 적에/ 그대여 그대여 어떻게 저 먼 밤을 뚫고 가겠는가/ 바위속같이 캄캄하고 팍팍한 수십만리 길을/ 그대 홀로 어떻게 가 보겠는가/ 가다가 쓰러지고 피 흘린들/ 누가 염습이라도 해 주겠는가/ 괴로움이 비늘처럼 번쩍이면서 목을 조르고/ 마을 불빛도 모두 꺼져 어둠속으로 감겨들가는데/ 다만 살아 움직이는 바다여 바람이여/ 눈물 속에서 날이 서는 칼을 갈고 칼을 갈고/ 이파리 끝도 다치지 못하는 칼날을/ 그대의 심장에 겨누며/ 우리들은 끝없이 어둠으로 뻗어가는/ 그대의 길을 큰 눈을 뜨고 똑똑히 본다//

詩 / 최하림
눈이 지천으로 오는 밤에 시를 써야지/ 머리를 눈에 박고 써야지/ 눈 속을 걸어가는 사내 몇/ 불을 찾는 사내 몇/ 겨울까마귀 몇/ 죽은 자들도 이런 밤엔 불을 찾아/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언덕을 넘겠지 그들의 목소리가/ 벌판을 헤매겠지 그들의 불을 찾으러? 꿈꾸는 불? 붉은 불?/ 그 불 속에/ 밤차가 달리고 겨울까마귀들이 공중을 떠돌겠지/ - 겨울까마귀가 중부지방엔 없어요, 여보/ 중부지방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남부지방이야/ 나는 그 살도 뼈다귀도 안다 바람이 그들 소리로/ 공중을 울리는 걸 안다 당신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이웃도…… 그 나라의 하늘로/ 머리를 빗겨내리며 불빛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어머님이 나를 보시듯, 그래 어머님이……// 오오 떠오르는 어머님이여/ 그날 저녁 우리는 어둔 거리를 헤맸습니다// 세종로 우체국 옆 담배가게에서 솔을 한 갑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면서 거리 끝까지 걸어갔댔습니다//

시를 태우며 / 최하림
밀면 돌멩이 되어/ 가는 불빛에도 흔들릴/ 석불(石佛)로나 돌아가 웃을까/ 동서로 떠돌며 노래부를까// 나는 시(詩)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오늘은 느티나무 아래서 시들을 모아/ 불태우네 점점이 날아가는 새들과/ 아직은 체온이 남은 기억들 그리고/ 지평선에 떠도는 그림자들// 나는 시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구천동 詩論 / 최하림
내 고독이 내 앞에 있다. 커다란 집인 양 덕유산은 나를/ 감싸고 물소리들이 발에 걸려 비틀거린다 줄참나무/ 청시닥나무 복장나무 왕솔나무들이 물안개 속에서/ 그림자 던지고 행락객이 사라진 이제 사방은 고요뿐/ 그뿐…… 그것들도 물 속 깊이 흘러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저녁 구천동 길을 간다 새들이 숲속으로 사라지고/ 무량의 시간들도 사라진다 돌아보면 길섶에서 모습을/ 감추던 기억도 이 시간에는 옷자락을 끌며 어디론지/ 바삐 사라진다 나는 발밑에서 고요가 부서지는 소리/ 듣는다 사물들이 제각각의 소리로 중얼거리고 얼비치며/ 떠나간다 나는 고요의 깊이 속으로 들어간다// 고요의 정수리 부근에서 숨을 죽인다 경신년 시월/ 입적했다던 지광국사를 생각한다 그의 수도와 입적과/ 유습(謬習)을 생각한다 이제는 그의 일대기에 취한/ 새들과 함께 눈을 감고 있다// 아직도 이슬비는 어깨 적시며 내리고 무색계의 시간들이/ 물소리와 더불어 계곡을 치며 간다 이런 밤에는 어찌/ 죽음인들 소리나지 않겠는가 구천동인들 그의 길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과 돌과 죽음 그리고 침묵이 깊은 얼굴을 하고 있고/ 경신년 시월도 낯설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구천동은 어둠이다 구천동은 침묵이다 구천동은/ 죽음이다 구천동은 물이다 지난 여름엔 장마가 길어/ 물소리 그치는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물이 길 넘어/ 오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물은 길과 개울쯤에서/ 소리내며 흘러갔다/ 매장시편의 시인 임동확이 어느 날은 길을 이탈하여/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이웃 시선들을 개의치 않았다/ 임동확은 물과 함께 흘러가면서 물의 부피만큼 부풀어/ 길 위로 넘실거린 때도 있었으나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지광국사를 생각지 않았다./ 그의 입적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물이었고 죽음이었고// 침묵이었다.// 덕유산 꼭대기에는 빈 집이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별을 보고 있다// 한 침대와 의자와 어둠이 있다// 경신년 시월 귀천길을/ 걸어 구천동을 간다/ 물소리 어깨 적시고/ 물소리들이 생각나면서/ 무색계의 시간들 흘러간다/ 젖은 옷을 걸어 널 고요도 이젠 없다.//

부랑자(浮浪者)의 노래 1 / 최하림
헤매는 자들아 헤매는 자들아/ 이제는 그만 마을로 돌아가/ 어린 날의 보리들을 보아라/ 서릿발같이 차거운 밤의/ 보리들을 보아라/ 이제는 그만 날리는 머리 풀어헤치고/ 밤이면 밤마다 시푸렇게 빛나는/ 네 하늘과 네 땅의/ 보리들을 보아라/ 보리들은 지천으로 자라서/ 사방을 가리언만 그대 눈엔/ 아무 보리 보이지 않고/ 산과 하늘에 넘쳐흐르는/ 보리밖에 보지 못하네//

부랑자의 노래 2 / 최하림
유리창 앞에서 물끄러미/ 하나의 별이었던 우리들을 본다/ 신안 앞바다 소금밭에서 소금을 구워 먹고/ 입추가 지나면 지리산으로 벌목하러 가던,/ 벌목이 끝나면 또 긴긴 겨울밤 눈보라를 헤치며/ 소금의 쓰라림, 여린 마음의/ 별의 쓰라림을 씹으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생각할 수도 없이/ 한없는 길을 헤매이다가/ 소금에도 벌목에도 눈보라에도/ 길들여져버리고 쓰라림에도 길들여져,/ 물 같은 시간을 흘러서/ 시구문이라든가 남양만에서, 또/ 일거리 없는 서해안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잠 아니 오는 밤을 보내이느니,/ 일하고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 가운데서 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인가,//

춘분 / 최하림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도 추워서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이 떨어지며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얼음이 깨지고 버들가지들이 보오얗게 움터 올랐다 아이들은 강 언덕에서 강아지야 강아지야 노래 불렀다// 나는 다시 왜 이리 봄이 빨리 오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지난 일이 마음 쓰여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이제 나는 잠을 자야겠습니다 / 최하림
새들이 모두 흘러갔나요 밤이 됐나요 아침이 됐나요 새들이 울고 있는 듯한데 아침 새들인가요 그들이 인사하러 왔나요 그래도 이제는 소용없겠습니다 내게 소중했던 시간들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잠을 자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는 손잡고, 기다리고 있었네 / 최하림
나는 살고, 숨 쉬고,/ 꿈처럼 본다, 하늘에서/ 요란스레 꽃들이 피고,/ 피가 흐르고, 천사들이 나팔 불고,/ 진압군이 몰려온다, 거리가 구부러지고/ 무너지면서, 심장이 터질 듯한 나는,/ 얼마나 손잡고, 웃고 있는가, 땀 흘리고/ 있는가, 고요히, 플라타너스, 이것은 최루탄,/ 이것은 민주주의, 이것은 방패, 하면서,/ 일렁이는 햇빛의 파도 속에서/ 흐르는 육체의 신선함으로,/ 신선함으로,//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 최하림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는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하나 둘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저녁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언덕 아래로/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간다 다시/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십일월과 십이월이 황사와도 같이/ 시계를 가리며 간다 모든 시간의/ 그림자들이 줄지어 간다 지상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했다는/ 허섭스레기 같은 소문들이 가득해지고/ 시청 앞 광장에는 오늘 밤도 촛불 시위가/ 계속된다 붉은 띠를 두른 전사들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가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 새에……//

말 / 최하림
나의 말들이/ 심연으로/ 심연으로/ 가라앉으면/ 맑은 물이/ 어둠을 비추고/ 형상을 비추어/ 슬퍼지리라// 슬픈 물결에 어린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흐르는 섬들이 끝없이 흐르고/ 낙조가 물든 바다가/ 눈을 감으면// 또다시 말들은/ 심연으로/ 심연으로/ 가라앉겠지/ 갈앉음이/ 솟아오름이라고/ 때로는 꿈꾸면서/ 꿈은 슬퍼지겠지//

독백 / 최하림
어두워지는 도시를 버스를 타고 달린다/ 피곤한 몸으로 달린다 아직도 아침과 같이/ 일들은 저쪽에 쌓여 있고 내일도 내일의 깨끗한/ 어둠도 어둠 속에 쌓여 있다 우리들은/ 어둠 속으로 달리는 차와 함께 달린다 어둠이 넌지시/ 손을 들고 있다 어깨를 펴고 우리는 그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도대체 우리는 무엇 하려고 하는가/ 잠 속에선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라고/ 물어볼 수도 있으리라 허나 누가 대답해/ 줄 것인가 잠은 말을 가지지 못한 것을 말은/ 달리는 버스 속에, 질문하는 자의 슬픈 질문 속에/ 불치의 환자처럼 누워 있는 것을//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 최하림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寒山 같은 시인도/ 길 위에서 비오면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지난 시간들이 촉촉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있다//

어디서 손님이 오고 계신지 / 최하림
문호리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산(雅山) 선생님이 보내주신 매화가 연 이태 눈을 틔운 것으로 그치더니 올해는 동지를 앞두고 꽃들이 활짝 피었다 향기가 복도로 퍼져나갔다 아내는 층계참에 쭈그려 앉고 나는 창가에 앉았다 바람이 부는지 창밖에서는 구름이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마음을 갈앉으려고 나는 청소기로 거실과 복도를 서너 차례 민 뒤 이층으로 올라가 책들을 정리했다 책상 위에 한 권 한 권 제 자리에 꽂고 있는 동안에도 어디 먼 데서 손님이 오고 계신지 마음이 흔들리고 유리창들도 덜커덩거렸다//

서상(書床) / 최하림
시인 김해겸이 서상(書床)을 하나 선물로 가지고 왔다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단 것이었다 도예가 이동욱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마루의 서쪽 벽면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아래 두고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흰 그늘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디로 갔는지 사발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도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서상(書床)은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다 우수도 지나가고 청명도 지나갔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나는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에서 파지를 수십 장 버리다가 작파하고 한밤에 층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나는 마루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마루에는 물과 같은 시간이 넘실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서상(書床)은 시간 위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구석방 / 최하림
산 아래 이층 목조 건물은 긴 의자와 십여 개 유리창이 일제히 남으로 열려 있어 아침이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밤에는 별들이 내려왔다 개들이 컹컹컹컹 짖어댔다 나는 고해성사실과도 같은 이층 구석방으로 들어가 옷자락을 여미고 숨었다 구석방은 어두웠다 건축가 김수 선생은 그날 지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으로 구석방을 마련한 모양이지만 나는 고해할 줄 몰랐다 고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 잠이 들면 새들이 소리 없이 언덕을 넘어가고 언덕 아래로는 밤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갔다 간간이 기적을 울리며 가기도 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 층계를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를 꺼내마셨다 토마토도 몇 개 베어 먹었다 밤은 아직도 멀었는지 창밖으로는 새까맣게 어둠이 흘러갔고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는 딱딱했다 의자가 밤 속으로 흘러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의자는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나무가 자라는 집 / 최하림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잡목 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 내릴 듯/ 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라든가/ 딱따구리 생쥐의 역할인 듯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 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 무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 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잡목 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아침 시 / 최하림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 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 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혹은/ 꽁지 붉은 비둘기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 포르릉 날며 흘러/ 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저녁 무렵 / 최하림
한번의 저녁도 순간으로 타오르지 못하고/ 스러지는 시간 속을, 혹시 뉘 있어 줍고 있는지/ 뒤돌아보지만 길들은 멀리까지 비어 있고/ 길들은 저들끼리 입 다물고 있다/ 길 위로 새 한 마리 공기의 힘을 빌려/ 하늘 위로 올라가 콕, 콕, 콕, 허공을 쪼아댄다/ 나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노을이 산 밑으로 흐르는 것을/ 무슨 상처처럼 보고 있다//

저녁 바람은 / 최하림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저녁 바람이 베란다를 넘나들며 논다/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저녁 바람이 복도 끝으로 달려 갔다가 복도 끝으로 달려오며 논다/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설거지 하는 사람도 없어서 덜커덩덜커덩 설거지하며 논다/ 그리고 저녁 깊이 어둠이 깔려오면 저녁 바람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어둠이 되어 논다//

황혼 저편으로 / 최하림
노을 속으로 그림자들이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어스름을 끌어당기며 밤 속으로 들어간다/ 내 것이 아닌 추억들이 소리 지르며 일어선다/ 주민들은 입을 다물고 가만가만 발길을 옮긴다/ 주민들은 침실로 들어간다 한밤에는/ 빗줄기들이 세차게 이파리들을/ 때리고 풍경은 길게 숨을 내쉬고/ 나는 두렵다 나는 눈 뜨고 있다/ 내 앞에는 아직도 검은 시간들이/ 뭉텅뭉텅 흘러가고 있다//

별 / 최하림
차고 차거운 밤에/ 별은 슬픔을 기르며 여위어가고/ 여인들은 밤으로 밤으로 드러눕는다/ 사립 밖에서는 개들이 울고 가랑잎이 날리고/ 눈이 오려는지 무거워진 공기를 흔들면서 사나이들이 돌아와/ 빼앗긴 땅에 검은 입술을 부비며 운다/ 울음이 하늘로 하늘로 퍼져/ 하늘의 깊음이 된다//

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날이여 / 최하림
여름풀들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구렁으로 우리는 들어가/ 푸른 메뚜기들을 만난다 메뚜기들은 가끔씩 덥고 지루한 풀/ 숲을 빠져나와 책장을 넘기고 넘기면서 새로운 책장으로 들/ 어간다 책장 위에서 뒷다리에 힘을 주고 똥을 눈다 검은 똥이/ 뚝뚝뚝 구멍으로 빠져나온다 다시 메뚜기들은 뒷다리의 힘을 풀고 눈을 굴린다 메뚜기들은 날개를 펴고 평형으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어떤 메뚜기들은 평형이/ 허물어지면서 날개가 부서져 내린다 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날이여 부서져 내리는 메뚜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슬프다//

메아리 / 최하림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장로들의 말씀으로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께서 파셨다고도 하고 성호문하에서 파셨다고도 하고 그보다 오래 전 사람들이 파셨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좌우지간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이유라도……/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은 채 외롭게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여림의 유작시 한 구절. 나는 그를 가르친 적이 있다.

빈약한 올페의 회상 / 최하림
나무들이 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을 횡단하여 나의 精神은 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여진 날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理解의 속/ 퇴각하는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發端인 우리/ 아아 무슨 根據로 물결을 출렁이며 아주 끝나거나 싸늘한 바다로/ 나아가고자 했을까 나아가고자 했을까/ 器械가 의식의 잠속을 우는 허다한 허다한 港口여/ 內部에 쌓인 슬픔을 수없이 작별하며 흘러가는 나여/ 이 雲霧 속, 찢겨진 屍身들이 걸린 침묵 아래서 나뭇잎처럼/ 토해 놓은 우리들은 오랜 붕괴의 부두를 내려가고/ 저 시간들, 배신들, 나무와 같이 심은 별/ 우리들의 소유인 이와 같은 것들이 肉體의 격렬한 通路를 지나서//

오늘 밤에도 당신은 -장석남에게 / 최하림
오늘 밤에도 당신은 슬픔을 한 그릇 넘치게 떠가지고 옵니다/ 산은 어둡고 나무들은 가지를 내리고 마을도 깊이 입 다물고 있습니다/ 시간들이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소리 꿈결처럼 들립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뿌리를 앙상하게 공중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두 손을 들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다림은 완성되지 않고 기다림의 징후도 보이지 않습니다// 달이 반쯤 떨어져가는 갈기산 쪽으로 이파리들은 재 채기하듯 뚝, 뚝, 져 내리고 벌레들이 울고 나는 유리창 안에 있습니다// 달이 모습을 아주 감춘 다음에도 나는 이윽히 서 있습니다// 수은등 아래 '끝집'이라고 간판을 단 주막에서는 주정꾼들이 기어나와 비틀거리며 가는 모습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릿느릿 돌아가고 있습니다//

유혹 / 최하림
수도 없이 소리들이/ 검은 벽에 부딪쳐/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이/ 차올라 사랑이라 한다// 나를 바라봐야 한다/ 내가 너를 보듯이/ 찬달이 흘러든다고/ 너에게 눈으로 말하듯이// 문 밖에서는 밤의 마디마디를/ 깎아가는 오뇌가 기다리고/ 우리들의 축축한 사랑과/ 미움의 이 분위기/ 너를 향해가는/ 이 불행한 벌건 희열/ 나를 어지럽히며/ 중심하여 세계를 돌고/ 밤의 돌벽과 우수의/ 나무 가운데서/ 아무 미소도 없이 이끌리고// 밝다 밝다 밝다/ 불붙음이 불붙음이/ 어리인 지금은......//

새 / 최하림
어떤 빛에도 드러나지 않고/ 어떤 놀에도 몸 붉어지지 않고/ 오로지 제 어둠으로 가는구나/ 멀리멀리 그리운 불 밝혀두고/ 풀잎들이 한덩이로 뭉쳐 사운거리는/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서, 겨울새들이여/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기다리는 사람들/ 어둔 벌을 가고 있으니/ 나직이 새들이 바람을 치며 나르고 있으니.//

풍경 / 최하림
그날 우리들은 빠른 걸음으로/ 허겁지겁 언덕을 올라갔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오고 있는 서남쪽으로/ 섬들이 붙박혀 오돌오돌 떨고// 그곳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내리는 눈이/ 희고 길게, 영산강보다도 시베리아보다도/ 갑오년에 굶어죽은 비렁뱅이 웃음 소리보다도 길게/ 내리고, 구름을 빠져나온 새처럼 검은 물체가 빠르게/ 그림자를 떨어뜨리면서 지나가고, 모든 배의 돛이/ 바다 쪽으로 펄럭이는 언덕에서 우리들은 보았다/ 눈에 묻힌 겨울이 드라클로아의 풍경처럼 엎어져 있었다//

불 / 최하림
링 위의 알리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들은 사랑의 어두운 자유를 누린다/ 타오르는 저 불꽃 창밖의 비바람소리 비바람소리/ 나는 난로 속에 장작을 집어던지고/ 솟아오르는 불길에 마음을 태운다/ 두 눈이 타고 손발이 탄다/ 벌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면/ 바람치는 지방의 여린 가지들이 사납게 휘나부끼고/ 이빠진 문이 사방에서 덜컹거린다/ 어느 곳에도 덜컹거리지 않는 곳이 없고/ 어느 곳에도 바람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나는 불길로 사랑으로 쓰다듬는다/ 불타는 입술로 입맞춘다/ 다시 없이 뜨거워지는 우리들의 몸/ 어떠한 비바람에도 뜨거워지는 몸/ 아아 사랑의 불길이여 타올라라/ 거세게 우리들의 마음을 태워라/ 불꽃 속에는 불이 있고 사랑 속에는 씨앗이 있다/ 장작을 태우는 불길의 뜨거움이/ 이제는 사랑하는 우리들이고/ 사랑하는 우리들이 세계에 대한 불이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불이다//

비가 / 최하림
흔들리고 증오스런 달빛이 확신의 지방으로 흐르는/ 밤에 우리들은 무슨 까닭으로 깨어 있었던가/ 우리들은 그를 사랑했던가/ 아니다 이제는 버릴 수 없는 쓸쓸한 밤이여/ 외로움이 그를 가게 한 뒤로 밀려드는 눈물의 안개/ 그리고 堤坊을 타고 오르는 물결소리/ 소리는 더욱 크고 높게 울부짖는다/ 그리하여 울고 있는 등어리를 물들이면서/ 소리는 한줌의 희망도 없이 흘러 내리고/ 보아라 칼 아래 잠든 밤이여/ 사랑의 아름다움을 알고 바라던 밤이여/ 소리가 지날 때마다 사방은 해초처럼 설레고/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으므로/ 이제는 진정하여야겠다 확실한 많은/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때를/ 위하여 슬픔을 버리고 헛된 눈물을 버리고/ 흐느끼는 듯한 진실을 만들어야겠다/ 사무치게 흔들리는 바다로 바다로 가/ 일대를 조용하게 할 질문을 들어야겠다/ 먼 현실로 돌아가 내가 나일 수/ 있다면……./ 나일 수…… 있다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 최하림
가뭄이 타는 대지를 걸어 당신께서는/ 신작로 끝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드시고/ 앙상한 가지들은 일제히 마른 소리를 냈습니다/ 당신께서는 앞개의 水畓에서 잃으신/ 수확을 그렇게 정성으로 보충하셨습니다/ 겨울이 소리없이 뒤를 따라왔습니다// 이삼월의 기근이 골목을 누비고/ 오막살이를 심하게 흔들 때에도/ 흰 무명으로 누추함을 감싸시고/ 당신께서는 언제나 그늘이 길게 뻗친/ 저녁의 네거리와 그 언저리에서 떠나셨습니다// 아아 그때의 어귀에서 흔들리던 일정/ 오랜 해수처럼 가래를 끌륵이면서/ 바닷가에서는 이윽고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눈먼 소년이 더듬거리며 눈을 밟고 갔습니다// 아아 어머니여 이제는 나도 눈먼 소년과 같이 어둠을 밟고 갑니다/ 휘어진 도시의 거리에서 그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패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우는 소리를 필경은 들을 것이고/ 그리고 도시의 앙상한 가로수를 흔들고/ 가로수들이 마르게 마르게 소리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그대는 눈이 밝아 / 최하림
그대는 눈이 밝아 마른 풀숲으로/ 기어가는 실뱀을 실뱀이라 하고/ 억새풀을 억새풀이라 하고/ 그대는 눈이 밝아 공기의 입자들이/ 햇빛에 흔들리며 소리하는 것을 소리한다고/ 말하지 가령 그 소리가 지쳐 지나가는/ 말 떼에 놀라 깨어질지라도 깨어진 소리가/ 시간 속으로 지나는 것 보며 소리가 지나간다고/ 말하지 감히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대는 눈이 밝아 눈이 밝아서/ 무지막지하게 군화 발자국이 들판을 짓이기고/ 라이보리가 목이 꺽이어 웅덩이에서 시들지라도/ 그대는 눈이 밝아 눈이 밝아서/ 라이보리가 시든다고 말하고/ 라이보리는 썩어서 모습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가시영역 밖으로 사라져가고/ 우리의 가시영역으로 돌아와/ 마른 풀숲에서 서걱거리고/ 헤아릴 수 없이 쓸쓸한 마음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설 때/ 일어서면서 흔들릴 때/ 그대는 눈이 밝아 눈이 밝아서/ 마른 풀숲이 흔들린다고 말하지/ 감히 그렇게 말하는 거지//

우리가 당신의 성채인 것처럼 / 최하림
우리가 당신의 성채인 것처럼/ 우리의 성채인 말들을 위해 기도해 주소서/ 말들은 오래 전에 집을 나가 객지를 떠돌고 있습니다/ 딱딱한 침상도 그를 위해서는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삼류여인숙에서 등을 돌리고 누울 시간도 없습니다/ 우유도 없습니다 희미한 미소와 손짓과 무채화 같은/ 공복의 이미지들이 저문 강에 말뚝을 박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간 공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말들이 숨쉬고 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등뼈가 휘도록 추운 길로 여인들이/ 가고 있습니다 소방차들이 가고 있습니다/ 꽁꽁 언 말들을 위해 기도해 주소서/ 우리가 당신의 성채이듯/ 말들은 우리 성채입니다//

소록도 시편2 / 최하림
시인이여, 문둥이 되어, 발가락이 떨어지고, 손가락 떨어지면/ 발가락 시 쓰겠느냐, 손가락 시 쓰겠느냐,//

소록도 시편5 / 최하림
시간이 날기를 멈추고 잠시 혼몽 속을 헤맨다 추억은 죽음보다 빛이 조금 생생하다 이시간이면 달이 떠올라 문둥이들이 산과 내를 건너와 지었다는 움막이 기둥만 남긴 채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바람 속에 서까래가 삐걱이는 소리 아직 들리고 이륜차 바퀴가 모래에 묻혀 구르고 바퀴들은 비실재의 시간 속에서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연발하며 돌아간다 해안은 여전히 푸르다 죽은 자들의 역사를 알리는 상형문자가 물 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베드로 / 최하림
골목에는 띄엄띄엄 병사들이 늘어서고 어둠이 소리없이 기어 들어갔다 그 밤에는 꼭 어둠이 아니라도, 예컨대 나무라든지 바람이라든지 새들이라든지,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빛과 소리와 그림자까지도 밤으로 스며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밤밖에는 아무 곳도 열려 있지 않았다 나는 검은 벽면에 몸을 붙이고 서 있었다 시간들이 우수수 떨어져 갔다 시간들은 골목과 골목으로 토네이도처럼 휩쓸려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밤손님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고 그들의 소굴로 데리고 갔다 그들의 침상에 던졌다 나는 며칠 동안 그들의 침상에 누워서 그들이 문을 밀고 나가는 소리와 문을 밀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해거름에 올 때도 있고 새벽녘에 올 때도 있었다 그들은 소리에 대한 병적인 징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놀래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째기 웃고 손짓하고 방 안을 되는대로 어지럽히면서, 깨끗이 치울 게 뭐람, 어차피 말세가 오면 세상을 뒤엎어 버리고 말 건데, 라는 식으로 사방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있었으며, 그 늘어놓음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인 듯했다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은 모두 창밖으로 나와 물끄러미 비를 천진한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여자도 있었고 늙은이도 있었고 종달새도 있었고 뱀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문둥이도 있다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서서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들판으로 나갔다 그와 함께 목을 축이던 샘가로 갔다 그곳에는 문둥이도 없었고, 그곳으로 가는 길도 없었고 무의미한 들판만이 고즈넉이 뻗어서 싸리나무숲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베드로 2 / 최하림
빌로드같이 검은 밤을 빠져나와 새벽 기슭에 이른 것은/ 나도 알 수 없는 격정 속에서였다/ 공기가 사납게 출렁거리고/ 길이란 길들은 다들 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걸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어갔다/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에게/ 어떤 사물은 그리움이고/ 어떤 사물은 사랑이지 않았으며/ 뉴스같이 맥빠진 언덕과 마루를 올라도/ 먼 산을 보아도// 머잖아 내릴 눈처럼/ 설레지 않았다/ 서천군 서천면 서천리/ 그 이상한 집 뜨락에서/ 모든 것들은 죽음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베드로 3 / 최하림
나는 돌부리에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골짜기로 들어갔다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고 캄캄한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하늘 한자락이 창고 지붕처럼 날리고 무너져내렸다 나는 병사들 속으로 들어갔다 철모와 구레나룻과 푸른 등줄기들이 빛을 발하며 한쪽으로 쏠린 둣 했으나 개의치 않고 나는 병사들을 뚫고 들어갔다 더욱 비는 세차게 내렸다 유카리나무와 종려나무 줄기에서는 비들이 줄줄줄 흘러내렸다 방금 나는 병사들 속으로라고 했지만 그것은 병사들인지 검은 나무들인지 나무의 그림자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미분간의 암흑 속을 뚫고 계속 들어갔다 골짜기를 지나 산마루로 올라갔다 산마루에서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올빼미 같은 새들이 날개를 후닥탁거리며 날아갔다//

베드로 6 / 최하림
돌과 모래와 지푸라기와 쇠똥구리 들을 지나고/ 쇠비름들을 지나 성큼성큼/ 물 위로 걸어가면서/ 가난한 자는 福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 福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 福이 있나니/ 라고 여덟 번 말하고, 또/ 세 번 가난한 자는 福이 있나니를/ 종려나무 가지에 걸어두고서,/ 아무것도 먹을 것 없고/ 마실 것도 없는,/ 뼈마디가 앙상한,/ 발이 희고,/ 눈이/ 푸른,//

가을의 속도 / 최하림
줄달음쳐 오는 가을의 속도에 맞추어 나는 조금 더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가 빠르게 머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산굽이를 돌고 완만하게 경사진 들을 지나자 옛날 지명 같은 부추 마을이 나오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는 모습이 보이고 마을회관 옆 산수리나무/ 이파리들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내립니다 물이고 노인들이고 이파리들이고 가을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산 속의 짐승들도 오늘은 그들의 겨울을 생각하며 골짜기를 빠져나와 오솔길을 질러 달립니다/ 가을은 우리 밖에서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비명처럼 서 있습니다//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 최하림
갈마동에 가자고 아내가 말한다/ 풀숲에 반딧불이들이 언뜻언뜻/ 머리 들고 나오는 설천과 나제통문을 지나/ 거창 쪽으로 십여 분 달리면 산그늘이/ 빠르게 내리는 곳, 한 골짜기/ 어둠을 풀어놓은 실개천에/ 가랑잎이 무시로 쌓이고 햇빛이/ 그리운, 사람도 조금씩은/ 그리운,// 나는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한동안 덕유산을 본다 산은 어느 때고/ 물에 젖은 채 입 다물고 있다/ 침엽수들이 해마다 솟아오르면서/ 골짜기는 깊어가고 내를 따라 가을 물은/ 졸졸졸 흐르다가, 그것도 그치고 나면/ 일대는 무통의 적막뿐, 그뿐,/ 아내는 낮은 소리로 산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작아지고, 그림자들이 우리를/ 어둠 속으로 몰고 간다고, 나는/ 말없이 귀를 기울인다 말은/ 은빛으로 반짝이면서 저녁 하늘로/ 퍼져가다가 산 아래, 나무 아래, 돌 밑에 숨는다// 여전히 아내와 나는 입 다물고/ 덕유산을 보고 있다 너무 슬프지/ 않고 심심하지 않게…… 한동안/ 어떤 사념이 머리를 흔들고 가는 것일까/ 바람 소리! 그림자와도 같은 바람 소리!/ 아내와 나는 놀란 듯 몸을 들고 일어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밤도 어둑신히/ 저어기, 저렇게, 허수아비처럼 있다//

달이 빈방으로 / 최하림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겨울 바람처럼/ 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나가는 정경이 보입니다/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빈집 / 최하림
초저녁, 눈발 뿌리는 소리가 들려/ 유리창으로 갔더니 비봉산 소나무들이/ 어둡게 손을 흔들고 강물 소리도 숨을 죽인다/ 나도 숨을 죽이고 본다 검은 새들이/ 강심에서 올라와 북쪽으로 날아가고/ 한두 마리는 처져 두리번거리다가/ 빈집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에는/ 빈집들이 줄지어 있다 올해도 벌써/ 몇 번째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집들은 지붕이 기울고 담장이 무너져내렸다/ 검은 새들은 지붕으로 곳간으로 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은 새들은 빈집에서/ 꿈을 꾸었다 검은 새들은 어떤/ 시간을 보았다 새들은 시간 속으로/ 시간의 새가 되어 날개를 들고/ 들어갔다 새들은 은빛 가지 위에 앉고/ 가지 위로 날아 하늘을 무한 공간으로/ 만들며 해빙기 같은 변화의 소리로 울었다/ 아아 해빙기 같은 소리 들으며/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다/ 검은 새들이 은빛 가지 위에서 날고/ 눈이 내리고 달도 별도 멀어져 간다/ 밤이 숨 쉬는 소리만이 눈발처럼 가늘 게/ 울린다//

오래된 우물 / 최하림
아침부터 나는 줄곧 유리창을 보고 있었으나/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많은 것들이 희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날들이 홑이불처럼 날리면서 가고 있었고/ 소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어두워지고 있었고// 물을 한 잔 마시고 있었다// 하늘 아래 달과 물이/ 차오르면서 쿨, 쿨, 쿨, 쿨,/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내린천을 지나 / 최하림
내린천을 지나 인제로/ 미시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졌네/ 꿈도 꾸지 않았네/ 한줄기 별똥별도/ 흐르지 않았네/ 캄캄한 잠 속을 헤매고 헤맨 뒤/ 또르르또르르 물소리 같은 소리가/ 계속 귓바퀴를 울려 나는 일어났네/ 물소리 같은 소리가/ 집을 울리고/ 나무도 새도/ 울렸네/ 가을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 울고 있었네/ 지붕 위로 떼 지어 어스름이 달렸네/ 검은 바위들이 어둠에 잠겼네/ 아무것도 나는 알 수 없었네/ 경(經) 한 장 읽을 수 없었네//

우수(雨水) / 최하림
雨水라는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심히 창을 여는데 길 건너편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달려들 듯 노을이 흘러가고 가는 바람이 흘러/ 가고 볼이 붉은 아이가 간다 누가 스위치를 눌렀는지/ 어두운 창이 밝아지면서 추녀가 높이 솟아오르고/ 불분명한 시간들이 산허리를 타고/ 강둑 버드나무숲 쪽으로 휘어져간다//

시월은 / 최하림
시월은 북한강 물이 마르고 등고선을 넘어온 산들이/ 그늘에 잠기고 하늘과 나무가 흰 머리를 내밉니다/ 시월은 밤이 가고 아침이 옵니다 시월은 털이 덜 난/ 사람들이 다시금 들녘을 헤매고 바람 많은 실내에서는/ 여인들이 이불을 한 채 깁고도 성이 차지 않아 한/ 채 더 깁습니다 아아 시월은 눈물이 타는 서쪽 창문을 바람이 활짝 활짝 열어젖히고/ 붉은 자전거를 타고 집배원이 달리고/ 부고와 청첩장이 날아들고/ 김우창 선생님의 초대를 받은 시인들이 신발끈을 매고 서둘러 집을 나섭니다/ 시월은 모두 바쁘고 모두/ 충만하고 모두/ 칩습니다//

가을날에는 / 최하림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고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데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가을과 그리고 겨울 / 최하림
깊은 가을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 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평전에는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겨울의 빛 2 / 최하림
지난 겨울, 남행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마침 창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 의자에 앉은 아이들이 좋아라 눈길을 밖으로 보내고, 외국인 부부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씨부렁거리고, 눈을 평범하게 볼 줄 아는 시골 아낙 서너 명도 그네다운 눈짓으로 유난히 아름다운 눈이란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열차에 소나 말이 타고 있었더라도 소나 말도 두 발을 들고, 소리질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열차는 기쁨의 열차인 것 같았다. 기쁨이 눈처럼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의사랑 / 최하림
겨울의 뒤를 따라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바람은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길을 달리는 행상들에게나/ 돌가루 냄새가 코를 찌르는 광산촌의 날품팔이 인부들에게/ 그리고 오래 굶주릴수록 억세어진 골목의 아이들에게/ 바람은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일러주었다./ 바람은 언제나 같은 어조로 일러주었다/ 처음 우리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반복의 강도 속에서 원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원한은 되풀이 되풀이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여인을 또다시 벌거벗게 하고/ 저녁거리 없는 자를 또다시 저녁거리 없게 하고/ 맞아죽은 놈의 자식을 또다시 맞아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아아 짓밟힌 풀포기 밑에서도 일어나는 바람의 시인이여/ 어쩌다 우리는 괴로운 무리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나/ 어쩌다 또다시 칼날 앞에 머리를 내밀고/ 벌거벗은 여인이 사랑을 말하려고 할 때/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사랑이 그들의 머리칼을 창대같이 꼿꼿하게 하고/ 불더미 속에서도 죽지 않는 영생으로 단련하는 것같이/ 단단하고 매몰차게 세상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아 바람의 시인이여 이제야 우리는 알겠다/ 그들의 골수 깊은 원한이 사랑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쇠붙이는 불길 속에서 단련되어진다는 것을/ 바람은 그것을 밤이 오고 눈이 온다고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겨울의 견고한 사랑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겨울 정치(精緻) / 최하림
큰 나무들이 넘어진다 산과 산 새에서/ 강과 강 새에서 마을 새에서/ 길을 벗어난 사람이 어디로인지 달리고/ 길러진 개들이 일어서서/ 추운 겨울을 향하여 짖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강을 따라/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걸어간다/ 저녁 그림자처럼 걸어간다 마을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과거도 현재도/ 보이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들의/ 불길한 울음만 공중에 떠돌며/ 얼어붙은 겨울을 슬퍼하고// 언덕도 상점도 폭설에 막히고/ 거리마다 바리케이드 쳐져/ 사람들이/ 어이아이어이 우부짖고/ 갈색 옷을 입은 사내 몇, 들리지 않는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소리로/ 진정하라고 말하고 그 소리들이 모여/ 경루나무를 넘어 뜨린다// 꽁꽁 언 새벽 여섯시, 지령(地靈)처럼 걷는/ 사람들 새로 우리들은 걸어간다/ 살얼음의 아픔이 여울마다 일어나고/ 흰 말의 무리가 하늘의 회오리 속으로/ 경천동지하며 뛰어올라 갈기를 날리고,/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단의 사내들이/ 사냥개를 끌고온다 개들이 짖는다/ 이제는 얼어붙은 우리들의 꿈이여/ 눈과 같은 결정체로 삼한(三韓)의 삼림에 내리어오라/ 기다리는 노변애서 상수리숲도 우어이우어이/ 울고 겨울새도 울고 우리도 울고 있다//

눈 / 최하림
눈이 내린다 서울에서도 그중 순결한 눈을 맞으며 수유리 숲길을 오르면 우리들 정신은 눈이 되어 허공에서 내려와 허공으로 돌아간다 펑펑 내리는 눈이여 우리들이 밟고 가는 눈이여 거부로 들끓는 한 사나이는 피 어린 언어를 토해내지만 칼끝을 걸어가는 아픔을 가지지 못한 언어는 칼 끝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언어는 칼일 수 있다 녹아서 지심 깊숙이 스며들어 사물의 뿌리를 죽이는 눈이여 너희는 우리의 정신을 순결하게 세척해 주지만 거부로 끓는 우리는 거부로써 씻어지지 않는다.//

언뜻언뜻 눈 내리고 / 최하림
언뜻언뜻 눈 내리고/ 바람 불고 마른풀들이/ 일어서는 중미산 언덕에서/ 어느 누가 홀로 서 있다 할지라도/ 소리들은 하염없이 빠져나가노니/ 날이 저물고 또 저물어/ 아무 병 없으면/ 우리도 저렇듯 아름다워지겠다고/ 할 수 있겠지요//

눈과 강아지 / 최하림
지그재그로 발자국을 찍으며/ 강아지 한 마리 눈 위로/ 겅중겅중 달린다 컹컹컹컹 달린다/ 한 골목을 지나 또 다른 골목으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는 골목으로/ 강아지는, 강아지는 달리고 또 달린다/ 이제 강아지의 앞발도 보이지 않는다//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 최하림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어느 시인이 북극에서 포획해 가지고 왔다는 극도로 단단하고 투명하기도 한, 이물질과도 같은. 나는 결빙(結氷)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고 읽는다 읽을수록 문장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바람도 없고 거리와 골목은 비좁고 마침내 폐쇄된다 나는 남은 문장을 버리고 집을 나선다 이상한 해방감이 감돌면서 나는 찬 기운이 도는 길을 지난다//

모카커피를 마시며 / 최하림
이마 넓은 가을이 찾아오면/ 우리 마음은 둥글어진다 거년에/ 입다 둔 무명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보이지 않게 먼지들이/ 국화문 벽지에 쌓인다/ 아내가 모카 커피를/ 타가지고 오는 소리 들린다/ 모카 향내는 색다르다 아내는/ 향내를 조금 쓰게 타올 때도 있고/ 조금 달게 타올 때도 있다/ 내 기분에 알맞게는 하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아니므로 그렇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함께 산다 우리의 개성인 모서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서지고 모서리들이/ 닳아지고 모서리들이 정다워지면서/ 죽음 가까이 죽음처럼 둥글게/ 감정이 고인다 감정이 가을 잎 같다/ 나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맛은 쓰다/ 아내는 사과를 쟁반에 받쳐 들고 올 때도 있다/ 홍옥이 가을에는 향기롭다/ 나는 부사가 좋을 때도 있고 배가 좋을/ 때도 있으련만 말을 않고/ 홍옥을 먹는다 홍옥 냄새가/ 입안을 감돌고 붉은 빛은 혀를/ 감칠나게 한다 향내가 감정이 된다//

담쟁이덩굴 / 최하림
문예진흥원 뒤에 있는 토탈디자인의/ 벽을 감아올라간 담쟁이덩굴이 비바람 맞아/ 참을 수 없는 충격으로 설래던 날은/ 한 도시에서 다른 모양으로 사는/ 너를 생각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지/ 그러나 나는 너를 생각하기 전 어두운/ 동요들이 일어나는 잎들의 돌연함에 놀라/ 떨었다 우리 마음속에는 잎들의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깜짝깜짝 깨어나는,/ 전율도 있을 것이다 담쟁이덩굴에서/ 비바람 소리 들린다 우리가 우리 그림자/ 뒤돌아볼 때 우리 시선이 머문 그곳으로/ 불길한 시간이 흔적 없이 지나간다//

방울꽃 / 최하림
여러 기슭을 흐르고 들판을 돌아 마침내 영산강으로 태어난 사람아 무얼 그리 깊은 눈으로 보고 있느냐/ 불어오는 바람에 붉은 몸 비비며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던 수분령의 무진 장관 잡초들이냐 잡초의 빛이냐 슬픔이냐/ 황혼 속으로 빠르게 침몰해가던 너의 존재가 버린 시간들 더러는 슬픔이고 기쁨이 되어 거울 속으로 떠오르던 시간들 찬비 같은 시간들/ 그런 시간 속에 모래 쌓이고 바람 일어 누군가 금방 울고 간 것 같은/ 오늘은 방울꽃이 피었다//

산수유꽃들이 피다 말고 떨어져 / 최하림
풍전등화같이 나라가 어수선할 때에도/ 봄이며는 매천 선생이 종자를 거느리고/ 왔다는 구례군 산동면 산위마을로/ 나는 근근이 와서 돌틈으로 흐르는/ 물 보며 우수가 저만큼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성급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카메라에 봄을 담느라 바쁘고/ 빈집 놈새밭에서는 봄풀들이 돋아나/ 성하다 쉰을 넘었음직한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빈집 사려고/ 그러느냐고 묻는다 나는 웃는다 그런/ 나를 살펴선지 담장의 산수유꽃들이/ 피다 말고 떨어져 붉은 물/ 풀며 흘러간다.//

밭고랑 옥수수 / 최하림
내 눈 이 너를 보고/ 내 귀가 너를 듣는 동안에/ 감추인 아침이 차츰차츰 열리고/ 감당할 수 없이 세상이 밝아온다/ 경이로운 아침이여 새벽부터 길들은/ 사립을 나서서 숨소리 깊은 들로 간다/ 내가 처음의 나그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몇 사람 째 이슬을 털고 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들을 깨우고 비린내음 물씬한/ 밭고랑 옥수수들을 흔든다 옥수수들이/ 눈 비비며 일어나 제 모습 본다/ 우리도 어느 날, 들을 가면서 우리가 지나는 모습/ 볼 것이다 긴 낫 들고, 그림자 드리우며,/ 존재하는 것들이 밝게 얼굴 드러낼 것이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랑에서, 나는 잠시, 햇빛에 싸여,/ 걸음이 미치지 않는 곳의 신비를 본다/ 가려고 하지 않는 길들은 매력 있다//

 



최하림(崔夏林,1939년~ 2010년) 시인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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