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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천양희 시인

부흐고비 2021. 7. 28. 09:08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다는 걸.//

우리는 말했다 /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번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외딴 섬 / 천양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벌새가 사는 법 / 천양희
벌새는 1초에 90번이다/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 시를 쓰나//

상일동 아침 / 천양희
아침마다 뻐꾸기가/ 복국(復國), 복국 울고/ 아침마다/ 상일(上一) 세탁소 아저씨가/ 세탁(世濁), 세탁 외친다/ 세상 탁해, 세상 탁해/ 탁한 세상/ 세탁하라는 소리 같아/ 그 소리/ 높이 들어올린 아침/ 탁한 몸 한 벌/ 세탁하고 싶네//

지나간다 /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 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발 없는 새 / 천양희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바람 속에서 쉰다네

날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만 쉰다네
......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서 쉬는 새
바람같이 소리치고 있다네
내 발 어디에 있지?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가 없다네


오래된 골목 / 천양희
길동 뒷길을 몇 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無憂樹 같아/ 그 자리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無憂 무우 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 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적고 있다/ 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 너무 오래된 골목//

구르는 돌은 둥글다 / 천양희
조약돌 줍다 본다 물 속이 대낮 같다/ 물에도 힘이 있어 돌을 굴린 탓이다/ 구르는 것들은 모서리가 없어 모서리/ 없는 것들이 나는 무섭다 이리 저리/ 구르는 것들이 더 무섭다 돌도 한자리/ 못 앉아 구를 때 깊이 잠긴다 물먹은/ 속이 돌보다 단단해 돌을 던지며/ 돌을 맞으며 사는 게 삶이다 돌을/ 맞아본 사람들은 안다 물을 삼킨 듯/ 단단해진 돌들 돌은 언제나 뒤에서/ 날아온다 날아라 돌아, 내 너를/ 힘껏 던지고야 말겠다//

시인이 되려면 / 천양희
시인이 되려면/ 새벽 하늘의 견명성(見明星) 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 같이/ 잘 때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 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 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 같이/ 1kg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 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 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 같이/ 하루에도 70만 번씩 철썩이는 파도 같이// 제 스스로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하루 / 천양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어떤 하루 / 천양희
건설중인 빌딩 꼭대기에/ 둥지를 튼 송골매 두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몇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더니/ 우리는 언제 저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니/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느니/ 아파트 공사장에/ 까치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멜버른이 아닌 우리나라 서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느니/ 이것이 사랑하며 얻는 길이거니/ 득도의 길이거니/ 아름다움과 자비는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는 것// 나,오늘 무우전(無憂殿)에 들고 말았네.//

하루살이 / 천양희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다가 죽습니다./ 하루가 하루살이의 일생입니다./ 하루의 하루살이가 되기 위해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딥니다./ 그동안 스무 번도 더 넘게 허물벗기를 합니다./ 천 일동안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다 하루살이가 되면/ 하루를 살다 죽어버립니다./ 하루를 살기 위해 천 일을 견디는 하루살이./ 그것은 하루살이의 운명입니다.//

뒤편 /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뒷길 / 천양희
뒷길은 뒤에 가기로 하고 앞길을 먼저 따라갔습니다 샛길을 끼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길은 몇 갈래 가다가 멈춘 길도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지평선 하날 당겨 먼 세계를 적었습니다 직선과 직진이 다르지 않았으나 나아가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려면 우선 물러서라는 말이 진과 퇴의 처세법임을 그때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곧은 것은 쉽게 부러지나 굽은 것은 휘어진다고 말들 하지만 구부러지면 온전하다는 저 곡선의 유연함 저 내밀함... 놀라운 것은 감추면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길 없어도 세상은 새 길을 만들고 사람들은 바쁘게 날 앞질러 갔습니다 옛 길이 언제 새 길을 내려놓았겠습니까 가파른 길 내 길 처럼 걸어갈 때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멀리 가야 많이 본다는 ...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길의 모든 것은 걷고 싶지 않아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들판 너머 길 하나 산 너머 길 바라다 봅니다 길의 끝은 멀고 그리고 가파릅니다 고갯길은 힘든 그 어떤 것도 넘겨주질 않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길 넘었습니다 고갯길은 벗어나도 벗지 못하는 업도 있습니다 눈부신 햇살도 모든 어두움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 다시 쓰고 싶은 생이 있겠습니까 앞길밖에 없겠습니까 가다보면 길이 되는 거 그것이 오래 기다린 뒷길일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놓았거나, 혹은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저녁의 정거장 / 천양희
전주에 간다는 것이/ 진주에 내렸다/ 독백을 한다는 것이/ 고백을 했다/ 너를 배반하는 건/ 바로 너다//

그 말을 들었다 / 천양희
몇 해 전/ 무릎에 갑자기 나타난 퇴행성보다는/ 덜 적막했다// 퇴생성이 어느 별자리인가/ 갑상선이 뉘 집 나룻배인가//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매미 노래와 시 / 천양희
큰 나무에 붙은 매미는/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매미의 노래는/ 멀리 퍼지고 깊이 파고든다 시집처럼//

시인의 말 /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빨래집게가 어쩌다 아이 속옷을 잡고 있는/ 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날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풍경은 엄마가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책 읽어주는 것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아이의 웃음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꽃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는 인간이 어머니 자궁에서 나와/ 최초로 터뜨리는 울음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은목서 꽃향기처럼 만리나 멀리/ 스며나갈 시인의 말이여//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 천양희
원고료도 주지 않는 잡지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 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 [답경지(答京之]에서

산문시에 대한 최근의 생각 / 천양희
어느 시인이/ 산문시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탄 뒤/ 잡지들 속에는 잡다한 시들이 부쩍 늘어났다/ 산문인지 산문시인지 모를 산만한 시들/ 뜬구름 입은 문장들이 흘러내린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거두는 것이/ 글쓰기와 읽기라는데/ 길어도 너무 길고 난해해도 너무 난해하다/ 서늘한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이른 봄의 시 / 천양희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을 안개를 길어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 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있다 /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 십만 번씩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참 좋은 말 /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600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 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 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최고봉 / 천양희
높은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고백한 산사람이 있었다/ 14번이나 최고봉에 오른 그가/ 무서워서 운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비밀을 안 것처럼 나도 무서웠다/ 산 오를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싼 짐을/ 풀지만 금방 울면서 다시 짐을 싼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울면서 짐을 싼 적이 있다/ 그에게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할 길이 있는 것이다// 능선에 서서/ 산봉우리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곳이 너무 멀었다//

삶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너무 많은 입 / 천양희
재잘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댄다 잎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시인은/ 마흔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입들이 너무 다르다//

한 아이 / 천양희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제각기 자기 색깔 / 천양희
세상의 바람 중에/ 솔바람만큼 영원한 초록이 있을까/ 사람의 일 중에/ 진실만큼 짙은 호소력이 있을까/ 세상의 말 중에/ 거짓말만큼 새빨간 속임수가 있을까/ 사람의 감정 중에/ 우울만큼 깊은 우물이 있을까/ 사람의 사랑 중에/ 옛사랑만큼 희미한 그림자가 있을까/ 세상의 사람 중에/ 시인만큼 변화부쌍한 계절이 있을가/ 세상의 시(詩)중에/ 고독만큼 자신을 고립치로 만드는 성지(聖地)가 있을까// 제각기 자기 색깔/ 제각기 자작(自作)나무//

저녁을 부려놓고 가다 / 천양희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던/ 시인 허수경 가고/ 속수무책이 당신이 세운 유일한 대책이라던/ 시인 황병승 가고/ 빈빈(彬彬)의 빛그물로 누워 떠내려가고 싶다던/ 시인 최정례 가고/ 붉은 황톳물 넘치는 강을 내려다보며/ 해가 지도록 울었다던/ 시인 권지숙 가고/ 별을 향해 걸어갈 내 발자국에는/ 왜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는지 묻던/ 시인 배영옥 가고/ 한 방울 눈물이 평생의 고백이라던/ 시인 박서영 가고/ 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던/ 시인 김종철 가고/ 시인을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던/ 비평가 황현산 가고// 저녁을 부려놓고/ 나보다 더 그리운 것은 가네*// 그리운 것은 가고 나보다/ 더 많은 저녁만이 남았네//
* 허수경의 시에서

너무 많은 생각 / 천양희
자기를 무너뜨리며 쌓으며 격렬비열도를 생각하다가/ 아름다움의 끝은 어디일까 고비사막의 일몰을 생각하는 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생각하다가/ 시련이 모두에게 좋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 밤/ 희랍인 조르바를 생각하다가/ 어둠이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는 쥘 르나르를 생각하다가/ 슬픔은 가면을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밤/ 긍정적인 마음의 씨앗을 하얀 씨앗이라는/ 티베트의 마음 수련법을 생각하다가/ 잔설 속에는 이미 봄이 와 있다고 생각하는 밤/ 언 땅에서도 푸르게 자라는 보리를 생각하다가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늙어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는 밤/ 불을 때도 연기 나지 않는 청미래 덩굴을 생각하다가/ 시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밤/ 씀바귀를 씹어도 잠은 오지 않고/ 너무 많은 생각이/ 생각탑을 세우는 밤//

슬픔을 줄이는 방법 / 천양희
빛의 산란으로 무지개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를 맞는 것일까// 빗속에 멈춰 있는 기차처럼/ 슬퍼 보이는 것은 없다고/ 까닭 모를 괴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시인 몇은 말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오죽하면/ 슬픔을 줄이는 방법으로 첫째인 것은/ 비 맞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까// 젖는 일보다 더 외로운 형벌은 없어서/ 눈이 녹으면 비가 되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빗소리에 몸을 기댄 채/ 오늘 밤/ 나는 울 수 있다/ 전력으로//

우두커니 / 천양희
희망이 필요하다고 얻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묶는다고 튼튼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깍는다고 깍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줌 쥐었다 놓는 날이면/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 천양희
열매를 보면서 꽃을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합니다./ 꽃은 열매를 위해 피었다 지고/ 어둠은 빛을 위해 어둡습니다./ 별을 보면서 하늘을 생각하고/ 나무를 보면서 산을 생각합니다./ 하늘은 별을 위해 별자리를 만들고/ 산은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듭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운명이라는 것 / 천양희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나는 독자를 믿는다 / 천양희


높은 가지의 잎을 따 먹는/ 단독의 기린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겉은 가시로 무장해 있지만/ 속은 짭찔한 물로 가득 찬 선인장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내릴 정거장이 없는 바람 같고/ 앉을 의자가 없는 물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그러면 안 될까요 독자여/ 자작나무에 자작자작/ 눈이 잠기는데/ 그래서는 안 될까요//


나의 거울 / 천양희
자신을 잘 모를 때/ 자신을 과신할 때/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어려운 일을 견뎌야 할 때/ 힘든 일을 인내해야 할 때/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옥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잘못된 일 때문에 후회할 때/ 실패한 일 때문에 좌절할 때/ 희망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고/ 절망보다 더 나은 교사는 없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자화상 / 천양희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 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직업 / 천양희
내 생의 업 중에 큰 업이/ 시업(詩業)이지 하다가도/ 시가 밥 먹여주냐,고/ 시답잖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밥도 안 되는 그걸로도/ 업이 될까 싶다가도/ 누가 나더러/ 그 시 참 좋데요, 할 때마다/ 나 혼자 감동 먹어/ 시로써 배부른 나에게는/ 말도 안 되지 싶다가도/ 또 누가 나더러/ 시만 써서 어떻게 사냐고 할 때마다/ 이태백 같은 사람은/ 술만 마시고도 시선(詩仙)이 되었는데 싶다가도/ 평생 시로써 업을 삼더라도/ 시선은커녕 시인도 못 되지 싶다가도/ 그런데 왜 하필/ 시업이 내 생업일까 싶다가도/ 생업이 실업이 안 되었으면 하다가도.//

천사의 시 / 천양희
꽃봉오리 아이 눈망울 같고/ 여린 잎들 아이 손가락 같아/ 사람들은 꽃을/ 천사의 시다 불렀을 것이다/ 신이 쓴 스테디셀러라 말했을 것이다/ 누구도 대신 쓸 수 없는/ 철창의 무궁 無窮시집// 꽃장을 넘기며 바람이 운다/ 꽃장을 덮으며 새들이 운다//

여식女息 보아라 -아버지의 옛 편지 / 천양희
여식 보아라 말하건대/ 모름지기 여성은 남성과 다르니/ 내 몸 잘 보존하거라./ 무릇 사람은 짐승과 다르니/ 네 맘 온전히 하거라./ 여식 보아라 이르건대/ 금보다 시간이 더 값진 것이니/ 세월을 막 허송 말거라/ 청춘부재래靑春不在來라./ 여식 보아라 원하건대/ 제 갈 길 잘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아내의 길을 잘 가거라./ 여식 보아라 빌건대/ 네 한 몸 누구보담 소중하니/ 아프지 말거라./ 여식 보아라 바라건대/ 제 정신 차리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니/ 절망하지 말거라./ 몽흔 주사 맞은 날 몽롱해져/ 환상인지 환생인지 옛 아버지/ 여식 보아라 여식 보아라 나를 깨운다.//

흐린 날 / 천양희
생각이 먼저 기슭에 닿는다. 강 한쪽이 어깨를 들어올린다. 下端이 저 아랜가. 문득 갈대숲에서 물떼새들이 달려나온다. 여름이 가는군. 나보다 먼저 바다로 든 길이 중얼거린다. 언제 내가 길 하나 가졌던가. 물줄기를 한참 당기면 마음에 들어와 걸리는 수평선. 세상이 평등하기를 저것이 말해준다. 이런 날은 물가에 오래 앉을 수 있겠다. 물에도 길이 있다고 하였으나 물방개, 소금쟁이, 물잠자리들, 물이 좋아 물 먹고 산다는 것일까. 나는 꿈속에서도 어안이 벙벙한 물고기들을 보았다. 물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 물까지도 한 잔의 물 속에선 흐르지 않는다. 나는 또 자주 쓴풀 몇 포기 뽑아 잘근잘근 씹는다. 산다는 건 자주 쓴맛을 보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비 오는 날 / 천양희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Ⅲ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마음의 벽 / 천양희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千弗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경계 / 천양희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마음의 지진 / 천양희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에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 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바닥이 쩍쩍 갈라져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양희
남편의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

외동, 외동 / 천양희
나는 오래 여기 서있었습니다 외동 1번지/ 다시는 저 다리 위에서 저 정거장엔/ 가지 않으리라/ 내려가서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리라/ 갈퀴별자리 옮겨 앉는 밤이면/ 네 청춘의 붉은 바퀴 굴러가다 멈춘 것/ 보입니다/ 가슴을 조금 움직여 두근거려 보지만/ 그 길 따라 오는 사람 있겠습니까/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 세상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늙은 느릅나무 뒤에는 주름 진 황톳길이/ 구불텅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개들 옆으로/ 저 혼자 젖는 취객들이 많이/ 어두워져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나는/ 신열에 들뜬 듯 머리를 싸매고/ 풀섶에 우는 벌레들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다 적기로 합니다/ 산간벽지 떠돌다/ 잔가지 생잎 쓸린 잡풀들/ 몰래 숨어든 외동 일번지 느릅나무 곁에서.//

진로를 찾아서 / 천양희
眞露도매센터 빌딩을 몇 번 돌았다/ 불빛 환한 지하에서 두꺼비처럼 두리번거리며/ 예술의 전당 쪽 계단을 오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眞路는 어느 쪽일까. 길 눈이 어두워/ 進路를 찾지 못해 돌아나온다. 오후 7시/ 저녁 어스름이 내 빈 속에 꽉 들어찬다/ 저 불빛 저 그림자도 길게 누일 길 있던가/ 생각하는 사람처럼 깊어지는 가로등들,/ 모르는 곳에 제 속을 허문다/ 차소리에 쓸려 나무들은 한 쪽으로 기울고/ 닳을대로 닳은 길은/ 사람의 산책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의 전당 무궁꽃에 기대어/ 한 사람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먼 길은 멀어서 하루가 짧고/ 담벽 너머 보는 지붕들이 뾰족하다/ 아무도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어/ 길 같은 길 어디 있냐고 투털대는 사람들이/ 자꾸만 비좁다며 바닥처럼 빠져나간다/ 모든 것은 항상 끝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로여/ 나는 너에게 줄 미래도 없는데/ 내 의지는 소의 눈처럼 꿈벅거린다/ 누가 나를 시험하러 세상을 문제로 내놓은 것일까/ 어딘가 길 잃은 사람 있을 듯/ 낮은 구두는 아직 귀가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眞路 너무 아득해 빌딩 숲 헤쳐 닿을 길 없고/ 이 길 한 켠에서 생각나는 것은 사람마다/ 가지 않은 길 하나씩 품고 있는 한줌 기대와 기대 속에 묻힌 한 그루/ 추억의 푸른 나무./ 기대는 자주 우릴 셀레게 한다/ 설레임 속에서 새벽이 뜬 눈으로 돌아온다/ 비로소 진로란/ 우리들 생이 그렇듯/ 비뚤비뚤 하거나 비틀비틀한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이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 간다//

자리 / 천양희
내가 철이 없었을 때/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지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고/ 아무데나 앉지 말라고/ 내가 잘할 때나 못할때나/ 들려주신 그 말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내가 철이들었을 때/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지요/ 자리가 사람을 지킨다고/ 한자리를 지키라고/ 내가 옳을 때나 틀릴때나/ 들려주신 그 말슴씀 자리가 사람을 지킨다// 아버지 보시기에/ 내 자리가 나를 만들었을까/ 아버지 보시기에/ 내 자리를 내가 지켰을까//

시간이 필요하다 / 천양희
춘란은 꽃봉오리를 맺고도 일곱 달이 지나서야 꽃을 피웁니다./ 봄의 꽃도 죽은 듯한 겨울나무에서 피어납니다./ 꽃도 고통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사막의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꽃이름을 '세기의 꽃'이라고 합니다./ 한란은 여름에 꽃을 피우는데 그땐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꽃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꽃이 언제 말하며 피겠습니까./ 꽃이 말없이 피는 데에도 시간은 필요합니다./ 꽃이 언제 말하며 지겠습니까./ 꽃이 말없이 지는 데에도 한두 달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꽃도 살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든 땅 언덕 위에 / 천양희
시로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시로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시로서/ 집을 짓고 시로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가 햇빛이 되고 불빛이 되고/ 시가 고향이 되고 나라가 되고/ 시로서 따뜻하고 시로서/ 사람들이 행복한 곳/ 정든 땅 언덕위에/ 시 같은 피, 시같은 땀/ 씨 뿌릴 수 있을까/ 시같은 인생 시같은 일생/ 거둘 수 있을까/ 정든 땅 언덕위에/ 시의 세상/ 시의 나라/ 시의 집을 짓고.//

묵상(黙想) 1 / 천양희
아름다움을 위하여 나는 날 버렸지/ 어리석음을 위하여 나는 날 버렸지/ 처녀성을 위하여 순정을 위하여/ 개 같은 운명을 위하여/ 불행은 부동자세로 다가오고/ 나는 종말적으로 울며/ 허옇게 드러눕는/ 내 죽음에 동참했었지/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나는 이 지상에 무덤으로 누워/ 망망한 대해/ 내 눈물의 바다를 보았지/ 시퍼렇게 떠오르는 나를 보았지.//

묵상 2 / 천양희

오랫동안 나는 슬픔과 살았지
날마다 그와 마음이 맞아
순정적으로 아주 순정적으로
낮과 밤을 바치고
뼈와 살을 바쳤지
눈오는 밤에는
백설 같은 나의 마음도 바쳤지
아, 꽃피는 봄에는
금간 내 뼈의 외로움도 바쳤지
아, 바람부는 날에는
가슴밑을 흐르는
새벽 강물 소리
깊고 험한 내 생에도 바쳤지.


묵상 5 / 천양희
나는 지상에 발묶인/ 한 인간의 딸입니다/ 오랜 절망을 사칭하고/ 자유를 형벌이라 매도하며/ 세상의 감옥/ 탈출을 노리는 죄인입니다/ 한번 살고 죽어버릴/ 인간의 탈을 쓰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누군가 남의 사랑을 엿보고/ 누군가 남의 뜰을 짓밟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수천 번 죽였습니다/ 삶은 나무처럼 가꾸는 것이라고/ 미래는 해처럼 떠오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긴 혀를/ 마음으로 수만 번 잘랐습니다/ 바람이 분다고 바람 속을/ 물결이 친다고 물결 속을/ 흔들리며 빠지며 아무래도 무엇인가/ 부끄러운 흔적만 남겼습니다// 신이여/ 나의 부동자세는 어디에 있습니까.//

묵상 8 / 천양희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수없이 말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 수없이 걸어가고/ 버려서는 안될 것/ 수없이 버렸습니다/ 사랑 하나에도 목숨걸지 못하고/ 진실 하나에도 깃발 들지 못하고/ 아무 것도 내놓지 않는 세상 원망했습니다/ 혀끝으로 수없이 맹세하며/ 혀끝으로 수없이 배반하며/ 혀끝으로 수없이/ 거짓을 보탰습니다//

스무고개 / 천양희
그가 넘어야 할 고개/ 그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지요/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웬 고개가 그렇게도 많은지요/ 우이령 넘고 우듬재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박달재 넘고 추풍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웬 고개가 그렇게도 높은지요/ 새재 넘고 고모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다섯고개 여섯고개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사람의 일 /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이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래내 종점 / 천양희
늦가을 비 내려 하루가 짧게 저문다./ 너무 춥네, 하듯이 가로수들이 헐벗었다/ 모래내 버스 종점.막차가 돌아온다/ 밤하늘이 어둡고 깊다. 바람이 출렁,/ 뼛속까지 밀려온다. 막일 끝낸 사람들 몇,/ 막차에서 내린다, 마른 가지 끝이 흔들린다/ 그에게 세상은 가지 끝 오르기다. 미끄러지기다/ 세상은 너무 미끄럽다니까/ 냉기도 뒤집으면 훈기가 된다고?/ 역 앞 마당이 썰렁하다. 늙은 취객 하나/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사라진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 간 새'/ 뭐, 새라고? 영화? 좋아하시네 하면서/ 흐린 불빛에도 으스러지는 건/ 지난 시간의 반짝이는 모래들, 모래톱들/ 누가 손을 넣어 그의 가슴을 뜯어내려는 건가/ 세상에는 물보다 더 맑은 눈물이 있다는 걸/ 수색(水色)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제 모래 속을 제가 들추어보려는 듯/ 거기,모래톱을 안고 사는 모래천변 사람들/ 지상의 그물 속에 그, 물 속에 걸리는 것은 모래뿐이지/ 물같이 흐르고 싶은 밤, 모래위에 앉아/ 밤새도록 꾸벅거리는 모래내를, 그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버스 종점 그 끝에 서서.//


꿈에 대하여 / 천양희
눈을 감아도 사방무늬로 번져 보이고/ 버리고 버려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니/ 그대의 집요한 자유자재/ 동서남북 가로놓여/ 너의 푸념 나의 푸념 머리 들 곳 없다/ 벌집처럼 들쑤신 고통/ 한 시대 벌겋게 쏘고 지나갈 때까지/ 물불 안 가리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나/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 하나/ 어른 된 오늘까지 우릴 따라와서/ 우리와 함께 지병이 되어 앓고 있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 천양희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한 순간은 어디서 오나 / 천양희
꿩의바람꽃이 고개를 든다/ 해가 나오려나보다/ 개가 고개 숙이고 저녁밥을 먹는다/ 개밥바라기별이 뜨려나보다/ 달개비 마디가 땅에 닿는다/ 뿌리를 내리려나 보다/ 떡갈나무가 누런 잎을 떨어뜨린다/ 새싹이 움트려나보다/ 두 살배기 아기가 처음 말을 한다/ 6천번을 들었나보다// 마침내/ 세상이 움찔!// 한 순간이 없다면 한 생도 없을 것이다//

나무의 힘 / 천양희
산이 불탄 끝에 어두워진다/ 재의 바람이 낮게/ 산을 쓸며 지나간다/ 바람맞을 나무는 이제 없다/ 품속같은 숲 사라지고/ 새소리 어느덧 사라지고/ 구불텅한 언덕 사라지고/ 죽음보다 더 슬픈 시간이 갔다/ 까맣게 속 탄 나무들 가지들/ 남은 무엇이 있어서/ 무어라 무어라 말할듯도 하다/ 가지 한자락에도/ 산은 저토록 그리움으로/ 속이 탔다는 것인가/ 어린 꽃잎 하나/ 불쑥 내밀고 있다/ 苦生도 저렇게 눈부시다니!//

노을을 적다 / 천양희
노을이 저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 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 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가시나무 / 천양희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일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자작나무 / 천양희
꽃을 피우는 건 나무만이 아니다 바람도/ 온몸으로 꽃피운다 나도 사람이라 바람을/ 꽃처럼 피우고 싶다 아니다 시를 꽃처럼 피우고/ 싶다 시의 만개 시의 발화! 한해살이 꽃도/ 발광하듯 피는데 시력 40년에 꽃같은 詩/ 못피우랴 큰소리치지만 시는 언제나 마음의/ 벼랑 끝에서만 핀다 시가 온다 시가 온다 소리쳐도/ 소금이 오는 것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도 피울건/ 이것 밖에 없어 시벽에 시달리고 시마에 끄달리다/ 어느 땐 나무 밑에 쌓인다 거름된 낙엽처럼/ 곰삭은 시도 좀 있어야지 아무 곳에나 피는 꽃 말고/ 벼랑에 핀 꽃 같은 그런 시 그러니 시여 내게/ 벼랑을 보여다오 詩는 둘도 없는 내 自作나무이니.//

견디다 / 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교감 / 천양희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환멸은 길고 매혹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요.// 희망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희망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현실은 길고 환상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 여자의 극(極) / 천양희
늙지 않는 희망이/ 추근대는 추억이/ 썩지 않는 사랑이/ 겨우 그 여자를 옹호한다 옹색한 옹호// 늙을 줄 모르는 아픔이/ 한정없는 한숨이/ 썩을 줄 모르는 슬픔이/ 겨우 그 여자를 변호한다 궁색한 변호// 희망이 추억이 사랑이/ 그 여자의 환상의 極이다/ 아픔이 한숨이 슬픔이/ 그 여자의 환括?極이다//

그것 / 천양희
그것은 쓰고 싶은 연장/ 그것은 무엇이든 덥석 잡는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다/ 그것은 잡을 때 힘이 세고 놓을 때 힘이 없다// 그것은 굴리고 싶은 바퀴/ 그것은 무엇이든 밟고 지나간다/ 한번 밟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밟을 때 힘이 세고 지나갈 때 힘이 없다// 한 시절을 주무르고 누르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손과 발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 한통속인가//

그믐달 /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산(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그에게 묻는다 /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삽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속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산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너에게 쓴다 /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너는 나다 /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번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너에게 부침 / 천양희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이 어제 같아 변한 게 없다/ 날씨는 흐리고 안개 속이다/ 독감을 앓고 나도 정신이 안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삶이 몸살 같다, 항상/ 내가 세상에게 앙탈을 해본다/ 병 주고 약 주고 하지 말라고/ 이제 좀 안녕해지자고/ 우린 서로/ 기를 쓰며 기막히게 살았다/ 벼랑 끝에 매달리기/ 하루 이틀 사흘/ 세상 헤엄치기/ 일년 이년 삼년// 생각만으로도 점점 붉어지는 눈시울/ 저녁의 길은/ 제자리를 잃고 헤매네/ 무엇을 말이라 할 수 있으리/ 걸어가면 어디에 처음 같은 우리가 있을까/ 돌아가면서 나 묻고 있네/ 꿈도 짐도 내려놓고/ 하루는 텅텅 빈 채 일찍 저물어/ 상한 몸을 가두네//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이 눈이 어두워졌다.//

누가 말했을까요? / 천양희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런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소리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바퀴 / 천양희
철물점 지나다/ 버려진 바퀴를 본다/ 구르지 않는 바퀴를 보면/ 명퇴당한 아비들 같아/ 덜커덕, 숨이 멎는다/ 한때 신나게 굴러갔을 저 바퀴/ 바퀴는 굴러갈 때 바퀴인 것이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소년은 아직 바퀴의 속력을 모를 것이다/ 차들이 바퀴를 굴리며 달려간다/ 속력은 모두 바퀴 때문이란 걸 모를 것이다/ 구르는 바퀴는 물러서지 않는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리는 것/ 그것이 바퀴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퀴가 되어/ 세상을 굴리고 싶다//

밥 /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비 / 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끈 / 천양희
수평선이 되고 싶다// 한 평의 바다도/ 못 가진 채/ 수초처럼 걸려/ 흔들리는 당신에게// 허전하게 편하거나/ 편하게 허전한/ 수평선 하나 주고 싶어// 우리가 껴안은/ 수많은 해안선// 세상의 끈이 이렇게 길었구나.//

눈 / 천양희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어둠속을 더 잘 보려고 눈을 감는다// 눈은 얼마나 많이 보아버렸는가// 사는 것에 대해 말하려다 눈을 감는다/ 사람인 것에 대해 말하려다 눈을 감는다// 눈은 얼마나 많이 잘못 보아버렸는가//

눈 / 천양희
눈을 보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새 눈이 녹아 눈물이 되었네요./ 눈물은 왜 눈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고이기만 할까요./ 고여서 자꾸 넘치기만 할까요.// 눈을 맞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덧 눈이 쌓여 눈길이 되었네요./ 눈길은 왜 눈물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쌓이기만 할까요./ 쌓여서 자꾸 높아지기만 할까요.//

손 / 천양희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 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들 / 천양희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몽산포 / 천양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욱을 거둔다.//

다대포에 들다 / 천양희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천만 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은 것일까 남긴 것 없이 남은 내 속의 물굽이들 소용돌이들 순천順天은 벌써 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섬은 발목 잡혀 꿈쩍 않는데 물거품이 해안까지 따라온다 언제 꽃을 바람처럼 피운 갈대들 그들이 환하다 문득 느낀다 내 어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낮게 엎드린 포구 수평선 바라보다 나는 겨우 세상은 공평한가 묻고 말았다 뱃전을 때리며 파도가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오늘도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다 말다 하였다//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 박수 소리 같은/ 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물결무늬고동 / 천양희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들어 보니/ 속이 텅 비었다/ 그 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나는 살아서도 구른다/ 구르면서도 산다// 구를 때마다/ 몸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그때마다/ 텅 빈 몸이 텉텅거린다/ 잔물결이/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오랫동안//

바람 습작 / 천양희
나무 동네 지나다 바람이 묻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 물구나무서기지 뭐……/ 가던 바람이 뒤돌아본다/ 물구나무도 있니?/ 나무라면 모두 흔들어보고 싶은/ 바람이 본색을 드러낸다/ 이 나무 저 나무/ 바람은 재미로 건들대지만/ 나무는 잎을 모두 떨어뜨린다//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나머지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나무들에게 들으시기 바란다//

바람 부는 날 / 천양희
바람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아이가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 바람 부는 날/ 시든 나뭇잎을 보다 아이가 또 물었습니다./ 나무가 아픈거야?// 어린것들이 눈부시게 일어나는 아침/ 숲은 가슴을 열어 새끼들을 안습니다./ 얘야, 감기들라 넘어질라./ 왼 종일 가슴이 조마조마.//

바람을 맞다 / 천양희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바람편지 / 천양희
잠시 눈감고/ 바람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 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배경이 되다 / 천양희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부재 / 천양희
내집 주소를 기억하지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주소 불명/ 수취인 불명/ 나는 지금/ 행방불명 중.//

사람의 일 /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읽기 / 천양희
세상을 뜻대로 읽고 싶어/ 가출을 출가로/ 불성을 성불로/ 유수를 수유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거꾸로 읽고 싶어/ 정부를 부정으로/ 선생을 생선으로/ 교육을 육교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마음대로 읽고 싶어/ 가능을 능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바꿔 읽어보다가// 세상을 세상대로 읽고 싶어/ 不二를 이불로/ 불행을 行不로/ 유일을 일류로 착각하다가// 삶은 삶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나는 나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각자를 자각으로 쓰고 말았네/ 실상을 상실로 쓰고 말았네//

소리꾼 / 천양희
소리 하나로 산을 휘어잡은 새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바람보다 먼저 산을/ 깨우고 계곡 아래 물살도 산정으로 당긴다 당기듯이/ 소리친다 소리치며 산그림자 가볍게/ 놓아버린다 숲속이 숲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산이 속으로 울다니! 속으로 우는/ 것들은 울음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소리 하나로/ 산을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시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은 시인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몸보다 먼저 혼을/ 깨우고 한순간을 영원으로 밀어올린다 밀어올리듯이/ 소리친다 세상 속이 세상의 속이 오래/ 울린다 저토록 세상이 속으로 울다니! 속으로/ 우는 것들은 소리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울어라/ 시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시여 시 하나로/ 세상 울릴 때 너는 소리꾼인 것이다 소리의/ 꾼인 것이다//

시작과 끝 / 천양희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 참 생생生生하지요./ 첫눈이 첫발자국이 첫만남이/ 또 얼마나 푸릇푸릇합니까./ 저 보리밭 저 청솔밭/ 참 청청하지요./ 첫해 첫날이/ 또 얼마나 새록새록합니까.// 끝이라는 말 마지막이라는 말/ 참 멸멸滅滅하지요./ 노을이 낙엽이 작별이/ 또 얼마나 뉘엿뉘엿합니까./ 저 서산 저 저녁강/ 참 냉랭하지요./ 가는 해 가는 날이/ 또 얼마나 얼룩얼룩합니까.//

어제를 돌아보다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혼자 울어본 적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 있는가/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얼굴을 묻어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인생은 추억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 농사 풍성하던 그 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왜요? /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총총//

운명이라는 것 / 천양희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추억 /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볏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친구 / 천양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 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밖에 없다 / 천양희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양희(千良姬) 시인
1942년 부산광역시 사상에서 출생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庭園 한때> <아침> <和音> 등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마음의 수수밭》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오래된 골목》 등과 산문집 《간절함 앞에서는 언제나 무릎을 꿇게 된다》 《직소포에 들다》,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을 출간했다. 현대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1. 천양희 시인 - 법보신문

죽겠노라 뛰어내린 곳이, 결국 하얀 종이였다. 이화여대 3학년 시절인 1965년박두진 추천 ‘현대문학’서 등단아이와 이별·폐결핵 등 상처 커10년 방황하며 죽음·출가 시도직소폭포·수수밭·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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