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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물같이 살았으면 / 석인수

부흐고비 2021. 7. 30. 08:46

모처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오후, 호숫가에 섰다. 하늬바람이 일었는지 엷게 이는 물결이 조용히 파장을 만들고 물새가 일렁이며 한가롭게 유영을 한다. 호수는 커다란 거울이 되어 또 하나의 하늘을 담고 있다. 하늘에 뭉게구름 가면 물속에도 똑같이 구름 가고 나도 구름 따라 한없이 떠간다.

잿빛 하늘처럼 내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얼마 안 있으면 추수가 끝난 들녘도 그럴 것이다. 마음도 들판도 공(空)이 된다. 공은 비었지만, 또 뭔가를 담고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다.

생물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물은 영양소이자 생명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달을 정복하고 화성을 탐사할 때도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물이다. 물이 있다는 것은 생물이 있다고 미루어 볼 수 있고 사람의 생존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인체에 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70%나 된다고 하니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물속에 함유된 각종 영양소는 에너지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람이 물만 먹어도 30일은 죽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다. 산소 같은 존재이면서 소중한 생명이고 자원이다.

인간의 탄생보다 인류문명의 발생보다 물이 먼저 있었는지 모른다. 물은 모든 살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에너지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생물체에 숨어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소임을 다한다. 중화되고 감춰지더라도 자신의 물성을 잃지 않는 올곧은 선비같이 초지일관으로 존재한다.

물은 해결사다. 목이 타 죽을 것 같은 갈증에 시달릴 때도 시원한 물 한 사발이면 금방 살아나고, 농부가 오랜 가뭄으로 하늘만 바라보다가도 흡족하게 비가 내리면 해갈되어 영농할 수 있다. 해결의 근원이 물이다.

물은 치유와 성장의 약이다. 순수하고 청정한 물만 마셔도 낫는 병이 많고 건강이 유지된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좋은 물 마시기 경쟁에 나서는 이유다. 사람도 작물도 물을 마셔야 생명을 유지하며 성장한다. 영양만 섭취하고 거름만 준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다. 물을 마시고 주어야 자라고 열매 맺는다. 물이 성장의 촉진제이자 영양소이기 때문이다. 작물의 성장에는 고인 물 수돗물 보다 하늘에서 처음 땅에 내리는 빗물이 최고다.

물은 변신의 마술사다. 물로 만든 화합물이 무수히 많다. 석고나 흙에 물을 섞어 조각이나 형상을 만들고 시멘트, 모래, 자갈에 물을 섞어 콘크리트를 만들어 여러 시설물을 만든다. 모두 다 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물은 조용히 빠져나와 다시 물로써 존재한다. 질량불변의 원칙이다. 물이 빠져나와도 조각이나 형상, 시설물은 모양 그대로 유지되니 이보다 더한 변신이 어디 있겠는가.

물은 청결의 대명사다. 빨래, 청소, 목욕 등은 물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은 오염된 어떤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청정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해서 깨끗하고 개운하게 해주고 상대의 더러움을 끌어안는다. 어떠한 대가도 반대급부도 원하지 않는 완전한 헌신이다. 예수나 석가 등 성인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물은 인내, 순응, 목표지향이다. 물은 흐르다 웅덩이를 만나면 잠시 갈 길을 멈추고 기다린다. 언젠가 다시 흘러내릴 기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고 참는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는다. 또한, 물은 흐르다 장애를 만나면 돌아갈 줄을 안다. 꼭 그 길을 고집하지 않는다. 사람도 살다 보면 멈춰야 할 때도 있고 더디 갈 때도 있기 마련이다. 마음먹는 대로 쉬지 않고 승승장구하며 살 수만 없는 게 인생이다. 인생길 가다 보면 디딤돌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땐 끝도 안 보이는 걸림돌만 깔린 사나운 길도 나온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지 않던가?

물은 또 계속해서 흐르려고 한다. 담담히 자기가 가야할 길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술수는 생각하지도 않는 우직하지만 정직하다. 정체된 물은 썩기 때문이다. 썩음은 죽음이다. 물의 생명이 끝나고 폐기됨을 물은 안다. 끝도 없이 흐르려 한다. 물이 가는 길의 끝이 바다이건 하늘이건 흐르고 순환한다.

물은 원칙주의자다.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나쁘더라도 위로 흐르지 않는다. 반드시 그리고 기어이 아래로만 흐르는 고집 센 원칙주의자다. 초지일관이다. 액체가 가지는 속성을 탈피하지 않는다. 만약 물이 아래서 위로 거슬러 흐르면 세상이 끝이다. 더는 자연의 이치가 아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원칙을 져버리는 세상에 물이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물은 포용과 관용의 달인이다. 물은 종착역인 바다로까지 흐르면서 수많은 세상의 온갖 오염을 다 쓸어안고 온다. 그러나 바닷물은 아무리 더럽고 냄새나는 물이라도 청탁을 불문하고 받아들인다. 전혀 불평도 불만도 없다. 내 세우는 조건도 없다. 오는 그대로 껴안는다. 오히려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섞여 희석하려 하고 서로 화합하려고 한다. 둘이 합해 하나 되어 본래의 물로 정화하려고 안간 힘을 다 쓴다. 인종을 차별하고 신분과 직업의 귀천을 따지며 인권을 무시하는 세상은 아직도 개선이 요원하니 어쩌면 물만도 못한 게 아닌지 모를 일이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동화되는 사람냄새가 그립다.

물에는 귀가 있다. 어느 TV프로그램에 긍정의 힘에 대하여 실험이 있었다. 일정시간 동안 긍정의 말과 부정의 말을 한 두 물 실험체의 반응이 놀라웠다. 긍정의 말을 한 실험체의 물맛이 부드럽고 좋게 나타났다. 또, 일본 어느 학자의 실험에서는 긍정의 말을 한 물의 입자가 아름다운 눈꽃모양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 같은 실험은 비단 물 뿐이 아니라 무생물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흔히 어리석은 사람을 두고 말 못하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는데 물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싶다.

태곳적부터 물이 있었다. 물은 생멸을 거듭하여 옛 물이 아니지만, 물의 성질은 그대로이고 변하지 않았다. 물은 물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계속하고 있다. 고일 때는 고였고 멈출 때는 멈췄으며 흐를 때는 흐르고 있다. 오늘도 물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웅변하며 흐른다. 물을 닮으라고, 물같이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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