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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여름 / 황현

부흐고비 2021. 8. 11. 09:08
번역문과 원문

 

여름 / 황현

사람 사는 땅을 멀리 벗어난 듯하니
시냇물이 콸콸 쏟아지는 때로다
향기로운 석류꽃 내음은 늦모종을 재촉하고
똑똑 오동나무 물방울은 새 시를 적시누나
이어진 장마에 소와 양은 늘어져 있고
궁벽한 시골 마을에 열매는 더디 익는다
맑게 갠 한낮의 한바탕 꿈
남들은 참말로 몰라야지

㢠似離人境 형사리인경
溪聲最壯時 계성최장시
榴薰催晩稼 류훈최만가
桐溜滴新詩 동류적신시
積雨牛羊倦 적우우양권
窮村蓏果遲 궁촌라과지
一回淸晝夢 일회청주몽
端不許人知 단불허인지

- 황현(黃玹, 1855~1910), 『매천집(梅泉集)』 제1권 「갠 여름날[夏晴]」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문인 황현의 시·논·설·서(書) 등을 수록한 시문집

 

해 설


참 많이 예민한 시절이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보건위기에 더해 날은 또 무덥고 습하다. 무리와 어울려 운치 있게 탁족하는 맛도 시원한 휴양지의 여유도 언제 일인지 모르겠다. 관계는 단절되고 개인은 고립되었다. 모두 지치고 힘들고 턱턱 숨이 막히는 그런 시절이다. 매천 황현이 처한 시기야 이보다 심함이 있다. 개항,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을사조약, 일제의 병탄까지 그가 세상에 성립(成立)하여 식자(識者)로 산 청장년 시기에 역사는 동탕(動蕩)하고 나라는 위급존망에 놓였다. 바야흐로 비통의 시절이다. 그가 절명(絶命)하며 남긴 시에 “인간세상 식자로 살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라는 말이 울림이 있다.

매천은 자기 시대의 시를 중시했다. 사람은 자기가 처한 시대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니 나와 상관없는 옛 시대의 풍격으로 시를 짓는 것은 가식적인 것이므로 내가 처한 시대와 현실에 기반하여 당대의 시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를 지은 30대 후반, 매천은 농촌의 식자층으로 자신이 사는 농촌의 정경을 참신한 표현으로 잘 그려내었다.

길게 이어지던 장마가 그치고 날이 갠 어느 여름날, 인기척이 모두 사라져 사람 사는 땅을 벗어난 것만 같은데 장마 뒤에 불어난 시냇물 소리만이 콸콸 들려온다. 석류꽃 향기는 늦모종을 서둘러야 할 때임을 알려오고 오동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비온 뒤 물방울 소리는 새로 짓는 시의 시상을 배가시켜준다. 주변의 소와 양은 오랜 장마에 게으르게 늘어져있고 가난한 농촌 마을의 풀 열매 나무 열매는 더디게만 익는다. 한바탕 낮잠을 자고 일어난 매천을 둘러싼 이 광경은 오롯이 매천만의 것이다. 무슨 눈이 번쩍 뜨일 기교나 난해한 고사 하나 없이 정갈하게 여름날 오후 시골마을의 담박하고 여유로운 정취를 삼삼히 그려낸 수작이다.

나 역시 답답하고 고독한 마음을 풀 요량으로 더운 여름날 옛 시인의 책을 뒤적인다. 맑은 시 한 수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음을 느낀다. 인간의 날들이 제아무리 지독하더라도 실상 그대로의 천진함이야 언제 사라진 적 있으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지가 무슨 선문답 같은 말은 아닌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그것을 느낄 마음만 있으면 된다. 매천의 시는 읽을수록 참말 맛이 있다. 매천의 날들도 우리의 날들도 고해(苦海)라 이를 만하다만 꽃내음 맡고 물방울 소리 듣는 일이야 뉘라서 어렵겠는가. 오늘 이 시 한 수를 독자 앞에 올려 다 같이 승량(乘凉)할 계제로 삼는 바이다.

글쓴이 : 이승현(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권역별거점번역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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