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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운니동 도킹 작전 / 홍정현

부흐고비 2021. 8. 18. 08:51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뭐라도 써볼 요량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계간 시 전문지 ⟪Position⟫을 펼쳤다. 나에게 시는, 창작의 마중물이다. 시가 열어주는 세상을 산책하다 보면 뜻밖의 길을 발견하고는 했다.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펼친 페이지 중간 부분을 읽고 있을 때였다.

정말, 느닷없이, 시를 쓰는 노나 선생이 떠올랐다. 노나 선생 시가 읽고 싶어졌다. 이런 ‘생각의 점핑(jumping)’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문 어떤 연상 작용의 결과라 하겠지만, 내게는 그저 뜬금없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노나 선생에게 날아가버린 ‘집중’에 굴복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장에서 이노나 시집 ⟪마법 가게⟫를 꺼냈다.

노나 선생과 나는, ‘조만간 같이 맥주 한잔 합시다’라고 약속한 사이다. 대한민국에서 ‘밥 한번 먹읍시다’라는 인사말 안에 ‘밥’은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나 선생과 ‘맥주 한잔’이란 단어를 주고받는 순간,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맥주’의 존재를 분명 보았고, 아마 노나 선생도 내 눈에서 ‘맥주’를 들이키며 웃고 떠드는 미래의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약속은 여전히 유보 중이다.

몇 번인가 나는 맥주를 마시고 흥이 오른 상태로, 맥주를 마시지 않은 노나 선생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어느 날은 맥주를 마시지 않아 멀쩡한 상태에서 ‘지금 노나 선생과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충실히 맥주를 마셨으나, 함께 즐기지는 못했다. 시를 쓰는 노나 선생, 수필을 쓰는 나, 그리고 맥주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삼각형을 이루지 못하고 늘 어긋났다. 그리고 우리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자주 운니동 골목에서 서로를 목격했고, 그때마다 이루지 못한 맥주의 연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최근에는 운니동 만찬 식당에서 ‘혼밥(혼자서 먹는 밥)’ 중인 노나 선생을 두어 번 보았다. 노나 선생은 늘 무언가를 읽으며 밥을 먹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노나 선생에게 “선생님!” 하고 부르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뒤로 묶은 젊은 여자가 / 벽을 바라보고 앉았다 / 내가 앉은 자리에서 / 식탁을 몇 개 가로지른 / 구석이랄 것도 없는 굳이 / 구석이라면 각자가 서로 구석이었다 / 그녀는 라면을, 나는 김밥을 시켰다 / 젊은 여자는 핸드폰과 젓가락을 번갈아 들다가 / 서서히 흔들렸다 / 내 김밥은 아직 목메게 남았고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 뜨겁고도 매운 걸 먹을 걸 그랬다 / 핑계 삼아 나도 잠깐 흔들릴 걸 그랬다 / 그래도 좋았을 것이다

- 이노나 ⟨뜨겁고도 매운⟩부분

이 시를 읽으니 혼밥 중인 노나 선생이 떠올랐다. 그날의 식당 풍경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의 시집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들, ‘달, 선명함, 구석’ 등이 시집 밖으로 나와 둥둥 떠다녔다. 자정을 넘은 시간, ‘마법 가게’의 마법이 시를 읽고 있는 내게 슬슬 주문을 걸어오고 있었다.

벽을 보고 앉아 뜨겁고도 매운 라면을 먹던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가 앉아있는 구석이 같이 흔들렸다. 아마 여자의 세상도 뜨겁고도 맵게 흔들렸을 것이다. ‘호호’ 하면서 입안의 공기를 내뱉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보였다. 바로, 중년의 나였다. 사십팔 년을 살았는데도, 여전히 뜨겁고도 매운 것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얼려놓은 컵에 담겨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맥주 두 잔이 나왔다. 나는 양손으로 맥주를 움켜잡고 일어났다. 나의 구석도 길쭉하게 일어났다. 뜨겁고도 매운 구석이 쭈욱 늘어나면서 옅어졌다. 나는 구석을 매달고 뛰어올라 그곳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렇게 나라는 중력장이 자라났다. 그리고 그의 구석을 향해 유영했다. 서서히, 서서히…. 구석에서 김밥을 먹던 노나 선생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있던, 뜨겁지도 맵지도 않은 구석도 길쭉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세상이 미소 짓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향해 팔과 다리를 움직여 다가갔다. 나의 구석과 그의 구석이 거리를 점점 좁혀 들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드디어, 나는 그의 중력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그의 앞자리를 노렸다. 너무 빠르게 착륙하다 추락하지 않도록 반작용의 힘을 이용했다. 조심히, 조심히….

그리고 마침내 착륙, 도킹 성공. 나는 차가운 맥주 한잔을 노나 선생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나와 노나 선생, 그리고 맥주는 서로 연결되었다. 그와 나의 구석이 연결되었다.

갈증이 났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가져와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 빈 화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노나 선생의 시가 모니터 안으로 ‘후’ 하고 옅은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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