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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악처(惡妻)를 찾아서 / 이기식

부흐고비 2021. 8. 18. 08:53

문자 소리에 잠이 깼다. 요즈음 흔한 이모티콘 새해 인사거니 했다. 의외로 초등학교 동창 한 명의 짤막한 부고였다. 우리 대부분이 6.25가 끝나는 해에 입학한 해방둥이들이다. 2019년의 통계청 발표를 보면 1945년생 남자의 기대여명이 12년이니 86세까지는 살 수 있다는데 조금 이른 감이 있다.

육십여 세에 일손을 놓았으니까 어느덧 이십여 년이 지났다. 초등학교를 다시 입학한다 해도 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100세 인생이니 제2의 인생이니 하며 야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세대의 대다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초고령화 시대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을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다. 오랜 기간의 월급쟁이 생활이 몸에 배서인지 아직도 토, 일요일은 그런대로 마음이 편한데 평일은 별로다. 꼭 꾀병으로 학교를 빠지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기분이다. 내 인생에서 무언가 중요하고 큰 것이 빠졌기 때문인가 보다. 뚜렷한 소신 없이 남들 뒤만 쫓아다니면서 살아온 것이 큰 원인인 것 같다. 요즈음, 부쩍 무엇이든 간에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다.

‘100세 시대’의 다큐멘터리에서 일본의 백십팔 세까지 장수한 분에게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맛난 거 먹고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철학계의 원로 김형석 교수는 저서의 대부분이 칠십 세 이후에 썼다고 한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젊을 때 못했던 공부나 취미활동을 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체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정말 무 재주이다. ‘무 재주가 상팔자’라는 말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주위의 친구들은 이미 동, 서양화나 서예, 악기, 노래 등을 배우며 나름의 새 세계를 발굴해 나가고 있다. 간신히 매달린 것이 글쓰기다. 초등학교 작문대회에 어머니가 써주신 글을 슬쩍 제출했는데, 이것이 장원으로 뽑혔다. 내심 부끄러웠으나 그 이후부터 나 스스로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필 공부를 시작한 동기가 아닐까 한다.

막상 수필을 쓰려다 보면 적당한 테마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 좋다고 선생님이 귀띔해주었다. 평소와 비교해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지난 인생을 반성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특히 철학적 사고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러나 철학은 너무 어렵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믿는 구석도 생겼다. 초등학교 때의 교과목에는 ‘도덕’이 중학교에서는 ‘공민’이 있었다.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이 교단에서 근엄하게 말씀하던 기억이 난다. 그 과목이 바로 철학의 꽃인 윤리학이나 가치론이란 것을 최근 알았다. 또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도 교양과목으로 ‘철학 개론’ 도 수강했다. 철학의 기본소양은 그럭저럭 갖추어진 셈 아닌가.

더구나 철학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어려운 존재론, 인식론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남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전문 철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부분이다. 나로서는 욕심을 내지 않고, 사는 목적이나 가치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다소 교훈적인 내용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면 그 이상 바랄 것도 없다. 그것마저 힘들지도 모른다.

이십 세 전후에 청춘기를 만나 가슴이 뛰었던 생각이 난다. 노인이 되는 것도 그때처럼 새로운 경험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오히려 가장 편한 시기이다. 남의 눈치 볼 일도 없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에 도전할 일도 없다. 새로운 공부를 하기에는 좋은 여건이다. 어느 정도 뒷전 인생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좋은 경험을 남이 참고할 수 있는 지혜로 만들어 글로 남기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불필요한 존재라고 느끼는 소외감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다. 이왕 시작한 공부를 좀 더 빨리 쉽게 해보고 싶다. 궁리하다가 현인 소크라테스가 머리에 떠올랐다. 대철학자가 된 이유가 악처 덕분이라고 한다. ‘테스 형’은 “꼭 결혼해라. 좋은 아내를 만나면 행복해질 수 있고, 나쁜 아내를 만나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돌며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고 다닌 모양이다. 철학자는 아니지만, 톨스토이, 모차르트의 부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최근 어떻게 하면 집사람을 악처로 만들까 하고 궁리 중이다. 가능성은 보인다. 여태까지 가슴에 맺히게 한 울분만 터트리게만 하면 된다. 파랑새는 역시 집에서 찾아야 하는가 보다.


이기식 프로필 : 수필과비평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KT 동우회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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