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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반에 반하다 / 윤기정

부흐고비 2021. 8. 25. 08:50

‘굿 샷!’ 캐디의 외침과는 달리 공은 호수를 향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공이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방향을 보면 물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 “몸이 덜 풀렸네.”라는 말은 첫 홀에서 자주 듣는 준비 운동이 덜됐다는 푸념 섞인 핑계다. 다른 사람의 이런 푸념은 듣기에 나쁘지 않다. 한데 내가 그 푸념을 하려니 발걸음도 마음도 가볍지 않다. “사장님. 반반.” 한국말에 놀라서 돌아보니 캐디가 온 낯으로 웃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가르쳐 준 말일 텐데 경우에 맞게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 공을 잘못 쳐서 속상한 마음이 ‘반반’이란 말에 반은 가셨다.

‘반’이 들어간 말을 생각날 때마다 기록했다. 메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얻은 말은 짧은 글짓기로 기억하든가 어떤 행동으로 기억에 남기려 애썼다. 귀가하던 전철에서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생각했을 때는 아내에게 얼른 시키라고 전화한 적도 있었다. 메모장 서너 쪽을 ‘반’이 점령했다. ‘반반’의 반인 ‘반’만 붙은 말도 적지 않았다. 반신반의, 반인반수, 자의 반 타의 반… 온갖 ‘반’들과이 메모장을 열 때마다 눈 맞춤하며 남몰래 웃었다. 반에 관련한 신화, 설화 등도 기록하여 글감 창고가 채워져 갔다.

반은 수학적으로는 1/2이다. ‘물 반 고기 반’은 양어장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유쾌한 사기성 발언이다. 당연히 물과 고기가 각각 1/2은 아니다. ‘공기 반 소리 반’ 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노래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성경 말씀처럼 여긴단다. 그러나 아직 공기와 소리를 각각 50%씩으로 정확히 계량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이란 메뉴는 고르기의 유예, 아니면 두 가지 욕망을 한 번에 채우려는 또 다른 고르기일 것이다. 짬뽕과 짜장면을 반반씩 내오는 ‘짬짜면’처럼 말이다. 생활에서의 반은 1/2이 아니다.

‘반백 살’처럼 ‘반-’을 접사로 쓸 때는 수학적 1/2을 꼼꼼히 따지지 않는다. ‘반만년 우리 역사’라는 말이 그렇다. 올해는 단기 4354년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BC 2333년을 원년으로 삼았다. 반만년은 수학적으로는 5000년이다. 우리 역사 4354년은 5000년에 훨씬 못 미치지만, 역사 ‘반만년’이라고 표현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4400년 다 돼가는~’이라는 말보다 자랑스럽고 깔끔하다. 나이 50이 채 안 된 사람이 반백 살이라 부풀리는 것도 같은 까닭이니 귀여운 허세로 보아도 좋을 일이다.

한편 ‘반’을 부족함에 빗대는 말로도 쓴다. 발달이 늦거나 인지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가리켜 ‘칠푼이, 팔푼이’라고 하는데 그만도 못하면 ‘반푼이’라 낮잡아 부른다. 실제로 반푼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로 직업이 없거나 수입이 거의 없거나 하여, 백수와 다름없는 상태의 사람을 ‘반백수’라 부르는 것도 반을 부정적인 쪽으로 당겨 쓴 말이다. 반병신, 반쪽도 온전치 못함을 뜻하는 말이다. 반은 차던 모자라던 양쪽에 두루 쓰이니 부풀려도 좋고 부족해도 반은 주니 넉넉함이다.

고대 아테네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BC450?~386?)의 '잃어버린 반쪽이'에 대한 농담은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 나온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등도 둥글고, 옆구리도 둥글었다. 팔 넷, 다리 넷, 귀 넷에 머리는 하나였지만 얼굴은 둘이었다. 두 얼굴은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힘이 장사였던 그들이 신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우스는 신들과 회의를 하고 살려는 두되 반으로 쪼개서 힘을 빼기로 했다. 그들은 아폴론에게 반으로 잘리는 벌을 받았다. 둘로 자른 후 마주 보게 하였으니 그로부터 반쪽이들이 다른 반쪽이들을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고 하였으니 인간 부절(符節)인 셈이었다. 부절은 옥이나 대나무 등을 둘로 쪼갠 신표이니 서로 맞아야 온전해지니 신화는 반의 본능을 알려준다. 반은 나눔이고 그리움이고 기다림이고 믿음이다.

일상에서는 ‘반’을 ‘1/2’ 의미로 말하거나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이나 자연 현상도 대부분 반반으로 이루어졌다. 낮과 밤, 양지와 응달, 과거와 미래, 남녀처럼 서로 상대적인 것들이 꼭 반이 아닌 반반 정도로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사람의 일도 그러하다. 행복과 불행,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도 반반의 조화가 아니던가? 삶에서는 반이 수학처럼 똑같이 나눈 것의 하나가 아니다. 조금 다른 반이라도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으로 자연을 닮았다.

어느 인문학 강사의 말이 재미있다. 나이 서른 되였을 때 반은 살았다고 했는데 마흔이 돼서 보니 또 반생을 살았더란다. 쉰이 되니 백세 시대란다. 또 반 살았으니 예순 때도 기대한다나. 반은 스스로 좌표를 갖지만, 또 무언가의 반이기도 하다. 반영구는 영구로 수렴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반은 독립적이면서 ‘온’의 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반은 황홀하다. 내가 아내에게, 아내가 내게 서로 ‘반’해서 하나 되었으니 수학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반반이다.


윤기정 프로필 :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경기 양평문인협회 회원, 경기 수필사랑 양평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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