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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박 14일의 이태리 인문기행 둘째날 우리일행은 나폴리를 거쳐 산타루치아 항구를 관광하고 폼페이 유적지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폼페이는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생각보다 큰 규모의 도시였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있어 여느 이태리 관광지에 비해 그다지 붐비지는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널찍하고 탁 트인 광장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광장 주변에는 원형극장과 관공서.공공건물들이 둘러 있었다.

우리는 주택가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다. 이천년 전 폼페이의 도로는 돌로 덮여진 포장도로였다.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고 마차를 세워 줄을 묶어두는 곳까지 있었다. 우리가 걸었던 길은 마차가 다녔던 차도였다. 도로에 패인듯한 부분은 그 시절 교통량이 많았다는 사실을 말 해 주었다. 상업과 농업이 발달하였다는 폼페이의 도시민들이 풍족한 생활을 누렸음을 알 수 있었다. 도로에는 건널목도 있었다. 가을비에 말끔하게 씻겨진 돌길을 우산을 쓰고 걸으면서 나는 잠깐 우리네 고궁을 산책하는 착각에 빠졌었다.

길을 따라 돌로 지어진 서민들의 주택가는 정겨웠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화산폭발로 지붕이 없는 상태였기에 그곳 역시 지붕없는 소박한 집들이었다.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엄마들의 잔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개조심이라는 그림이 있는 집 앞에서는 무서운 개가 뛰쳐나와 나를 향해 짖어댈 것처럼 생생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는 빈부격차,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 부자들의 널찍한 저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규모가 큰 집 건물의 앞쪽에는 화려한 기둥에 둘러쌓인 정원도 있었다.

150개가 넘는다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상가 지구도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바(bar), 혹은 선술집과 카페들이었다. 과일 가게나 포목점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가게들도 서로 어울려있었다.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는 술집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번 예외가 없는 거리에 들어섰다.

좁은 골목에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음난화들이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여인들의 방에는 돌로된 침대가 있었고 쾌락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분위기였다.

조금은 민망했지만 흥미있는 장소였다. 혹자는 폼페이를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하면서 타락한 쾌락의 도시라고도 표현했다.

공중 목욕탕은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한 대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잡았다. 냉온탕 시설까지 갖춘 지금의 사우나에 버금가는 시설이었다.

그밖에 거의 모든 로마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원형 경기장과 수준 높은 규모의 시민들을 위한 공동 상수도 시설도 있었다. 각 가정으로 물을 공급하던 상수도 파이프도 발견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삶의 자취가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2000년 전의 그들의 생활상은 겉 모습만 조금 다를뿐 우리네 일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 곡물창고로 쓰였다는 건물이 지금은 쇠창살로 된 자료실이 되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자료실에는 가재도구들과 단정하게 정리 되어 있는 토기들, 식탁에 남아있는 음식, 담았던 그릇, 심지어 빵집의 화덕에는 여전히 구워지고 있던 빵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도시민의 사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적 발굴 책임자인 고고학자 쥬세뻬 오렐리 교수는 현장에서 빈 공간을 발견하고 그곳에 석고를 부어 굳힌 다음 주변의 흙을 긁어내었다. 그러자 폼페이 최후의 날에 미이라가 되어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코와 입을 막은 남자, 얼굴을 감싼 채 엎드린 여자, 집안에 묶인 채 누워 있는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화산 폭발 당시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체들이 모습을 드러 내었다.. 애완동물을 비롯해 온갖 생명체들이 미이라의 형상으로 발견되었다. 옷주름과 몸짓, 표정까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6미터 높이의 두꺼운 화산재 덕분에 긴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화산 폭발 당시의 현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난 2002년 일본 연구진이 폼페이에서 수거한 화산 분출물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 했다.

화산 분화 후 매몰되는데 걸린 시간은 30분이라 했다. 고통스런 30분이 지난 후 폼페이의 도시민들은 모두 함께 다음 세상으로 집단 이주를 한 셈이다.

관광객과 모든 사람들이 떠나간 유적지에 조용히 땅거미가 내려 앉는 시간을 상상 해 보았다. 폼페이의 영혼들이 바람이 되어 잘 정돈된 2000년 전에 자신들이 몸 담았던 보금자리를 찾아 올 것만 같았다.

가을비 촉촉이 내리는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같이한 영혼들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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