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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한승원 시인

부흐고비 2021. 10. 2. 05:28

손거울 하나 / 한승원
중학교 학생들의 호주머니 검사를 실시했는데,/ 키 작달막한 아이의 호주머니 속에서 손거울 한 개가 나왔다./ 생활지도 선생님은 그 손거울을 압수해 가지고 가면서/ “이 손거울을 반드시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교무실로 와서 말하고 찾아가도록 해라.”하고 말했다.// 그 아이가 생활지도 선생님에게 찾아가 말했다./ “예쁘게 피어 있는 꽃을 만나면 그 꽃한테 제 얼굴을 비쳐 보여주려고요.”/ 옆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국어 담당 시인 여선생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생활지도 선생님이 빈정거렸다./ “야, 손거울로 꽃한테 제 얼굴을 비쳐주면 꽃이 제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이냐?”/ “모든 꽃들은 손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비틀어져 있는 꽃잎을 바로잡고, 향기도 더 진하게 뿜습니다.”/ 그 학생의 말에 시인 여선생님은 가슴이 우둔거렸다./ 생활지도 선생은 말했다./ “네가 한 말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으니까 손거울은 돌려줄 수 없다.”/ 그 학생은 돌아가지 않고 서서 손거울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시인 여선생님은 그 학생을 자기 자리로 데리고 가서 물었습니다./ “손거울로 꽃한테 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누구한테 배웠니?”/ “우리 할머니요.”/ “네 할머니는 무얼 하는 분이신데?”/ “점도 쳐주고 굿도 하러 다니고 그러셔요.”/ “그럼, 네 할머니도 거울을 이용해서 꽃한테 제 얼굴을 보여주곤 하시니?”/ “우리할머니는 화단에 치자 꽃, 족두리 꽃, 금강초롱꽃, 백일홍 꽃들이 피면,/ 꽃들 앞에다가 체경을 세워놓아요. 밤이면 초롱을 켜놓기도 해요.”// 시인 여선생님은 부끄러워하며,/ 생활지도 선생님에게로 가서 손거울을 돌려주자고 하면서 말했다./ “저는 가짜 시인이고,/ 저 아이하고 저 아이의 할머니하고는 가슴으로 시를 쓰는 진짜 시인들입니다.”//

 
손거울 / 한승원

30년 전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 우렁각시 같은 여선생님은 여름철에 허벅지 드러나는 치마를 입곤 했는데, 학교 안에 '오늘 우리 여선생님은 빨간 팬티 입었더라‘는 말이 떠다녔습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통로에 떨어져 있는 손거울을 발견한 그녀는, 생활지도 주임을 앞세우고 가서 그 반 학생들의 호주머니 검사를 실시했는데, 키 작달막한 아이의 호주머니 속에서 손거울 한 개가 더 나왔습니다. 생활지도 주임은 그것을 압수하면서, 이 손거울을 가지고 다녀야 할 이유가 있으면 교무실로 와서 말하고 찾아가라고 했고, 키 작달만한 아이가 교무실로 와서

“꽃한테 제 얼굴을 비춰주려고요” 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옆에 앉은 여선생의 연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했는데, 생활지도 주임이 빈정거렸습니다.
“야, 이놈아, 꽃에게 거울을 비춰주면 꽃이 제 얼굴을 알아본다냐?”
학생이 말했다.
“모든 꽃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고 비틀어진 꽃잎을 바로잡고 향기도 더 진하게 뿜습니다.”
얼굴이 빨개진 생활지도 주임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썩 꺼져!” 하고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돌아가지 않는 그 학생을 나는 내 자리로 데리고 가서 물었습니다.
“그것을 누구한테 배웠니?”
“우리 할머니요.”
“네 할머니는 무얼 하는 분이시냐?”
“점도 쳐주고 굿도 하러 다니셔요.”
“네 할머니는 집에 꽃이 피면 어떻게 하시니?”
“치자꽃, 족두리꽃, 금강초롱꽃들이 피면, 앞에다가 체경을 세워놓아요. 밤이면 초롱을 켜 달아 놓기도 해요.”
가슴에 불이 환히 켜진 나는 생활지도 주임에게, “저는 가짜 시인이고, 이 아이하고 이 아이의 할머니하고는 가슴으로 시를 쓰는 진짜 시인들입니다.” 하며 손거울을 찾아 돌려주고, 이후 그런 손거울을 무수히 제작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팔고 또 팔면서 이제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 한승원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그 한복판에 수직으로,/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는 새 아닌/ 새 한 마리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거기 떠 있어서입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말/ 하나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꽃 / 한승원
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 시를 쓰는 것입니다, 나는/ 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 달거리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나는/ 칠보 장식한 비천녀의 공후인/ 시나위 가락으로 출렁거리는 혼령입니다./ 별똥 떨어진 숲까지 다리 놓는 무지개로/ 쨍쨍 갠 날의 음음한 콧소리 합창으로/ 원시의 늪지대 달려가는 암컷 사슴의 숨결로/ 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다/ 시 같은 웃음을 까르르까르르 알처럼 낳는 것입니다./ 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 달거리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것입니다./ 이상(李箱)처럼 객혈하는 것입니다.//

쑥국화 / 한승원
늦가을 고향 뒷산 자드락 길에 피곤 하는 쑥국화 송이송이 따다가 말려 씁쓰름한 맛과 향기를 우려 마시려고 달려갔는데 소복 차림 서넛이 쑥국화 위에 하얀 밀가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산골 다랑이 논 근처에서 땔나무 한 묶음을 머리에 이고 자드락 길 내려오다가// 쑥국화 떨기 꺾어 킁킁 향기 맡던 홀엄씨,// 시동생들 시집 장가 보내고, 유복자 하나 이끌고 광주로 가서 파출부 노릇 하며 대학엘 보냈는데, 금남로// 피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돌아오지 않자, 하루도 빠짐없이 세 끼 밥 지어 차려놓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가슴에 든 푸른 멍이 피고름 되어 죽어,// 시동생들이 그녀 유골 가루를, 산 다랑이 묵정논에 뿌리고 남은 것 몇 줌을 꿀벌 잉잉거리는 황금색 쑥국화 송이송이에 뿌려주고 있었습니다.//

하얀 해당화 / 한승원
덧니 수정 같은 그 여자의 아침 산에 노을 지면/ 내 저녁 하늘에 황금색 별이 뜨곤 하여/ 첫눈 흩뿌리는 밤/ 모래톱에서 울부짖는 파도 앞에 놓고 소주로 개차반 된 내가/ 그것/ 담배씨만큼만 보여달라고 하자/ 소주 한 병 나발 불고 나서 블라우스 자락 훌렁 걷어 올려/ 유백색의 정구공만 한 젖무덤의 암자주색/ 오디/ 보여주고 어흑어흑 통곡하다가 눈물 콧물 훔치며 떠나간 그 여자,//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먹물 빛 장삼에 백팔 염주 하고 와서/ 까치파도 앞으로 나 이끌어내고 곡차 여남은 잔에 혀 굽은 목 쉰 소리로//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너는 발 빠른 분침으로/ 나는 발 느린 시침으로/ 한 시간마다 뜨겁게 만나자/ 순간을 사랑하는 숨결로 영원을 직조해내는/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아, 그 / 노래하던 순백의 한 많은 넋.//
* 첫 시집 『열애 일기』중의 「시계」첫 연.

백합꽃 / 한승원
내 가슴/ 아무도 밟지 않은 눈꽃나라의 꼭두새벽처럼 펼쳐놓았습니다,/ 그 신화의 종이에 노을처럼 타오르는 사랑의 시 한 줄 써주십시오,/ 진주 같은 씨앗 하나 품고 싶습니다.//

치자꽃 / 한승원
아침 안개 너울 쓴/ 신부처럼 우윳빛 이빨 가지런히 내놓고 웃는 그녀의 가슴을/ 킁킁 코끝으로 더듬는데 뒷산의 뻐꾹새/ 뻐꾹뻐꾹 앞산의 장끼/ 꿩꿩 동네방네에다 소문내고 있습니다./ '저것들, 저것들/ 시방, 시방/ 사랑하고 있네에!'// 그래, 차라리 사랑은/ 그렇게 들통나버려야만/ 드러내놓고 신명나게 너울거릴 수 있습니다/ 주변인들의 호들갑스런 너스레와 떠벌림을 축복 삼아.//

흰 수련꽃 / 한승원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르면서/ 시끄러움과 고요를 한데 버무려놓은 그 미녀의 하얀/ 넋을/ 아십니까,// 미녀는 잠이 많다는 속설대로/ 물에 뜬 채로/ 오후 1시쯤부터 졸기 시작하다가/ 4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깊은 잠을 자버리는/ 그녀의 잠을 깨우고 싶어 나는 안타까워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에도 자고 일어날 때에도 늘 상큼하지만/ 저 세상 돌아갈 때는 추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깊이 수장시켜버리는 그녀/ 아, 그녀의 깊고 그윽한 알몸의 영원한 잠이여.//

도라지꽃 / 한승원
뙤약볕 여름 기들어지고 귀뚜라미 울면/ 나 산으로 들어갈 거야/ 머리 옥빛나게 깎고/ 송낙 깊이 눌러쓰고/ 송이송이 살구꽃 눈바람에 날리던 날/ 나 버리고 훌쩍 떠난 그대 마을로/ 탁발가게/ 나무 관세음보살/ 사랑 시주하십시오.//

은초롱꽃 / 한승원
곤히 잠든 그대의 머리맡/ 순은색의 오종종한 잔에/ 담긴 한 모금의 자리끼로/ 그대의 은하 세상의 잠과/ 꿈을 적시고 싶습니다./ 내 불면의 뒤숭숭한 밤은/ 그대의 뜨락에 할미새 소리 머금은/ 은색의 초롱꽃들로 초롱초롱 피고/ 그 초롱에 아침 햇발이 담길 때/ 싯다르타가 최후에 남기신/ 말씀을 듣습니다./ 신에게도 악마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내 등불 내가 켜들고 내 섬을 밝히고/ 살아 있는 한 열심히 분투하듯이/ 정진하라는,//

개망초 꽃밭 / 한승원
나 장차 죽어지면 거가 묻히겠습니다/ 유월 칠월 산에 들에 눈 덮인 듯 지천으로 핀 개망초 꽃밭/ 살과 피는 그 풀꽃의 잎과 줄기 되고/ 넋은 꽃으로 피어나게//

난초 잎사귀 / 한승원
비수같이 뾰족한 그것은/ 세상 한복판과 맞부딪쳐/ 한번 꺾이게 되고/ 꺾이었다가는/ 다시 몸을 일으켜 고개 쳐들고/ 하늘을 향해 나아가다가/ 또다시 꺾이었다가 결국/ 하늘의 앙가슴을 찌르고/ 나 거기/ 천심을 확실하게 찔렀다/ 하고 환희한다.//

늦가을 달맞이꽃 / 한승원
찬바람/ 줄달음질하는 늦가을 농수로에 투영된/ 서역으로 떠나가는 이른 아침의 창백한 달그림자를/ 심호흡으로 빨아들인/ 흰나비 같은 내 넋을/ 훔쳐 가곤 하는 달의 상아孀娥여신을/ 애인이라고 여기는/ 망상 한 자락/ 간밤 그대 잠깐 내려와/ 내가 밟아갈 산책길 가장자리에/ 내 차가운 가슴을 덥히기 위해/ 호오, 호오 불어 놓았구나/ 여신의 입 비린내 나는/ 황금빛 뜨거운 숨결을//

족두리꽃 / 한승원
우리 막내 고모 가마 타고 시집간 첫날 상다리 휘어지는 신부상을 받았는데 상 위에는 젓가락으로 집어먹어야 할 것들 뿐이었습니다 처녀 시절 부뚜막에 앉아 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곤한 막내 고모는 젓가락질을 할 줄 몰랐습니다 김치는 손으로 집어 먹고 파래지국은 숟가락 궁둥이로 건져 먹곤 하였으므로.// 울긋불긋한 활옷 입고 연지곤지 찍은 신부 체면에 차마 손으로 집어 먹을 수는 없고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는 것은 콩나물뿐이라 그것만 거듭 먹었는데 들러리가 부엌을 향해 말하기를// 신부상에 콩나물 한 접시 더 주소 우리 신부는 콩나물만 좋아하네!// 그날 밤 신랑과 한 이불 속에 들어간 우리 막내 고모 우글거리며 밀고 나오는 방귀를 참고 또 참다 배 뒤틀어 올라 뒹굴고 다녔는데// 다섯 해 전 당신 혼자만 아는 먼 나라로 떠나가신 우리 막내 고모 시방 내 토굴 화단에서 이 조카 쳐다보며 웃고 있습니다//

아내 꽃 / 한승원
한여름의 저물녘 햇살 비낀 성긴 솜대나무 숲 속의 산 모기들이 ‘아따! 살집 부드러운 아주머니 반갑고 또 반갑네. 나하고 오늘 밤 함께 잡시다잉,’ 하고 흡혈하러 덤벼드는 죽로차 밭에서 차양 긴 모자 쓴 시인의 늙은 아내가 잡초를 맵니다.// 그녀가 손수 덖은 차만을 상음하는 시인을 위해 가꾸는 차나무들, 스티로폼으로 만든 원통형의 앉을 것을 엉덩이에 붙여 줄로 감아 묶은 채 쪼그려 앉아 차나무 뒤덮는 바랑이풀 모시풀 씀바귀 육손이덩굴풀들을 뽑아냅니다.// 시인의 아내가 어기적어기적 지나간 밭고랑에는 앙증스러운 차나무들이 詩語(시어)들처럼 줄지어선 채 붉어지는 하늘을 향해 가슴 펴고 달려온 저녁 바람에 우쭐우쭐 춤춥니다.// 시인은 차밭 어귀에 선 채 얼굴과 팔뚝으로 덤벼드는 모기를 쫓으면서 철부지 소년처럼 ‘여보, 저물어지니까 오늘은 그만 하고 내일 하시지’ 하고 조르는데, 늙은 아내는 달래듯이 말합니다, ‘서늘한 김에 한 고랑만 더 매고 갈랑께 먼저 들어가시오. 산 모기가 보통으로 사납지를 않구만이라우.’//

저승꽃 / 한승원
늙은 시인의 손등과 얼굴의 암자주색 저승꽃들은/ 봄밤의 소쩍새소리/ 초여름 한낮의 뻐꾹새 소리/ 한여름 뙤약볕의 왕매미 소리/ 가을 초저녁의 수리부엉이 소리/ 겨울철 대숲을 우수수 수런거리게 하는/ 높새바람에 요분질치는 처마 끝의 풍경소리/ 체머리 미세하게 흔들며 드라마 보다가/ 꿀잠 자는 아내의/ 애잔한 코고는 소리를 먹고 피어납니다,/ 늙은 시인의 손등과 얼굴의 암자주색 저승꽃들은,//

무위사에서 만난 구름 / 한승원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당신은 무위사 텅 빈 마당에서/ 선승처럼/ 구름 한장 턱으로 가리키며/ 겹겹이 껴입은 옷에 갇혀 있는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바람처럼/ 휠휠 날아다니라고.//

절 / 한승원
절하고 싶어/ 절에 갑니다./ 절하고 또 절하면 저절로 내 병 낫습니다./ 땀 뻘뻘 흘리며/ 절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의/ 절은 영원을 짜는 피륙/ 절하고 싶어/ 절에 갑니다.//

박귀심 부인 / 한승원
팔등신인 데다 머리 영리한 자기가 며느리로 들어옴으로 해서 참새 같은 시가의 씨가 고래처럼 늘어났다는 자궁 권력자 박귀심 부인은, 처녀 시절 이름이 점례였고 올해 94세입니다. 부인은 덕도에서 태어나 예배당에서 한글을 깨치고 사립 양영학교에 들어가 아홉 살 위인 홀아비 선생이 써준 원고대로 농촌 계몽 연설을 했고, 열일곱 살 되던 해에 그 홀아비 선생에게 시집가서 열한 명의 아들딸을 생산했는데, 갓난아기였을 적에 셋을 날려 보내고, 환갑 막 지낸 그 선생 남편 먼 나라로 보내고, 열아홉 살 된 딸 하나와 환갑 직전의 큰 아들과 마흔다섯 살의 셋째 아들을 앞세우고 나서 둘째 아들과 며느리의 봉양 받으며 사는 요즘 시아버지와 남편의 노랗게 빛바랜 사진 앞에 놓아두고, 꼿꼿이 앉은 채 저승에 가신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그리고 하느님들과 목청 높여 말씀을 주고받습니다.// 밥 이상으로 좋은 보약 없다며 며느리에게 밥 고봉으로 담아 달라고 하여 다 비우고, 둘째 아들의 큰 자식이 장가들어 고추 달린 놈 낳는 것보고 죽고 싶다 했는데 그 소망이 이루어졌고, 또 막내딸 그림 전람회 하는 것 보고 죽겠다고 했다가 또 그것마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오십대 막내아들의 영어 프랑스어 잘하는 열여덟 살의 손녀가 유학 갔다가 잘되어 돌아와 사는 것보고 죽고 싶다하며... 사인펜 사다달라고 하여, 둘째 아들이 버린 종이 이면에 살아온 이야기들 괴발개발 써서 무더기무더기 쌓아놓고, 후세들에게 남길 유언들을 달력 종이 뒷면에 서서 바람벽에 輓詞(만사)처럼 주렁주렁 걸어놓고, 이후로는 오탁악세 질타하는 글을 써 가는데, 그 속에는 자기 모시고 사는 둘째 아들과 며느리의 행동거지에 대한 상찬과 비판과 수복강녕 비는 기도들이 들어 있습니다.// 아, 사랑하는 자궁 권력자, 위대한 나의 껍질, 나의 어머니여.//

사랑 / 한승원
모든 실개천물들/ 큰 강물들 다 흘러들어가는/ 그 바다/ 토굴 앞 마당에 가져다놓고/ 하루에 열두번씩도 더 거기 풍덩 빠져 죽곤 한다.//

첫사랑 / 한승원
꽃사슴 키우며 덕도 첫머리 마을 산기슭에서 산다는 쉰여섯 살의 그 여자 돈 많은 뭇남자들 승용차 타고 와서 자기앞수표// 내밀고 사슴뿔 자르고 피 마시며 힘 돋우는 걸 보면서 아쉬워한다. 어린 시절 한 동갑내기 머슴애에게 나무접시만큼하게 커// 진 가슴 만져보라고 내밀던 그 여자 자꾸 앓곤 한다는 쉰여섯 살의 머슴애에게 그피 먹여주고 싶어 그 머슴애를 해저문 날// 기다린다. 얼굴에 노끈 같은 주름살 깊어지고 머리칼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 있는 그 여자.//

사랑한다는 것은 / 한승원
사랑한다는 것은 학까치가 자기 깃털을 뽑아 길쌈을 하기이고/ 그 남편이 그 베를 팔아 모은 살림을 주색잡기로 탕진하기 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밧줄끝을 던져주고 그것을 끌어당기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심연 속의 허기진 갈치들이 서로의 꼬리를 갈라먹기 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허무의 바다 건너기입니다./ 한쪽은 나룻배가 되고/ 다른 한 쪽은 사공이 되어//

나의 사랑스런 여신 / 한승원
내 전생의 젊은 날의 밤에는 늘 나의 하얀 달빛이/ 만개한 하얀 연꽃들이 수런거리는 방죽으로 흐르곤 했는데,/ 어느 여름밤, 뭉크의 <사춘기> 소녀 같은 달빛 옷을 입은 여신이 방죽 가장자리의 바윗돌에 걸터앉은 채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여신에게서 날아오는 향기에 달뜬 나는 가슴을 두근대며 여신 옆으로 다가갔는데,/ 연꽃잎 그늘에 숨어 있던 거대한 거무튀튀한 남신이 덤벼들어 나를 번쩍 들어서 방죽 한가운데에 내리꽂았는데 여신이 거짓말처럼 나를 달빛 치마폭으로/ 살포시 받아주었는데,/ 순간 여신의 체취에 취하여 그 치마폭에서 깊이깊이 오래오래 잠들었는데,/ 나 지금 이승에서 그 달빛 옷 입은 백련꽃 향의/ 여신을 찾으려고 헤매고 있습니다.//

상아孀娥여신 -이천 말향고래 시인에게 / 한승원
한밤에 울산 반구대에 갔는데/ 하얀 만월이 중천에 떠 있었는데/ 아득한 옛날 암구대의 제사 음식 받아먹던/ 달에 사는 상아여신을 만났는데 나는/ 그 여신의 아리따움과 향기에 반해서 그녀의/ 신금神琴을 연주하며 내내 황홀했는데/ 암구대 호수의 모든 물고기들이/ 그녀와 내가 수면에 흘린/ 반짝거리는 사랑 찌꺼기들을 쪼아 먹었는데// 거기 새겨진 말향고래, 꽃사슴, 노루, 호랑이의/ 그림자들이 물에 잠기고 있어서/ 상아여신은 새벽녘에 헤어질 때/ 사제들이 바친 음악과 춤과 향기로운 술과 차를/ 즐기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로 그녀의 흰 달빛옷자락이 얼룩지고 있어서 나는/ 그녀를 아픈 가슴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진실이야 / 한승원
반쪽 얼굴의 흰 낮달 그림자 품고 사는/ 늙은 시인의 집/ 소주 한 잔 하자고 찾아가니/ 저승꽃들 다투어 피는 살갗에 사발한 실국화꽃같은 머리털 늘어뜨리고/ 먼지 하나도 없는 방안을 쓸고 또 쓸고 있었다/ 말 없이/ 내가 마당귀에서 몽당 빗자루 하나 찾아 들고 마당을 쓸고 났더니,/ 진실이 무어냐고/ 대답할 말 찾지 못하고 멀거니 건너다보기만 하는 나에게 늙은 시인 말하기를/ ꡒ조금 전에 저 창문 너머로 늙은이 하나가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 그 늙은이 떨어져 죽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가 진실이야.//

강(江) / 한승원
내 탐진(探眞)의 강에 성스럽고 풋풋한 여자 살고 있네./ 언제 입 맞추고 춤추며 노래하고/ 언제 수다를 떨고 언제 침묵할 것인지,/ 언제 슬퍼하고 언제 앙칼지게 울부짖을 것인지 아는 그 여자는 밤마다/ 우렁이각시 되어 내 침실로 찾아와 질퍽한/ 사랑의 담금질로 나를 잠재워 놓고 이 강으로 돌아가네./ 그 맨살의 향 맑고 달콤한 맛에 환장한 나는/ 바람 되어 그 여자 물살을 철벅철벅 밟아대고,/ 해오라기 되어 여울목에서 은어 사냥에 몰입하고,/ 먹구름 되어 천둥을 토하며 그 여자의 몽실몽실한 은빛 가슴에 비를 뿌리고,/ 산그늘 되어 그 여자의 심연에 나를 담그면/ 아, 타오르네, 우리 사랑 술 익는 해질녘의 타는 노을처럼.//

천심 –강(江) 8 / 한승원
장마철의 곰팡이를 이기는 것은 가뭄이고/ 거북등처럼 균열이 생기는 가뭄을 이기는 것은 번개와 우레고/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번개와 우레를 이기는 것은 햇볕이고/ 살갗을 벗기려드는 햇빛을 이기는 것은 꽃그늘이고/ 상사의 꽃그늘을 이기는 것은 밤이고/ 번뇌의 밤을 이기는 것은 잠이고/ 죽음 같은 잠을 이기는 것은 아침인데/ 아침을 이기는 것은 무심(无心)이고/ 무심을 이기는 것은 천심(天心)이다.//

길 / 한승원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길이 있고/ 구름에게는 구름의 길이 있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 같은 구름도 있고/ 구름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이 구름의 길을 가기도 하고/ 구름이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사람이 개의 길을 가기도 하고/ 개가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구름인가 사람인가 개인가/ 무엇으로서 무엇의 길을 가고 있는가//

밀양 가는 길 / 한승원
재금이 처남이 불러서/ 내 사랑 아랑한테 간다./ 대나무숲 속에서 옷고름 만지작거리며/ 강물에 뜬 달 보고 있을/ 천 년의 대나무숲에/ 천 년의 향맑은 바람이/ 천 년의 강물에 뜬 그 사랑을 출렁거리게 하는 영남루 처가에 간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쇠말뚝도 예뻐보인다는 말대로 나는/ 밀양의 돌멩이 하나/ 비름이나 명아주 풀잎 한 포기/ 강변의 소금쟁이와 물벼룩 한 마리/ 전봇대 밑에서 꼬리 마주대고 있는 똥개들의 행위도 성스럽고 장엄해 보인다/ 천릿길 달려서 밀양 간다./ 천 년의 달그림자 내린 대나무숲 속에서/ 그 무엄한 관노가 되어/ 그 여자와 장엄하게 영육 섞으러 간다./ 그 영원한 처가에 간다.//

다시 '나무' / 한승원
도 닦는다는 것은/ 벗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어 못 견디겠으니 지금 만나/ 차 한잔 하자고/ 술 한잔 하자고/ 사랑하자고/ 보채고 싶은 것을 이 악물어 참고/ 짙푸른 하늘 경전,/ 흘러가는 바람 경전 구름 경전을 읽는 것입니다.//

여닫이바다의 혼례 / 한승원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보았습니까,/ 안개 낀 봄밤에 별들이/ 여닫이바다하고 혼례 치르는 것, 보았습니까,/ 한여름 보름달이/ 마녀로 둔갑한 바다와 밤새도록 사랑하고 아침에/ 서쪽으로 가며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것, 보았습니까,/ 늦가을 어느 저녁에 여닫이바다가 지는 해를 보내기 싫어/ 소주 한 병에 취하여 피처럼 불타버리던 것, 보았습니까,/ 달도 별도 없는 겨울밤 눈보라 속에서 여닫이바다가/ 혼자 외로워 불부짖으며 몸부림 치는 것, 그대 알아채셨습니까,/ 여닫이바다의 몸짓이 사실은/ 제 마음을 늘 그렇게 표현해주고 있다는 것,//

파도 / 한승원
꼿꼿이 쳐들고 온 머리부터를 모래톱에 처박고/ 온몸을 양파껍질처럼 말면서 곤두박질치고/ 울부짖는 그대/ 멀고 먼 세상에서 흰 거품 빼어문 체 내내/ 사랑하고 악다구니 쓰며/ 줄기차게 살아 온/ 그 삶을 후회하는가//

달 몸살 / 한승원
시인 이태백은 달 몸살을 앓았습니다./ 달이 밝으면 호수에 배를 타고/ 하늘의 달을 탐하며 미친 듯 술과 시를 즐겨야 직성이 풀리는 달 몸살,// 어느 날 밤 그는 물속에 일렁거리는 달을 길어 올리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는데,// 나는 만월 때면 가슴이 두근거려 잠 못드는 달 몸살을 앓곤 하는데다,/ 매화 진달래꽃 철쭉꽃 살구꽃 복사꽃들이 만개한 봄철이면 꽃 몸살을 앓고,/ 높새바람에 밀려든 검은 구름장이 비를 흩뿌릴 때면 비 몸살도 앓습니다.//

​ 열꽃 피는 날의 기도 / 한승원
나무숲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꽃송이나 천강의 물결이나 새들의 눈빛 속에 스며들어/ 저를 지켜보시는 당신,/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도/ 잔글씨 십 분만 읽으면 그것들이 개미처럼 기어다니다가/ 밤안개처럼 풀어지곤 하는 아비를 위하여/ 딸이/ 소포로 보내준 사각의 확대경을 받아든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나무숲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꽃송이나 천강의 물결이나 새들의 눈빛 속에 스며들어/ 저를 지켜보시는 당신/ 바다 향해 흘러드는 저의 시간을 당신의 저수지에 가두어주십시오.// 이것만은 반드시 완성하고 가야 하는데/ 책상에 앉으면 무력증이 일어나고 머리가/ 물 머금은 솜덩이들 가득 찬 듯 멍해지곤 합니다,/ 제 영혼을 맑게 헹구어주십시오,// 나무숲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꽃송이나 천강의 물결이나 새들의 눈빛 속에 스며들어/ 저를 지켜보시는 당신/ 저의 몸에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방울까지를 다 태워/ 제 어둠을 밝히고 나서 아쉬움 없이 바람처럼 날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바람 불면 춤춘다 / 한승원
그리하여 바람 불면 춤을 춘다/ 보릿대춤 엉덩이춤/ 바람벽을 끌어안은 채/ 창밖의 들판을 향한 채/ 애무하는 손짓발짓 미친 듯이 뜨겁게/ 맨살 섞는 몸짓/ 참새도 까치도 해바라기도 벼들도 들깻잎들도/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해도 달도 별도 바다도 섬도 파도도/ 노을도 안개도/ 모두들 춤을 춰라/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라/ 땅속에서 기어나온/ 아지랑이의 미립자 같은 정령들이/ 옆구리를 질벅거리면서/ 사랑도 미움도 춤이고 춤은/ 우주의 율동이라고/ 소리쳐대니까/ 바람 불면 춤을 춘다/ 전축 귀청 터지도록 틀어놓고/ 징 치고 꽹과리 치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주꾸미 / 한승원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주꾸미들이다/ 소라껍질에 끈 달아 제 놈 잡으려고/ 바다 밑에 놓아두면 자기들/ 알 낳으면서 살라고 그런 줄 알고/ 태평스럽게 들어가 있다/ 어부가 껍질을 들어올려도 도망치지 않는다/ 파도가 말했다/ 주꾸미보다 더 민망스런 족속들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소라고둥 껍질 속에 들어앉은 채 누군가에게/ 자기들을 하늘나라로 극락으로 데려다 달라고 빈다//

내 늘그막의 허방 -사랑하는 나의 허방 1 / 한승원
늘그막에 허방 하나 팠습니다./ 넘어지더라도 다치지 않는/ 고향의 숲과 바다 같은/ 허방// 세상사에 지치면 거기에 빠져 넘어지고/ 넘어지면 넘어진 김에 한숨 푹/ 늘어지게 자고 털고 나서곤 하는/ 허방// 이후 언제부터인가는 나 스스로 누군가를 빠지게 하는/ 허방이 되어줍니다,/ 나의 허방 속에 빠진 사람이 내 속에서 넘어지고/ 넘어지면 넘어진 김에 한숨 푹/ 자고 가게 할/ 허방// 그 이후 언제부터인가는 내 허방 속에 넘어진 그 사람의 가슴을/ 허방으로 만들어 그 속에 넘어지고/ 넘어지면 넘어진 김에 한숨 푹/ 자고 나서 털고 일어서서 걸어가곤 하는/ 아, 사랑하는 나의 허방.//

소설은 시를 향해 날아간다 / 한승원
하늘의 관광寬廣한 음률을 떠받치는 땅의 요분질 같은 지령음地靈音, 그것을 다라 추는 우주의 춤사위//

사랑 타령 -토굴 다담 3 / 한승원
정원의 청매화 코에 대고 허기진 듯 킁킁/ 어지러워하다가 들어와 다탁 앞에 앉았습니다,/ 입술 델 듯 따끈한/ 차가 말합니다,/ 깊이 사랑하라고// 뙤약볕 아래서 번쩍거리는/ 늙은 감나무 잎사귀들을 내다보면서 차를 우립니다,/ 오래 두어 씁쓸해진/ 차가 말합니다,/ 탐욕을 버리라고// 소슬한 바람에 들쥐처럼 달려가는/ 낙엽 하나 주워 와 다탁 위에 놓고 차를 마십니다,/ 미지근해진/ 차가 말합니다,/ 사랑을 접으라고// 꿈에 슬프게 울다가 깨어 일어난 아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을 보며 차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차갑게 식은 차가 말합니다,/ 저 눈벌판처럼/ 마음을 비우라고.//

섬 -토굴다담 9 / 한승원
바다에 떠 있는 섬만 섬이 아니고/ 혼자 있는 것은 다 섬입니다//

경계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토굴 다담 12 / 한승원
농부가 이웃의 대밭에서/ 자기네 채마밭으로 뻗어온 솜대나무 뿌리를 파서 던지고,/ 대 뿌리가 다시는 건너오지 못하게 하려고/ 밭과 대밭 사이에 허벅다리 잠길 만큼의 도랑을 팠습니다.// 시인은 그 대 뿌리들을 서재의 서편 창문 앞 울타리에 심고,/ 이듬해부터 달이 서편으로 기우는 무렵 서창에 비치는/ 수묵의 대 그림자를 완상하고,/ 속 텅비고 올곧게 살아가는 대나무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대나무로 하여금 자기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경계 허물기를/ 즐겼습니다.// 삼 년 뒤, 서편 울타리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금잔디 마당 안쪽에서 죽순 하나가 솟아나왔을 때/ 시인은 경계를 허무는 그놈을 용납할 수 없어서 잘라냈습니다.// 그 이듬해 5월부터는 마당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죽순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재 서쪽 구석의 바람벽과 장판의 굽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갈색 창끝 같은 머리를 들이밀고 있어/ 소스라쳐 놀라 살펴보니 죽순이었습니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시인은 독한 마음먹고 그놈의 허리를/ 잘라버린 다음/ 우둔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하늘을 향해 '아, 하느님, 나 죽고 나면,/ 경계를 허무는 이놈들 때문에 내 집은 무성한 솜대나무 밭이 되어/ 버릴 터입니다' 하고 말하자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그게 자연이라는 것이다.'//
* 함민복의 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 차운

그대를 사랑하는 내 슬픈 눈빛 -토굴 다담 16 / 한승원
그대를 사랑하는 내 슬픈 눈빛이/ 그대 들판의 개망초 꽃들을 물보라처럼 피어나게 하고/ 그대를 사랑하는 내 슬픈 눈빛이/ 당신 밤하늘의 별을 얼굴 붉히게 하고/ 전설처럼 멀리 있는 그대 가슴을 무지개 색으로 색칠하고/ 그대 붉새* 하늘에서 초조처럼 첫눈을 내리게 합니다,/ 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슬픈 눈빛/ 그대를 향해 평생토록 먼먼 들판 길과 산모퉁이 길을 맨발로/ 걸어서, 걸어서, 걸어서 온/ 내 슬픈 눈빛을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대의 눈빛입니다.//
* 붉새: 하늘이 불그레해지는 빛.

그리운 연꽃 등불 하나 –연가 1 / 한승원
초파일에 그리운 연꽃 등불 하나 너를 위해 달았다/ 금산사 가는 산굽이 위에서/ 밤은 별들을 초롱같이 켜달았다/ 이 여름엔 나도 한 점 혼령이 될거나/ 눈 부릅뜨고 수묵화 같은 너의 숲을 헤매는/ 철 이른 반딧불이나 될거나.//

불바퀴 -촛불 연가 2 / 한승원
혼자서/ 허공을 향해/ 두 손의 엄지와 검지 끝을 맞붙이면 그것은/ 그냥 손가락들의 만남일 뿐이더니/ 그대를 향해 앉아 눈을 감고/ 엄지와 검지 끝을 맞붙여 동그라미를 그리면/ 모든 세상이 그것 안에 다 들어와 담긴다/ 그것을 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의도 속에 담는 것보다는 풀어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를/ 그대에게서 배운 다음부터 나는/ 이것저것 조급해하며 직시{業]를/ 삼가기 시작했다.//

바위 -촛불 연가 3 / 한승원
붉은 피돌기 가진/ 그 누군들 불가마 속을 거쳐나오지 않은 자 있으며/ 불망치로 제련되지 않은 자 있으랴// 내 의식 한 자락을 퍼렇게 멍이 들도록 짓밟고 있는/ 그대의 깸 없는 잠은/ 잠 없는 영원한 깸으로/ 곰팡이 낀 일상을 성난 얼굴로 짓두들기는/ 파도 같은 사랑이다// 그대의 감춘 숨결은 내/ 치열한 불을 일으키게 하는 화톳불이 되고/ 그대의 감춘 말은/ 늘 홍수로 범람하는 강을/ 평화처럼 흐르게 한다// 달콤한 육신 속에서 깸 없는 잠에 빠져 있는 나/ 그대 속에서 조그마한 돌미륵으로 드러누워 있다가/ 몇 천 억겁 뒤에/ 한 안목 있는 석공의 정과 망치 끝에서 살아나게 하여라.//

기도 -촛불 연가 16 / 한승원
갈대보다 더 약한 것은 이슬이고/ 이슬보다 더 여린 것은/ 콧바람 한 줄기에도 곧잘 출렁거리는 촛불 그대라지만/ 그 불길로 세상의 모든 바다와/ 우리들의 수미산을 태워 녹이는 비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대의 가슴으로 이 늙은 가슴을 끌어들여/ 타오르게 하곤 하는/ 실 같은 바람 한 줄기에도/ 꺼지곤 하지만 결코 제 가슴에선 꺼지지 않고/ 타오르곤 하는 그 비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시계 –열애일기 1 / 한승원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너는 발 빠른 분침으로/ 나는 발 느린 시침으로/ 한 시간마다 뜨겁게 만나자/ 순간을 사랑하는 숨결로 영원을 직조해내는/ 우리 다음 생에는 시계가 되자// 먼지 알 같은 들꽃들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고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그리고 우리/ 한 천년의 강물이 흘러간 뒤에/ 열두 점 머리 한가운데서/ 너와 나 얼싸안고 숨을 멈추어버린/ 그 시계/ 다음 생에는 우리 이 세상 한복판에서/ 너의 영원을 함께 부둥켜안은 미이라가 되자/ 박새들의 아프고 슬픈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늘과 땅의 뜻을 그 영원에 수놓을 수 있으랴//

나 죽으면 -열애 일기 3 / 한승원
나 죽으면 그 바다의 파도가 되겠다/ 물보라로 산화되었다가/ 멀고먼 밥다 저편에서 불끈 일어나/ 이편 모래톱을 햝고 빠는 마녀의 혀 같은 파도/ 유마힐維摩詰*같이 누워 있는 당신 앞에서/ 나는 파도같이 늘 치맛살을 푼다.//
* 유마힐維摩詰: ‘깨끗한 이름’이란 뜻. 못 입고 못 먹고 못살고 박해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찌 보살이 앓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한 사람. 불이법(不二法)에 대하여 설했다.

바다에 간다 -열애 일기 13 / 한승원
사랑하는 법 배우러 바다에 간다// 파도와 모래톱은 억겁을 사랑하고도/ 그것이 아직 부족하여/ 거품을 입가에 물고 헐떡거린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붙잡기 위하여 합환화를 뜨락에 심었다지만/ 나는 당신을 영원히 즐겁게 하는 비법과 힘을 터득하려고 바다엘 간다.//

낙타 -도선사 가는 길 20 / 한승원
살아가는 일 모두가 비지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는 중노동이었다// 돈황의 모래산 밑에서 내가 중국돈 10원 주고 탄 낙타/ 고개를 외틀어 나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잘 보아라 내가 네 전생의 모습이다// 그날 밤 꿈에 나는 낙타가 되어 있었고/ 전날 내가 탄 그 낙타는 사람이 도어 낙타인 나를 타고 있었다// 내가 탄 그 낙타/ 그 모래밭에 그냥 두고 왔는데/ 내 서재에 낙타 한 마리/ 부지런히 땀을 뻘뻘 흘리며 사람들을 실어나르곤 한다/ 모래산을 타넘는다// 그 낙타 고삐 끊고 연꽃바다로 도망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그 바다는 멀고 먼 사막 모래산들 저쪽에 있고/ 꿈에 태우고 모래산 넘었던 그 낙타/ 이 새끼들아, 다음 생에서 너희들은 다시 나같이 될 것이다 하고/ 울부짖으며 오늘도/ 사람들을 싣고 불볕 사막을 건너간다.//

내 무덤 -도산사 가는 길 28 / 한승원
우리집 앞 골목 비좁아서 대문 앞까지 장의차 못 들어올 터인데/ 얼마나 고생을 할까 내 관을 멘 사람들/ 내 무덤 고향 바다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와 인연했던 사람들/ 그 인연의 빚 갚겠다고/ 한 시간 반 시내버스에 시달리고/ 8시간 고속버스에서 흔들리고/ 가파른 그 고향 산언덕까지 내 무덤 찾아가느라고 얼마나 고달플까/ 에라/ 나하고 불행하게도 인연했던 사람들아/ 그 뼈다귀 무얼 하ㅏ게 거기까지 끌고 갈 것이냐/ 벽제 화장장에서 태워 날리고 뼛가루는/ 너희들이 뿌리고 싶은데다 뿌려라/ 구름 되고 눈비되고 안개비 몇 알 되어/ 산과 들의 나무에/ 들풀 위에/ 논밭의 곡식과 바다와 강에 내려/ 소나 돼지나 닭이나 말이나 뱀이나 풍덩이나 새들의 피와 살 되고/ 사람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너울거리고 뛰어다니고 출렁거리게/ 나와 인연한 만큼의 빚졌다고 생각학 사람들아/ 나 보고 싶고 그 빚 갚고 싶거든 그냥/ 구름 강 바다 산천 초목에/ 들꽃 한 포기한테 절하고/ 눈길 맞추고 입맞추고 말아라.//

 



한승원(韓勝源) 시인, 소설가
1939년 전라남도 장흥 대덕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산(海山), 본관은 청주이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명심보감을 배웠다. 장흥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잡지인 ‘억불’을 창간했으며,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6년 신아일보에 〈가증스런 바다〉가 신춘문예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 1968년 대한일보 〈목선〉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하였으며, 장동서국민학교와 동신중. 여중 교사로도 근무했다. 저서로 시집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별 연습하는 시간’ ‘꽃에 씌어 산다’ 등과 장편소설 ‘불의 딸’, ‘포구’,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버지와 아들’, ‘해일’, ‘시인의 잠’, ‘동학제’, ‘아버지를 위하여’, ‘해산 가는 길’, ‘멍텅구리배’, ‘사랑’, ‘물보라’, ‘초의’, ‘흑산도’, ‘하늘길’, ‘원효’, ‘키조개’, ‘추사’, ‘다산’과 소설집 ‘한승원중단편집’ 전 7권, 산문집 ‘차 한잔의 깨달음’, ‘바닷가’ 등을 펴냈다. 한국문학소설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서라벌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동인문학상, 순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승원 “한점 한점 보석을 새기듯… 소설가 이전에 나는 시인”

소설가 한승원(74)은 사실 시인이기도 하다. 첫 시집 출간 이후로만 따져도 시력(詩歷) 20년을 훌쩍 넘는다. 1991년 첫 시집 ‘열애일기’를 낸 그는 소설을 쓰는 틈틈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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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승원 "딸 한강은 나를 뛰어넘어…가장 큰 효도"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그 아이(작가 한강)가 이미 저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가장 큰 효도는 승어부(勝於父)예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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