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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창변(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에서 노천명의 시 「길」·「망향」·「남사당」등 29편을 수록하여 간행했다.
작자의 제 2시집으로 서문이나 발문은 없다. A5판. 한지(韓紙) 인쇄.
길 / 노천명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古家)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 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가자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은/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망향(望鄕) / 노천명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계림사(鷄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잔나비가 우는 산골// 잔등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년들은/ 금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講道) 상을 치며 설교하던 촌/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라비아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이야케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고을/ 나뭇집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겄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叢]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남(男)사당 /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되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넘어 지나 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작별(作別) / 노천명
어머니가 떠나시든 날은 눈보라가 날렸다.// 언니는 흰 족두리를 쓰고/ 오라버니는 굴관을 하고/ 나는 흰 댕기 늘인 삼또아리를 쓰고/ 상여가 동리를 보고 하직하는/ 마지막 절하는 걸 봐도/ 나는 도무지 어머니가/ 아주 가시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키를 하고―/ 산엘 갔다 해가 지기 전/ 돌아오실 것만 같았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나는/ 어머니가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푸른 오월(五月) / 노천명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는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진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훗잎나물 젓갈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첫눈 / 노천명
은빛 장옷을 길게 끌어/ 윈 마을을 희게 덮으며/ 나의 신부가/ 이 아침에 왔습니다.// 사뿐사뿐 걸어/ 내 비위에 맞게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 오늘 노래를 부릅니다./ 잊어버렸던 노래를 부릅니다// 자― 잔들을 높이 드시오./ 빨―간 포도주를/ 내가 철철 넘게 치겠소// 이 좋은 아침/ 우리들은 다같이 아름다운 생각을 합시다.// 종도 꾸짖지 맙시다./ 애기들도 울리지 맙시다.//
장미(薔薇) / 노천명
맘속 붉은 장미를 우지지끈 꺾어 보내 놓고―/ 그날부터 내 안에서 번뇌가 자라다// 네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리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 보며 나무 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소녀(少女) / 노천명
뺨이 능금 같을 뿐 아니라/ 다리가 씨름꾼 같아// 내가 슬그머니/ 질투를 느낌은/ 그 청춘이 내게 도전을 하는 까닭이다.//
새 날 / 노천명
고운 아침입니다.// 파아란 하늘 아래/ 기와들이 유난히 빛나고―// 마음속엔 한아름 장미가 피어오릅니다.// 오랜만에/ 부드러운 정과 웃음과 흥분 속에 다시/ 사람들은 안에서 ‘희망’이/ 포기포기 무성하고// 나 이제 호수 같은 마음자리를 하고/ 조용히 남창(南窓)을 열어 수선(水仙)과 함께/ ‘새 날’의 다사로운 날빛을 함뿍 받으렵니다.//
묘지(墓地) / 노천명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 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樂譜)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悲哀)가 꽃잎[瓣]처럼 휘날린다.//
저녁 / 노천명
나이 갓 마흔에도 장가를 못 간 칠성이가/ 엄백이 짚신을 삼는 사랑 웃구들에선// 저녁마다 몰꾼들이 뫼고/ 고담책(古談冊) 읽는 소리가 들리고// 밤이 으슥해 삽살개가 짖어서 보면/ 국수들을 시켰다.//
한증 / 노천명
헌 털베로 벌거숭이 몸을 가린 내인들이/ 지친 인어(人魚)처럼 늘어졌다// 하나같이 낡은 한증 두께가/ 거렁뱅이들을 만들어 놨다// 용로(鎔爐)같이 뻘겋게 단 한증 안은/ 불지옥엘 온 것 같다/ 무덤 속도 같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어느 구석에선/ ‘감내기’를 명주실처럼 뽑아낸다// 나는/ 뻘건 천정(天井)이 대작구/ 무서워진다//
수수깜부기 / 노천명
깜부기는 비가 온 뒤라야 잘 팼다./ 아이들이 깜부기를 찌러/ 참새떼처럼 수수밭으로들 밀려갔다.// 밭고랑에가 들어서/ 꼭대기를 쳐다보다/ 희끗 깜부기를 찾아내는 때는/ 수숫대는 사정없이 휘며 숙여졌다.// 깜부기를 먹고 난 입은/ 까아매 자랑스러웠다.//
촌경(村景) / 노천명
구리빛 팔에 쇠스랑을 잡고/ 밭에 들어 검은 흙을 다듬는 낫// 보기좋게 낡은 초가집 이엉마루엔/ 봄이 나른히 기고/ 울파주 박으론/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잔치 / 노천명
호랑담요를 쓰고 가마가/ 윗 동리서 아랫말로 내려왔다// 차일을 친 멍석 위엔/ 잔치국수 상이 벌려지고/ 상을 받은 아주머니들은/ 이차떡에 절편에 대추랑 밤을 수건에 쌌다// 대례를 지내는 마당에선/ 장옷을 입은 색시보담도 나는/ 그 머리에 쓴 칠보족두리가 더 맘에 있었다.//
추성(秋聲) / 노천명
플라타나스의 표정이 어느 틈에 이렇게 달라졌나// 하늘을 쳐다본다/ 청징(淸澄)한 바닷가에 다시 은하(銀河)가 맑다/ 눈을 땅으로 떨어뜨리며/ 내가 당황하다//
여인부(女人賦) / 노천명
미용사(美容師)에게/ 결발(結髮)을 읽히는 대신/ 무릇 여인이여/ 온달에게서 ‘바보’를 배우라/ 총명한 데에 여인은/ 가끔 불행을 지녔다// 진실로 아리따운 여인아/ 네 생각이 높고 맑기/ 저 구월의 하늘 같고// 가슴에 지닌 향낭(香囊)보다/ 너는 언제고 마음이 더 향그러워라// 여인 중에/ 학처럼 몸을 갖는 이가 있어 보라/ 물가 그림자를 보고/ 외로워도 좋다// 해연(海燕)은 어디다/ 집을 짓는지 아느냐//
향수(鄕愁) / 노천명
오월의 낮 차(車)가/ 배추꽃이 노오란 마을을 지나면/ 문득/ ‘싱아’를 캐던 고향이 그리워// 타관의 산을 보며/ 마음은/ 서쪽 하늘의 구름을 따른다.//
돌잡이 / 노천명
수수경단에 백설기 대추송편에 꿀편/ 인절미를 색색이로 차려놓고// 책에 붓에 쌀에 은전 금전/ 갖은 보화를 그득 싸놓은 돌상 위에/ 할머니는 사리사리 국수를 놓으시며/ 명복(命福)을 비시고/ 할아버진 청실 홍실을 늘여 활을 놔 주셨다// 온 집안사람의 웃는 눈을 받으며/ 전복에 복건 쓴 애기가 돌을 잡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문장이 된다는 책 가를 스쳐/ 장군이 된다는 활을 꽉 잡았다//
춘향(春香) / 노천명
검은 머리채에 동양여인의 ‘별’이 깃들이다// ‘도련님 인제 가면 언제나 오실라우 벽에 그린 황계 짧은 목 길게 늘여 두 날개 탁탁 치고 꼬끼오 하면 오실라우/ 옥빛이야 변할랍디어’/ 옥가락지 위에 아름다운 전설을 걸어놓고/ 춘향은/ 사랑을 위해 형틀을 졌다// 옥 안에서 그는 춘(椿) 꽃보다 더 짙었다// 밤이면 삼경을 타 초롱불을 들고 향단이가 찾았다/ 춘향 ‘야이 향단아 서울서 뭔 기별 없디야’/ 향단 ‘기별이라우? 동냥치 중에 상동냥치 돼 오셨어라우’/ 춘향 ‘야야 그것이 뭔 소리라냐 ――/ 행여 나 없다 괄세 말고 도련님께 부디 잘해 드려라’// 무릇 여인 중/ 너는/ 사랑할 줄 안/ 오직 하나의 여인이었다// 눈 속의 매화 같은 계집이여/ 칼을 쓰고도 너는 붉은 사랑을 뱉어버리지 않았다/ 한양 낭군 이도령은 쑥스럽게/ ‘사또’가 되어 오지 않아도 좋았을 게다//
창변(窓邊) / 노천명
서리 내린/ 지붕 지붕엔 밤이 안고// 그 안에 꽃다운 꿈이 뒹굴고// 뉘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 입 물었[含]다.// 눈비탈이/ 하늘 가는 길처럼 밝구나// 그 속에 숱한 애기들을 줍고 있으면/ 어려서 잊어버린 ‘집’이 살아났다.// 창으로 불빛이 나오는 집은 다정해/ 볼수록 정다워// 저 안엔 엄마가 있고/ 아버지도 살고/ 그리하여 형제들은 다행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는 눈을 모아/ 고운 정경(情景)을 한참 마시다―// 아늑한 ‘집’이 왼갖 시간에 벌어졌다.// 친정엘 간다는 새댁과 마주 앉은/ 급행열차 밤 찻간에서도/ 중년 신사는 나비넥타이를 찼고/ 유복한 부인은 물건을 온종일 고르고/ 백화점 소녀는 피곤이 밀린 잡답(雜沓) 속에서도// 또 어느 조그만 집 명절 떡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이 박쥐처럼 퍼덕이면/ 눈 감고/ 가다가/ 슬프면 하늘을 본다.//
춘분(春分) / 노천명
한 고방 재어 놨던 석탄이 퀑 하니 나간 자리/ 숨었던 봄이 드러났다.// 얼래 시골은 지금 뱜 나왔갔늬이// 남쪽 계집아이는 제 집이 생각났고/ 나는 고양이처럼 노곤하다//
동기(同氣) / 노천명
언니와/ 밤을 밝히는 새벽은/ ‘성사(聖赦)’를 받는 것 같아/ 내 야윈 뺨엔 눈물이 비오듯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이 뜨거워/ 언니와 보고지워 떠나가는 날은/ 천리길을 주름잡아 먼 줄을 몰라// 감나무 집집이 빠알간 남쪽/ 말들이 거세어 이방(異邦)도 같건만/ 언니가 산대서/ 그곳은 늘상 마음에 그리운 곳―// 오늘도 남쪽에서 온 기인 편지/ 읽고 읽으면 구슬픈 사연들/ “불이나 뜨뜻이 때고 있는지/ 외따로 너를 혼자 두고/ 바람에 유리문들이 우는 밤엔 잠이 안 온다”// 두루마지를 잡은 채/ 눈물이 피잉 돌았다.//
감사(感謝) / 노천명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 노천명
아―무도 모르게 뉘도 몰래/ 멀리 멀리 가버리고 싶은 날이 있어/ 뫼에 올라 낯익은 마을을 굽어보다// 빨―간 고추가 타는 듯 널린 지붕이―/ 쨍이를 잡는 아이들의 모습이―/ 차마 눈에서 안 떨어져// 한나절을 혼자 산 위에 앉아 보다//
녹원(鹿苑) / 노천명
눈보라를 맞으며 공원을 걷는다/ 눈보라를 맞으며 공원을 걷는다// 붉은 산다화(山茶花) 꽃술을 따들고/ 서투르게 사슴을 불러본다// 사슴과 놀다보니/ 괜히 슬퍼져서/ 사슴을 데리고 사진을 찍다// ―나라공원(奈良公園)에서//
새해맞이 / 노천명
구름장을 찢고 화살처럼 퍼지는/ 새 날빛의 눈부심이여// ‘설’ 상 을 차리는 다경(多慶)한 집 뜰 안에도―/ 나무판자에 불을 지르고 둘러앉은/ 걸인들의 남루 위에도―/ 자비로운 빛이여// 새해 늬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重)에 뱄다// 이제/ 우리 늬게/ 푸른 희망을 건다/ 아름다운 꿈을 건다//
저녁 별 / 노천명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든 밤도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두울 나 두울/ 논 뜰엔 따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앗소리― 들은 지 오래―/ 고향 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하일산중(夏日山中) / 노천명
보리이삭들이 바람에 물결칠 때마다/ 어느 밭고랑에서 종다리가 포루룽 하늘로 오를 것 같다// 논 도랑을 건너고 밭머리를 휘돌아/ 동구릉(東九陵) 가는 길을 물으며 물으며 차츰/ 산속으로 드는 낮은 그림 속의 선인(仙人)처럼/ 내가 맑고 한가하다/ 낮이 기운 산중에서 꿩 소리를 듣는다/ 당홍댕기를 칠칠 끄는 처녀 같은 맵시의 꿩을 찾다보면 철쭉꽃이 불그레하게 펴 있다// 초록물이 뚝뚝 듣는 나무들이 그늘진 곳에 활나물 대나물/ 미일 때를 보며/ ―나는 배암이 무서워 칡 순을 따 머리에 꽂던 일이며/ 파아란 가랑잎에 무릇을 받아먹던 일이며/ 도토리에 콩가루를/ 발라먹던 산골얘기를 생각해 낸다// 어디서 꿩알을 얻을 것 같은 산속/ ‘숙(淑)’은 산나물 꺾는 게 좋고 난 ‘송충(松蟲)’이가 무섭고―// 한치도 못 되는 벌레에게 다닥드릴 때마다/ 이처럼 질겁을 해 번번이 못난이짓을 함은// 진정 병신성스러우렷다/ 솔밭을 헤어나 첫째 능에 절하고 들어 잔디 우에 다리를 쉰다// 천년 묵은 여우라도 나올 성부른 태고적 조용한 낮/ 내가 잠깐 현기를 느낀다//
* 초판에만 존재
흰 비둘기를 날려라 ㅣ 진혼가 ㅣ 출정하는 동생에게 ㅣ 승전의 날 ㅣ 병정 ㅣ 창공에 빛나는 ㅣ 학병 ㅣ 천인침 ㅣ 아들의 편지 ㅣ
*시집 〈창변(窓邊)〉은 여기까지*
자화상 / 노천명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미(性味)는/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객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답을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처럼 꺽이는 질망정 구리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사월의 노래 / 노천명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봄의 서곡 / 노천명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옷들을 받아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 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 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 분홍「베일」이 씌워질까봅니다//
봄비 /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유월의 언덕 / 노천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의 첫 시집 《산호림》에 수록. 노천명의 대표작.
사슴의 노래 / 노천명
하늘에 불이 났다/ 하늘에 불이 났다// 도무지 나는 울 수 없고/ 사자같이 사나울 수도 없고/ 고운 생각으로 진여 씹을 것은 더 못 되고// 희랍적인 내 별을 거느리고/ 오직 죽음처럼 처참하다/ 가슴에 꽂았던 장미를 뜯어버리는/ 슬픔이 커 喪章같이 처량한 나를/ 차라리 아는 이들을 떠나/ 사슴처럼 뛰어다녀보다// 고독이 城처럼 나를 두르고/ 캄캄한 어둠이 어서 밀려오고/ 달도 없어주/ 눈이 나려라 비도 퍼부어라/ 가슴의 장미를 뜯어버리는 날은/ 슬퍼 좋다/ 하늘에 불이 났다/ 하늘에 불이 났다//
장날 /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구름같이 / 노천명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별을 쳐다보며 / 노천명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고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 노천명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이름 없는 여인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애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당신을 위해 / 노천명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 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 만을 쳐다보며/ 얘기는 우정 딴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비련송 / 노천명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그림자 안 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고향 / 노천명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늘타리 따는 길 머리엔/ 학림사 (鶴林寺)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등글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장구채 범부채/ 마주채 기륙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룹 개두룹 혼닢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 끝마다 꽉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직이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던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 (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꺽어 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꺽다 나면 꿈이었다.//
캐피탈 웨이 / 노천명
샅샅이 드러내놓는/ 대낮은 告發者/ 눌러보고 싸주어 아름답게만 보아주는/ 밤은 여인// 시속 15마일의 안전상태로/ 나 이 밤에 캐피탈 웨이를 달린다/ 낮에 낙엽을 줍던 이도 안 보이고/ 다람쥐처럼 옹송거리고 밤을 굽던 소년도 그자리에 없다/ 하나 좋은 줄 모르고 날마다 오르나린 이 길이/ 오늘밤 유난히 멋지고 곱구나/ 몇백 환 택시의 효과여// 가로수를 양옆에 끼고/ 鋪道를 미끄러지는 맛이 괜찮구나/ 보초 대신 칸칸이 늘어선/ 나의 수박등들의 아름다움이여/ 개 짖는 집 하나 없는 이 골목을/ 난 이제 조심조심 들어가야 한다/ 남의 집 급한 바느질을 하는 모퉁이집 할머니를 위해서/ 시린 손을 불며 과자봉지를 붙이는 반장아저씨를 위해서/ 기침도 삼키고 나는 근신하며 들어서야 한다//
성탄 / 노천명
메시아가 세상에 오시는 새벽/ 어두운 밤을 헤치는 성탄의 노랫소리/ 집집이 불빛 찬란히 흐르고/ 사람들 메마름 가슴에 즐거움 깃들였나니/ 형제여 메리 크리스마스!// 인류 구속(救贖)하러 오시는 왕의 왕/ 베들레헴 가난한 집 마구간으로/ 겸손히 오신 날/ 당신의 고초스러운 생---/ 가시관에 쓴 잔이 약속된 날이어니// 땅 위의 영광을 당신에게 돌리나이다/ 가슴속 헤치며 드는 저 성당 종소리/ 탕자도 도둑도 당신의 죄 많은 아들들이/ 성당이 첨탑을 우러러보며 십자를 긋습니다// 오는 이 나라 겨레들은/ 또 하나의 이스라엘 백성// 저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소서/ 주여 외로운 이들에게 강복(降福)하소서/ 당신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어야겠나이다//
가을날 /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예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드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내 가슴에 장미를 / 노천명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슴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친일시 |
기원 / 노천명
신사(神社)의 이른 아침/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빗은 듯 아직 새로운데/ 경건(敬虔)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아내의 간절한 기원/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
출전: <조광> 1942년 2월
흰 비둘기를 날려라 / 노천명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일장기ㅅ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젊은이들에게 / 노천명
늙은 영국을 대해서/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제국(帝國)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 정의를 위해 대동아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
* 출전: <삼천리> 1942년 1월
승전의 날 / 노천명
거리거리에 일장깃발이 물결을 친다/ 아세아 민족의 큰 잔칫날/ 오늘 「싱가폴」을 떠러트린 이 감격// 고흔 처녀들아 꽃을 꺽거라/ 남양 형제들에게 꽃다발을 보내자/ 비둘기를 날리자// 눈이 커서 슬픈 형제들이여/ 대대로 너이가 섬겨온 상전 英米는/ 오늘로 깨끗이 세기적 추방을 당하였나니// 고무나무가지를 꺽거들고 나오너라/ 종려나무잎사귀를 쓰고 나오너라/ 오래간만에 가슴을 열고 우서 보지않으려나// 그 처참하든 대포소리 이제 끗나고 공중엔/ 일장기의 비행기 햇살에 은빛으로 빛나는 아침/ 남양의 섬들아 만세를 불러 평화를 받어라//
* 출전: <조광> 1942년 3월호
싱가폴 함락 / 노천명
아시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英 米의 毒牙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싱가폴을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 빨아먹고 넘어지는/ 英 米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동아민족은 다같이 고대했던 날이냐/ 오랜 압제 우리들의 쓰라린 추억이 새롭다//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죄악의 몸뚱이를 어둠의 그늘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신음하는 저 英 米를 웃어줘라// 점잖은 신사풍을 하고/ 가장 교활한 족속이며 네 이름 英 米다/ 너는 신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상을 해적으로 모신 너는 같은 해적이다//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혹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면 차라리 병적으로/ 선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우리들이 내놓는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 얼굴이 검은 친구여/ 머리에 터번을 두른 형제여/ 잔을 들자/ 우리 방언을 서로 모르는 채/ 통하는 마음 굳게 뭉쳐지는 마음과 마음//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낙타등에 바리바리 술을 실어 오라/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
부인근로대 / 노천명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출전: <매일신보> 1942년 3월 4일
군신송(軍神頌) / 노천명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 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 출전: <매일신보> 1944년 12월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 노천명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노천명(盧天命, 1911년~1957년) 시인, 작가, 언론인
황해도 장연군 출생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6세 때 홍역을 앓았는데 20일이 지나도록 고열과 혼수상태가 계속되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 끝에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고, 이를 하늘이 주신 명이라 생각하여, 아명 기선(基善) 대신 천명으로 개명하였다.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작품에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과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작품의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는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를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시집으로 《산호림》(1938)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 《사슴의 노래》(1958) 《노천명 시집》(1972) 등이 있다. 프로필 상세 내용: 위키백과[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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