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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고재종 시인

부흐고비 2021. 9. 30. 08:17

첫사랑 / 고재종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않았으랴// 싸그락싸그락 두드려 보았겠지/ 난 분분 난 분분 춤 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날랜 사랑 / 고재종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서러운 사랑 이야기 / 고재종
저 밤나무의 밤송이들이/ 왜 가시옷으로 무장을 하고/ 왜 종주먹질을 해대는지 아시는지요/ 나는 기억하는데요/ 모내기 끝난 지난 유월/ 모내기 끝낸 여남은 사람들/ 해설피 정자에 앉아/ 남은 막걸리 마저 기울이다간/ 앞산 보고 넋을 잃었는데요/ 그 앞산엔 젖살빛 밤꽃무더리/ 뭉실뭉실, 수만 구름 떼 밀어올리며/ 물큰물큰, 숫컷내 마냥 풍겨댔는데요/ 그 꽃 보다 넋을 잃다 다 가고/ 샛터집 과수댁만 뿌리치고 남아/ 워매, 저 징헌 놈의 꽃 좀 보소/ 워매, 이 징헌 놈의 냄새 좀 보소/ 꽃멀미 한 태산 일으켰는데요/ 혹여 그 일 때문에/ 혹여 그 환장할 일 때문에/ 저 밤나무의 밤송이들/ 저렇게 가시옷에다/ 종주먹질을 해대는 건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저 밤나무의 밤송이를 까주어선/ 그 속의 알알들 쏟게 할 수 있는 건/ 바람 같은 세월일까요/ 미륵불 같은 침묵의 기다림일까요/ 아, 남에게는 넘치는데/ 나에겐 바짝 마른 사랑일까요//

웅숭 깊어지는 사랑 / 고재종
수수 꽃 다리 꽃이/ 바람에 우수수 거릴 때마다/ 그 청량한 향기가/ 보이지 않는 사방의/ 별을 생생히 닦아 내느데요// 수수 꽃 다리 꽃을/ 정 혼자에게 보내선/ 파혼을 통고했다는 한 여인은/ 저 꽃을 일러/ 젊은 날의 추억이라 했다지요// 그런 서럽고 서느러운/ 그늘이 드리워져/ 수수 꽃 다리 꽃도 우리네 사랑도/ 아, 연자줏빛으로/ 웅숭깇어지는 건 아닐런지요//

사랑에 대한 몽상 / 고재종
내가 가보지 않은 뉴질랜드 숲은 밤 내내/ 짝을 부르며 우는 올빼미앵무로 뒤척인다/ 검은 고요가 콜타르처럼 엉겨붙어/ 성냥알만 대어도 확 일 것 같은데 어떤 놈은/ 인근 바닷가에서 죽은 갈매기를 물고와/ 屍姦을 감행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네 마음을 얻으려고 늘 언어를 혹사했으나/ 네 마음을 호출하는 호출부호를 마침내 얻어서/ 네게 가보면 너는 이미 거기 없던 것처럼/ 밤 내내 우는 올빼미앵무, 끝내 짝을 짓지 못한다/ 숲의 땅바닥에 사는 까닭에 곧잘 잡혀 먹혀/ 씨가 마를 정도로 개체 수가 준 탓이라고 하는 건/ 검은 몰약으로 밤을 닦는 숲의 말이 아니다/ 결코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둠이라고 하지 않고/ 지상을 울울창창 덮는 나무들과/ 正金片 같은 별들을 보여주는 숲의/ 끔찍한 마술, 그에 대한 최초의 오해가/ 너를 향한 나의 언어를 갈고 닦게 했지만/ 너는 늘 거기에 없었다, 내가 얻은 호출부호론/ 똑같은 바다를 두 번 다시 열 수 없을 뿐/ 우주를 가로질러 세 걸음을 딛어 우주를 확장한/ 비슈누, 그의 마지막 세 번째 걸음처럼/ 너는 나의 시야를 벗어나고, 되레 그 벗어남이/ 내가 가보지 않은 어느 숲에서라도/ 애초에 없는 짝을 부르는 올빼미앵무처럼/ 애초에 없는 너를 더욱 열렬히 확장케 하는/ 나의 눈뜬 맹목 속에 나는 다만 존재하는가.//

화음 / 고재종
나의 사랑은 가령/ 네 솔숲에 부는 바람이라 할까/ 그 바람 끌어안고 또 흘려보내며/ 온몸으로 울음소리 내는 것이/ 너의 사랑이라 할까// 나의 바람 그러나/ 네 솔숲에서만 그예 싱싱하고/ 너의 그지없는 울음 또한/ 내 바람맞아서만 푸르게 빗질하는/ 그런 비밀이라 할까 우리의 사랑//

에로스의 혀 / 고재종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 입는 육체는/ 타는 듯이 취하는 향기와/ 터진 석류의 신음이 퉁기는 탄금// 한 세계를 발사하는 치명의 눈빛과/ 붉은 입술의 이승저승/ 출렁이는 파도의 무한을/ 하루 더 춤추게 할 시간의 깊숙한 창날// 차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음부에서/ 새어나온 고유의 방언들이/ 처절하게 미끄러지는/ 모든 색택과 조형의 전위인 달항아리// 막 따낸 수밀도를 베어 물며/ 달고 탄탄한 모든 것의 목록을 해독하는/ 미뢰, 에로스의 극히 사적인 혀는// 뜨거운 왕국의 첫 글자/ 추문의 고요라면 더 뜨거울 왕국의 화두// 승인하라, 시와 나비의 리듬/ 질정 없는 연주의 알레그로비바체/ 아편 먹은 듯 번지는 총천연색의 꽃구름//

세한도 / 고재종
날로 기우듬해가는 마을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내는 댑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다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성숙 /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 듯/ 온통 보석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줄도 알거니//

출렁거림에 대하여 / 고재종



너를 만나고 온 날은, 어쩌랴 마음에/
반짝이는 물비늘 같은 것 가득 출렁거려서/
바람 불어오는 강둑에 오래오래 서 있느니/
잔 바람 한 자락에도 한없이 물살 치는 잎새처럼/
네 숨결 한 올에 내 가슴별처럼 희게 부서지던/
그 못다 한 시간들이 마냥 출렁거려서/
내가 시방도 강변의 조약돌로 일렁이건 말건/
내가 시방도 강둑에 패랭이꽃 총총 피우건 말건//


상처에 대하여 / 고재종
솔가지 꺽던 낫날에 왼손 집게손가락을 날렸다지요. 두어엄자리 뒤던 쇠스랑날로 오른쪽 발등을 찍었다지요. 거친 밥 독한 소주에 가슴앓이 이십 수년. 복부의 수술자리는 시방도 애린다지요. 좋은 일은 다 잊었는데 몸의 상처론 환히 열리는 서러움들, 참으로 야릇하다고, 이게 다 몸으로 살아온 탓 아니겠냐고 활짝 웃는 얼굴의 주름살. 그건 그대로 논밭고랑이네요. 마치 앞강 잉어들의 비늘무늬가 그들이 늘 헤살치는 물결을 닮았듯이, 봄날 당신이 잘 갈아논 밭을 닮았네요. 여기에 무얼 심을 거냐고 했더니 이제 복숭아를 심겠다네요. 암종으로 먼저 간 아내가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복숭아라네요. 복숭아 같던 아내의 젓가슴을 쉿, 처음으로 움켜쥐던 비밀도 이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무심코 입술에 가져다대는 아, 없는 집게손가락! 그뭉툭한 상처자리가 반질반질 윤을 내고야 말더라니.//

분통리의 여름 / 고재종
닷새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 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할매/ 굴삭기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는/ 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이 사양의 마을/ 그 어디건 헐린 담장, 텅 빈 마당에/ 개망초 눈물꽃은 흐드러지고/ 뻐꾹새 피울음은 종일 쏟아지고//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 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6월의 童謠 / 고재종
6월은 모내는 달, 모를 다 내면/ 개구리 떼가 대지를 장악해버려/ 함부로는 들 건너지 못한다네// 정글도록 땀방울 떨구어서는/ 청천하늘에 별톨밭 일군 사람만/ 그 빛살로 길 밝혀 건넌다네// 심어논 어린 모들의 박수 받으며/ 치자꽃의 향그런 갈채 받으며/ 사람 귀한 마을로 돌아간다네//

소쇄원에서 시금(詩琴)을 타다 / 고재종
소쇄소쇄, 대숲에 드는 소슬바람/ 무엇을 마구 씻는가 했더니/ 한 무리 오목눈이가 반짝반짝 날아오른다// 소쇄소쇄, 서릿물 스치는 소리/ 무엇을 마구 씻는가 했더니/ 몇 마리 빙어들이 내장까지 환하다// 자미에서 적송으로 낙엽 따라 침엽 따라/ 괴목에서 오동으로 다람쥐랑 동고비 따라/ 빛나는 바람과 맑은 달이/ 飛潛走伏(비잠주복)을 다스리면// 오늘은 상강, 저 진갈맷빛 한천 길엔/ 소쇄소쇄, 씻고 씻기는 기러기며와/ 소쇄소쇄, 씻고 씻기는 푸른 정신뿐// 나 본래 가진 것 없어 버릴 것도 없나니/ 나 여기 와서는 바람 들어 쇄락청청/ 나 여기 와서는 달빛 들어 휘영청청//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 고재종
하늘의 정정한 것이 수면에 비친다. 네가 거기 흰구름으로 환하다. 산제비가 찰랑, 수면을 깨뜨린다. 너는 내 쓸쓸한 지경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그렇게 너를 꿈꾸겠다. 草露를 잊은 산봉우리로 서겠다. 미루나무가 길게 수면에 눕는다. 그건 내 기다림의 길이. 그 길이가 네게 닿을지 모르겠다. 꿩꿩 장닭꿩이 수면을 뒤흔든다. 너는 내 그리운 지경으로 다시 구불거린다. 나는 이제 너를 그렇게 기다리겠다. 길은 외줄기, 飛潛 밖으로 멀어지듯 요요하겠다. 나는 한가로이 거닌다. 방죽가를 거닌다. 거기 윤기 흐르는 까만 염소에게서 듣는다. 머리에 높은 뿔은 풀만 먹는 외골수의 단단함임을. 너는 하마 그렇게 드높겠지. 日月 너머에서도 뿔은 뿔이듯 너를 향하여 단단하겠다. 바람이 분다. 천리향 향기가 싱그럽다. 너는 그렇게 향기부터 보내오리라. 하면 거기 굼뜬 황소마저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렇게 아득하겠다. 그 향기 아득한 것으로 먼 곳을 보면, 삶에 대하여 무얼 더 바래 부산해질까. 물결 잔잔해져 水心이 깊어진다. 나는 네게로 자꾸 깊어진다.//

천지간의 네 속삭임 / 고재종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무어라, 종일 속삭이는/ 저 봄비 아득한 숨결은 돌아와/ 이제 마악 옴짓거리는 살구나무의/ 어린 꽃망울엔 무슨 구실이 엉기는지/ 와르르 무너지는 해동의 담 너머/ 앞들 메말라터진 보리밭엔/ 무슨 꿈들이 파릇파릇해지는지/ 고요하여라, 다만 천지가 속삭이며/ 서로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뿐/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 오랜 자글거림도, 그 자글거림의/ 내 영혼 속 쓸쓸한 적막산천도/ 이제는 깨어나 봄비 머금는 시간,/ 동구밖 당산나무 둥치는/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대는지/ 거기 때까치는 젖어드는 날개를 접고/ 웬 생각에 골똘히 잠겼는지/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별 / 고재종
겨울 하늘 두드리면/ 쨍- 소리날 것 같이 추운 날/ 들녘의 짚가리 밑에 앉아/ 거기 옥실옥실 모여 속살거리는/ 햇볕 속에서 놀다 오니/ 늙은이 혼자 거처하는 잿등집/ 어둔 대울바자에/ 쌀 씻는 소리로 반짝이기 시작하는/ 오, 별이여!/ 눈물말고 눈물말고/ 네 형형한 보석 무엇으로 빛나리//

북극성을 일별하다 / 고재종
별 볼일 없는 일들 때문에/ 별 한번 보지 못하고 살다가/ 추석날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사이/ 북극성, 당신을 일별합니다./ 늘 저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채비를 마친 채/ 저를 내려다 보시는 당신의/ 恒心 아래서 저는 떠돌이였습니다./ 아주 어릴 적, 제가 사랑하는 소녀와/ 늦도록 강둑에 앉아 애너벨 리를 읽고/ 아예 씨르래기 울음을 연주 삼아/ 당신을 애너벨 리로 명명했지요./ 그 호명 이후 늘 당신은/ 제가 부자될만하면 가난케 하고/ 제가 날 것 같으면 어깨를 치시고/ 제가 연애할 양이면 눈멀게 하셔서/ 쌀싸라기 같은 그때 그 순결을/ 호젓이 돌아보게 했지요./ 제가 헌 상자며 넝마 등을 가득 싣고/ 좌우로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는/ 굽은 등허리의 리어카꾼 노인처럼/ 생을 낑낑대며 끌어대다 돌아와/ 이제 이렇게 당신께 고백합니다./ 애초에 당신을 함께 호명했던 소녀마저/ 이젠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라고.//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 / 고재종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 탱자울에 방자한 참새떼 소리/ 이제 그만 시끄럽다 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 몇몇/ 죄다 비닐하우스에 가버리면/ 하느님도 간간 바람으로 스쳐와선/ 후진 곳에 쓰레기 버리듯/ 은행나무 잎새를 우수수 쏟아버리게 한다/ 외로움은 빛나서 별이 되지 못하고/ 청대숲의 청대잎들/ 저희들끼리 몸을 버히게 하고/ 까짓것 알몸으로 알몸으로 온통 덤벼도/ 어느 손목뎅이 하나 건드리지 않는 홍시들/ 이제 그만 붉은 눈물 떨구게 한다/ 외로움은 질기고 질겨서/ 그래도 남은 무엇이 있다는 듯/ 삼밭의 폭배추를 포탄이 되게 하고/ 여차하면 날아버릴 듯 웅등거리게 하고/ 더는 반짝반짝 닦아내지 않는/ 장독대의 옹기들을 온통 검푸르게/ 간이 들게 하고, 간이 들어/ 미륵불처럼 처연하게 하고/ 반갑다, 어디서 개 한마리 짓는 소리에/ 마을 가득한 햇살만 출렁! 하게 한다/ 아아 외로움은 흘러서 강이 되지 못하고/ 봉두난발 갈대꽃만 미쳐 흔들고/ 강둑의 미루나무 끝으로나 달아나서는/ 이제는 외로움 저도 외로워/ 우듬지 한 떨림으로 청천하늘 치받는다//

외로움에 대하여 / 고재종
들어봐, 저 처서절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뿜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은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의 목 늘어지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그리운 죄 / 고재종
산 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는/ 눈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 고재종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 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들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달밤에 숨어 / 고재종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 오르며/ 갈대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發光)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읽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저 씻나락 담그는 풍경 / 고재종
하느님의 죄마저도 다 드러내 줄 듯한/ 청명도 쾌청명 아래/ 뭇생명의 기미들 한결같이 제 생명의 욕구에/ 스스로 놀라 부르르 떠는 모습 생생한 날/ 내 또한 무슨 그리움 하나 찾아볼까 들썽이며/ 동네 한 바퀴 돌러 나선다/ 봄은 와도 더는 심을 것 없는 마을에 봄은 짙어/ 앞집 뒷집 사방에 새하얀 한 살구꽃 보니/ 문득 세상의 때 벗은 죽음 같은 것이라도/ 와락 눈앞에 달겨들 것 같고/ 사시장철 대숲에서 고요지경을 시샘해쌓던/ 바람의 흐름 속으로 살구꽃은 또 난분분 진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내 찾는 그리움은/ 이제 강아지조차도 얼씬 않는 고샅길 도니/ 마을 앞 삼밭의 샛노란 장다리꽃무리가/ 광기로도 모자란 독기로도 모자란/ 원색의 화냥끼로 자꾸만 꽃사래 쳐대고/ 그 위로 흰 나비 쌍쌍 비몽사몽 속인듯 날으고/ 또 바람에 물결치는 앞들 초록의 보리 앞에서/ 일순 내 넋은 고압의 전류 흘러 깜깜하다/ 하지만 그 초록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왜 진즉 승천해 버리지 못했을까/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보리피리를 불었었다/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애써 앙탈하던/ 사랑 하나를 눕혔었지만/ 이제 한사코 한사코 바람은 불고/ 이제 아니라고 아니라고 보리는 도리질치고/ 그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재잘대는/ 종달새 노래에 나는 그만 문둥이처럼 서럽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길 위에서 길을 찾듯/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찾는 내 그리움은/ 썰렁한 회관 옆, 지난 겨울 끝내 밤봇짐 싼/ 명수형 집의 박살난 대문이거나/ 거기 그가 남기고 간 한숨 탄식 눈물들 하나같이/ 푸른 노여움의 싹이 되어 돋는 마당이거나/ 지난 가을 심어놓고 미처 캐가지 못한/ 텃밭의 한 자쯤이나 자라 있는 마늘싹/ 이제는 그 임자 없는 희망 속에나 있을까/ 익숙하던 길 위에서 문득 서먹거리는/ 이 쓰거운 마음의 행로/ 새벽이면 새벽같이 댓잎 뜬 각시샘에서 물을 긷고/ 푸르른 연기를 곧게 피워 올려 하늘과 내응하거나/ 새하얀 연기를 옆으로 흐트려 세상을 위무하던/ 생솔연기의 나라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곧고 부드러운 정신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 온통 나간 집 같다/ 다만 거기 파랗게 옷 입은 길섶에/ 좁쌀 뿌려놓은 듯한 냉이꽃 마구 피어나고/ 그 귀여운 제비꽃은 오늘도 꾸벅꾸벅 인사하고/ 논둑에 빽빽히 돋은 서러움의 쑥잎은/ 거기 꽃다지 개불알풀꽃 코딱지꽃들 함께/ 이제 짙어버린 봄의 정액을 자꾸만 탐하는데/ 저 뒷들 몇몇 검은 그루에 초벌갈이꾼도 있긴 하다/ 이논 저논의 비닐하우스에선 김도 푹푹 새어나온다/ 하지만 저 뒷산 바우배기에서/ 이제 마악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쩍새의 피울음/ 그 피울음 먹고 이제 마악 미친듯 피어나는/ 저 묵정논의 핏빛 자운영꽃불은 누가 끄는가/ 어느 순간 걷는데 푸드득 날아오르는 들비둘기떼 쫓아/ 내로 산으로 달리던 함성이 환청으로나 살아온다/ 그리하여 고독의 키가 무척은 자라면/ 저 갱변 미루나무처럼 연두빛 이파리라도/ 온몸에 달고 반짝거릴 수는 있을까/ 거기 맑은 냇물에 은피라미떼가, 꿩 꿔엉/ 느닷없이 울리는 장끼소리에 놀라 뛰어드는/ 개구리 몇 마리에 혼비백산 하는 모습/ 물가의 빛나는 조약돌 함께 들여다보다간/ 냇물이 흘러가는 저 먼 곳을 또 한참은 바라보거니/ 이윽고 풀이란 풀은 다 썽난 들을 질러/ 사방산천 연두초록 물감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광경 한눈에 보이는 뒷동산에 오르니, 거기 지금은/ 조팝나무 새하얀 꽃자루가 자꾸만 끄덕이는 때/ 찔레꽃 말고 찔레꽃 속니파리가 마악 피어날 때/ 거기 지금은 비비비 우는 비비새거나/ 쭉쭉쭉 우는 머슴새거나, 한창/ 잡덤풀 사이로 쫓고 쫓기는 사랑놀음으로 바쁜 때/ 그럴지라도 내 신명나는 그리움은/ 저기 발치 아래 가슴 저미도록 휑한 마을의/ 동구밖 정자나무에 있지 않다/ 그 위의 까치집 몇 채에 있지 않다/ 하마 남은 집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서 술을 담고/ 하마 집집의 장독마다 햇간장 맑게 우러날지라도/ 한번 흘러버린 사랑의 뒤안길에서/ 슬픔의 버얼건 화농을 덧들일 뿐인 이 그리움/ 그러나 그러나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은/ 아까 웃뜸 샛길 접어오다/ 어느 집 담 너머로 그만/ 황망간에 바라보고 놀라 급히 고개 돌렸던/ 그 씻나락 담그는 풍경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바람도 알고 꽃도 알고 햇빛도 아는 일이다/ 지난 겨울 집채만한 외국산 태풍이/ 이윽고 이 들녘을 마지막으로 덮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앞집도 뒷들도 농기계도/ 온통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저 폐허의 상처나 뒤적이던 나날 속에서/ 결국 씻나락만큼은 간수해왔더라니/ 그리하여 씻나락만큼은 그예 담그더라니/ 이제 그 아침 다시 오지 않으리라던 마을에/ 이제 다시 땅이 발정의 신열에 들떠/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급기야 저기 저렇게 논 봇도랑에서/ 수많은 개구리들 암놈숫놈 업고 업히어 걀걀걀걀/ 불 앓는 소리 만발케 하는 그 힘 그 유정 속에서/ 가래톳 서는 내 그리움 하나쯤은 끝내 찾나니/ 봄햇살 융융한 봄날 보리밭 너머 저 지평선이여/ 뭇 생명의 싹들 무장무장 자라는/ 그 경이의 찰나까지 드러내 줄 듯한 청명이여/ 온몸 다 문드러지는 절망, 그 뿌리에서 돋는/ 새싹의 욕구 하나로 또또 진저리치는 만물 위에/ 내 그리움의 금가루 은가루 마구 뿌려보나니.//

길에 관한 생각 / 고재종
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 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 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밭에 서면/ 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 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 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 하루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 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 버린/ 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르쳐 든 길에서/ 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 살다 보면 정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차이든/ 가다 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 먼 산을 가늠해 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 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니, 욕망의/ 초록이 쭉쭉 뻗쳐오르던 억새풀 언덕에/ 마른 뼈들 스치는 소리는 생생하다. 그 소리에/ 삶의 나날의 몸살에 다름 아니던 별들은/ 또 소스라치다 잦아드는 새벽, 오늘도/ 푸성귀밭에 오줌발을 세우는 것은/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갑오패 같은 그리움/ 이토록 질기다는 것인지. 어디서 종은/ 또 울고, 그러면 황급히 말발굽을 갈아 끼우고/ 잡목에 덮인 저 황토잿길을 올려다보는/ 마부처럼, 꿈에 견마 잡힌 우리도 뚜벅뚜벅/ 발길을 떼야 하는 일이 새삼 절실한데/ 소슬바람은 부는 것이다. 계절은 벌써/ 깊어져, 우리는 또 한발 늦는다 싶은 것이다./ 한발 늦는 그것이 다시 길을 걷게 한다면/ 저 산도 애써 아침해를 밀어올리긴 하지만./ 풍경 속으로 꺼져버리는 풍경?//

면면(綿綿)함에 대하여 / 고재종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 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 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아, 싸아하게 열리는 순간 / 고재종
날다람쥐 눈망울같이 또글또글한/ 새까만 머루를 아시는지요/ 나는 지금 머루술을 담근답니다/ 산토끼 눈망울같이 똥글똥글한/ 새빨간 맹감을 아시는지요/ 나는 오늘 산행길에서 빛났지요/ 아, 물론 당신도 잊지 않으셨겠지요/ 코밑 거뭇거뭇해지는 아이들/ 틈만 나면 조물락거리는 불알 모냥인/ 다래 열매랑/ 으름 열매, 그 이름도 이윽한/ 으름 열매를 톡 까서는/ 한 입에 냉큼 넣고 으석 씹으면/ 그 달디단 향내가 온 몸에 퍼지는/ 순간,/ 아, 싸아하게 열리는 순간/ 난 오늘도 이슬과 바람과/ 햇빛과 비와 새울음을 보았답니다/ 나같이 메말라가는 것도/ 그 향내 속에 깃든/ 가을의 은총으로 자지러졌습니다//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 고재종
내가 시방 어쩌려고 능금밭 앞에서 서성이며/ 내가 요렇듯이 바잡는 마음인 것은/ 저 가시 탱자울의 삼엄한 경비 탓이 아니다// 내가 차마 두려운 건, 저 금단의 탱자울 너머/ 벌써 신신해진 앞강물소리와/ 벌써 쟁명해진 햇살을 먹고/ 이 봐라, 이 봐라, 입 딱! 벌게는 주렁거리며/ 빨갛게 볼을 붉히고 있을 능금알들의 황혼// 어느해 가을 저곳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볼이 달아오를대로 올라선/ 그 능금알을 따는 처녀들과/ 그것을 한광주리씩 들어올리는/ 먹구리빛 팔뚝의 사내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저 능금밭에 들려거든/ 두근두근 숨을 죽이고, 콩당콩당 숨을 되살리며/ 개구멍을 뚫는 벌때추니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익을대로 익은 빛깔이/ 그토록 견딜 수 없는 향기로 퍼지는/ 저 풍성한 축제를 누가 방자하게 바라볼 것인가// 내가 능금밭 앞에서 여전히 두려운 것은/ 시방 무슨 장한 기운이 서리서리 둘러치는!/ 저 금기의 신성의 공간, 그것을/ 내 차마 좀팽이로도 바잡는 마음 다하여/ 아직도 몰래 훔치고 싶은 이 황홀한 죄, 죄 때문//

나락밭에 순금이 일면 / 고재종
나락밭에 순금이 일면/ 하늘은 더 청때깔 나고/ 양광이야 벌써부터 맑아져선/ 강아지풀 이삭마다에도 등불을 켜댄다./ 나락밭에 순금 일수록/ 바람은 한결 일렁이면/ 뒷산 노루막이도 우뚝하게 씻고는/ 제 능선 위로 기러기의 길을 트고,/ 창공을 덮은 고추잠자리떼로/ 세상은 또 어린 경이에 닿는구나./ 이런 날엔 그렇기로/ 날백정이라도 정정해져선/ 저 은빛 억새밭에 가서 흔들리거나/ 아이쿠, 나는 내 미급한 바로/ 가을 물소리 듣기도 어려운 처지인데/ 보아라, 나락밭에 순금 일수록/ 십리 밖까지 트이면/ 먼 지평으로 목례 한 번 보내지 않고/ 네 눈물 돋는 어디에 들국 한 점 돋겠느냐/ 시방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박하향 먹은 듯 환해선/ 쌔르릉, 발길에 이는 메뚜기 한톨에도/ 온 들판의 것들이 차랑차랑,/ 나락밭에 순금이 일자/ 하늘은 더 청때깔 나고/ 이런 땐, 아랫마을에 혼사라도 있어서/ 먼 징소리조차 세상을 넓히니/ 네 그리움은 어느 처음에 닿겠느냐.//

삼밭에서의 휘파람 / 고재종
늙은 소의 눈망울같이 그렁그렁한 삶에도/ 참깨가 온종같은 꽃을 흔들어댈 때 있다/ 세월의 불볕에 귀때기 퍼렇게 견디다보면/ 벌써 첫물이 바알간 고추처럼 익기도 하리니/ 고추 따는 아낙의 얼굴도 발갛게 익는다/ 이제 슬쩍슬쩍 스치는 바람자락을 보아라/ 그 바람에 온 잎새 진저리치는 옥수숫대 위로/ 된장잠자리떼는 즈이도 가만 있지 못한다/ 사람인들 왜 그리움의 물살을 모르겠느냐/ 이럴 때 저기 저기 뭉게구름마저 부풀면/ 하늘도 쟁쟁쟁 소리날 듯 쟁명하여서/ 우리 사는 이 순간만은 내남없이 쾌청하다/ 예의 땅 위에 별 낱낱을 뿌린 메밀꽃이며/ 주렁주렁한 콩도 팥도 어찌 아니 싱그러우랴/ 사람이 손 안 대어도 스스로 잘 자라선/ 어느덧 땅으로 절하는 강아지풀송이랑/ 내가 호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풀들도 바쁘게는 바쁘게는 반짝이면서/ 햇빛은 따글따글 열매들을 죄 익히면서/ 또 우두둑거리는 아낙의 허리가 펴지는 순간/ 뒷산 봉우리는 더욱 더 우뚝해지면서/ 온갖 것이 거기 그렇게 제 설레임으로/ 가을의 장엄 선율을 완성시키는 삼밭에서/ 나는 아직 푸르른 휘파람을 부는 쪽에 선다/ 깊은 강은 소리없이 흘러서 깊은 것이다.//

숲의 묵언 / 고재종
숲은 아무 말 않고 잎사귀를 보여준다./ 저 부신 햇살에 속창까지 길러 낸 푸르른 투명함/ 바람 한 자락에도 온 세상 환하게 반짝이며/ 일렁이는 잎새 앞에서/ 내 생 맑게 씻어내고 걸러낼 것은 무엇인가// 숲은 아무 말 않고 새소리를 들려준다./ 저것이 어치인지 찌르레기인지/ 소리 떨리는 둥그런 파문 속에서 무명의 귀청을 열고 들어가/ 그 무슨 득음을 이루었으면 한다/ 숲은 그러자 이윽고 꽃을 흔들어 준다// 어제는 산나리꽃 오늘은 달맞이꽃/ 깊은 골 백도라지조차 흔들어 주니/ 내 생 또 얼마나 순해져야/ 맑은 꽃 한 송이 우주 속 깊이/ 밀어 올릴 수 있을까// 문득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때마침 오솔길의 다람쥐 눈빛에 취해/ 면경처럼 환한 마음일 때라야 들려오는 낭랑한 청청한 소리여/ 이 고요 지경을 여는 소리여// 그러면 숲의 침묵이 이룬 외로운 봉우리 하나/ 이젠 말쑥하게 닦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내 석삼년 벙어리 외로움일지라도/ 이 숲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다/ 숲은 다만 시원의 솔바람 소리를 들려줄 뿐이다.//

비자숲 바람소리 / 고재종
비 온 뒤에 젖어 있는 마악 개고 햇살이 나오는, 때마침 바람도 일기 시작하는 숲이었지. 그 나뭇 잎새가 非非非하게 생기고, 그 둥치는 어처구니로 생긴 것들이 이윽고 반짝이며, 툭툭 털며, 솨솨솨 빗질 소리를 내는 숲이었지. 세월로 삐그덕거리는 내 이백여 뼈마디가 살살 안 아프겠는 그 숲에 아참, 너와 나 무엇이 정녕 시들하긴 시들해서는 찾아갔었지.// 그랬더니, 아 그랬더니, 직박구리 둥지 머리에 이고 千手觀音처럼 기도하는 나무들로 꽉 찬, 그렇지, 북제주군 조천의 비자숲은, 배배 꼬인 분재 같은 나, 끄덕하면 세상의 상처를 운운하는 나를, 그렇게 우람하고, 그렇게 팽팽하게 세워서는, 같이 간 너의 외로움마저도 푹 젖게 하고, 벌쭉 열리게 해서는, 온 숲이 한바탕 처녀매미로 찢어지게 하고는, 솨솨솨 그 숲바람 소리에 아득아득 자물 쓰게 할 숲이었지.그랬지. 우리 온갖 것으로 막인 九竅를 열어 너와 나, 너나 들이로 속속 물 흐르게도 한, 그러나 끝내 다음 일정에 쫓기는 어리보기를 숲길 밖으로 쫓아내는 그 숲에 실은 우리 안 들어갔었지. 들어갔다 해도 그 깊고 푸르고 생생한, 그 어처구니 숲에서 내가 본 건 아무 것도 없이, 되레 세상엔 그 알 수 없는 성성한 힘이 알 수 없게 관장하는 한 곳 쯤은 그예 감춰두어야겠다는 마음 다짐 속으로 시방도 솨솨솨거리는 너와 나의 通風, 바람소리만을 달고 왔었지.//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정자나무 그늘 아래 / 고재종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느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새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늘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 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은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나무 속엔 물관이 있다 / 고재종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거나 굵은 것이거나 아예 실가지거나 우듬지거나 모두 다 서로를 훼방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거리거나 휙휙 후리거나 모두 다 제 깜냥껏 한세상을 흔들거리는데 그 모든 것이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한 집의 주춧기둥 같은 둥치에서 뻗어나간 게 새삼 신기한 일이다.// 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막한 새 한 마리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깜깜한 땅속의 그중 깊이 뻗은 실뿌리에까지 거기 흙살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듬지에까지 올려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는 어느 여린 것 하나라도 어떤 댑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 우린 너무 감동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 고재종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거나 굵은 것이거나/ 아예 실가지거나 우듬지거나 모두 다 서로를 훼방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거리거나 휙휙 후리거나/ 모두 다 제 깜냥껏 한세상을 흔들거리는데/ 그 모든 것이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한 집의 주춧기둥 같은 둥치에서/ 뻗어나간 게 새삼 신기한 일이다.// 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만한 새 한 마리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깜깜한 땅속의 그중 깊이 뻗은 실뿌리에까지/ 거기 흙살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듬지에까지 올려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는/ 어느 여린 것 하나라도 어떤 댑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 우린 너무 감동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파안 / 고재종


마을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원 내놓으니//

소주 세병에/ 두부찌개 한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대접 받았네그려//

 

고요를 시청하다 / 고재종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 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 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광채 / 고재종
석모도 방죽, 그 아득한 억새 밭에 섰더니/ 일몰에 젖은 네 눈동자는/ 되레 무슨 깊고 푸른 수만 리로 일렁거렸다/ 억새 때문만도 아니게 길 하나 보이지 않고/ 내 눈은 내 눈동자를 보지 못할 때/ 네 눈동자에서 터져 나오는 광채는/ 저 수평선까지를 황홍(黃紅)으로 물들여놓곤/ 되레 넌 깊고 푸른 네 심연으로 잦아들었다/ 억새꽃 금발들이 하염없이 반짝거렸다//

그 희고 둥근 세계 / 고재종
나 힐끗 보았네/ 냇갈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딴 세상에서인 듯한/ 풍덩거리는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키들거림이여/ 때마침 어디 마을에선/ 훅, 끼치는 밤꽃 향기가/ 밀려왔던가 말았던가//

기도하는 사람 / 고재종
길가의 오락기에서 아무리 두들겨대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두더지 대가리처럼/ 한사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퇴행성 고독의 습관 같은 게 그를 홀로 세운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우느냐고 하지 말아라/ 울 수라도 있다면 왜 기도하겠느냐고/ 반문하는 데에도 지쳐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없는 생이/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던 랭보여/ 중대장의 명령 하나에 인분을 먹은 병사들의/ 굴욕 같은 생도 이미 참았으니// 다만 오그라지고 우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과일 도사리 같은 것으로/ 그를 아무도 눈여기지 않는 곳에 홀로 세우는/ 저주받은 고독의 습관이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저 풍찬노숙의 나날을 누구에게 물을까//

꽃의 권력 / 고재종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 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 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 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저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 고재종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를 찾아/ 십일월의 억새 밭에 든다./ 이 쓸쓸한 봉두 난발의 바람에서/ 내 어쩌려고 고향을 느끼는 건/ 내 안에 든 행려나 남루 때문일 터./ 먼 데서 아주 먼 데서/ 내 안으로 속삭여오는 바람은/ 시퍼런 초록으로 뻗치던 억새 밭에/ 마른 울음이나 치고, 그 울음에/ 나도 뭔가 한없이 떨리는 게 있지만/ 내 몸의 새것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나날의 새것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비로소 눈이 보이는 나는/ 억새 속에 고개 떨군 귀신이 보인다./ 어깨를 들썩이는 망나니를 쓸어댄다./ 알밤 다 쏟아버린 밤송이 같은/ 마음의 거처에 누우면/ 훗날 거기 바람도 없이 억새도 없이/ 억새 꽃 빛 서천에 놀이나 좀 비낄까.//

이승 꽃의 향기에 저승 새가 취하면 / 고재종
고산의 석남화라 했지요./ 네가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으면/ 나도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는소리에/ 너와나와가 함께 깨어난다고 했지요./ 백두산 골짝 암벽에 피는 꽃,/ 노랑만병초라고도 하는데요./ 그 향기가 하도나 좋아선, 네 오랜 체증도/ 내 밭은 정기도 새삼새삼 씻는다는데요./ 그것이 광대고원을 달리는 바람 향이거나/ 그것이 감사나운 강풍이 잠깐 비낀 날,/ 아청빛 하늘의 흰구름 향이거나/ 그것이 구름 저편에 아스라히 묻힌/ 시간 밖의 시간을 일깨우는 은하 향이어서/ 그래요, 석남화 향기 맡으면/ 妙音鳥라던가 그런 새가 울 것 같아요./ 극락정토 설산에 살아서/ 너무도 춤 잘 추고 너무도 미음을 내어선/ 네가 병들고 내가 죽을지라도/ 왜 아니 싱싱하고 왜 아니 생생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새가 울고 말겠지요./ 그러면 석남화주, 내 마시고 너도 마시고/ 한 오십년 더 우는 거예요, 그 눈물로/ 꽃향기와 새 노래 듣는 꿈길을/ 너와나와는 조금은 닦을 수가 있어서/ 두발부리 두억시니와 같은 세상의/ 서러운 사랑들 먼저 걷게 할 테지요.//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보낸 한철 / 고재종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노래한 시인은/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적었네./ 오늘 나는 목 백일홍 꽃 그늘에서/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고 적어도/ 나의 큰 죄과는 어쩔 수 없네, 늘 삶의 바깥에/ 숨은 음모가 있는 거라고 핑계댔으니/ 불행은 내가 창조한 신이어서,/ 저 황홀한 아편 송이송이 같은 색들/ 아편 맛 같은 색정에 저항하지 못하는/ 삼복염천의 호사를 어찌하랴./ 회의하다니 몽상하다니, 고통은 여기 있고/ 우울이라니 동경이라니, 죽음은 내가 원했다./ 새 애인을 만나 전 남자의 아이를 지우러 가는/ 여자가 걷는 길처럼/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나의 형벌이었으니/ 삼복염천 개는 제발 목 달지 말고, 피비린내는/ 참수의 무리가 닥치기 전에/ 온통 색뿐이어서 색정뿐이어서/ 천지가 따로 없는 저 황홀로 터지며/ 석 달 열흘은 사랑하리라 해도, 복날/ 개처럼 늘어진 환멸 때문에/ 마냥 긁어대는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나는/ 내 비명의, 송이송이의, 목백일홍만을 보네.//

꽃 터져 물 풀리자 / 고재종
저 강변 마을마다 매화꽃은 터져/ 강물은 다시 풀리고/ 이 아침, 사람들은 보리밭으로 나간다// 뼈가 마르는 외로움에 지친/ 저 참절의 먹때왈빛 얼굴들/ 날피리 떼 일기 시작하는 강물에 씻고/ 또 매화꽃을 바라본다// 보아라, 저 유장한 강물보다/ 더한 그리움의 속절들 있어/ 서러운 나라와 폐허의 마음을 딛고/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 보리거름 주다 잠시 쉴 짬에도/ 거기 벌써 푸릇푸릇한/ 냉이 달래 지칭개를 한 웅큼씩 뜯는가// 저 강변 마을마다 매화꽃은 터져/ 강물 위로 통통통통/ 흰비오리 떼를 냅다 달리게도 하는/ 그 맑고 생생한 서러움으로// 이 저녁, 집집마다에선/ 봄나물국이 쩔쩔 끓을 것이라면/ 이 봄이 저리 환해진들 또 어쩌겠느냐//

너의 얼굴 / 고재종
예기치 않은 어느 날 내 앞에서/ 눈물로 중독된 눈을 하고서는/ 무언가를 애써 말하려고 더듬, 더듬거리는/ 그러나 끝내 온몸이 뒤틀려버려 말을 못하는/ 너의 얼굴은 내게 계시(啓示)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무력한 네 얼굴로 나는 상처 받고/ 무력한 네 얼굴에 저항할 수 없다// 버려진 고아처럼 나는 나를 얼마나 울어야 하나/ 홀로된 과부처럼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밤중 나그네처럼 별의 지도도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난 내 앞의 너는/ 네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으로 나의 하늘이다/ 나는 너로 인해 죄책 하지도 않고/ 나는 너를 연민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나는 다만 너를 모실 뿐이다// 기막히게는 말할 수 없는 네 뒤로/ 기막히게는 번지는 밀감 빛 노을을/ 네가 잃어버린 날에 대한 서러움이라기보단/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차마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중독된 눈물을 잃어버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잃어버리고/ 내 마음을 잃어버리기까지는, 너의 계시/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누님 / 고재종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저 아가씨 얼굴 좀 보아/ 홍색 자색 연분홍 드네/ 가슴 봉긋한 저 아가씨/ 꽃물 든 손 가슴에 얹네/ 저 먼 데로 까치발 딛네/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어쩌자고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치다 깨어나니/ 울 밑의 봉선화 비에 젖네//

 

세월의 여자 / 고재종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의 상족암에/ 때아닌 겨울비 치는 바다,/ 파도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 말한/ 그녀는 거기 홀로 견디는 거다./ 그녀와 거기서 좀 지체해도 좋았던 그곳엔/ 백악기 때의 공룡 발자국과/ 만권서 쌓은 듯한 퇴적암에 층층 새겨진 세월,/ 그것과 함께 그곳에선/ 그녀 가슴에 패인 삶의 사랑의 상처도/ 빗물 고이는 공룡 발자국처럼 오래/ 가리라는 것을 짐짓 모른 체해야 한다./ 몇 번이고 숨이 턱턱 막혀/ 그 가슴의 울혈, 퇴적암처럼 더께 얹고 나니/ 고독은 삶에 대한 경건한 수절이더라며/ 그녀는 오연한 눈빛이던 거다./ 어쩌면 그녀는 일억 년 전까지는 추억되는/ 무상의 시간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또 만권서보다 더한 것들을/ 세월 밖에까지 쌓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바다가/ 고래 떼처럼 몰려온다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난 비 아니라도 온통 젖어 그만이던 거다.//

눈물을 위하여 / 고재종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로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대설 / 고재종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무늬 / 고재종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오솔길을 쓸고/ 오솔길에 무늬를 짠다// 나뭇잎 그늘 없는/ 나뭇잎이 어디에 있는가// 나뭇잎 그늘에/ 누워 마음의 상처를/ 쓸지만 상처 없이는/ 생의 무늬를 짜지못한다// 아. 사랑의 그늘은/ 나를 이윽하게 하지/ 이윽함 없는 봄날은/ 찬란히 갔지// 나뭇잎 그늘이 일렁일렁/ 내 생의 이정(里程)을 쓸고/ 그 이정의 무늬를 밟으며// 나는 이제 막 중생의/ 하루를 통과하는데// 시방 눈앞에 일렁이는 게/ 나뭇잎인가 그 그늘인가//

묵정지 이 쓸쓸함의 저편 / 고재종
한때의 푸르른 피를 잘 씻어낸// 억새꽃 은발들이 잔광에 반짝인다./ 한때의 무성한 살을 잘 비워낸/ 억새꽃 은발들이 바람에 쓸린다./ 이때쯤 개울물 소리는 청천에 닿고/ 나는 묵정지 서 마지기, 할말이 없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서러움을 잘 부린/ 머슴새가 시방도 쭉쭉쭉쭉 소를 몬다./ 이 저녁까지 나날의 그리움을 잘 빛낸/ 머슴새가 시방도 그 누굴 호명한다./ 이곳저곳 구절초가 속속 듣고/ 너는 못 뒤엎는 자리, 들을 귀가 없다./ 바람은 또 우수수히 풀밭에서 인다./ 풀들은 또 소슬하게 그만큼 시든다./ 하여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먼가./ 꽃도 새도 어둠으로 눕는 자리엔/ 두루총총 별이 참 많이는 돋는다./ 두루총총 서리 쓴 들국빛으로 돋아선/ 너나 나나의 눈물의 사리를 닦는다./ 그러면 타는 밭과 빠지는 수렁을 넘던/ 우리의 외진 사랑과 노래여, 안녕./ 이 저녁 아득아득 저무는 길에서도/ 찔레 열매들 형형, 사상을 묻고/ 실베짱이 씨르래기 풀무치 한 떼는/ 시간 너머의 더 높은 꿈을 연주한다./ 너와 난들 이 무명을 무얼로 점등하랴.//

봄 마당에서 한나절 / 고재종
하늘은 쪽빛이고 마당은 환하다./ 햇병아리 몇 마리가 무언가를 콕콕 찍고/ 토방의 늙은 개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세상 살며/ 바람에 꾸벅이는 제비꽃이나/ 처마 밑에 떨어진 참새 주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다. 담 너머 대숲의/ 고요 모르는 수런거림과/ 사립 옆 윤기 나는 감나무 잎의/ 반짝거림에, 한때는 목숨이라도 걸 듯/ 그리움과 노여움을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먹이 모자라던 까치 지난 겨울엔/ 개밥 그덩에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더니/ 그 까치 시방은 마당을 차고 오르며/ 흰 무늬 날개 활짝 펴서 대숲 위를 다닌다./ 그 부신 꿈의 비상엔 언제나/ 차고 오를 마당과 몇 알의 밥알이 필요했던/ 것인데, 나는 시방 생의 어디쯤/ 어슬렁거리며 날개 짓 해보는 것인가./ 마당은 환하고 불혹은 눈앞이다./ 헛간의 녹슨 경운기와 담장 밑의 풀덤불이/ 세월을 가르치고, 장독대의 곰삭은 옹기들은/ 미륵불처럼 처연하다. 서러운 것들의/ 모든 가슴이 미륵불 되면 좋으련만/ 아직도 외양간의 부사리는 영각을 쓰며/ 마당을 한바탕 뒤흔드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 사랑을 부르는 소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마당 귀퉁이의 참배 꽃은 펄펄/ 져내리고, 나는 목이 메이는 것도 지쳐/ 물끄러미 생의 안마당을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우편배달부는 늘 늦는 것이다.//

시간에 기대어 / 고재종
강의 면목이라면 면면한 유수와 범람,/ 강물 따라 걷는 마음은 넘치고 또 흐르네./ 보리숭어며 비오리 떼가 튀고/ 창졸간의 갸륵한 것들이 좋이 울어도/ 순간의 꽃보다는 이야기로 더 유장할 터,/ 금결은결 반짝이는가 했더니 금세/ 그리움의 파란으로 일렁이는 시간 아닌가./ 한때는 한도 없이 파닥거렸던/ 강변 은백양 잎새와 첫사랑의 흑단머리는/ 바람의 갈래 갈래로 흩어지고/ 오늘은 강가에 퍼지는 라일락 향기,/ 강섶을 일구는 고라니며 노인장과 함께/ 또 무엇, 그 누구로 흘러드는 구름 떼라니!/ 구름이 깊어지면 강물도 높아져서는/ 서러움 밖의 그 무엇이라도 소환할 듯한 모색,/ 서녘 놀이 비쳐 든 갈대밭 속의 연애 너머/ 썩지 않고 들끓는 고독의 항성으로/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그런 유정의/ 경계 같은 것들을 오늘도 추문 하는 것이랴./ 흐르는 강에 차마 가닿지 못하고/ 사소한 마음 하나에도 수만 물비늘을 뒤채는,/ 지금은 결락한 꿈의 시간에 기대어/ 제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강의 명색이여.//

사인(死因) / 고재종
세상에 아름다운 시신은 없다고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박혜진 씨는 다만/ 사회가 외면하는 시신의 침묵을/ 묵묵히 대변할 뿐이라며 웃는다/ 부검 날엔 몸에 배는 부패 냄새 때문에/ 밖에 나가 점심도 먹을 수 없는 그녀가/ 토막 난 사체의 위장을 가르고/ 썩어 문드러진 사체에서 피를 뽑고/ 유괴 후 숨진 아이 부검 때는 펑펑 울기도 한단다/ 하지만 그녀가 고독과 죽음을 관통하며/ 그토록 밝히고자 하는 사인은/ 저마다에게 어떻게든 있긴 있는 것일까/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는 하인이 없고/ 공포를 휘두를 제국이 없어서 자신을 증오하는/ 우리들의 너무도 의당한 천국에서/ 우리들의 죽음은 스스로 저당 잡힌 게 아니던가/ 인간에 대한 예의/ 그 관대한 거짓말 때문에/ 오월 강변의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보석처럼 짤랑거린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유서 / 고재종
된서리에 배추 속 차듯이 살면/ 땅 밑의 알토란 무더기 캐듯 할 거라더니,// 개평술 몇 잔에 이 집 저 집/ 상갓집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간 죽었다.// 평생을 리자만 갑다 말었따!/ 모진 생만큼이나 쓰라린 유서 한 줄 남기고,// 서로 외면하는 그의 집에 삭풍만 들락거리며/ 문에 붙은 조합의 차압 딱지를 추문해댔다.//

개기월식 / 고재종
이웃들과 아랫마을에 문화예술단 공연 보러 갔다가/ 공짜 공연 본 죄로 강권하는 만병통치약을 한 박스 이고 왔다/ 수십만 원 되는 외상값 미처 못 갚아서 독촉장 수없이 받았다/ 붉은 도장 팡팡 찍은 재산 압류 계고장 계속 받고/ 오밤중이건 새벽녘이건 협박 전화질 받다가/ 자식 직장 상사까지 알아내 전화질 한 ‘그놈 목소리’ 때문에/ 자식 앞길 막았다고 순창할매 홀로 제초제를 마셨다// 전직 경찰관이라는 그 해결사의 쇠갈고리에 찍힌 삶을/ 캄캄하게 조문하고 있는 오늘, 개기월식의 지구라니!//

수숫대 높이만큼 / 고재종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 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수평선 / 고재종
저렇게는 저렇게는/ 물낯에 꽂히는 빛의 작살 떼와// 그 작살 뗄 맞고 번쩍번쩍/ 물낯 위로 튀는 숭어 떼와// 그 또 숭어뗄 채고 채는/ 하도나 무정한 갈매기 떼여// 이런 날엔 이런 날엔/ 네게 차마 못 닿고 부서지던/ 서러움, 서러움의 떼까지// 이내 까치놀 이는 먼 곳까지//

즐거운 경배 / 고재종
나는 가난해서 면서기의 권세도 없이/ 냉이, 패랭이, 감국, 바람꽃/ 그 여린 숨탄것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유는 꽃들에게 가서 물으라/ 다만 그 애젖함에 목이 메리라//

천지간의 네 속삭임 / 고재종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무어라, 종일 속삭이는/ 저 봄비 아득한 숨결은 돌아와/ 이제 마악 옴짓거리는 살구나무의/ 어린 꽃망울엔 무슨 구슬이 엉기는지/ 와르르 무너지는 해동의 담 너머/ 앞들 메말라터진 보리밭엔/ 무슨 꿈들이 파릇파릇해지는지/ 고요하여라, 다만 천지가 속삭이며/ 서로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뿐/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 오랜 지글거림도, 그 지글거림의/ 내 영혼 속 쓸쓸한 적막산천도/ 이제는 깨어나 봄비 머금는 시간,/ 동구밖 당산나무 둥치는/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대는지/ 거기 때까치는 젖어드는 날개를 접고/ 왠 생각에 골똘히 잠겼는지/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내가 그저 살아낸 모든 상처들이/ 저 봄비 융융한 숨결로 넘쳐나/ 十方이 촉촉히 젖어든다면/ 세상 모든 죽은 것들의 흙은/ 산 것들의 새싹들을 속속 틔우는지/ 아니 이 고요의 밀림 속, 무엇 하나 속삭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봄비는/ 내 생의 작은 뜰을 꽤는 적셔볼 참인지//

청춘 / 고재종
동백꽃 송이송이가/ 저렇게는/ 빨갛게 탐나는/ 피어나는 시간을/ 사무치는/ 사무치는 시간이라 할까./ 저 동박새 한 마리/ 동백가지에 앉아/ 동백꽃 송이송이를/ 차마 쪼다간/ 한 번 울고는/ 먼바다를 바라보는데/ 목이 메이는/ 목이 메이는/ 무엇이라도 있어서일까./ 동백꽃 송이송이가/ 빨갛게 무참하게/ 지는 날에는/ 저 파랗게 질린 바다도/ 야심하도록/ 야심하도록 문창가에/ 해조음을 밝혀놓고,/ 너와 나는/ 홍역을 앓듯/ 홍역을 앓듯/ 목놓아 울지도 못하던/ 자청의 밤이 있었다.//

침묵에 대하여 / 고재종
용구산 아래 있는 나의 오래된 우거는/ 용과 거북이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사방이/ 단단한 침묵으로 둘러쳐 있다// 침묵은 녹슨 함석대문에 붙어 있고/ 마당가에 비쭉비쭉 솟은 망촛대로 자라고/ 침묵은, 재선충병에 걸린 뜰의 반송으로 붉어지고/ 토방에 벗어 둔 검정고무신으로 암암하다// 어느덧 내 몸조차 침묵으로 하나 됐다가/ 그중 몇 개쯤 파계하여 들고양이로 울다가/ 때론 용과 거북이가 재림하길 염불하게도 하는/ 무자비하고 포악한 침묵이란 짐승은// 송송 구멍이 뚫리는 외로움의 골다공증과/ 사괘가 마구 뒤틀리는 고독의 퇴행성관절염과/ 바람에 욱신거리는 그리움의 신경통을 앓는/ 앞집 폐가에 달라붙어 와지끈,/ 그 근골이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공적(空寂)에 대하여 더는 묻지도 않는다// 침묵의 폐허를 차마 감추지 못하는 달빛은/ 이것이 무장무장 은산철벽을 치는 것이어서/ 용과 거북이의 뿔 자라는 소리 듣다 보면/ 나는 나일 것도 없다고 할 때가 오리라, 생각한다//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 고재종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시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새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 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는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갓씨 고추씨 오이씨 죄다 뿌린다네/ 할매에겐 땅 한 뼘 없어도 걸어댕겨 보면/ 천지에 온통 오목조목 씨뿌릴 땅이어서/ 어느 누가 거두어 가든 상관 않고 뿌린다네/ 누가 됐든 흡족하게 묵으면 월매나 좋겄냐고.//

 



고재종 시인
1959년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나 담양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 밖 집 열 두 식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3년 신동엽창작기금을 받고, 1995년 시집 《날랜 사랑》을 출간했다. 1999년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백련사 동백숲길〉로 2002년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 〈사랑, 그 봄 여름 가을 겨울〉이 2003년 농림부에서 선정한 ‘농(農)사랑 시(詩)사랑’ 작품에 뽑혔다. 시집으로 《바람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쌀밥의 힘》.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고요를 시청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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