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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 피고 꽃 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 2016년 EBS 국어수능교재 수록
마흔아홉을 지나며 / 최광임
나 이제부터 당신에 대한 호칭을 바꾸려네/ 시기 질투 빠진 여자를 성님이라 부르고/ 식물성 남자를 오라버니라 부르고 싶어지는 것이네// 생이란 황량한 벌판을 가로 지르다/ 온 듯 간 듯 스치며 저무는 게 한살이라면, 혹/ 간밤의 서늘한 기온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삶이 어디 그런가, 가다 보면/ 햇살과 바람과 소낙비 같이 천지간 유일해서/ 피붙이 같은 이름 지어 부르고 싶기도 하는 것인데// 참 많은 초록이 지쳐가고 뒷굽 닳듯 몸 헐거워진/ 추수절이 되어서야, 여자를 벗어버린 성님 몇과/ 남자보다 더 귀한 오라버니 몇/ 소출로 삼으면 넉넉하다 싶어지는 것이네// 더는 채워지지 않을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서/ 성님 풀피리 불고 오라버니 상두 돌리며/ 또 한 생애 건너자는 것이네//
애인아 놀자 / 최광임
장맛비 주춤한 사이로 저녁이 온다/ 낮 동안 빗속에 갇혀 있던 개구쟁이 두엇/ 고샅으로 나와 고립된 정적을 흔든다/ 애 인 아 노 올 자/ 호방한 소리로 공중을 흔들고 다니는 뻐꾸기처럼/ 턱을 아래로 당기고 배 힘을 꽈악 준 사내아이 소리/ 애인아는 대답이 없다, 보송보송 흰 빨래 같은/ 거리와 거미줄 위 물방울의 정적을 가르는 애인아/ 그 흔한 까치조차 깍깍거리지 않는/ 저물녘, 쿵 쿵 태초의 소리다/ 그러고 보니 장맛비 잠시 개인 박명(薄明)의 거리에서/ 애인이라 불러도 흠 되지 않을 사람/ 만나고 싶은 시간이다 겹겹이 빗나가는 눈빛과/ 죄 없이 목소리 낮추거나 높여야 하는 시간 말고/ 어스름을 휘어잡고 흔드는 스스럼없는 누구/ 자꾸만 빠진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애 인 아 노 올 자//
늦은 사랑 -창평에서 한철 / 최광임
창평 장날 면에 나간다,/ 두부 한 모 막걸리 한 병 사고/ 약방 지나 미장원 옆 쌀집에 들러/ 아저씨, 쌀 3kg만 주세요/ 봉지쌀을 팔아 거처로 돌아오는 저녁,/ 근래 봉지쌀을 팔어가는 사람들이 많네라/ 쌀집 아저씨 말에 쿵 내려앉는 가슴/ 첩첩산 골짜기 어디쯤 빈집에 살림 차리고 싶은/ 내 맘 콕 찔린 것도 같아/ 짐짓 경기 탓이라는 듯/ 피식 웃어넘기고 돌아 나오는 길/ 이 마을 어딘가에 나보다 먼저 살림 차린/ 늦은 사랑이 있을지도 몰라/ 부러움이 앞서왔던 것인데// 지난 번 장에 나와 붉은 냄비를 사고/ 가난한 사랑 끓여줄 휴대용 가스버너를 사고/ 라면 몇 봉지와 인스턴트 반찬 몇 가지와/ 이 집에 들러 봉지쌀을 팔아갔을지 몰라/ 날이 풀리면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뙈기밭이라도 얻어 경작할 농작물을 궁리하고/ 가끔은 면소재지 국밥집에 들러/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 암뽕순대를 시켜/ 백아산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온 밤이 있었을 거야/ 그들의 사랑은 누룩처럼 발효되고/ 빈가에 고소한 냄새 진동했을 거야/ 마을의 개들 밤새 짖어댔을 거야//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산이 먼저 문 닫아 걸고 길을 내어주지 않는 산골/ 내 사랑도 그 산기슭 어디쯤에 자물쇠를 채우고/ 누룩 띄워 막걸리를 담고/ 붉은 냄비에 밥물이 넘칠 때/ 냄비 닮은 엉덩이의 여자가 되어도 좋을/ 꿈꾸는 한철이 지나가고 있었다//
불멸의 사랑 / 최광임
화분 위에 숯덩이 하나씩 올려놓고/ 숯을 피해 화분에 물을 주곤 하였는데/ 깊은 밤, 톡 톡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마디 하나하나 추슬러 뼈를 세우는 것일까/ 침대 옆 벤저민 화분 위/ 스멀스멀 기어오른 수분만으로도 금세/ 제 몸에 물길을 내고/ 생의 뿌리 움켜쥐고 한때 푸르렀던 나무/ 푸석한 몸뚱이 흔들어 깨워 뼈와 살을 채우며/ 장작 타는 소리 내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뼈마디 곧추세워/ 아득히 되살아나는 불/ 여한 없이 태우고도 한 토막 숯으로 앉아/ 나머지 소신공양을 준비하는 것인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삶의 화분이 되는 날이면/ 긴 밤을 앓는다, 벤저민 잎들 무성하다//
개 같은 사랑 / 최광임
대로를 가로지르던 수캐 덤프트럭 밑에 섰다/ 휘청 앞발 꺽였다 일어서서 맞은편 내 자동차 쪽/ 앞서 건넌 암캐를 향하고 있다, 급정거하며/ 경적 울리다 유리창 밖 개의 눈과 마주쳤다/ 저런 눈빛의 사내라면 나를 통째로 걸어도 좋으리라/ 거리의 차들 줄줄 밀리며 큼큼거리는데/ 죄라고는 사랑한 일밖에 없는 눈빛, 필사적이다/ 폭우의 들녘 묵묵히 견뎌 선 야생화거나/ 급물살 위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 같은, 지금 내게/ 무서운 건 사랑인지 세상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간의 생을 더듬어 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은 눈/ 단 한 번 어렴풋이 닮은 눈빛 하나 있었는데/ 그만 나쁜 여자가 되기로 했다// 그 밤, 젖무덤 출렁출렁한 암캐의 젖을 물리며/ 개 같은 사내의 여자를 오래도록 꿈 꾸었다//
뱀파이어와의 사랑 / 최광임
이 새벽 누가 아가를 울리나/ 정월 그믐 꽁꽁 언 창밖에서/ 누가 저 울음을 만드나// 울음의 근원인 당신도 창밖에 있어/ 날카로운 이빨은 안녕하신지/ 나와 당신이 시간을 분리하는 사이/ 불 꺼진 예배당 바닥에 엉겨붙던 그림자/ 끝내 외면하고 노틀담에 틀어박힌 곱추 같은 당신/ 당신 떠나보낸 내 아가들도 저 울음처럼 울었을 것인데/ 이 시대, 누가 또 저 울음을 만드나/ 수없이 스러졌다 한순간 어둠에 되살아나는 울음들/ 화톳불처럼 쟁쟁거리게 하나/ 나는 왜 헛배 틀고 젖은 또 도는지// 어둠에 잘못 끌려 허기에 잘못 이끌려/ 서로를 물어뜯던 것만이 우리의 양식이었던 시절/ 그때도 주님은 온화했으나/ 사랑은 원죄를 가진 자만이 하는 것이라서/ 태생도 모르던 당신과 국경을 넘어 시대를 넘어/ 한 생을 의심 없이 저당 잡혀/ 이승에서 사랑을 하고, 죄를 짓고,/ 아직도 저 울음에 화들짝 따라 우는,// 지금은 사라진 뱀파이어와의 사랑/ 이 한밤 울음으로 되살아나나/ 헛맹세의 유령들 되살아나나//
자서(自序) / 최광임
내 삶의 배경은 늘 바다였다/ 술 취한 아버지의 바다/ 바탈밭에 엎드린 어머니의 푸석한 바다/ 내 꿈은 지지리도 척박한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다/ 도무지 만선의 배 한 척 들어올 것 같지 않던/ 허기의 바다/ 바람에게나 파도에게나 말을 걸던 유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야 안다/ 나는 세습무였음을/ 그 바다가 시가 되고 내가 되었다/ 이제 내가 바다다/ 내 몸이 지금 분주하다/ 수많은 해초들과 물고기들/ 미끈덩 솟아오르는 아침과 알몸으로 빠져드는 새벽달/ 이 쉼없는 몸짓들/ 내가 퍼내어야 할 바다다//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 최광임
부끄러워 몰래갔다/ 이슥한 어둠 탓도 있었지만 바다는 묵묵했다/ 활어보다 싱싱했던 한때 지나, 까막까막/ 몇 채 안 되는 외등 켜고/ 폐경기 맞은 여인처럼 주름져 있었다// 속살 여리디여린 곳 갈라 뭍을 들이고/ 굴삭기, 덤프트럭에 만신창이 된 제 상처 핥으며/ 자꾸자꾸 어둠을 끌어다 덮는 바다다/ 부려놓은 인연, 몸 깊숙이 근 박아둔 채/ 풋것 주렁주렁 달고/ 목놓아 먹일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 되어/ 백주 대낮이 부끄러운 나다// 가끔 진저리치듯 진눈깨비 몰아가고/ 바다와 나,/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짠물에 종기 우려내면 그제서야 낮이 아프지 않을라나/ 아버지 닮은 누군가 지금도 술을 어둠처럼 마시며/ 이 거리 저 거리 상한 비늘로 날릴 것인데/ 바닷가 윗뜸, 이제 술기운 가신 채 누워 계실 아버지/ 맑은 무덤에도 진눈깨비는 내릴 것이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무덤가 아버지 축축이 젖은 손 뻗어/ 내 시린 눈 어루어주고 있었다/ 멀리서 희끄무레하게 흰 파도 밀리다 말다,/ 바다와 나/ 불게/ 몸 들이고 있었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 최광임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나의 늙은 애인아 / 최광임
나의 늙은 애인이 가릉 가릉 낮은목소리로 시를 읽어 주는 밤이었다 라고 쓸/ 그런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늙기 시작했고 나의 늙은 애인은 어느 페이지 행간에 틀어박혔는지/ 그런 밤엔 잠도 오지 않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어감도 좋은 나의 늙은 애인아/ 볕 좋은 지붕 위 고양이처럼 순하게 늙어가자/ 나의 늙은 애인아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늙은 애인아/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늙어가자/ 생의 구비란 고갯길을 벌써 넘어왔을 나의 늙은 애인아/ 여덟시 삽십오분발 정선행 기차를 타고 오늘을 떠나자/ 첩첩산중이면 어떠랴 당신은 나의 능선 이되고 나는 그대의 능선이되아/ 설운 삶의 고갯길을 넘어가도 좋겠다/ 나의 늙은 애인아 어감도 좋은 나의 늙은 애인아/ 아우라지 장터국밥 한그릇처럼 뜨끈하게 늙어가자/ 나의 늙은 애인아 아직오지 않은 나의 늙은 애인아/ 덕산기 숲속책방 부부처럼 삶을 시로 쓰며 살자/ 나의 늙은 애인아 어감도 좋은 나의 늙은 애인아/ 볕 좋은 마루 위 고양이처럼 순하게 늙어가자/ 나의 늙은 애인아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늙은 애인아/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늙어가자 애인아//
눈물의 배후 / 최광임
한 계절에 닿고자하는 새는 몸피를 줄인다/ 허공의 심장을 관통하여 가기 위함이다/ 그때 베란다의 늦은 칸나꽃송이/ 쇠북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는데/ 그대여 울음의 눈동자를 토끼눈으로 여기지는 마시라/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고목일수록/ 어린잎들 틔워내는 혼신의 힘은 매운 것이니/ 지루한 가뭄 끝 입술의 심혈관이 터진 꽃무릇 같은 것이니/ 턱을 치켜세운 식욕 왕성한 새끼들에게/ 공갈빵이나 뜯어 먹게 하는 무색한 시절을 두고/ 부엌으로 달려가 양푼에 밥을 비빈다/ 어떻게든 허방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하여/ 뙤약볕 같은 고추장 비빔밥을 쑤셔 넣어 보신 적 있는가/ 막무가내로 뒤집어지는 매운 밥의 본능이/ 한 세월로 건너가는 새가 되는 것일 뿐,/ 천둥벌거숭이 나는 이 새벽 가슴 골짜기에서 솟구치는/ 눈물의 거룩한 밥을 짓고 국을 끓일 것이니/ 그대여 울음의 배후에 대하여 숙고하지 마시라/ 삶이 풍장 아닌 다음에야 칸나꽃 피고지고 또 필 것이므로/ 먼동 트기 전 세상 한 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내 발굽에 편자나 박아주시라//
고양이 / 최광임
벤치 위의 남자에게서 사향내가 난다/ 사랑이 묵으면 짐승이 되는 걸까// 이집트의 벽화로부터 걸어 나온/ 가시돌기의 혓바닥과/ 몰약에 굳어진 몸속에서도/ 솟구치던 발정기// 애당초 자라 묵은 사랑이야,/ 사향이랄 수밖에// 관목숲에서도 은신하지 못한 그대가/ 짧은 네 발로 딛는 어둠 속/ 아파트 담장 아래 무성히/ 꽃보다 진한 사향/ 그 남자 외로움의 냄새가 진동한다//
문어숙회 먹는 밤 / 최광임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카멜레온형 인재가 되지 못한 여자와 남자가/ 문어숙회를 사이에 두고 도란거린다/ 또 한 번의 봄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중이고/ 여자가 맥주에 소주를 만다/ 넘치지 않게 술 따르는 법은 용케도 익힌듯하나/ 생이란 게 변변치 못해 팔팔한 적 없어,/ 서로에게 숙회감도 되지 못하였으나/ 귀는 순하여 참도 잘 들어 준다/ 한참만에야 문어 한 점 입에 넣다가/ 사람이나 문어나 사는 게 애옥살이라는 듯/ 혼자서는 무엇을 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고/ 중얼거리는 남자의 행간에 노후가 펄럭인다/ 여자와 남자가 합쳐야 고작 팔완목이겠으나/ 여덟 개의 다리로도 육지로 끌려나온 돌문어/ 가난을 합쳐본들 늙음뿐이 더 늘겠는가마는,/ 함께 일할 생각 없냐고 묻는 남자 앞에서/ 같이 살자는 말로 해석해 버릴까/ 늙은 여자 더딘 계산을 하는 밤이다//
달팽이 간다 / 최광임
달팽이 개수대를 기어 오른다/ 제 살 곳에 살지 못하는 것이 저 달팽이 뿐이랴만/ 언제 이 사막을 건널 것인가/ 연유를 묻지 않아도 여기, 지금 이곳/ 응, 나야 하고 말 걸어 볼 사람 하나 없는 건기의 도시/ 때때로 절박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직도/ 그곳엔 바람을 되새김질하는 감자꽃과/ 해질녘 주인이 전지한 넝쿨에 참외꽃 피겠지만/ 겹겹의 바람을 쟁이는 치마상추 잎 그늘에/ 깃들고 싶었을 달팽이를 안다/ 오늘도 도시는 번화하고 바람이 불었다/ 모두들 촛불 켜들고 광장으로 나갈 때에도/ 달팽이 건기의 도시를 횡단하며/ 자정 가깝도록 서걱서걱 초인종을 눌렀다, 그때마다/ 내 몸에서는 한 움큼씩 초록물이 빠져나가지만/ 사막에서도 한 평생 살아내는 몇 종의 동물과 식물처럼/ 목메어 기다 가다 거기, 어디쯤/ 스쳐갔을 상추 잎에 스민 바람과 그늘 찾아//
인어 / 최광임
모계의 일가가 댐인 곳이 있다/ 여자 남자 구분 없이 그곳에서는 모두 물이고 그녀이다/ 나는 능선까지 올라선 그녀 종아리에 매달린 물비늘이다/ 속내 깊숙한 그녀 뿌리의 하나다/ 한 번 떠나온 이는 그곳을 향해 고개도 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는 것을 알지만 그녀 생의 근간은 대처로 나온 나임을 안다/ 차를 몰아 대청댐 한 바퀴 휘휘 돌아오는 날이 잦다/ 흐린 날일수록 도로까지 기어올라 기다리는 그녀에게 가기 위함이다/ 어둠에 수몰된 모계의 내력이 무던해질 즈음/ 나는 내 생의 근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인어였을지 모를 슬픔의 어머니를 품고 오는 날/ 전설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었다//
술병 속의 새 / 최광임
1// 술병에 쓰인 약주, 락주라 생각하며 잔을 기울인다 “차게 해서 드시면 더욱 좋습니다” 아, 마음 이 차가워서 너를 찾았는데 너마저도 차갑다. “좋구나” 너와 내가 속살까지 비치는 햇살을 적시며 마시는 낮술 자, 나뭇가지에 앉아 자올대는 새를 위해서 한 잔. 가만. 가만. 잔 속에 내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 아버지… “네 아버진 고급 룸펜이었어. 평생 네 어머니 골수를 뽑아 술로 마셨던 한량”, 평생 알려지지 않은 자아를 끌쩍이다 부스러진 육신을 술로 적시던 시대적응의 부진아! 그리고 유전?// 2// 그윽한 풍경화, 속없이 앉아 있는 새를 좀 봐. 갑갑함에 취하고 바깥세상의 동경에 취한 가슴이 퉁퉁 부은 새. 대책 없이 불어나는 체중으로나 삶의 부피를 감지하는 여자. 턱밑까지 자란 아이의 키를 보면서 나이를 파악하는 여자. 복숭아 빛으로 웃던 처녀를 기억 속에 가두고 우렁각시가 되어가는 그림 속의 새. 갇혀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세상. 취해서 움츠린 새. 잔 하나에 담긴 세상 이젠 비워주세요. 남모르는 아버지의 행간을 더듬으며 건져내는 넋. 파란 날개가 돋고 술병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 들린다. 새가 나는 소. 리.//
도요새 요리 / 최광임
세상은 온통 흐르는 것들이다/ 교묘와 수법을 진실처럼 가장하고/ 강물은 흐른다는 것만을 강변하는 당신/ 나는 강물도 바위틈에 둥지 튼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당신은 강물처럼 흐르고, 나의 조상도/ 흐르고 흐르던 유목민이었다 전생의,/ 나는 멕시코만 근처 요리를 잘하는 여자였을 것이다/ 여우비가 내리면 푸른 초원을 찾아 떠나는 아버지 따라/ 나는 오래도록 달밤을 걸었으며/ 별 총총한 물가에 잠시 항아리를 내려놓고 머물던 일들이며/ 정갈하게 씻은 부드러운 내 목을 기억한다/ 나는 앉은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맹렬하나 밀림을 내달리던 치타나 기린의 슬픔을 아는 탓이다// 오랜 유목 생활은 세상을 향한 더듬이만 발달하여/ 교묘와 수법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알게 하였다/ 당신과 또 하나의 당신이 강물과 진실 사이의 내밀함을 계산하는 일이나/ 두 마음 사이 교묘하게 거리를 정하는/ 당신의 전생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저명한 산술가였을 것이다/ 내가 강 하구에서 잡아온 도요새를 요리하고 있을 때에도/ 저 여자 몇 분 후면 새의 깃털을 벗길 것이며/ 내장을 꺼내 이글이글 불 위에 얹을 것인지/ 당신이 흘리는 군침의 분량은 몇의 숫자에/ 해당하는지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수법보다 먼저 감각의 답을 빼들고/ 요리를 한다, 식단에 적혀 있는 메뉴에는/ 도요새 요리에 필요한 양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후추랄지 산초랄지 산 짐승의 시큼함을 없애기 위해/ 초원의 아버지로부터 배워온 양념을 골고루 넣는 대신/ 전설에도 드문 진실이란 양념을 즐겨 사용한다/ 거북해진 당신은 짐짓 시치미 떼며 강물로 돌아가면 그뿐// 오랜 유목에 지친 도요새 무리는/ 진실의 처마에 깃들기 위해 오늘도 한 대륙을 횡단하다/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산닭 / 최광임
조류든 포유류든 계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영예와 상징의 시대를 지나 뻐꾸기에게 몰수당한 울음/ 더 이상 시간이 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사실은 너무 높이 날기를 꿈꾸던 조상들/ 그만 옥황상제님 발바닥 아래 허공까지 닥 닥 긁어댄 대역죄의 내력으로/ 수형생활 중에 있는 것인지도 몰라/ 피아골에서 날으는 산닭 숯불구이를 먹던 날에도/ 나는 것과 날지 못하는 것들 사이/ 뚱뚱한 씨암탉과 백 미터는 거뜬히 난다는 산닭 사이/ 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인데/ 최시인 좋아진 걸 보니 시인이기를 포기한 게로구만/ 안분자족 씨암탉이 되었던 것인데/ 딱 꿩만 하다는 산닭, 밤에나 잡아야 한다는 그 닭들/ 갈매기보다 더 멀리 날았다는 족보도 없는 조상의 꿈/ 전생의 힘으로 푸드득 푸드득 겨울 산을 뒤틀며/ 산꿩처럼 날아가 여영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는 산닭들/ 그날로부터 그들에게는 다시금 써야할 역사가 생겼기 때문일 것인데// 문득 산산조각 발목 베이고 꿩처럼 울었던가 어쨌던가//
산수유꽃 / 최광임
넓은 냄비에 카레를 끓인다/ 불꽃의 정점에서 꽃이 핀다/ 굴참나무 아래 쪽빛 드는 구릉 사이/ 타닥타닥 산수유꽃 피어나듯/ 약한 불꽃 가장자리에서부터 오르는 기포/ 철판도 더 뜨거운 한 쪽이 있다니,/ 나도 그대 앞에선 뜨거운 꽃이지 않던가/ 세상은 자꾸 배면을 더 할애하지만/ 억척스레 빛을 끌어다 덮고 열리는 몸/ 불판 중앙으로 냄비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한동안 노란 속살까지 차오르는 뜨거움/ 누구의 한때도 뜨겁지 않는 삶은 없다/ 봄날의 빛이 또 산란한다/ 유독 내 가슴이 먼저 가 닿는 곳/ 까르르르르/ 산수유꽃같이 끓어오르는/ 나를 저어다오//
목련꽃 진다 / 최광임
아름다운 것이 서러운 것인 줄 봄밤에 안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 흔들어 대던 낮바람을 기억한다/ 위로 솟거나 아래로 고꾸라지지만 않을 뿐/ 바이킹처럼 완급하게 흔들리던 둥지/ 그것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라고/ 의지 밖에서 흔들어대는 너/ 내 몸에 피어나던 목련꽃잎 뚝뚝 뜯어내며/ 기어이 바람으로 남을 채비를 한다/ 너는 언제나 취중에 있고/ 너는 언제나 상처에 열을 지피는 내 종기다/ 한때 이 밤, 꽃이 벙그는 소리에도 사랑을 하고/ 꽃이 지는 소리에도 사랑을 했었다/ 서러울 것도 없는 젊음의 맨몸이 서러웠고/ 간간이 구멍 난 콘돔처럼 불안해서 더욱 사랑했다/ 목련나무는 잎을 밀어 올리며 꽃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이 밤도 둥지는 여전히 위태롭고/ 더욱 슬퍼서 찬란한 밤 또 어디서/ 꽃잎 벙그는 소리 스르르,/ 붉은 낙관처럼/ 너는 또 종기에 근을 박고 바람으로 불어간다/ 꽃 진다, 내가 한고비/ 진다//
장미의 전쟁 / 최광임
장미가 붉다고 해도 뜨거운 건 아닌가봐요/ 바람은 자꾸만 태양 쪽으로 불어가네요/ 쟝미는 바람이 불어간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태양의 내부는 너무 뜨거워 겁이 나요/ 울타리 밖으로 바람의 생각을 던져버리기도 하고/ 이내 까맣게 지워버리기도 해요// 씨방을 만들고 매서운 눈보라 건너 와/ 몇 잎의 싹을 틔우기까지/ 그때도 태양의 손짓은 강렬했던가 봐요/ 철망의 울타리도 속수무책 이었어요/ 온 몸 푸른 독이 깊어지니/ 스스로 가시가 돋네요// 형식을 벗어버리니 사랑도 사랑이 아니어요/ 태양은 늘어진 시계추 같이 바람의 분별력을 흐리게 해요/ 한 밤중 현관 앞 그의 입에선 술 냄새가 진동해요/ 태양은 붉은 포도주로 이루어졌나 봐요/ 이제 그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태양의 냄새가 나는 듯해요// 아 참,/ 장미차를 드시겠어요/ 포도주를 마시겠어요//
그리움은 소금꽃이다 / 최광임
프라이펜에 그물을 친다/ 식용유를 두르는 것만으로는 멸치 떼를 잡을 수 없다/ 물엿을 더 부으면/ 그때서야 바다를 향한 몸짓에 체념이 걸릴까/ 코끝에서 볶이는 실같은 기억의 갯내음/ 자근거리는 뼈마디에 소금꽃 돋는다/ 물고기라 할 수 없는 작은 몸의/ 뼈마디 마디에서 바다가 쏟아진다/ 출렁이는 파도 위 마지막 떼 울음 치다/ 바늘귀 같은 눈에 피어나는 하얀 꽃/ 그렇지, 그리움이란 꽃이 되기도 하지/ 생의 문 하나를 닫으며 말아 올리던 머리/ 열기구 안에서 뒤틀리던 머리카락 모양처럼/ 나의 울타리에선 짜디짠 서러움 여물고 있었던가// 프라이팬에서 잊혀지는 바다가 꽃이 되고 있다//
무꽃이 아프다 / 최광임
식탁 위 무꽃 피었다// 겨우내 비닐봉지에 묶어두었던 무/ 꺼내놓고 칼집을 낸다 기억이 시신경에/ 뚫린 길들 바람의 집이다 온몸 신열로/ 눈뜨는 밤 어둠을 휘젓고 다니는/ 그때 많은 것들 몸을 관통해 지나가곤 한다/ 크고 작은 상처만큼 구멍 뚫린 몸둥이/ 피고 지고 피는 봄날의 꽃밭에서 무 속 같은 즈음에/ 또 얼마나 많은 흙밭의 지난날들 끌어안고 차가운 세상에서/ 싸늘했을지, 유즙같이 눈 뜨며 잎을 밀어올리고/ 햇살이 세우는 쪽으로 대궁 기울이다 벙글던 꽃잎들/ 온 들녘 목 놓아 부르던 바람의 노래 꿈꾸는지 기억이란/ 흔적뿐이어서 온통 바람이 지나간 길뿐이어서/ 무릎을 감싸안은 듯 한쪽으로 기울인 대궁들/ 바람의 몸에 기둥 세운 꽃// 우기를 느끼며 어깨 주무르는 날이면/ 내 몸에서도 바람 소리 난다 생애 언제 또 꽃의/ 날들이라고 해야 하는지 막연한 즈음, 샛강이 멀어보인다/ 자꾸 저 꽃이 아프다//
담쟁이 / 최광임
이제 나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내 살 속 뿌리를 내리고 키돋움하며 오르는 일/ 처음엔 나의 알맞은 집은 아니었다 어느 날/ 달그락거리는 뼈만 모여 살던 삶/ 떡잎의 네 사다리가 되어도 좋을 듯했다 옆에는/ 흐드러진 능소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다족류의 곤충처럼 셀 수 없는 네 손길은/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살을 붙이기도 하고/ 뼈와 뼈를 맞추기도 하고 살과 뼈 사이/ 아귀틀림을 다듬기도 하며 나를 지워갔다/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삶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 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감나무가 있는 집 / 최광임
거르막, 감나무 아래 누렁이가 집을 지킵니다/ 댓병술이 소주컵 뒤집어쓰고 주인의 머리맡을 지킵니다/ 아랫집께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에 쫑긋 귀 세웁니다/ 간혹 읍내로 유학 보낸 아들에게서 편지가 오곤 합니다/ 주인의 낮잠 시간 타인의 방문은 긴장을 줍니다/ 감나무 등걸 베고 누워있다 벌떡 등허리 털을 곧추 세웁니다/ 오토바이가 감나무 아래를 지나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고즈넉한 외딴집에 감꽃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토방 아래로 바짝 마른 쥐가 줄행랑 놓습니다/ 컹컹 짖으며 잽싸게 쥐구멍을 향해 뛰다 오토바이 주위를 한 바퀴 돕니다/ 주인이 일어나 편지를 받고 배달부 아저씨 부르릉 마당을 나갑니다/ 감꽃이 우르르 바퀴 뒤를 따르다 이내 놓친 쥐처럼 포기하고 맙니다/ 주인이 소주를 마십니다, 아들의 공납금 고지서가 함께 왔나 봅니다/ 오늘도 안주인은 달이 떠서야 오려나 봅니다/ 어쩌면 내일부터 더 많은 노동을 털게 될지도 모릅니다/ 감나무 아래에서 툴툴 수건 터는 안주인을 좋아합니다/ 그제서야 백열등 켜지는 외딴집, 감꽃도 올망졸망 둘러앉습니다// 지금은 꽃 피우지 못하는 늙은 감나무 빈집을 내려다 봅니다/ 낮 한때, 객지로 떠난 주인의 소식 물어 온 까치 한 마리 반갑기만 합니다//
버드나무 / 최광임
안부를 물으러 그대에게 갔네 그대의 강은 잘 있는지 물 속 버드나무는 청둥오리는 발 묶인 나룻배는 잘 있는지 옥천 금산 지나 그대와 함께했던 태고사 지나 언젠가 갔던 연산까지 오래 된 시골길과 처음이지만 낯익은 마을 지나 논산 벌판을 달리고 몇 개의 포구를 거처 그대의 강으로 갔네// 나 다 내어주고서 그대 안의 찰방찰방 물이고 싶었네 무겁게 지고 갔던 가슴의 겨울산과 건드리면 문드러질 것 같은 속내 내려놓고 얼마나 안녕한지 어떻게 안녕했는지 보고 싶었던 그대, 그대에게로 그대에게로 깊숙이 자맥질 하였네 강심을 걷질러 오르면 거기 물 속 버드나무 군락 숨소리 분주했네 의지할 데 없는 것들 죄다 쓸려와 뿌리 내리고 사는 곳 수초 사이 살아있는 것들의 한바탕의 정사//
대숲에서 / 최광임
눈 오는데 나의 애인은 눈이 온다고만 하고/ 나도 눈이 온다고만 하고// 눈 오는데 그대는 올곧은 대나무 같기만 하고/ 나는 대숲 밖으로 부는 바람 같기만 하고// 눈 오는데 당신은 말도 못하고 제 몸만 비비고/ 나는 그대의 소리가 되고 싶어 언저리 맴돌기만 하고// 숲에 목맨 여인의 신음소리였다가 풍장한 아기 울음소리였다가 풀섶을 기는 뱀의 소리였다가 때로는 뽕잎 갉아먹는 누에의 입질 소리였다가 풀 먹인 속치마 스치는 소리였다가 이불 속 뜨거운 살들의 소리였다가 쩡쩡 언 땅 속 구근으로부터 뿜어 올리는 대숲에 든 것들의 숨통 틔우는 소리 우우 눈발이 안으로 안으로 기어들고 숲이 까르르 옷깃을 풀어 헤치고//
숲에서 듣다 / 최광임
창문을 열면 베란다 밤 아카시 숲입니다/ 껑충 솟아있는 미루나무도 수런거리는 숲입니다/ 나를 읽어주는 저곳에 세 들어 산 지 오래되었는데요/ 만약, 내가 궁금해진 당신이 저 숲으로 간다면/ 백 년 전의 나와 백 년 후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한번쯤 당신이 저 숲을 다녀왔으면 했습니다/ 아홉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좁고 긴 오솔길이 숲으로 안내합니다/ 왼쪽으로 무명씨의 무덤을 지나/ 곧장 오르면 관목 우거진 숲의 정수리입니다/ 찔레덩굴 대문을 노크하실 때에는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백 년 전 선인장이 사랑한 태양이라고 하십시오/ 없는 길 헤쳐가다 보면 미루나무 창가/ 백 년 후의 창백한 내가 있을 겁니다/ 나를 듣는데 긴 시간은 필요치 않습니다/ 어쩌면 많이 슬퍼질지도 모릅니다만 연민은 금물입니다/ 고열과 추위에 스스로 가시가 돋던 선인장의 절대고독과/ 평생 생명의 체온을 느껴보지 못한 가엾은 태양에 관하여/ 당신의 전생을 더듬을 필요는 없습니다/ 얼크러진 실타래에 발목 잘린 어린 야생고양이와/ 지난 봄 뻐꾸기 새끼가 둥지 밖으로 내던진/ 새끼 뱁새의 죽음에 대하여 귀 기울이고/ 숱한 날 나뭇잎을 스쳐간 천둥과 번개/ 수수방관하던 바람과 구름까지/ 비온 뒤 반짝 빛나는 거미줄 같은 희망과/ 나뭇잎의 왕성한 식욕과/ 누대에 걸쳐 반복될 이 격렬한 생애에 대하여/ 지금 여기 이곳 이 순간을 갈무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아카시 숲은 수런거립니다만//
우거지다 / 최광임
가난한 그와 살고 싶은 내가/ 봄날 물 빠진 버드나무 군락에 방 한 칸 차렸습니다/ 겨우내 마른 가지 분질러 딱 한 사람만 누워도 좋을 구들을 들이고/ 벽지 바르지 못한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들 듯도 했는데요/ 이 시대는 웰빙이잖아요 조각보 같은 여러 겹의 하늘과 벽/ 오랜 세월 달을 지키는 개밥별같이 저만치 혹은 이만치 그와 나/ 곧 온 몸 물 먹은 버드나무 봄눈이 싹틀 것입니다/ 나는 조금 전 강물 위 나직이 날으던 재두루미를 생각합니다/ 강물 속으로 저와 닮은 두루미 한 마리 거느리고 있었는데요/ 잘 닦인 수면과 그것을 경계로 나는 두루미/ 함께 산다는 게 별거겠어요 그와 내가 벽 없는 방에 누워/ 버드나무 뿌리로 뿌리로 물 길어 숲 짙은 그늘을 이루듯/ 재두루미 제 그림자 거느리고 가는 구름과 바람과 하늘/ 한데 어우러져 봄 여름 갈 겨울 계절이 되는 것입니다/ 강가 높은 산이 자꾸 깊어지는 것도/ 겨우내 견뎌온 제 마른 몸 추스르며 물질하는 것일 텐데요/ 우리의 구들에서도 쩌렁쩌렁 신록 우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된장국, 2004년 여름을 넣다 / 최광임
집 안에 들어앉아 또 집 짓고 있는 아이들/ 어둠의 집에서 며칠째 공작을 한다/ 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땡볕 속에서도 집은 어둡다/ 여윈 손들이 하나씩 하나씩 뜯어내는 어둠/ 견디는 일이 삶이라는 것 이미 알아버렸는지 모른다/ 여름내 밖으로 외출하지 못한 채 집짓기 놀이를 한다/ 나무젓가락으로 통나무집을 만들고/ 라면 박스 속에서 침대를 들이고 소파를 들이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많은 집을 가져본다는 것/ 저들 유전한 탓인가,/ 어둠에 퉁퉁 분 아이들의 집에 들여놓은 세간 안에서/ 엄마는 여름 내 된장국만 끓이고 아직 여름이 가려면 멀었는데/ 된장국은 이제 신물나요, 오늘 된장국엔 호박잎을 넣었단다/ 우거지국 맛이 나지, 오늘은 어둠을ㄹ 넣었단다/ 글쎄 어둠은 끓여도 끓여도 묽어지지 않는구나/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넣어 우렸단다/ 미움을 배우는 것도 후일의 사랑엔 강한 맛이 나지, 아이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또 집 짓는다 여름은 가고 있고/ 가끔씩 매미가 방충망에 달라붙는 그런 날/ 날개에 묻어 온 햇살, 아이들 눈부신지/ 푸른 이끼가 돋곤 하지만 아직 인광이 남아 있어 군데군데/ 빛나는 몸, 빼곡이 들어앉은 햇살의 힘이 세다/ 항생제 없이 된장국만으로도 무탈한 아이들/ 그 여름, 발효되고 있었다//
옹이에 대하여 / 최광임
물에 쉬이 섞이지 않는 밀가루/ 하염없이 젓네 물은 물대로 밀은 밀대로/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나 보네/ 거푸집 같은 덩이를 으깨며/ 며칠 전 다녀간 노모의 손거죽에 박힌/ 옹이를 생각하네 물에 떠밀리는 밀가루 같이/ 늘어진 살가죽에 싸이고 뭉친 세월/ 꽈리를 터뜨릴 때마다 새어나오는 바람 같은/ 덩이가 밀리다 풀리다 터져 나오는 소리 같은/ 한 밤 젊은 어미의 절정에 다다르던 괴성/ 옹이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네/ 뜨거운 봄날 햇볕과 통정하던 밀밭의/ 밀잎 부비는 소리 이끌고/ 물은 어디서부터 흘러온 옹이인지/ 부드럽고 부드럽게 찰방진 소리 톡 톡 터지네/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반죽을 저으며/ 옹이는 상처가 만든 것이라는 생각 바꾸기로 하네/ 흘러가서는 다시 오지 않을 한 때/ 옹이는 담아두었던 것이네//
한가위 / 최광임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치마폭에서 달이 뜨는 날입니다/ 아스라한 황톳길을 돌아/ 대 바람에 실려온 길 잃은 별들도/ 툇마루에 부서지는 그런 날입니다/ 밀랍처럼 곱기만 한 햇살과/ 저렇듯 해산달이 부푼 것도/ 당신이 살점 떼어 내건 등불인 까닭입니다// 새벽이슬 따 담은/ 정안수 한 사발로도/ 차례 상은 그저 경건한 풍요로움입니다/ 돌탑을 쌓듯/ 깊게 패인 이랑마다/ 일흔 해 서리꽃 피워내신 신앙 같은 어머니,// 다만 살아온 날 만큼/ 당신의 고운 치마폭에/ 두 무릎 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비친 웃음 한 소절/ 입김으로 펄펄 날리며/ 모두가 오래도록 그랬음 정말 좋겠습니다//
두꺼운 옷 입고 있었다 / 최광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밥 때를 비켜 혼자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식은 밥에 고추장 얹고 통깨 몇 알 뿌려 비빌 때의 느낌과/ 타월로 제 몸을 밀 때의 퍽퍽함이나 같은 일이다/ 싱크대 위, 흐린 햇살을 쳐놓고 선 채로 쓸쓸함을 뜬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간밤의 취기/ 나말고 또 누구를 만났었던가/ 붉은 밥수저 안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따끔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겹겹의 웃음이 번지고 있지만, 장기 공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말이 건배를 하고 술잔이 건배할 때도/ 형광등보다 도수 높은 쓸쓸한 눈빛들, 외투 속/ 어깨를 심하게 들먹이며 골목 어디로 흩어지던 사람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더 쓸쓸한 일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과/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른 일,/ 유치환의 행복이, 한도 초과 카드 명세표처럼 거치적거린 날/ 살얼음 얼던 간밤의 거리는 무표정하다/ 누군가 혼자서 밥을 뜨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는 하루//
하얗게 된다는 것 / 최광임
그 여자 한때 다부졌었다/ 일 나가는 새 서방님 밭둑 논둑/ 둑길로 쫓아가 한 살림 차렸다/ 도랑물 떠 새참 지어먹고/ 땀냄새 나는 것 어푸어푸 등목시켜 주며/ 터 좋아 낳은 새끼,/ 제 몸들로 밭을 이루었다/ 가뭄 깊던 끝여름/ 새들은 예감으로 떠나고, 폭우/ 쟁기질하듯 억새밭 갈았다/ 누렇게 야윈 몸뚱이 가누며/ 찾아보는 새끼들 더러는 서방님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자그마한 바람에도 이제 눕고 마는/ 그 여자/ 하얗게 상사화로 피어나고 있다// 통발배 폭우 속으로 떠난 서방님/ 갈매기는 먼바다 소문 물어오기도 하는데/ 전해지는 소식도 없이 지는 세월/ 개울가 외딴집 그 노인/ 하얗게 머리 패가고 있다//
안개 / 최광임
아무래도 잘못 든 길이다 정신을 가다듬겠다고 안경을 닦아서도 안 된다 짐작이지만 외길 성급히 돌아가는 낭떠러지쯤이지 싶다 나는 아직 작별의 말들을 남기지 않았다 일정 속도로 진행하는 기차 사실은 도깨비도로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무도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들도 없다 군데군데 마을의 나지막한 지붕들은 또 아침 하늘을 나는 새들은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은 어둠만이 갖는 줄 알았다 빛으로 호명되지 못하는 것 가장 불행한 말이 어둠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서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검정이 품고 있는 환한 빛 고양이 숨소리를 내는 옆 좌석 할머니의 눈가에 묻어나는 세상 수없이 거쳐왔을 어둠들이 환하다 저렇듯 검은 얼굴로도 평온한 할머니의 잠이라니 이곳에서는 모두 안개가 아니면 검은 물체들뿐이다 대가리부터 급류를 타는 뱀과 같이 기차는 제 몸조차 보이다 말다 한다 변함없을 저편의 강 들 산을 기억한다 나는 안에서 밖으로만 향한 사시의 눈을 가졌던가 엇나간 시선을 좇다 빠진 안개의 나라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광활한 공중의 나라 기차는 철로도 없이 급경사 낭떠러지를 타고 돌며 날고 있다 조심스럽게 닦는 차창 안으로 하나 둘 깊숙이 들어오는 저 환한 세상//
못질 / 최광임
떨어진 옷걸이, 그 자리에 못질을 한다/ 머리에 철퇴를 당하면서도 제 길/ 쉽사리 파지 않는 못이나, 제 몸의 틈/ 내주지 않는 벽 사이/ 펜찌에 못을 물리고 있는 힘 다해 망치질한다/ 소리의 크기만큼 서로를 밀어내는 힘/ 못의 머리에 불꽃이 인다, 한때/ 나와 그 사람 서로 못이고 벽이었던 적 있다/ 비로소 든든해지던 삶/ 자고 나면 한 뼘씩 메워지던 허공/ 우리의 세간은 봄날 복사꽃 같았다/ 봄은 여우와 같아서 자주 변덕을 부렸지만/ 헐거워지는 틈에서도 아슬아슬/ 꽃 피고 지는 사이 몇 번의 바람과/ 몇 번의 비가 다녀갔고 삶은 무르익기도 전에/ 낙과를 하고는 했다, 그럴수록/ 과수원 나무들 창이 되어/ 날아들고, 잡은 손 누가 먼저 놓았는지/ 벽의 못 방바닥에 뒹굴기도 했다/ 낙과를 주어들고 못질한다/ 상처도 사는 힘, 이어서/ 봉인된 구멍에서 트는 싹/ 봄이다//
수(繡) 2 / 최광임
한 떼의 물고기가 우르르 달려왔다/ 집에 가고 싶어요, 데려가 줘요/ 당신과 내가 C병동에 들어가던 밤이었다// 봄은 오지도 가지도 않은 채 4월이었다/ 소쩍새는 청아한 목소리로 울어댔지만/ 내 몸 밖은 겨울이었다, 꽁꽁 언 저수지/ 산 세월보다 두터운 얼음 층이었다/ 물 속 생물들 버즘처럼 비늘 벗겨진 몸으로 부들거렸고/ 연푸른 비늘 옷을 입고 잠만 자던 당신/ 내 안에서 자꾸 실족하고 있었다/ 같이 가자, 매달리던 당신 위해/ 겨우내 빙판위로 미끄러지던 햇살들/ 기를 쓰며 주사기를 당신 팔에 꽂고 있었다/ 저수지는 깊고 넓었다, 우리는/ 자주 길을 잃었고, 자꾸만 휘어져서 위태로운 주사바늘/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걷던 저수지 길을 떠올렸다/ 술 취한 아버지의 둑방길은 자주 구부러지며 휘청거렸지만/ 송송 떠 있는 별 몇 개 따다 내 손에 쥐어주던 아버지, 그때도// 저수지 밖 봄은 지들끼리 피고지고 있었다/ 당신은 자꾸 같이 가자, 응? 응?/ 아버지, 그만 가야겠어요/ 연신 비만 내리던 4월이었다,// 물안개 속에서/ 비단잉어 몇 마리 솟구쳐 올랐다//
봉분 만들기 / 최광임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마늘을 샀다/ 여름내 바구니에 담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람을 친다/ 김장철 지나 풍장의 시간을 건너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가 눈뜨던 마늘,/ 지나간 시간에 봉분 하나를 만들고 있다/ 제 몸 섞었던 땅 바람 비/ 밤마다 채마밭 근처에서 울어주던/ 풀벌레와 별들까지 生 하나를 지운다/ 목 잘린 몸뚱이에 간간이 낯선 바람이 기웃거리고/ 장난감 찾는 아이들이 무심코 건드리고 지나가는 베란다/ 제 몸에 자해를 하며 자진하는 몇몇의 마늘 옆/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해안解顔으로 앉아있다/ 예전보다 일찍 마늘을 깐다/ 아직 흔적을 벗어내지 못한 마음에 칼을 댄다/ 추위 속에서 싹들을 뿌리째 뽑아 텃밭을 나오던 날/ 무딘 바람에도 베어져 나가던 마음을 기억한다/ 밤낮으로 정을 쳐도 날카로워지기만 하던 봉분,/ 이토록 처절한 즙 같은 눈물이라니/ 매운 삶을 안으로 삭이고 있지 않은가/ 왼쪽 검지가 싼득싼득 아린다/ 생채기도 없이 아물지 않는 쓰라린 生/ 지워지지 않는 연緣을 지우라 한 죄,/ 베란다에서 또 누가 울고 있다//
이상한 날 / 최광임
수술 환자가 마취에서 덜 깨인 듯한 날이었다/ 지나간 버스 꽁무니를 따르는 비포장 길 흙먼지 같기도 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도로 위 차들 뿐이었고/ 포도밭의 포도송이는 수의를 입은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오전 열 시가 무기력한 표정으로 껌벅껌벅 지나갔고/ 야윈 두루미 몇 마리 가파른 공중에 날개를 걸치고 있었다/ 나무의 손들은 조용히 하늘을 향해 모아져 있었지만/ 기도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듯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멀건 해져갔다/ 푸른 독이 올라있어야 할 벼이삭에서는 연두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버스 안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염분 빠진 생선들 같았다/ 구부정한 어깨로 시계는 오후 네 시를 지나가고 있었고/ 세상은 귀가 시간도 아닌데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늘도 태양은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문만 퍼졌다/ 나는 습관처럼 내일 버스를 탔다가 빈혈 앓는 오늘을 버스에 실었다/ 놓쳐버린 무엇인가 아귀틀린 톱니바퀴처럼 삐걱대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을 견디는 일은 어둠이 아니었었다/ 절망일 때 절망을 견디는 일 따윈 절망이 아니었었다,라고/ 불완전한 내일 속으로 관성의 버스가 달리며 바람을 만들었다/ 도로변 플라타너스, 커다란 손바닥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일, 붉은 혹은 검은 / 최광임
며칠째 휴일인데요/ 떨이도 되지 않는 두어 물 간 생선 같은 날들이네요/ 궁둥이를 이고 걷는 할머니의 어물전/ 손가락만 닿아도 살점 문드러지는 물고기들 같아요/ 희멀겋게 백태 낀 물고기 눈에 잠긴 바다나 떠올리는/ 나도 며칠째 팔리지 않는 할머니의 생선이네요/ 한 번은 오들오들 울다 먹오디처럼 잠들었고요/ 하루는 대청마루에 앉아 산허리를 치켜세우는 구름을 보았는데요/ 구름이 자꾸 부연해지면 바람의 소리만 사나워지네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난청이기 때문일까요/ 주인 잃은 소리는 갈비뼈 사이 그물을 치고/ 세상 밖의 파도란 파도 죄다 불러 앉히곤 하네요/ 적요에 익숙지 못한 심장이 용마루에 앉았다 대숲으로 뛰어내려요/ 파리 한 마리 날지 않는 어물전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죽창 같은 무서움의 뼈들 몸 뚫고 자라 내 숨을 찌른 탓인데요/ 개에게 물린 어둠이 팽팽해질수록/ 한 움큼 쏟아지는 왕소금에 속수무책으로 팔딱이던 활어를 떠올려요/ 어둠에 익숙지 못한 것은 전등 뒤를 걱정하는 것일 텐데요/ 부나비도 한 번쯤은 자신의 등을 보았을까요/ 짊어진 짐도 없이 근심만 태산인 것들/ 뻐꾸기가 동쪽에서부터 어둠을 쪼아 오네요/ 그러니 저 소리도 여직껏 노래가 아니라 구업(口業)이었던 걸까요/ 백태 낀 눈에서 짭짤한 바다 둥실 떠오른다 해도/ 어쩌죠, 익숙해지는 이 어둠은//
떨림에 대하여 / 최광임
집 앞 미루나무가 위태롭다 바람도/ 없는 허공에 제 몸 내어놓고 때론/ 간지럼 이는지 가만가만 몸 뒤틀기도 하는데/ 지금 눈 내리고 있다 저 나무 위로/ 폭설의 조짐이다 갸우뚱 한쪽으로 기울인 모습/ 곧 땅의 혈관을 파열하는 지진이 일 것이다/ 나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떨림을 찍는다/ 이 마흔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는 멀미가 있다니/ 저렇게 껑충 커버린 나무도 때때로 흔들리다니/ 하르르 흩날리는 눈의 모습도 떠는 것이다/ 촘촘히 조직되었을 허공의 내부를 관통하며/ 격정 뒤 잦아드는 숨소리처럼 쌓이는 눈/ 미루나무와 눈과 나와 마침내 폭설 속으로 잦아드는/ 세상, 이제 땅에 귀를 기울이는 일 뿐이다/ 나무가 몸을 뒤트는 건 폭설의 여진 때문이라고/ 나는 네게 말하지 않는다//
순수에 대한 보고서 / 최광임
겨울 한 철 내 집에 짐승 한 마리 살았어요 그는 머언 바다에서 왔다고도 하고 산골짜기 깊은 응달에서 왔다고도 했어요 그와 내가 처름 소통한 언어는 눈물이었어요 그에게서 파도 냄새가 나기도 했으며 골짜기 굽이쳐 흐르던 물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어요 나는 그에게 산짐승(生짐승)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그의 언어는 눈물뿐이었으니까요 해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동안 봄은 멀리 있는 듯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여전히 격렬과 온유의 극점을 오가는 그를 나는 산짐승이라 불러주기만 하면 되었지요// 어느 날은 소파에 앉아 유심히 그를 관찰하기도 해요 야생에서 왔다는 것 말고는 처음부터 언어가 다른 우리였지만 볕 좋은 창가랄지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조곤히 바라보노라면 햇살의 아이 서넛 낳고 싶어지기도 해요 그러나 대화법을 모르는 그는 장식장이나 에어컨 뒤 음습한 곳으로 숨어들기도 해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애 나타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입에서는 상한 비린내가 진동해요 어느 사이 봄은 창 가까이 오고 있었던가 봐요 그의 외출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더 이상 그의 눈물을 볼 수 없게 되었어요 그가 드나들던 음습한 구멍에선 황사바람만 들이치고 있기도 없기도 한 그에 대하여 무심해지는 날들이 가고 있었어요//
그리운 순리 / 최광임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고 한/ 박경리 선생의 시/ ‘일 잘하는 사내’를 읽다 운다// 선득선득 깊고도 선명한 무엇,/ 사랑에 생을 걸고 사는 일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다/ 단언해버린 치기의 내 젊은 날과/ 대비되는 말// 우주 만물의 이치가 음양의 조화라면/ 지상에 외짝인 나는 우주의 기형아,/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충만해도 녹록치 않을 삶 앞에서/ 나 생해줄 사내 하나 없이 사는 일이란 게/ 비정기적인 글품 말품 팔아 밥 벌고/ 불합리한 세상 혼자 맞서야 한다는 게/ 쓸쓸하고 외로워 높고도 높은 일// 그때나 지금이나/ 시인보다 엄마가 먼저이고/ 아이들의 밥이 먼저여서/ 밥이 시보다 먼저인 삶이어야 해서/ 사랑이든 시든 혁명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나는 아직도 밥의 비탈을 누비는 게릴라// 생이 별거든가 싶어도 결코 허투 아니라서/ 이생의 필부필부 하지 못한, 한 생은/ 젊음 저 너머에 순장시킨 순리와/ 떠메고 온 사마천* 훨훨 놓고 싶었으리/ 아직도 자수성가하지 못한 이 시대의 불온한 게릴라/ 박경리 이름 아래 깃들어 글밥 먹는다/ 구구구 멧비둘기 목을 놓는다//
구즉 묵집에서는 / 최광임
나의 애인이/ 혼신의 힘으로 묵 한 점 들어 올린다/ 떡갈나무숲 상머리에서/ 도톨밤, 아슴한 기억을 떠올리자/ 젓가락 사이 전생과 현생이 두 동강 날 태세다/ 떼굴떼굴이 아닌 낭창낭창/ 아마 나도 그에게 그렇게 굴러갔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겸허하다/ 상수리나무숲 밖으로 새옹지마의 도토리였으나/ 이곳은 순연의 도토리세상이다/ 기고만장한 자세로도 먹을 수 있는 묵은 묵이 아니어서/ 선사의 멧돼지처럼 주둥이 디밀고 묵사발 한 그릇 비우다보면/ 얼마나 우리가 울울창창 상수리나무숲으로 가고 싶었는지/ 묻힌 기억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와 내가 떡갈나무숲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이다//
상처가 흐르는 것은 / 최광임
수심 깊은 강은 그저 물이 모여서만 된 것은 아니에요. 속으로 속으로 견뎌 근심이 되고, 위장병이 된 지병 같은 여자의 굵은 주름이에요. 하여 시간이 흐르는 것은 체념 하나씩 풀어 띄우는 것. 사랑에 생을 걸고 사는 일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어요. 별을 떨구고 먹먹한 가슴팍에서 시작한 강, 이제 미혹의 퇴행성관절염 꾹꾹 눌러가며 아득히 거슬러 오르는 강줄기, 꿈 속 그곳엔 아직도 풋풋한 물풀들 이슬을 터네요. 굵어진 주름으로 흐르는 강 같은 여자, 어머니가 젖고 있네요. 강물이 깊어진 것은 단단한 바위를 사랑하였거나 어린 소나무를 사랑하였거나, 오래도록 함께 흐르지 못한 독한 상처 탓일 텐데요.// 부질없음도 세월이라 여적지 흐르고//
훌라후프를 돌리며 / 최광임
허리는 움직이는게 아니야/ 엉덩이를 둥글게 돌려봐/ 다리도 약간은 흔들어야 해/ 둥근 것 둥근 것 그 안에 누가 있지,/ 나 말고 또/ 착각이야/ 후프가 돌고 있다고 생각하지?/ 우리가 돌고 있잖아// 생각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이 돌고/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몸이 돌고/ 세습같은 질긴 외로움이 돌고/ 구멍 난 콘돔의 미완성 사랑이 돌고/ 너와 나의 어지러운 욕망이 돌고/ 돌고/ 돌고/ 돌/ 고// 발바닥에 팽팽한 공기압 느껴지니?/ 엉덩이를 조금 더 빨리 둥글려봐/ 토네이도 회오리가 몸을 휘감고 있는 기분/ 재빠르게 공중 선회하는 송골매같아/ 표적이 보여. 다리를 더 흔들어봐/ 기류를 잘 타야 해/ 그 곳에 온전한 블랙홀이 있어//
오래 전부터 그 길을 다니고 / 최광임
봄기운에 이끌려 그와 드라이브 간다/ 땅 속은 지금 실눈의 껌벅거림으로/ 분주한 미진이 일고 있으리라// 옥천 영동 지나 그만 추풍령을 넘었다/ 예상에도 없던 김천까지, 되짚어 국도를 달린다/ 옥천쯤, 산 아래 길 하나 하얗다/ 지나칠 때마다 생소하게 다가온다/ 저 곳도 가보고 싶어요/ 야트막한 산을 헤집고 나 있는 길/ 숲 그림자에 둘러싸여 반쯤 끊긴 길/ 이 사람아 우리가 노상 다녔지 않은가/ 내 어눌함에도 친근감을 더하는/ 익숙한 그, 문득문득/ 그의 마음 가늠하지 못해 궁금해지던 사랑/ 그래, 오래 전부터 수없이 다니던 길/ 날망 하나 넘으면 오래 된 마을이 나오고/ 비탈에 검은 삼밭이 있는 곳,/ 저렇게 낯설 듯 지금/ 어둠 속 촉수 하나 세운 씨앗들 나와 같으리라/ 그와 내가 다닌 길인 줄도/ 모르고, 오래 전 그의 마음 다 본 줄도/ 풀잎의 풀잎들이 오래 전부터 그렇게 움 틔운 줄도/ 모르는// 아흐, 발바닥을 간질이는 씨앗들//
발바닥이 따스하다 / 최광임
돼지 족을 샀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면도날로 잔털을 발라낸다/ 하얗게 드러나는 살점 부드럽고도 파리하다/ 지저분한 밥구시와 똥 묻은 몸뚱이/ 어릴 적 사립문 옆 우리 속 돼지들, 생각해보니/ 우리 밖을 걸어본 일 없는 발이다/ 국산 아닙니다만 맛은 같습니다/ 머리와 몸통 내장까지 다 내주고서라도/ 우리 밖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먼 이국을 건너 온 발만 남은 돼지/ 평생 한 곳에 자리하고 살았던 만큼/ 드넓은 세상으로의 이탈, 저 발들은 꿈꾸었을지 모른다/ 통양파와 생강 대파/ 냉한 수족에 뜨거운 기운이 돌게 한다는/ 계피나무까지 툭툭 분질러 넣는다, 매운향에/ 칼질 사이 묻어나던 들척한 비린내가 가신다/ 일을 마치고 막기차 타는 밤이면/ 피가 돌지 않는 다리 주무르다 새벽을 맞기도 한다/ 가끔은 더욱 안온한 우리와 부실한 다리/ 탐하거나 탓하기도 하다가/ 차창 밖으로 내달리는 세상, 가장 큰 우리 속에서/ 화르르 찜통이 넘친다/ 뜨거운 세상을 얼마나 걷고 또 걸었는지/ 우둘투둘 발등의 살점들 다갈색으로 그을렸다/ 관절마다 건강한 촌부의 마디처럼 굽어있다, 울컥/ 발바닥이 따스하다//
최광임 시인
1967년 전북 부안 변산에서 출생. 대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현재 ‘다층’ ‘빈터’ 동인이며 계간 《시와경계》 부주간, 《디카시》 주간, 창신대 교수.
시집으로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도요새 요리』. 디카시 해설집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가 있음.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대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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