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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정만 시인

부흐고비 2021. 10. 7. 09:15

박정만(朴正萬, 1946년~1988년) 시인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에서 출생. 전주고등학교,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81년 한수산 필화사건에 휘말려 갖은 고초를 당하고 1988년 10월 2일 봉천동 자택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시집으로 《잠자는 돌》《맹꽁이는 언제 우는가》《무지개가 되기까지는》《서러운 땅》《저 쓰라린 세월》《혼자있는 봄날》《어느덧 저쪽》《슬픈일만 나에게》《박정만 시화집》유고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이 있다.

※ 시인의 말: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죽였다. 그 속에는 꺼져 가는 불티처럼 겨우 명맥만 붙어 있는 나의 목숨도 묻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亂麻)처럼 얼크러져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 그리하여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서 들끓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편을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87년 8월 20일 경부터 9월 10일까지 사이에 나는 물경 300편 가까운 시를 얻었다.”

                                                               - 1988년 2월 ‘그 처절했던 고통의 시간들’에서 -


종시(終詩) / 박정만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박정만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 맨 첫 페이지에 쓰여진 시.

해지는 쪽으로​ / 박정만
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 들판에 꽃잎은 시들고​// 나마저 없는 저쪽 산마루/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흐르는 눈물 / 박정만
마음에 시퍼런 毒을 품고/ 자살하듯 술사발만 들이키는 날,// 하늘엔 저승으로 가로 놓인/ 애틋하고 선연한 서녘 무지개.// 눈 시려, 눈 시려, 눈이 시려,/ 눈 감고 눈을 감고 바라보는 맘.// 내 피는 오금박혀 가지 못하고/ 눈물만 저승까지 갔다고 되돌아오네.//

술 노래 / 박정만
꼬이고 꼬인 새끼줄처럼/ 어둠이 내 목을 쓸어 안고 진(陣)을 치는 밤/ 독사여 죽음의 불꽃이여 잠든 혼이여/ 불을 질러 불을 질러/ 불달은 꼬챙이로 심장을 찔러/ 서리서리 목을 감고/ 밤보다 깊고 천 년보다 아득한 정을 맺어라./ 쇠하고 쇠한 몸이 사약을 받쳐들고/ 기둥처럼 서서/ 바치는 법, 법을 잡아먹는 망할 자식아./ 아으! 불먹은 저 놈의 혓바닥,/ 게거품 입에 물고 토해놓은 욕지거리,/ 나를 보며 날름대는 저 놈의 욕지거리,/ 독사여 죽음의 불꽃이여 잠든 魂이여/ 암컷은 두었다 약에 쓰고/ 오늘밤은 한 목숨이 악으로 지자./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창(唱)이며 끄덕이는 고갯짓은 두었다 하고/ 버려라,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하라, 취할 것은 취하고/ 취하고 취하여 강술에 파김치같이/ 저 마지막 한 방울의 고요 속으로/ 시들어져라, 시들어져라, 시들어져라//

오늘의 병 / 박정만
어제도 세 병 반의 술을 비웠다/ 비우고 비워도 마음은 비워지지/ 않았다 병만 깊어가고// 늘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깊어가는 병을 생각했다 봄꿈처럼/ 허망한 일에 꿈을 걸고 다시 봄이 오리라고/ 기다리는 일처럼 부질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초에 천 번도 넘는 죽음을/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리워하며,/ 그래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 법이라고/ 퀭한 눈에 힘을 주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백 번도 넘게 길을 떠났다.//

잠자는 돌 / 박정만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며/ 마을마다 떠 다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바다를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 애오라지 내가 죽고/ 그대 옥비녀 끝머리에 잠이 물들어/ 밤이면 눈시울에 꿈이 선해도/ 빛나는 대리석 기둥 위에/ 한 눈물로 그대의 印을 파더라도//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감고 천년을 깨어 있는 鳳凰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禪 모양으로//

엉뚱한 심사 / 박정만
그대에게 비처럼 가려고 했지/ 산 높고 물 깊어 폭이 넓은데/ 그래도 그 산천 건너뛰어 마냥 가려고 했지/ 말도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하지만 그리움 풀잎에 누워/ 그 풀잎에 달맞이꽃 마냥 어리니/ 어찌한담 어찌한담 그냥 맘만 깊어서/ 아니가고 배길 수는 끝내 없었지// 그대여, 내 소리 들녘에 지면/ 냉이꽃 피는 소리로 한바탕만 귀담아 듣고/ 잔시름 풀어 가는 새벽이 되면/ 청솔밭 산까치의 울음소리로/ 그냥 지나가는 진정으로 받아 주소서// 매양 태양은 동편 숲에서 떠서/ 매양 서산으로 지고 마는 법/ 내 그대 생각하고 한숨짓고 눈 뜨고 눈 감는 것도/ 그렇듯이 그냥 그런 것/ 그것은 삶에서 죽음까지 그런 것이라// 오늘도 엉뚱한 마음으로 술잔만 본다//

다시 도봉(道峰)에 살면서 / 박정만
물굽이 눈에 돌고/ 귀울음 새로 돋아나는 나날이여./ 잠 아니 오는 밤 날로 길어지고/ 풀섶에 무서리 깊어지면 어이하리.// 기러기 짝하여/ 스스로 흘러가는 하늘 위의 때,/ 서러운 어린것들/ 제 품에 품에가는 우리들의 때,// 아내여,/ 물 젖은 네 낯바닥의 주근깨에/ 두릅나무 새순 같은 어린것을 붙이고/ 말없이 돌아서서 도봉을 본다.// 청수장 맞은편 그늘목의/ 내가 앉던 그 자리,/ 햇발에 그늘이 조금씩 넓어졌으니/ 아내여, 서리 묻은 울음발/ 발 아래 두고/ 발걸음 새로 하여 산에 들어라.// 이윽고 해거름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산자락이 단정히 품(品)으로 깃을 접으면/ 사랑이 제철을 품어보는/ 달무리 허리 두른 우리들의 옥빛 꿈자리.// 내 또래의 젊은것들 의좋게 산에 오르듯/ 도봉과 짝하여 마주서는/ 너와 나/ 우리들 길동무의 짝,/ 어린것들 쑥잎처럼 새로이 짙어오리니.//

수상한 세월 1 / 박정만
그 막막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군화 신은 아이들이 내 몸뚱아리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상처를 내고/ 나이팅게일 그려진 안티플라민을 주었어// 1981년 5월 국풍(國風)이 여의도에서 흐느끼던 날.//

어혈(瘀血)을 채우며 / 박정만
어혈을 풀기 위해/ 한약 한 제를 지어 왔다/ 코 위에 안경을 걸친/ 한약방 주인이/ 물에다 끓이지 말고/ 막걸리를 부어 끓이라 한다./ 술 먹고 대한민국처럼 망가진/ 내 몸뚱이의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는 듯한 말투다./ 참 용타고 생각하며/ 아내는 탕기에 술을 넣어/ 약을 달인다./ 펄펄 끓는 물솥에 수건을 적셔/ 내 몸의 어혈 위에 찜질도 하고/ 탕기에선 한밤내 부글부글/ 죽음이 들끓는 소리/ 절명하라, 절명하라, 절명하라,/ 이를 갈다, 이를 갈다/ 가슴도 부글부글 소리를 내고/ 분노도 피딱지도 약에 녹아/ 하나가 되고/ 어혈은 풀어져서/ 내 몸의 피와 살과 뼈에 스미고//

대청에 누워 / 박정만
나 이 세상에 있을땐 한칸 방 없어서/ 서러웠으나/ 이제 저 세상의 구중궁궐 대청에 누워/ 청모시 적삼으로 한 낮잠을 뻐드러져서/ 산뻐꾸기 울음도 큰댓자로 들을 참이네// 어차피 한참이면 오시는 세상/ 그곳 대청마루 화문석도 찬물로 씻고/ 언뜻언뜻 보이는 죽순도 따다 놓을 터이니/ 딸기잎 사이로 빨간 노을이 질 때/ 그냥 빈 손으로 방문하시게// 우리들 생은 다 정답고 아름다웠지/ 어깨동무 들판길에 소나기 오고/ 꼴망태 지고 가던 저녁나절 그리운 마음/ 어찌 이승의 무지개로 다할 것인가// 신발 부서져서 낡고 험해도/ 한 산 떼밀고 올라가는 겨울 눈도 있었고/ 마늘밭에 북새더미 있는 한 철은/ 뒤엄속으로 김 하나로 맘을 달랬지// 이것이 다 내 생의 밑거름 되어/ 저 세상의 육간대청 툇마루까지 이어져 있네/ 우리 나날의 저문 일로 다시 만날 때/ 기필코 서러운 손으로는 만나지 말고/ 마음속 꽃그늘로 다시 만나세// 어차피 저 세상의 봄날은 우리들 세상//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 박정만
사랑이여,/ 이 세상 가장 순결한 꽃잎의 이름으로/ 저 하늘에 내 이름이 적히리니/ 그때에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나는 사망의 검불이요/ 그 무덤을 덮는 한 촉의 풀잎이니/ 이제 뿌리째 들어내어/ 저 오뉴월 땡볕 아래 가차 없이 던지시라./ 그리하여 마르고 마른 땅에/ 마른 줄거리같이 육신의 뼈가 놓일 때/ 아득하고 어두운 저 적소(謫所)위에/ 내 생도 사라지고 풀잎 또한 시든 것을./ 그러나 아낌없는 세월이 또 흘러/ 어느 황량한 빈 벌판길에/ 목마른 황혼의 계절이 찾아오면/ 한 나그네 내 무덤 위에 앉아 쉬리니/ 그때에 거듭 이르기를 인생은 한마당 꿈이라 하라./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그리운 저 무덤 / 박정만
마지막 한 분(盆)의 사랑마저/ 해거름 쏠리는 서산에 주고/ 나 그림자만 남아서 어디로 가나.// 길은 천 갈래/ 어둠 속에 저마다 깊이 저물고/ 제 피로 초롱에 불을 밝혀도/ 그리움은 캄캄한 숯으로 필 뿐./ 슬픔은 찔레꽃처럼 찬란할 뿐.// 차라리 바늘쌈에 목을 놓고/ 소리 없는 울음이나 울고 살 것을./ 눈썹 끝에 시름처럼 어리는/ 한 조각 노을이나 이고 살 것을.// 아무리 달려가고 달려가도/ 어긋나고 어긋나고 어긋나는 길,// 나 같은 것 그렇게 가다 지쳐서/ 가시덤불 쑥굴헝에 묻혀나지길./ 묻혀져서 한 세월 지나면 잊혀나지길.// 헛되어 살아온 목숨 하나가/ 죽어서도 못 만날 너를 그리며/ 오늘도 무덤가에 창처럼 꽂혀 있어라.//

영원한 약속 / 박정만
나는 몰랐네./ 슬픔이 슬픔으로 떠 도는 것을./ 그 이전 절대적인 생각으로 만났던/ 사랑과 미움의 한 가지 뜻을.// 그때 분명히 이야기했지./ 저물녘의 산빛깔도 나의 몫이고/ 기원사 가는 길의 달맞이꽃도/ 내 생의 가는 길도 나의 몫이라.// 그런데 다 어디로 갔나./ 살피꽃밭 꽃거리의 꽃들도 바람에 지고/ 밤꽃나무 아래의 패랭이꽃도/ 슬픈 잠을 자는지 보이지 않네.// 그러면 이제 저 무덤이나 보자./ 무덤은 소슬바람 불어오는 산에 막혀서/ 한소절 피리마저 불어주지 않고/ 막한 생각으로 젖어 있구나.// 가자, 사람이 사는 마을로./ 더러운 화살로 풀빛을 건드리지 말고/ 이제 또 한 번만 영원한 약속을 하자.// 그리운 세월을 내 품으로 품기 위하여.//

풍장(風藏) 1 / 박정만
晴天(청천) 하늘 아래/ 목마른 자의 풀은 끝없이 시들어지고/ 한순간의 불볕 위에/ 모지라진 긴 소멸의 시간.// 하늘 기울고/ 목숨을 劫(겁)이라 이름하여도/ 숯불에 삭은 뼈 하나로/ 누구의 한 목숨을 다 비취볼 수 있으랴.// 殘燈(잔등) 높이 돋우고/ 젊은 날 내 불면을 밝혀주던/ 능금나무 열매의 능금 향기와/ 소매 끝을 적시던 눈물의 紅玉.// 기울어진 가지 끝에서/ 다만 간직한 귀로 듣던/ 水晶(수정)의 푸른 씨앗조차 사그라지고/ 돌아가는 물소리에 물이 어리어/ 꿈길 같은 꿈길 같은 길이 흐를 뿐.// 한 평의 땅도 가진 것 없이/ 삭은 뼈도 삭아서/ 맑은 햇볕 속/ 흔들리는 바람같이 민들레처럼.//

풍장(風藏) 3 / 박정만
無明의 촛불 위에서/ 어둠의 그림자 어둠 속에 자지러지고/ 뜨락 배꽃 위에/ 눈부신 소금처럼 달빛이 차다// 무덤같이 행복했던 者./ 그 끝없는 발자국 소리도 멀어져 가고/ 풀벌레의 울음조차 곤한 잠에 떨어졌다./ 잠시 가랑잎 하나가 뜰을 흔들고/ 뿌리 없는 밤이 물속처럼 깊어진다.// 서역(西域)하늘/ 고요 속에 흔들리는 풀잎이 되어/ 풀잎으로/ 이 세상의 곤한 잠을 어찌 깨우랴.// 어둠을 대하여 나의 귀를 대하면/ 어둠 속에 이르는 소리뿐으로/ 어둠이 어둠을 부르는 소리 들리고/ 어둠 뒤에 더 큰 어둠이 온다.// 靑盲(청맹)의 바람이여/ 이제 나를 묻어 주시라./ 산빛이 제 목숨 놓아 가는 영마루/ 그 너머 하늘가에/ 내 모든 욕망과 허물을 다 덮어 주시라.// 없는 무덤 위를 지나서/ 명부(冥府)에 떠다니는 불의 티끌,/ 불의 어둠 불의 사랑 불의 잠이여./ 내 눈의 티로써/ 저 세상의 곤한 잠을 어찌 깨우랴.//

풍장(風藏) 4 / 박정만
흰 우모(羽毛)를 털며/ 산을 뜨는 산소리에 산이 잠기고/ 돌아가는 물소리에/ 물소리 돌아가는 물이 고인다.// 돌아보면 내가 살던 마을도/ 푸른 잠 기우는 산그늘에 묻히고/ 나아갈 길도 돌아갈 길도/어두운 돌 속으로 깊이 스며버렸다.// 한 하늘의 폭풍과/ 한 바다의 해일이 놓인 돌이여,/ 유리등 푸른 불을 끄고/ 돌을 열고/ 어둠으로 내 생애의 길을 삼아도/ 미량의 마른 소금으로/ 돌에 스민 폭풍과 해일을 어이 지키랴.// 설레이는 잠의 머리맡에/ 끝없이 떠도는 별이 보이고/ 모래 속으로/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눕는다.// 마른 풀잎 위에 빛나는/ 한 평의 어둠이여,/ 한때 초록의 잎새 위에/ 삶이 하나의 죽음을 놓고 간 뒤에/ 한 포기 풀뿌리의 밑동에/ 죽음이 또한 한 목숨 놓고 갔을 줄이야//

어떤 비가 4 / 박정만
그대를 기다리는 내 자유의 의자에/ 산발한 저녁 연기처럼/ 가늘게 슬픔의 떼들이 내려 앉을적,/ 내 떨리는 손가락은/ 비가의 흐느끼는 현을 골라짚고서/ 그저 하염없었다 한들./ 이윽고 잠 아니오는 한밤의 적막속으로/ 내 의식의 불씨들은 꺼져들고/ 흐느끼는 현마저 어둠속으로 잦아들어/ 그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한들./ 그러나 언제나 전하시라,/ 내 외로운 기대의 손바닥에 놓인/ 조용한 기다림의 의미를./ 패랭이꽃 눈 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대 없는 빈 그림자를 지키고 서서/ 이렇게 바람처럼 지나가는 내 생각은/ 그저 부질 없었다 한들//

작은 연가 /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가 천리 밖까지/ 나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아득한 그대 / 박정만
첫사랑의 앵화도화/ 울밑으로 시들어지고/ 먼 산허리에/ 기우는 봄빛,/ 엉터리로 불러보는/ 아득한 그대,/ 막차의 불빛으로 자옥하게 피어난 그대.// 이 봄빛 다하면/ 저승꽃만/ 착실히 피리//

돌아온 추억 / 박정만
갑니다. 내 갑니다./ 이 고통, 이 설움 참지 못하고/ 그냥 가고 맙니다.// 서러워하지 마세요./ 가는 길은 가는 길, 남는 길은 남는 길,/ 길 위에 한떨기 꽃도 피게 하지 마세요.// 길을 덮어주셔요, 길을./ 길은 너무 멀고 아득하여서/ 꽃으로는 덮을 수 없어요. 꽃으로는요.// 바람이 불어요./ 그대 가고 없는 눈부신 바람이./ 가라 하지요, 바람 부니까./ 그럼 이담에 어떻게 해요.// 그래도 가라 합니다./ 슬픔이 너무 크니까. 너무 크니까./ 그러면 인제 이렇게 합시다./ 저녁 잠은 무사합니까.// 꿈꾸는 봄날, 나는 어리석어서/ 잠만이 깊어가고 깊어갑니다./ 내 잠 이 곳에 두고 가니/ 어리석다, 어리석다 말을 맙시다.// 갑니다, 이 세상 사는 일 너무 아름다워서.//

외로운 풀벌레 / 박정만
까닭없이 눈에 눈물이 돌고/ 진종일 사랑에 배고프던 철없던 봄날,/ 나는 그대의 젖동생같이 아아 젖동생같이// 울다말다 울다말다 잠에 지쳐서/ 눈물어린 꿈하나를 꾸었습니다./ 정향나무 밑이였지요/ 이따금 생각처럼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날아온 풀벌레 울음소리가/ 내 목청에 금강처럼 어렸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 박정만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흐르고/ 이 밤이 깊을수록 외로움도 깊어 가는데/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 사람의 아들아,/ 나지 말지어다, 나는 것 괴롭도다// 청솔가지 반쯤 가리고 별이 흐르고/ 가을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깊어 가는데/ 조용히 귀 기울이면/ 어디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 이 사람의 아들아/ 죽지 말지어다 죽는 것 괴롭도다.//

죽음을 위하여 / 박정만
간이 점점 무거워온다./ 검푸른 저녁 연기 사라진 하늘 끝으로/ 오늘은 저승새가 날아와서/ 하루내내 울음을 대신 울다 갔다.// 오랜만에 일어나 냉수를 마시고,/ 한 생각을 잊기 위해 뜻없이 책을 읽고,/ 일없이 고향에 돌아갈 꿈을 꾸고,/ 그러다가 가슴의 통증을 잊기 위해/ 요 위에 배를 깔고 주검처럼 납작 엎드리었다.// 여봅시요, 여봅시요,/ 하늘 위의 하늘의 목소리를/ 누군가 문 밖에서 자꾸만 날 부르는 소리./ 혼곤한 잠의 머리맡에/ 또 저승새가 내려와 우는가보다.// 나 죽으면 슬픈 꿈을 하나 가지리./ 저기 저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에간장이 다 녹아나서/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은빛 기러기가 되는 곳,/ 그곳에서 반짝이는 홍역 같은 사랑을.// 아픔이 너무 깊어 또 눈을 뜬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군지 알 수 없는 흰 이마가 떠오르고/ 돌멩이 같은 것이 자꾸 가라앉는다.// 어서 오렴, 나의 사랑아./ 신열 복숭아 꽃잎처럼 온몸에 피어올라/ 밤새 헛소리에 시달릴 때도,/ 오동잎 그늘 아래/ 찬 기러기 꽃등처럼 떠갈 때에도/ 분홍빛 너의 베개 끌어안듯 기다리었다.// 한세상 살다보니 병도 홑적삼 같다.//

슬픈 일만 나에게 / 박정만
사랑이여,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바람도 조금 불고/ 하얀 대추꽃도 맘대로 떨어져서/ 이제는 그리운 꽃바람으로 定處를 정해다오.// 세상에 무슨 수로/ 열매도 맺고 저승꽃으로 어우러져/ 서러운 한 세상을 건너다 볼 것인가.// 오기로는 살지 말자./ 봄이 오면 봄이 오는 대로/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는 대로/ 새 울고 꽃 피는 역사도 보고/ 한 겨울 新雪이 내리는 골목길도 보자.// 참으로 두려웠다./ 육신이 없는 마음으로 하늘도 보며/ 그 하늘을 믿었기로 山川도 보며/ 산빛깔 하나로 大國도 보았다.// 빌어먹을, 꿈은 아직 살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역에 자고/ 그 꿈자리마다 잠만 곤하여/ 녹두꽃빛으로 세월만 다 저물어 갔다.// 사랑이여, 정작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너의 옷고름 / 박정만
자줏빛 너의 옷고름,/ 풀 길이 영원히 없어/ 문설주에 짝귀 대고 바라보았네./ 산 빛에 햇빛이 앵돌아진 때였지만.// 그래도 너무 감사한 일,/ 바구니엔 그냥 밤참이 오고/ 혀짤배기 소리로 그리운 밤이 내려서/ 현고조고(顯高祖考) 적당한 사투리 말로/ 네 푸른 옷고름 풀고 싶었네.// 우리가 죽어서 다시 만날 때./ -염미혜에게 주는 글//

정읍별사(井邑別訶) 1 -아내에게 / 박정만
네 반달 같은 눈썹 가에/ 가승(歌僧) 하나가 참(斬)하듯 늘어붙어서/ 옛 누래 한 가락 오늘에 이르노니/ 뉘라서 그 목울대의 떨림을 알까.// 바람은 다 가고 비었는데/ 참등나무 여린 꽃이 무시로 떨어지고/ 덤 같은 사원의 뒤뜰에는/ 들끓는 고요의 떼가 시퍼런 칼을 쓰고/ 한 적막을 베고 있다.// 허물 많은 목숨을 땅에 놓고/ 우리 모두 바람같이 돌아가는 사람들./ 기다림 끝난 곳에 새순이 돋아나도/ 눈에는 참하듯 눈물이 늘어붙어// 한 묶음의 죄를 받쳐들고/ 죽은 꽃잎의 수를 세는 무지개의 밤,/ 오오 너만 남고 모두 다 가버렸구나./ 풀잎 같은 인간사, 뜨내기 사랑들은.// 내 죽어 네가 없으면/ 내 몸의 능소화나무 위에 뭐가 있으랴./ 너 살아 내가 없으면/ 네 몸의 마름풀 꽃잎 위에 뭐가 남으랴.// 곤한 세상 막간에/ 나는 한갓 이름없는 별로 태어나/ 너로 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한 점 어둠인 것을./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별의 새끼, 별의 아들인 것을.//

정읍별사(井邑別訶) 2 / 박정만
민들레 작은 꽃씨 하나가/ 만리 허공 밖을 헤매이다가/ 어디메 묵정밭에 떨어져서/ 눈부시게 눈부시게 피어나거든/ 그게 바로 너인가고 여길지니// 내 가슴 한편에/ 봄꿈 함께 끄듯 그렇게 누워 있다가/ 바람 자고 운우(雲雨) 잘 내리거든/ 찬란한 사랑의 꽃말 마구/ 퍼뜨려 놓고 퍼뜨려 놓고 퍼뜨려 놓고// 날아가라, 적막한 사월의 뜰,/ 인생의 싹수 노오랗게 사라진 대지 끝으로,/ 간혹 부질없는 목숨이 금단추같이 피어/ 길섶에 주저앉아 울음 울거든/ 그것이 또한 싹수 노오란 나인 것을.// 인생의 저마다 외로운 섬과 같은 것,/ 안개 속에 가뭇없이 사라져서/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흘러가는 곳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해도/ 점점점.... 사라진다 해도.....//

 

정읍후사(井邑後詞) / 박정만

내 이마의 땀으로/ 몇 평의 밭을 얻었느냐 하늘이냐/ 몇 되의 술을 얻었느냐 땅이냐/ 네가 얻은 자수정 푸른 모서리에/ 내비친 일생의 그늘./ 너의 밭에 다아 추수는 끝나고/ 빈 손으로 깊이 머리 짚을 때/ 가거라, 가거라, 가거라,/ 석양이 야산마루에 걸리고/ 손이여, 나 또한 그렇게 가야 한다면/ 날 위해 널()위에/ 하나의 들꽃도 던지지 말라./ 예나 지금이나 혹은/ 그 이후의 마지막 한 차례,/ 나머지는 너의 잠이며 달/ 너의 흙, 무궁한 한 평의 허공뿐이다./ 허공 중에 홀로 빛나는 달하.//


어느 흐린 날 / 박정만
눈앞에 어지러이 陳(진)을 치는/ 하루살이 떼, 하루살이 떼,// 소금발로 눈을 씻고/ 하늘을 보면,// 하늘엔 온 하늘 가리우는/ 하늘 속의 서녘 무지개.// 산 아래 마을마다/ 낮은 音의 불이 켜지고// 마음은 슬픔의 향내에/ 코를 박고 잠들어.//

매화 / 박정만
매화는 다른 봄꽃처럼 성급히 서둘지 않습니다/ 그 몸가짐이 어느 댁 규수처럼 아주 신중합니다/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달아 두 송이 세 송이… 다섯 송이 열 송이/ 이렇게 꽃차례 서듯 무수한 꽃숭어리들이 수런수런 열립니다/ 이때 비로소 봄기운도 차고 넘치고, 먼 산자락 뻐꾹새 울음 소리도/ 풀빛을 물고 와서 앉습니다/ 산자락 밑의 풀빛을 물고 와서 매화꽃 속에 앉아/ 서러운 한나절을 울다 갑니다//

작약(芍藥) 꽃밭에서 / 박정만
헤어지자,/ 이 지상에서,/ 저무는 해와 같이.// 오래오래 숨겨온 눈물의 흔적/ 허공에 주어버리고/ 마른 약뿌리같이/ 인제는 맨정신으로 헤어져버리자.// 오래오래 간직해온/ 우리들 사랑의 순금의 눈시울,/ 저 버림받은 나날과/ 헛맹세와/ 이우는 꽃잎 같은 젊은 물머리.// 질근질근 손톱을 깨물며 깨물며/ 들끊는 어둠 속을 달리며 달리며/ 나 죽음 곁에 엎디었노라 - 꽃비에 젖어/ 꽃같이 나 죽음에 엎디었노라.// 오, 불타는 눈그늘에/ 다시금 꽃잎은 지고..../ 네 발 달린 짐승의 울음 위에/ 피먹은 가슴으로 자지러진 저녁답.//

떨어진 꽃잎 / 박정만
앞섶의 꽃 단추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떨어진 꽃잎./ 잉크 빛으로 하늘만 푸르러가고/ 생쥐 같은 눈을 뜨고 뜰에 떨어진 봄빛./ 싸리비로 한참만 쓸어 보고파.//

한해살이풀 / 박정만
패랭이꽃 눈뜨는 아침부터/ 산메아리 잠드는 저물녘까지/ 비루먹은 시간의 하늘 속을/ 앉은뱅이 시늉으로 걸었습니다./ 오뉴월 소금맛도 잃어버린 채/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당신을 찾아/ 앉은뱅이 시늉으로 걸었습니다.// 한 생을 하루해에 던져 놓은 채.//

마지막 편지 / 박정만
그대에게 주노라/ 쓸쓸하고 못내 외로운 이 편지를// 몇 글자 적노니/ 서럽다는 말은 말기를/ 그러나 이 슬픔 또한 없기를// 사람이 살아 있을 때/ 그 사람 볼 일이요/ 그 사람 없을 때 또한 잊을 일이다// 언제 우리가 사랑 했던가/ 그 사랑 저물면/ 날 기우는 줄 알 일이요/ 날 기울면 사랑도 끝날 일이다// 하루 일 다 끝날 때 끝남이로다//

아사녀의 편지 / 박정만
서방님,/ 제게 藥 한 첨만 지어주세요./ 바람편에 쉬이 오는 기별/ 좋으나 나쁘나 잘 계시다는/ 한 두어 자 소식만 들으면/ 얼마쯤 속이 冷해질 것 같은데요.// 서라벌이 얼마나 먼지는 모르지마는/ 머리털 엮어가는 저승의/ 별에서 여기 오는 거리만큼/ 되지는 못하겠지요./ 시샘하는 초봄의 꽃망울같이/ 서라벌에서 저 아닌 또 누가 있어서/ 못 가리다 못 가리다 붙잡는가요./ 독사와 같이 아아 독사와 같이/ 그대 발목 물어 뜯고/ 칭칭칭 목이라도 휘감는가요./ 어제도 산바람에 귀 대이고/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돌아서고/ 오늘도 산바람에 귀를 대이고/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돌아섰지요./ 제 그림자 제가 밟고 돌아왔지요.//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 박정만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네 눈에 흐르는 눈물로 나도 흐르고 싶어// 어쩌다 웃고도 싶어/ 밤이면 네 눈 속에 뜨는 별처럼/ 나도 네 눈 속에서 별로 뜨고 싶어// 간혹 꿈도 꾸고 싶어/ 네 눈 속에 꿈꾸는 길이 있으면/ 나도 네 눈 속에 꿈꾸는 길이 되고 싶어// 끝없이 걸어가는 길이 되고 싶어/ 어쩌면 그 길에서 나그네도 보겠지/ 그러면 나도 네 눈 속에서/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어// 풀밭에 주저앉아 가끔가끔 쉬어도 가는/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나도 보고/ 네 마음의 풍향계도 바라보고 싶어// 저기, 키 큰 미루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군/ 네 눈 속에는 바람이 지나고 있어/ 나도 네 눈속을 지나는 바람이고 싶어//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지/ 왜냐하면 나는 네 눈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네 눈 속에는 멧새가 살고 있어/ 갓 움이 돋은 고란초도 살고 있어// 그 날은 비 갠 오후 저녁 때/ 네 눈동자 속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나도 네 눈동자 속에 무지개로 내리고 싶어// 그리하여 네 가장 아름다운 젖무덤에/ 어린 양처럼 유순한 코를 박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꽃잎의 모습으로 죽고 싶어// 나는 끝끝내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내 너에게 이르기를 / 박정만
내 너에게 이르기를/ 꽃 지는 저녁은 바라보지 말라./ 香이 어려/ 눈부신 밤이 오면 눈물 나리.// 이젠 잦아지리./ 보글보글 끓는 탕약 속으로/ 사랑이건 목숨이건 다 주어버리고/ 이젠 사라지리.// 때론 저물녁도 기억하리/ 노을이 물결처럼 지고/ 어떤 나그네가 죽자살자 걸어가는데/ (산문적으로)/ 딸기꽃 있지.// 내 너에게 이르기를/ 저녁때의 슬픔은 갖지 말자/ 뒤가 켕겨/ 눈부신 밤이 오면 눈물이 나리.//

살아가는 법 / 박정만
저 하늘을 바라보아라/ 저 푸른 하늘을,/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 저 산을 바라보아라./ 저 푸른 산을,/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 저 바다를 바라보아라./ 저 푸른 바다를,/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늘, 산, 바다와 같이/ 우리는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월과 오월 사이 / 박정만
사월과 오월 사이, 사랑아,/ 봄꽃보다 찬란하게 사라져간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사월과 오월 사이,사랑아,/ 너는 나를 그리며 더 큰 웃음을 웃고 있지만/ 네가 던진 함성도 돌멩이도 꿈 밖에 지고/ 모호한 안개, 모호한 슬픔 속으로/ 저 첫새벽의 단꿈도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사라진다./ 사월과 오월 사이,사랑아,/ 세월의 앙금처럼 가라앉아/ 그것이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되고/ 그 뿌리 속에 묻어 둔 불씨가 되는 너를 그린다.// 그린 듯이 그린 듯이/ 너는 라일락 꽃잎 속에 숨어서/ 라일락 꽃잎 같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파아란 보랏빛 얼굴로 웃고 있지만.//

쓸쓸한 봄날 / 박정만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路傍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적셨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 몸을 다 주었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 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 녘에서는/ 풍문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드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의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은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 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

겨울 저녁의 시(詩) / 박정만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에도/ 흰 재채기나 조금씩 토해 내면서/ 이제 우리 모두 돌아갈 시간이다./ 안티플라민 시린 코를 감싸쥐고서/ 눈물 어린 눈을 끔벅이면서.//

 

겨울 속의 봄이야기 / 박정만

1/ 뒤울 안에 눈이 온다./ 죽은 그림자 머언 기억 밖에서/ 무수한 어둠을 쓸어내리는/ 구원한 하늘의 설화./ 나는 지금 어둠이 잘려나가는/ 순간의/ 분분한 낙하 속에서/ 눈뜨는 하나의 나무/ 눈을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무수히 작은/ 아이들의 손뼉소리가 사무쳐 있는/ 암흑의 깊은 땅 속에서/ 몸살난 곤충들은 얼마나 앓고/ 있는가./ 사방에 사유(思惟)의 충치를 거느리고/ 밋밋한 수해(樹海)를 건너오는/ 찬란한 아침 광선./ 수태한 여자의 방문 앞에서/ 나는,/ 청솔과 반짝이는 동전 볓 닢을/ 흔들며// 2/ 아침 한때 순금의 부리로/ 빨갛게/ 새들은 남은 잔설을 쪼아대고/ 그때 무어라 귓속말로 읽고 가는/ 바람의 전언./ 수런거리며 은빛 비늘이 돋아/ 나는/ 수파(樹皮)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몇 개 새순이 자라나고 있는가./ 사람의 품사(品詞)들로 점점이/ 물들어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예지의 광채가 가지끝에 앵기어/ 비쭉비쭉 푸른 혈관이 일어서면,/ 저 유난히 커오르는 숨소리를/ 내 아내의 어린 살빛은 듣고 있다./ 자꾸만 바람 뜨거운 나뭇가지 끝에서/ 까치들은 한 소절의 노랠 부르며 있고.// 3/ 홀연 도련님 눈썹 위에 내려앉는/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 봄의 젖줄을 잡아당기는/ 따스한 모정의 촉감을 한줄기씩 내리어/ 꽃대의 등심(燈心)을 밝히고 섰는/ 어머니의 축복을 누가 알까./ 가가호호 문전마다/ 신춘대길이라 방을 붙이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겨앉는 메아리./ 시간은 상처난 손을 떨어뜨리며 지나가고/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었다.//


작은 사랑의 송가 / 박정만
사랑이 진하여 꽃이 되거든/ 그 꽃자리에 누운 한 작은 종자가 되라/ 그리하여 다시 오는 세상에서는/ 새나 나무나 풀이나/ 그런 우리들의 영원한 그리움이 되라.//

저 높푸른 하늘 / 박정만
저 높푸른 하늘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그것은 나에게 군말만 있었기 때문,/ 이제 철 지난 눈으로 저 하늘의 푸른 땅을 보나니/ 버리라 하면 다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다려보자./ 왜 생의 한나절은 내게 없으며/ 걸어가는 길섶에는 좋은 꽃도 없는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아, 이제 알겠어./ 나는 언제나 되돌아오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지./ 바람과 달과 구름은 끝이 없는데/ 난 그저 오금 박힌 걸음으로 걸어온 거야./ 저 높푸른 하늘을 좀 봐,/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 아무렴 저 꼭두서니 빛을 보라니까./ 저녁 산의 이마 위에/ 높푸른 하늘의 맑은 빛이 마냥 걸려서/ 내 꿈과 저승길로 걸어오는 걸./ 걸어와서 슬픔의 한 빛깔로 물드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이것이 아닌 것 같아.//

저 가을 속으로 / 박정만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부신 꽃잎만 던져 놓고 돌아서는/ 들끓는 마음 속 벙어리같이.// 나는 오늘도/ 담 너머 먼 발치로 꽃을 던지며/ 가랑잎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내사 짓밟히기로 묻히기로/ 어차피 작정하고 떠나온 사람,/ 외기러기 눈썹줄에 길을 놓아/ 평생 실낱 같은 울음을 이어 갈 것을.// 사랑의 높은 뜻은 비록 몰라도/ 어둠 속 눈썰미로 길을 짚어서/ 지나는 길섶마다/ 한 방울 청옥 같은 눈물을 놓고 갈 것을.// 머나먼 서역 만리/ 저 눈부신 실크로드의/ 가을이 기우뚱 기우는 저 어둠 속으로.//

 

無花의 꽃상여 / 박정만

내 가는 길섶에는/ 한 송이 복사꽃도 피지 말아라/ 눈물겨운 새소리 하나라도/ 靑松 높은 가지 위에 앉지 말아라.// 바람도 불지 말고/ 그저 앉은 채로 살아 있는 돌멩이 같이/ 그렇게 내 생의 그림자만 보아라./ 산도 그냥 울지 말아라.// 꽃 피면 서러웁고/ 달 뜨면 아득한 인간의 하루,/ 물소리 가득하여 나는 못내 못 참아라./ 그러니 이 뒤에 나를 보시라.// 정작 한 소리 마음을 내노니/ 저쪽 한 사람 외로운 이도 볼 일이요,/ 날 기울면 이편 쪽 마음도 줄 일이다.// 가는 길 없음을 나는 아노니.//


추심가(秋心歌) / 박정만
영산홍 꽃떨기 속에/ 영산홍 꽃떨기만한 귀로 앉아서/ 산간물 흔드는 해거름 발자취 소리/ 일자 마음에 새겨 듣노니,/ 청천에 뜬 뭇 별의 저 시름을/ 누구의 어둠으로 마냥 다 덮으리오./ 캄캄할수록 시름 또록또록 밝아지고/ 밝아질수록 실꾸리 시름 더하나니/ 어지 광명에 눈멀 듯 눈멀 듯 덮으리오.//

아담한 고독 / 박정만
山水菊 한 가지로/ 이 세상 산빛을 모두 받드는 저녁/ 이 빠진 사기잔에 차를 따르며/ 찻잔 속에 어리는 그대 뒷 모습을 보노니.// 아서라./ 슬픔은 오래오래 간직했다 약에 쓰고/ 오늘밤은 그저 창밖의 별이나 세며/ 일없이 눈끔적이 신세나 되자./ 멍하니 눈뜬 장님 행세나 하자.// 하마 지금쯤/ 너와 내가 기대앉던 그 꽃자리에/ 패랭이꽃이라도 한 두엇 피어나서/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죄로 살겠지.// 아따, 늬 몸뗑이에서는/ 무신 놈의 땀냄새가 이리 난당가./ 사투리로 스무살 적 곤한 때를 이야기하며/ 젊은 마음 꼬여대는 저녁 물소리.// 이런 날은 강낭콩이나 까먹고 싶어/ 사랑도 미움도 시름시름 까먹고 싶어./ 그리하여 마지막 십원짜리 하나까지 다 까먹고/ 빈 껍데기로 남고 싶어.// 빈 찻잔 속에 떠도는 향기로 남고 싶어.//

헤매는 벌판 / 박정만
누이여, 벌판에서는 새소리 들리고/ 수수밭 머리에서는/ 아직도 바람소리 끝나지 않았다/ 바람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너는 너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고/ 철새마저 다 떠나고 말면/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벌판을 흔드랴/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生)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버린 대로 자라나서/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無風)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비추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십이월의 저녁답,/ 자지러진 꿈, 꿈밖의 누이여.//

산 아래 앉아 / 박정만
메아리도 살지 않는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녹을 때까지/ 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봅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오지 않는 꿈 / 박정만
초롱의 불빛도 제풀에 잦아들고/ 어둠이 처마 밑에 제물로 깃을 치는 밤,/ 머언 산 뻐꾹새 울음 속을 달려와/ 누군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문을 열고 내어다보면/ 천지는 아득한 흰 눈발로 가리워지고/ 보이는 건 흰눈이 흰눈으로 소리없이 오는 소리 뿐/ 한 마장 거리의 기원사(祈願寺) 가는 길도/ 산허리 중간쯤에서 빈 하늘을 감고 있다.// 허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다 풀뿌리같이/ 저마다 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나는 꿈마저 오지 않는 폭설에 갇혀/ 빈 산이 우는 소리를 저 홀로 듣고 있다.// 아마도 삶이 그러하리라./ 은밀한 꿈들이 순금의 등불을 켜고/ 어느 쓸쓸한 벌판길을 지날 때마다/ 그것이 비록 빈 들에 놓여 상할지라도/ 내 육신의 허물과 부스러기와 청춘의 저 푸른 때가/ 어찌 그리 따뜻하고 눈물겹지 않았더냐.// 사랑이여,/ 그대 아직도 저승까지 가려면 멀었는가./ 제 아무리 밤이 깊어도 잠은 오지 아니하고/ 제 아무리 잠이 깊어도 꿈은 아니 오는 밤,/ 그칠 새 없이 내리는 눈발은/ 부칠 곳 없는 한 사람의 꿈없는 꿈을 덮노라.//

 

비는 줄창 내리고 / 박정만

비는 눈물같이 줄창 내리고/ 창은 보랏빛으로 젖어 있다./ 나는 저 산쪽/ 외로운 한 사람을 생각하노라.// 그대 생은 어디 있는가./ 가고 없는 사람은 생각 말고/ 돌아올 사람도 생각지 말자.// 한 떨기 풀잎을 바라보자./ 그냥 그 뜻대로 지고/ 산천도 언제나 조용하게 저물었다.// 인간은 다 어디로 갔나.//

 

누이를 위한 小曲 / 박정만

누이여, 나는 아주 이상하게 彷徨하였다./ 수천 년 동안 아주 이상하게/ 죽음 저편의 건너 세상까지를/ 막연한 명칭 밑에 나는 방황하였다./ 나의 방에 빗나간 변혁,/ 빗나간 자유,/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는 나의 방에는/ 죽은 언어의 시체만이 누워 있었다./ 나는 웬지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하나 있는 나의 목숨이 싫고 싫었다./ 부질없이 엎디어 울고 울었다./ 그리하여 간혹 아무런 방향도 없는/ 일종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그때는 내가 너무 迷信的이었으므로.//

 

낮은 목소리로 / 박정만

산정에 올라오면 먼저 머물 자리를 마련한다./ 금년의 나는 지난 해의 내가 아니므로/ 지리도 새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억새밭에 자릴 잡았다./ 먼 산정에는 어느덧 억새꽃이 무성하다./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나서/ 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득한 산 너머로 해는 지고/ 장엄한 어둠이 살에 스미는 것을 느낀다.// 삽시간에 별들이 돋았다./ 사람의 눈매가 그렇듯이/ 어떤 별은 글썽글썽 눈물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별밤엔 혼자서 무엇을 하나./ 나는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로 더욱 낮게/ 풀뿌리까지 닿도록/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무살 以前 / 박정만

등꽃 아래 앉으면 보랏빛 눈물,/ 시름 곁에 앉으면 다시 또 시름의 눈물,/ 그때는 왜 그렇게/ 눈물이 흔했는지 몰라./ 한 모금의 소주와/ 푸르게 넘쳐나는 정열의 돛폭 높이 달고/ 한숨의 떼 무리지어 밀려올 때도/ 마음(사랑의 마음)/ 금쪽같이 금쪽같이 나누어 썼네.//

 

부러진 약속 / 박정만

사랑이여,/ 불타는 녹음, 불타는 대불(大佛)의 내 심장 위에/ 거친 피로 내리쏟는 가을과 같이/ 그 가을 속을 흐르는 캄캄한 선지피같이/ 이제 바람이 불어오면 어이하리.// 가을 강의 그 짙푸른 하늘 속으로/ 네 뒷모습의 그림자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간 것들만이 남아서 모닥불같이/ , 스러지고 반짝이는 오밤중의 모닥불같이/ 사그라져 재로 남는 목숨의 불씨,/ 이제 그 불씨마저 잦아들면 어이하리.// 꿈 속에 다시 보자 하던 언약의/ 지지난 봄날의 금강의 하늘도/ 그 하늘 속의 어리디 어린 잔별까지도/ 내 가슴 깊이 골을 타내리는데/ 그대가 남기고 간 곡옥(曲玉)의 눈물처럼/ 이제 무서리 깊어지면 어이하리.// 짧은 날의 가을비 마냥 내리고/ 산색 또한 저홀로 깊어지면/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길은 저물고/ 어느 찬란한 그믐밤,/ 촛대에 이우는 꽃잎과 같이/ 그 꽃잎 속을 건너서 걸어오는 그리움같이/ 이제 새 병이 돌아오면 어이하리.// 가을 강의 그 짙푸른 하늘 속으로/ 저홀로 찾아왔다 저홀로 떠나가는/ 사랑은 한갓 떠돌이별의 비유일 뿐,/ 사랑이여, 별 같은 너와 나,/ 눈물어린 눈으로 기르던 꽃밭 속의 수정돌같이/ 그 수정돌에 얼비치는 비비새의 울음과 같이/ 이제 한 목숨 땅에 지면 어이하리.// 하늘에서 하늘로 사라지면 어이하리.//

 

웃자란 어둠 / 박정만

그 수수로이 해맑은 저녁,/ 연자방앗간 옆 도랑의 조약돌이 수런거리고/ 어머니의 늦은 머릿수건에/ 먼 산 빛이 독사진으로 어리던 그 때.// 아버지는 수수미틀 일거리로/ 반백의 머리칼로 돌아오시어/ 밀주 한 대접으로 도적(桃赤)게 처럼 얼굴 불콰해져서/ 시시부지 사라지는 하늘을 보며/ 뜰앞의 난초순을 바라보셨지.// 어머니의 앞치마에 어리던 장작불도/ 해 저문 저녁참을 거들어 주고/ 울타리 밑의 토란잎에 듣는 이슬 방울은/ 한마디로 별빛이 모이는 장소였어.// 웃자란 어둠이 모여서 별이 되는 곳,/ 호박순과 우엉잎과 모란의 꽃잎,/ 그 하나하나에 나는 눈길을 주며/ 엔간히 초저녁 초록별을 바라보았지.// 키 크고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지금도 역시.//

 

행복한 잠덧 / 박정만

희미한 초롱불 창호지에 어리던 저녁,/ 먼 대숲마을의 바람소리도 봉창에 들어/ 앙갚음같이 앙갚음같이 봉창에 들어/ 안방 웃녘에 왕골로 수놓은/ 돗자리의 꽃잎에 앙금앙금 기어가 앉고// 띠톱 같은 소리로 귀울음도 돋아나/ 내 어린 잠덧 속으로 파고들었지./ 나는 귀산(歸山)의 몸짓으로 깊이 잠들어/ 갈매나무 잎사귀의 어린 별빛도 보며/ 뭉게뭉게 그냥 잠에 취해서/ 못질하듯 그냥 깊은 잠에 취해서.// 삼월삼짇날 밤은 으례히 봄비./ 우리 동네 이쁜 처녀 윗고을로 시집을 갈 때/ 의패잡이 어깨에 한숨으로 내리던 봄비,/ 잘 자거라, 내 어렸을 적/ 꿈이며 조약돌이며 수수깡 같은 것들./ 밤마다 뒤척이며 바라보는 행복한 잠덧.//

 

토라진 겨울 / 박정만

겨울잠에 시들어진 삼밭 속에서/ 대궁이도 없는 것이 한바탕 순을 내밀어/ 싸가지 반푼어치도 없는 말로 말을 하는데/ 추우면 솜바지를 껴입어야지/ 하고는 내 배꼽에다 깔깔거리고 웃는 거였어.// 그 때는 영 춥고 배고픈 시절이어서/ 떨어진 고무신도 새끼줄로 동여매고/ 눈밭길로, 눈밭길의 얼음길로 귀때기에 찬바람 쐬며/ 십 리고 이십 리고 가던 시절이었는데/ 강추위에 초가 처마 밑엔/ 두 자 세 치쯤의 오동통한 고드름도 열리고/ 장대로 두두려 패서/ 그것들 토담 밑에 모로 쓰러지게 만들었는데// 그 토라진 겨울,/ 겨을잠에 시들어진 삼밭 속에서/ 영 글러먹은 삼 싹이 고개 내밀고/ 옘병할, 거지발싸개 같은 말로/ 자지 내놓고 오줌 싸면 그냥 고드름되지/ 하고는 내 터진 바짓가랑이 보는 거였어.// 낄낄낄, 앵돌아진 그 겨울의 따뜻한 햇볕.//

 

유향(遺香) / 박정만

파초잎으로 걸어가는 저물 때의/ 저 이상한 어둠 속으로/ 콸콸거리는 물소리 듣긴 들었었네만/ 내 마지막 저녁잠을 누가 지키랴.// 콩풀 따던 서녘 창엔/ 쾌남아 몸짓으로 비가 내리고/ 푸르대콩 대궁이에도 시시각각 봄빛이 누워/ 아참, 암담하고 암담하구나.// 콩탕국을 조금은 먹고 싶었는데/ 수연증(手軟症)이 너무 심해/ 발록구니처럼 그냥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덧저고리에 코피도 흘려버렸네.// 이것이 나의 데드 엔드(막다른 골목),/ 산 후취(後娶)로 모질게 살() 받으며/ 우적우적 통김치나 씹어서 먹는/ 나는 더럽고 천대받은 우졸(愚拙)한 사람.// 차월피월(此月彼月) 죽음을 미루긴 하나/ 낭떠러지 험한 바위산에 놓인 셈이고/ 때 만나서 반듯한 세월이 오면/ ()반자에 가로 세로 틀을 놓아서/ 종잇장 하나로 용마루에 오를 셈이네.// 그 향기를 나머지 사람에게 주게.//

 

보리개떡 / 박정만

앞산의 푸른빛도 언필칭 기울어 갈 때/ 늦은 저녁잠을 슬쩍 달래어/ 가마솥에 댓바리로 쪄 주던 보리개떡,/ 멍석 옆의 모깃불도 꺼져버리고/ 하늘엔 그녘 땅의 별빛만 총총하게/ 미리내 건너가는 다리를 놓았었지만// 어머니와 나는 맞받이로 앉아서/ 맞은바래기로 하늘을 보며/ 보리개떡에다 별무늬의 잇자국도 남기며/ 수알치새 같은 어둠도 보며/ 두 벌 잠 자고 난 누에같이 이야기했네.// 지등롱(紙燈籠)은 문밖에 내걸리어/ 지란(芝蘭)과 귀엣말도 주고 받았고/ 돌쩌귀엔 가타부타 귀뚜리 울음도 살아/ 지르르 여름밤을 속여 놓았네./ 대싸리엔 어둠을 몸에 달고/ 담록색 꽃이 닥지닥지 피어서/ 한 무더기 기름떡처럼 뭉쳐 있었고,/ 겹사돈하듯이 맺어진 이웃집 담장 너머/ 배나무 몇 그루와 살구나무들.// 보리개떡으로 불러 보는 입찬 말소리.//

 

지랄병의 샴푸 / 박정만

산빛으로 문질러간 지릿내의 오후,/ 가지는 자줏빛으로 자지가 되어/ 한 여자의 질 속으로 그냥 흘러나가고/ 고추밭의 고추는 된서리에 젖어서/ 치사하고 더럽게 핏대를 세우기도 하고,// 썩어 문드러질 이 피리젓대./ 샴푸라니, 물방울에 녹아나는 샴푸,/ 꼼짝없이 방에 갇혀 하룻밤을 세우는 샴푸,/ 지랄병의 샴푸,/ 때때로 머리칼을 쥐어뜯기도 하는 샴푸,// 겁없이 도리질로 잔도 받으며/ 이 시대와 저녁 잠을 함께 하지만/ 눈구멍엔 허황한 바람이 일고/ 엉겁결에 팔베게로 곤한 잠도 청해 보지만/ 보지만 보지만 보지만 보지만// 샴푸로 머리 감고 샴푸가 되는 샴푸.//

 

 

 

시인 박정만

1987년 여름... 두 달동안 오백병의 소주를 마시고, 삼백편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詩人 박정만 출판사 고려원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박정만 등 7명이 보안사로 끌려갔고, 며칠간 무자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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