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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조절 잘하기 / 이현일

부흐고비 2021. 10. 6. 15:24
번역문과 원문


일어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렵기로 분노만 한 게 없다.

易發難制, 莫忿懥若.
이발난제, 막분치약.

- 이현일(李玄逸, 1627~1704), 『갈암집(葛庵集)』권22 「징분잠(懲忿箴)」

조선후기 문신·학자 이현일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11년에 간행한 시문집, 본집 29권 15책, 별집 6권 3책, 부록 5권 3책, 합 40권 21책. 목판본.

 

 

해 설


추석 연휴의 어느 날, 학습지를 풀던 큰딸이 갑자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연휴라서 엄마도 아빠도, 학습지 선생님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쉬는 것 같은 그런 때에 왜 자기만 연휴 내내 이 학습지를 매일 꼬박꼬박 풀어야 하냐며... 그러더니 결국에는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습니다. 분통 터뜨리는 거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엉엉 우는 꼴까지는 두고 볼 수 없어, 이번엔 부녀지간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학습지 푸는 아이와 부모 간에 수없이 오갔던 그 말, “너 그러려면 학습지 끊어!”가 새삼스럽지 않게 또 터져 나왔고, 그렇게 옥신각신 오랜 설득 끝에 결국에는 국어 학습지를 네 장에서 두 장으로 줄이는 것으로 간신히 타협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견 대기업 노사 간의 임금협상 못지않은 30분 넘는 릴레이 협상 끝에 간신히 극적인 타결을 봤지만, 큰딸은 “아빠랑 이렇게 길게 얘기할 시간에 국어 두 장 더 풀었겠어!”라며 끝내 핀잔을 날리고 말았습니다.

큰딸에게 왜 그렇게 하기 싫어하면서 학습지를 계속하냐고 물어보니, 같은 반 친구들보다 더 공부를 잘 하고 싶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불타오르는 그 학구열이 언제까지 갈까 걱정이지만, 돌아보면 간단한 놀이나 게임 하나도 남한테 지는 게 싫어서 씩씩대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큰딸과 승부를 겨루는 놀이를 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질 수 있을까?’ 하고 머리 굴리는 게 아빠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의 호승심(好勝心)은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로 표현되고, 그 분노는 다음에는 꼭 이겨야겠다는 동기 부여의 장작을 타오르게 하곤 합니다.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 썩 안 좋게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분노이지만, 어느 정도 적당한 분노는 경쟁심을 고취하면서 나름 긍정적인 동기 부여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공부를 잘 하신 분 중 하나인 공자님의 공부법에 보면 ‘발분망식(發憤忘食)’이란 말이 있습니다. 너무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밥 먹는 것도 잊는다는 건데, 이 중에 ‘성낼 분(憤)’자가 쓰이는 게 제법 흥미롭습니다. 물론 여기서 ‘분’자는 ‘분발하다’는 뜻에 더 가깝긴 하지만, 이처럼 ‘분(憤)’자는 ‘분(奮)’자와 종종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당한 분노는 분발(奮發)이나 분기(奮起)로 이어지면서 때로는 큰일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동인(動因)이 되곤 합니다. 어쩌면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의병(義兵)을 일으켰거나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조상님들의 의기(義氣) 속에도, 옳지 못한 것에 대해 발발한 분노의 감정이 적지 않은 몫을 차지했을 겁니다.

하지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은 「징분잠(懲忿箴)」이란 글에서,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연히 내려 받아 지닌 7가지 감정 중에서 가장 일어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분노’를 거론하며 이를 억누르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적당한 분노는 좋은 분발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너무 과한 분노의 발발로 수많은 문제들을 초래하곤 합니다. 수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PC방 살인사건 또한 과도한 분노가 초래한 끔찍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나 요즈음은 세상에 흉흉하다 보니 분노에 차 있는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볼 수 있고, 분노를 잘 못 참는 사람들을 두고 ‘분노 조절 장애’가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일상 어디든 분노의 현장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지만, 아마 가장 흔한 곳은 운전자들끼리 부대끼는 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얌전한 사람도 간혹 운전대만 잡으면 난데없이 크락션 난타와 난폭한 핸들질을 통해 내 안에 꿈틀대는 분노 조절 장애를 여실히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불치병 같은 분노 조절 장애가 일순간에 치유의 기적을 맞는 현장이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한 유명 격투기 선수가 소형차를 몰고 운전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난폭 운전을 해가며 계속 그 소형차를 위협했습니다. 급기야는 앞길을 가로막아 차를 세우더니 운전석에서 뛰쳐나와 육두문자를 퍼부으며 당장 내리라고 다그치며 험악하게 소형차에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여성 운전자가 벌벌 떨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그 조그마한 차 안에서 갑자기 칠척 장신의 험악한 거한이 등장했습니다. 그러자 중증의 분노 조절 장애는 기적의 치유를 거쳐 어느새 ‘분노 조절 잘해’로 탈바꿈했다는 일화입니다.

앞서 갈암 선생은 인간의 7가지 감정 중 분노를 가장 제어하기 힘들다고 역설했는데, 위의 경우에는 어떻게 이처럼 쉽게 제어할 수 있었던 걸까요? 공자님은 『논어(論語)』에서 이 분노 조절 장애의 특효약에 대해 제대로 처방하신 바 있습니다. 바로 ‘화가 나면 어려움을 생각하라[忿思難]’는 말입니다. 앞서 난폭 운전자 역시 소형차를 상대로 기세등등 화를 냈지만, 그 차에서 자신을 한주먹거리로 만들 것 같은 칠척 거한이 등장하니 당장 눈앞에서 그 거한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을 떠올리며 금방 분노를 제어할 수 있었던 겁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참 많이도 분노하곤 합니다. 앞서 말했듯 적당한 분노는 때로는 긍정적인 동기 부여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과도한 분노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뜻하지 않게 분노 조절 장애에 휩싸여 머리가 뜨거워질 때면, 나중에 뒷수습할 어려움을 생각하며 차분히 머리를 식히는 비결을 항상 명심해야겠습니다.

 

글쓴이 : 허윤만(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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