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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줍다 / 김순일
별이 서늘한 가을날/ 우산재 앞 공원에서/ 낙엽을 줍는다.// 벌레 먹고/ 병들고/ 거무칙칙하고// 세월에 할퀴고 찢긴/ 은행잎을 줍는다.// 상처 많은 나/ 나를 줍는다.//
누구인가 / 김순일
누구인가, 나의 주인은// 개심사 대웅전에서 나를 열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인도에 갔습니다 발바닥에 피가 맺히고 맺히도록 걷고 걸어 부처를 찾았습니다/ 견성하였다는 네란자라 강가 보리수 밑에 앉아 부처에게 묻고 물었습니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어찌 너의 주인을 나한테 와서 찾느냐, 너무 멀리까지 왔구나 어서 일어나 너한테로 가보아라’/ 나의 등을 떠미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거르지 않고 찾아 먹는 세끼 밥인가/ 나를 감싸고 다니는 옷인가/ 신발인가 신발 속 그 고린내인가// 네 살 박이 손녀아이가 엄마아빠놀이 하자며 ‘여보 여보’ 부르는 여보인가// 아니면 눈인가 귀인가 코인가 입인가 매일 불을 다듬는 성기인가?// 평생 속고 속으며 살아온 내가/ 나의 주인인가//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 김순일
아이들이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오메아베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할메할아베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스승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제자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말의 전당에 말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광장에 함성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강 가에 물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산 산에 푸나무 새들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바다에 고래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목탁소리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코오란의 웃는 눈물이 없습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웃는 눈물이 없는 여기는//
서산(瑞山) 사투리 1 / 김순일
내 얼굴에는 늘 바보스럽게 헤에 웃는 웃음이 붙어다녀서 사람되기는 다 틀렸다고 한다 피사리를 가서도 피대신 벼를 뽑아 놓고 헤에 웃는다고 주인한테 퇴박맞고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에 나와 웃는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하루종일 재수없다고 사람들은 투덜댄다. 막걸리 냄새만 맡고도 절로 나오는 그 바보스런 웃음 때문에 술맛이 없다고 잘 끼워주지도 않고 초상집 시신 앞에서까지 웃는다고 뺨을 맞으면서도 헤에 웃는다./ 병원엘 가 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절에도 갔었지만 헤에 웃는 나를 내려다 보시던 부처님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지성드릴 게 따로 있지 어서 가라고 한다./ 〈무슨 웃음이 그렇지 부처님도 꼭 바보스럽구먼〉/ 나는 시무룩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서 별 희한한 일이라도 엿본 듯이 헤에 웃는다//
두 그루의 가시나무 -부부 / 김순일
부부는/ 두 그루의 가시나무// 꽃그늘 속에서/ 사랑사랑 사랑노래를 부르다가/ 자작자작 금이 가기 시작하면/ 가슴에 가시가 돋아나고/ 혀에도 가시가 돋아나고/ 눈에도 가시가 돋아나고/ 웬수 웬수가 된다// 파경이 되지 않도록/ 장미를 가꾸듯/ 아카시아를 키우듯/ 서로/ 거름도 주고/ 북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며/ 가시가 있는 듯 없는 듯/ 평생 가슴을 맞대고 살아야 할// 부부는/ 두 그루의 가시나무//
나의 손으로 하늘을 열어준 옥잠화 꽃 대궁은 / 김순일
무성한 넓은 잎이/ 두겹 세겹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잎을 떼 내고 꽃 대궁의 하늘/ 길을 열어 주었다./ 태양이 뜨거운 가슴에 안기기만 하면/ 수태 할 거라고 믿은 나의 손/ 땅 속 어둠의 담금질을 몰랐다/ 하늘을 가린 완강한 잎을 여린 머리로/ 치밀고 올라온 땅속/ 어둠이 받쳐주는 힘으로 치밀고 올라온/ 옥잠화 꽃 대궁이/ 태양의 품에서 황홀한 몸을 부르르 떨 때/ 내 절간의 자궁에서/ 일곱 달 만에 문을 열고 태여나/ 서산 시장 바닥에서 막걸리나 퍼 마시며/ 비척거리는 나의 칠뜨기/ 시 처럼 무지몽매한 나의 손으로/ 하늘을 열어준 옥잠화 꽃 대궁은/ 살의 언저리가 너덜너덜 찢긴 채/ 흐였게 웃고 있었다.//
눈물꽃 / 김순일
초원에서 푸른 노래를 먹고 뛰놀던 말의 혀가 보이지 않네/ 말랑말랑한 파아란 말, 풀꽃들의 노래가 얼음벽에 갇혀 있네// 얼음송곳 같은 말의 점령군이 섬의 요새에 높이 높이 성을 둘러치고 제 입에/ 맞지 않으면 하늘 말도 퇴박이네// 새들이 비척비척 노래의 날개가 부러진 지 오래/ 벌 나비들이 비실비실 둥그런 알을 슬지 못하네// 나루로 건너오던 파아란 물의 말들이 얼음 섬을 멀리 비켜 서해 소금바다로/ 나가네 소금물로 귀를 싹싹 닦고 있네// 설악산에서 내려왔다는 목탁이 같잖게 부처 흉내를 낸다고 난도질을 당하고/ 피를 쏟으면서도 얼음 박힌 섬의 초원에 파아란 종소리를 뿌리네// 햇살 같은 땅 냄새 같은 물소리 같은 바람 소리 같은 파아란 말이 봄비처럼/ 가슴에 스며들어 속삭이네// ‘사랑해요!’/ 얼음 박혔던 말의 초원에 그렁그렁 눈물꽃이 피어나네//
등잔불 / 김순일
희망 주고/ 마음을 밝혀주기 위해/ 등잔불 너를/ 불태우는구나// 아 춥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소녀 스르르 잠이 든다/ 너 홀로 남겨 둔 채// 그렇지만/ 꺼지지 않고 붉게 태우며/ 나를 지켜 주고/ 다시 일어나라 깨워 준 너// 세월이 흘러/ 새로운 문명에 밀려났지만/ 그립다/ 다시 보고 싶구나//
저녁 밥상 / 김순일
여름밤/ 무더움이 숨 고르기 할 때/ 멍석 위에 차려진/ 어머님의 손맛 난 칼국수// 온 가족이 모여/ 도란도란 하루를 풀어낼 때면/ 하늘에/ 촘촘히 보이는 별빛/ 저녁 밥상 위에 쏟아지는 웃음// 달빛도 시샘하며/ 밥그릇에 가득/ 식구들 마음에 둠 북/ 행복이/ 달빛을 먹는다//
코로나19 / 김순일
너는 어디서 온 누구냐/ 여기는/ 왜 왔어/ 그래 인간이 자연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해서/ 항변할 말도 없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살고 싶으면/ 마스크 쓰고 거리두기 하면서/ 집콕 생활로 반성하고/ 자연을 숨 쉬게 해 달라하네//
산소 / 김순일
좁다랗게 풀 냄새 난 오솔길/ 바람에 나무들이/ 서로서로 비비며 반기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찾아온 산소// 할아버지/ 두 할머니/ 아버지가 누워계신 묘소// 목 놓아 큰 소리로 부르면/ 허공에 메아리 되어/ 응원하고 계시네// 또 오겠습니다//
타작 / 김순일
집 마당에/ 반은 콩가리/ 나머지 보릿가리/ 할머니와 어머니 타작하시네// 도리깨질로/ 할머니가 찰싹/ 어머니가 찰싹/ 땀방울이 숨차게 춤을 추네// 도리깨질 장단에/ 세상에 뛰쳐나온 콩 보리/ 껍데기는 바람에 날려가고/ 결실이 주는 기쁨이 가득하네// 농자는/ 천하지대본/ 알알이 쌓이는 행복/ 콩밥 보리밥이 먹고 싶어지네//
딸을 위한 기도 / 김순일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 급히 달리지 말고/ 천천히 가야 할 길// 너 가다가/ 새싹이 보이거든 보면서/ 꿈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너 가다가/ 작열한 빛이 뜨겁거든/ 열정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너 가다가/ 황금빛 들판을 걷거든/ 결실의 고마움에 인사하고// 너 가다가/ 칼바람의 눈보라를 맞거든/ 빨갛게 핀 동백의 인내를 배워 실천하고// 삶이 뜻대로 안 될 때도 주눅 들지 않고/ 세월을 뜨개질로 짜가는 길/ 그것이 인생길을 걷는 거라고//
길들어져간 나 / 김순일
사람은/ 타고난 천성이 있다.// 성격 참 급하고 불같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다른 일은 손도 못 대고/ 하늘이 무너져도 해버린다// 나의 원칙에 어긋난 꼴을 못 보고/ 자신조차 용서 못 하는/ 참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정년퇴임 후에 만난 다른 세상에 사람들/ 화를 내도 흥분하지 않고 따지지 않으며/ 설득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봤다// 숨차게 걸어 온 세상/ 깊어진 여유와 숨 쉴 공간에/ 길들여져 간 나의 모습을 본다.//
웃음을 돈사려고 / 김순일
오늘도 가을 하늘 같은 파아란 웃음을 돈사려고 서산장터에 나가네 한바지게 풀어놓고‘ 진짜 웃음 사가유 원조 바보 웃음 이유 싸구려 싸구려유’ 목이 터져라 호객을 하지만 이젠 서산 촌놈도 서울사람 뺨치는 깍쟁이가 되어서 싸구려 웃음 따위는 거져준다 해도 쳐다보지도 않네 값비싼 서울의 냉동웃음에 인이 박힌 아이들은 더더욱 들은 척도 하지 않네// 네팔 산골이나 몽골 초원의 아이들이랑 어른들의 그림자 없는 웃음을 시장바닥에 부려놓고 케냐의 어느 바닷가에 사는 파아란 웃음 푸지게 풀어놓고 거져준다 해도 모두 가난한, 미개한웃음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네// 오늘도 원조 바보웃음 돈사려고 한짐 땀나게 짊어지고 서산 장터에 나온 나의 바지게를 태깔 반드르한, 얼음 박힌 웃음들이 툭툭 차고 그냥 지나가네//
범종에게 / 김순일
코끼리 할미할아비 삶아 먹고 웃느냐/ 코끼리 어미아비 삶아 먹고 웃느냐/ 코끼리 서방 삶아 먹고, 마누라 삶아 먹고 웃느냐/ 코끼리 새끼 삶아 먹고 웃느냐/ 입술에 흐르는 하얀 피/ 너, 정녕/ 눈물이 되겠느냐//
깡통 / 김순일
골목길에서 밤새 알몸으로 떨고 있는 사랑을 모셔옵니다/ 공원이나 놀이터에 몰래 내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단물 한 방울까지 다 빨아먹고 냅다 차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구둣발로 납작하게 뭉개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주식시장 바닥에 코풀어버린 사랑을 모셔옵니다/ 새벽마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쓰레기 사랑을 모셔오는 노파/ 주일날이면 무거운 다리 가볍게 끌고 나가/ 척박한 자선 상자에 꼬깃꼬깃 접은 할미꽃 사랑을 심습니다//
고비사막에서 수박꽃을 만나다 / 김순일
발광한 태양이 가시처럼 탱탱해서/ 생각이 깊은 그늘 한 바가지 동냥하기 어려웠네/ 범종소리의 품보다 이슬 한 방울이 사랑이었네/ 불모래벌에 삼끈 같은 목줄을 늘이고/ 아리디 아린 꿈을 키우는 수박넝쿨/ 물 쓰듯 퍼마시며 살면서도 갈증이 솟는/ 나의 샘이 모래언덕이었네/ 비쩍 마른 이슬 한 방울 받아먹고/ 피어 있는 수박꽃 씨방에 겨자씨만 한,/ 하늘의 자식이 숨쉬고 살다니!/ 무등산 수박을 갈라놓고도 투정을 부리던/ 나는 오늘/ 너의 쥐불알만 한 신 앞에 무릎을 꿇었네/ 물 담은 구름을 애걸하지 말아야지/ 나를 짊어지고 터벅터벅 길을 찾아가는//
벽 -시의 날개 / 김순일
내가 처음 시의 벽을 타고 넘으려고 날개의 깃털을 키울 때 은사 한성기의 ‘바람이 맛 있어요’를 매일 숨쉬며 살았지 만나는 이들 모두 ‘나’의 숨소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서정주에 푸욱 빠졌을 때는 ‘질마재 신화’를 가슴 깊이 품고 살았는데 나와 살을 맞대고 살겠다던 시의 여신이 나의 살냄새가 없는 나하고는 살맛이 없다고 떠나버린 거 있지// 날개를 접고 만해의 깊고 넓은 바다에 닻을 내리고 살면서 ‘임의 침묵’이 내 시의 젖줄이라고 믿었었지 그런데 네 영혼은 어느 절 수행승으로 놔두고 왔냐며 사람 맛이 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거야// 우유니 소금사막*을 건너가듯 시의 갈증을 풀어 줄 푸른 숲을 찾아가던 내 시의 날개는 어디서 파닥이고 있을까 하염없이 집으로 돌아온 봄날// 수선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노랑노래 소리가 들린다며 나비손짓을 하는 다섯 살배기 손녀!// 그 손녀 아이가 내 시의 날개가 날아 넘어야 할 벽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네//
* 볼리비아에 있는 세계 제일의 소금사막
아주 가까이 -부처를 만나다 / 김순일
높고 높은 산 고찰로 찾아다녔다/ 깊고 깊은 산 토굴로 찾아다녔다/ 부처는 없었다/ 멀고 먼 인도까지 찾아다녔다/ 부처는 없었다/ 다 버리고 돌아왔다/ 나의 집 마당가 풀잎 위에서/ 바람과 함께 살랑살랑 노닐고 있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물에도/ 새 벌레 짐승 나무 잡초……그 눈빛 속에/ 그동안 찾아 헤매던/ 부처가 살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 살고 있었다//
미꾸라지 사원 / 김순일
진흙펄이 나의 씨방이고 젖줄이지/ 하얗게 시린 물의 대궐은 숨통이 막혔어/ 동네방네 휘젓고 다니며/ 흙탕물을 쳐대야 삭신에 기름이 돌았어// 철이 엉덩이에 뿔이 나는 나이가 되면서/ 오메 아베가 창피스러웠고/ 하늘이 내가 꿈꾸는 사원이라는 것을 알았어// 비가 내릴 때마다 하늘젖을 받아먹으며/ 해와 함께 살아야 해/ 달과 별과 함께 살아야 해/ 오메 아베가 진흙펄에 가둘수록/ 머리를 곧추세우고 날개를 키웠어// 동아줄 같은 비가 내리던 날/ 하늘을 향해 힘차게 올라갔어/ 날개를 펴려던 파란 꿈은/ 하늘 벽에 부딪쳐 머리통이 터지고/ 만신창이 땅바닥에 메탱이쳐진 나는/ 흙탕물에 휩쓸려 둠벙으로 되돌아오고 말았어// 진흙펄이 나의 상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어/ 그때 무지개를 보았어/ 내가 사는 둠벙에서 날개를 펴고 일어나/ 들판 건너 산 넘어 연못에 뿌리를 박고 있는/ 무지개를 보았어/ 진흙펄 속 오메아베의 사원을 보았어//
사막으로 가는 길 / 김순일
하늘엔 지팡이 짚고 오는 늙은 구름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가출한 태양의 집엔 사내의 불잉걸만 이글이글/ 계곡엔 갈비뼈만 앙상한 바위의 자식들만 자글자글/ 나무뿌리에서는 툭툭 불거진 폐유덩이가 느물느물/ 나의 침실엔 폭염의 자식들만 찐득찐득/ 강물이 흐르기를 멈춘 성기엔 사막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만해와 간디를 엿듣다 -간디의 묘소에서 / 김순일
우리는 우리의 말이 삶의 집이고 밥이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태풍이 휘젓고 들쑤시고 지나간 뒤 더 싱싱해진 바다를 보십시오 팔다리가 더 튼튼해진 풀과 나무와 벌레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말이 삶의 피라고 믿었지요/ 공룡도 잠간/ 불개미를 보십시오 억만 년을 저렇게 살아오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말이 삶의 길이라고 믿었지요/ 부처는/ ‘나는 없다 나의 말 토시 하나까지도 다 버려라’ 하였다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의 씨앗을 뿌리고 왔지요// 둘이는 파아란 하늘 자락에 앉아,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파랗게 웃고 있었어요//
옷 - 시크교도의 나체 행렬과 맞닥뜨리다 / 김순일
바라나시 갠지스강 가트에서 시크교도의 나체 행렬고 맞닥뜨렸습니다// 밀림의 사자처럼 당당한 알몸이 야생마처럼 탱탱한 숫기가 나를 덮쳤습니다 초라한 나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어 갠지스강물에 가랑잎처럼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허푸허푸 물을 켜는데 시궁물 똥오줌물 땟국물 뒷물이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따뜻했습니다 함께 어우러져 넘실넘실 소금바다로 흘러가면서 비로소 나의 나를 보았습니다// 몸을 받들어 모시는 나의 사랑은 맹목이었습니다 철창이었습니다 죄인이로소이다 죄인이로소이다 무릎은 꿇게 만드는 밥만 배불리 먹였습니다 주눅들은 새침떼기로 키우는 몸통 없는 날개였습니다// 화장 가트에서 정강이뼈를 배불리 뜯고 나와 꿀레 붙은 견공의 눈빛은 갠지스 강물에 노니는 해님처럼 반들반들 빛났습니다 골목길을 터벅터벅 빠져나와 꼬리를 살래살래 시일실 웃음을 흘리며 암내 물씬 풍기는 궁둥이를 따라가는 탁발소를 보면서 내가 지겨워졌습니다// 누구냐 어디냐에 따라 하나하나 참견하고 심지어 잠자리까지 이래라 저래라 사육해온 내가 지겨워졌습니다 나는 넘실넘실 난바다로 나갔습니다 소금물이 되어 터놓고 살기로 굳혔습니다// 나의 철창에 갇혀 살던 풀 나무 벌레 짐승이며 새들이 날개를 펄펄 펴고 날아오릅니다 암내를 부끄럽다고 손바닥으로 가리고 살던 암컷도 비릿한 교성을 앞세우고 수놈을 따라 날아오릅니다 햇빛처럼 흙냄새처럼 물소리처럼 자연스럽습니다 화사한 봄바람입니다//
부처바위에게 / 김순일
강천산 바위에 갇혀 사는, 부처라는 네가 소한 칼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떨고 있구나// 너의 이목구비 아직도 뚜렸해서 부처 되기는/ 너의 허벅지 아직도 튼실해서 부처 되기는/ 너의 척추 아직도 강직해서 부처 되기는/ 너의 살덩이 아직도 피둥피둥해서 부처 되기는// 어제는 한지를 만나고 왔지// 닥나무의 부리부리한 눈 떼내고 벌룽거리는 코 떼내고 재재발기는 혀 잘라내고 세상 바람에/ 기웃대는 귓바퀴 잘라내고 척추를 발라내고 마지막 남은 살덩이 까무러치게 패대고 한 점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몽둥이질 해대고 허깨비 마음이란 년까지 투명한 물로 씼어 내버린 한지를 보고 왔지// 내일은 금강야차와 몽둥이를 데리고 와 바위를 부수고 너를 불사르겠다 재도 남지 않게 지운/ 너를 한지에 그린 수묵담채화의 여백으로 담겠다//
무불암(無佛庵) / 김순일
내 입에 늘 붙어사는 헤에 웃는 바보스런 웃음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절간에 갔을 때 치성드릴 게 따로 있지 어서 산을 내려가라며 헤에 웃던 그 부처가 보이지 않네/ 절간 이름도 무불암, 옷자락만 쬐끔 보였는데 눈에 번쩍 뜨이도록 대광사大光寺로 바뀌었네 법당에 들어가 가만히 둘러보자니께 헤에 웃던 그 부처 자리에 하! 하! 하! 웃어재끼는 대불大佛이 앉아 있네 호골주 한 잔 철 철 넘치게 따라주면서 헤에 웃음 떼고 하! 하! 하! 웃으라 하네/ 이제 사람 노릇하겠구나 어깨 펴고 큰 걸음으로 사는데 마당에서 함께 뒹굴며 놀았던 누렁이가 꼬리를 샅 밑 깊숙이 내리고 뒷걸음치며 멍! 멍! 멍! 울어대네//
하루살이 / 김순일
하루살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 일이지// 무슨 말씀,/ 나는 하늘이 준 하루를/ 더도 덜도 아니게/ 땀나게 살다 황홀하게 죽을 뿐// 당신은 얼마나, 어떻게 살다 가는데?/ 120년을 받았다고?// 천년만년도....../ 눈 깜짝할 사이가 아닌데// 하루와,/ 80 또는 90년, 120년을 산다해도/ 게가 게// 찰나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가출 / 김순일
바람이 식식거리며 달려온다 오메아베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만을 기다리던 거미새끼들은 멀리 멀리 떠나갈 준비를 하느라 설렌다. 높높이 올라가야 더 센 바람을 만나 한 발이라도 멀리멀리 날아갈 수가 있다. 머뭇머뭇하다가 오메아베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새끼들은 ‘물가에 가지마라 높은 나무에 올라가지 마라 서쪽은 삼살 방이니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오늘은 김가 성을 가진 녀석을 만나지 마라’ 허구헌 날 ‘마라마라 !’속에서 기를 펴지 못 하고 늙어 꼬부라지게 되지 더러 가출을 해 보기도 하지만 오메아베 밑에서 기를 펴지 못 하고 살아서 동네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땡볕에 오그라들거나 추위에 얼음이 박히거나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지 못 해서 노숙자의 발치께도 기웃거리지 못 하고 비실비실 돌아오는 녀석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 일찌감치 오메아베의 그늘에서 벗어나 멀리 멀리 새 세상으로 가출한 거미새끼들은 기름진 영토에 높은 성을 쌓고 어깨를 으쓱으쓱 뻐기며 사는데 그 성주의 새끼들 또한 세고 센 바람을 기다리며 오메아베의 성밖 멀리 멀리 떠나갈 준비를 하느라 남몰래 바쁘지.//
공룡 -산성비 69 / 김순일
공룡의 발자국 앞에서/ 입이 닫혀지지 않았네// 그 산보다 높은 힘 앞에서/ 누가 머리를 들 수 있었으랴// 멸종한/ 공룡의 화석 앞에서/ 나를 보았네// 우주까지 정복하겠다고/ 기고만장한/ 나의 묘비를 보았네//
질주 -산성비 80 / 김순일
터덜터덜 흙먼지 날리던/ 신작로가 곧고 넓게 포장되고/ 차량들이 총알처럼 달린다// 고양이 쪽제비가/ 넓죽 넓죽 깔려 죽고// 느릿한 사투리들이/ 길을 건너기도 전에/ 저승길이네// ‘빨리 빨리’ ‘비켜 비켜’/ 긴급 수송차의 경보소리// 가슴 속 후들후들근하던/ 촌 아낙네들이었는데// 또 하나 저승길이구먼// 예사롭게/콩밭을 매고 있네//
도깨비 장난 -산성비 92 / 김순일
방망이를 두드려/ 금싸라기 같은 땅을/ 더도 말고/ 여의도 만큼만 준다면/ 나를/진짜 신으로 모시겠니// 방망이를 두드려/ 곰의 쓸개랑 발바닥을/ 한 달에 한 마리치씩 대주면/ 나를/ 진짜 신으로 모시겠니// 방망이르 두드려/ 황금의자 하나 지어 놓고/ 제일 높은 감투 하나 씌워서/ 남이고 북이고 동이고 서이고/ 네 마음대로 놀게 해주면/ 나를 진짜 신으로 모시겠니// 아니면/ 방망이를 두드려/ 하늘에 사는 부처도 예수도/ 모두 지옥으로 내몰고/ 황금사원 하나 지어주면/ 나를/ 진짜 신으로 모시겠니// 그건/ 한밤중/도깨비 장난// 날이 새면/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사람을 찾습니다 -숲의 나라 68 / 김순일
칠뜨기를 찾습니다/ 낙엽이구 지전이구 다 그게 그거지/ 면장이구 이장이구 다 아제 아제 살던/ 칠뜨기를 찾습니다/ 조무래기들에게 삐비도 뽑아주고/ 거시침 흘리면 개구리 뒷다리도 삶아주던/ 칠뜨기를 찾습니다./ 제비꽃이 피면 제비꽃 속에서 뽀뽀하고/ 흘레붙은 잠자리를 쫓아다니며 헉헉거리던// 칠뜨기를 찾습니다/ 부처하고 불알도 대보고/ 예수하고 어깨동무하고 해해거리던/ 그러면서도 비 오는 날/ 도깨비불을 제일 무서워하던// 칠뜨기를 찾습니다./ 어려서나 조무래기 대장이 되어서도/ 그냥 칠뜨기로 사는//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 / 김순일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코 박고 쓰러질 술독을 안고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장미의 허벅지에 파묻혀 코피를 쏟으러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결핵균이 득실거리는 금두꺼비를 훔치러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비수를 품고 반역을 꾀하러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너섬에 지천으로 득실거리는 말의 금니빨을 박으러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비구니의 바랑 속 금부처를 넘보러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하늘 닿는 대궐의 십자가를 보쌈하러 간다/ 내 속의 시커먼 털복숭이 손이 허깨비 나를 찾아 룸비니로 예루살렘으로 쏴다닌다//
파랗게 빈 날 -황금산에서 / 김순일
황금산에 오른다 바람소리 파랗다/ 가로림만 들고 나는 물소리 파랗다/ 정상에 내려와 노니는 하늘이 파랗다/ 갈매기가 날아간다 멀멀리 한 점 파랗다/ 바닷가 조약돌처럼 자글자글 끓던/ 나의 가슴 속 잠시 한 때 파랗다//
해장국을 먹으며 / 김순일
해장국을 먹는다./ 저자 마당 좌판 앞에 즐펀히 앉아/ 막걸리 한 대접 들이키고/ 허섭쓰레기 곰끓인/ 해장국을 먹는다.// 세상은 추워도/ 훈훈하게 달아 오르는/ 몸뚱아리// 멋이나 맛/ 또한 분위기를 따지는/ 깔끔란 사람들은 모른다./ 저자 마당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해장국에 막걸리를 마시는/ 편안함을// 주제골은 사나워도/ 몇 푼거리 세강에 팔고 사는/ 저자 마당 아낙네들이/ 손톱을 손질하고/ 하품으로 하루해를 보내는/ 귀부인들 보다/ 오늘따라 더욱 정겨워라.//
왜 / 김순일
쥐 소 호랑이 토끼가 달려간다/ 용 뱀 말 양도 달려간다 식식거리며/ 잰나비 닭 개 돼지도 달려간다 허둥지둥/ 앞만 보고 달겨간다 죽을 둥 살 둥// 벼랑 끝으로 가랑잎 같은 해가 지고// 왜, 달려왔지?//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잰나비닭개돼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두리번 두리번//
살 / 김순일
칡뿌리를 캐다가 사람의 유골을 만났다/ 살은 물이 되고 흙이 되고/ 영혼은 바람이 되었나?/ 두개골에서부터 발가락 마디마디까지/ 뼈다귀만 고스란히 남아 누워 있는// 내 손길이 닿자마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숨 쉬고 사는 것은/ 잔가시에 찔려도 피를 흘리는 물렁한/ 살이 뼈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구나// 시장바닥 굴러다니느라 온몸 구석구석 박힌 옹이/ 등때기에 깊히 박힌 죽비 자국/ 너희들이 내 뼈의 갈기를 세워/ 눈물의 짠바다를 건너게 하는/ 살의 상처구나/ 아, 골륭을 골륭이게 하였던/ 살이여//
삶 / 김순일
산다는 것은/ 생각하며 걸어가는 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름답고 소중하네// 치열하고 삶/ 열정적인 인생을 살았지만/ 남은 것은/ 나에게 희미한 흔적들// 앞만 보고 살아 온 삶/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숨 막히게 살아 온 추억들// 이제는 천천히/ 세상을 더 넓게 보고/ 삶을 깊게 음미하며/ 나만의 여백에 그림을 그려 가야지//
김순일 시인
1939년 충남서산에서 태어났다. 1958년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하여 중·고등학교 교사, 태안여중 교감, 서산교육청 장학사, 부석중학교 교장, 서산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정년퇴임을 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던 198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서산사투리’, ‘섬’, ‘어둠꽃’, ‘서산장터’, ‘사람 어디 있나요’, ‘우울한 햇빛’, ‘숲의 나라’, ‘미꾸라지 사원’, ‘웃음을 돈사려고’ ‘부처한테 속아 인도에 가다’ 등이 있다. ‘서산문화대상’, ‘충남예술상’, ‘충남문학상’, ‘충남문화상’, ‘충남시인회 본상’, ‘해동문학상’, ‘시인정신상’, ‘한성기문학상’과 ‘황조근정훈장’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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