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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공화국 /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우리들의논과밭이가라앉으며/ 누군가의이름을부르는것을들으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 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뻐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우리들은또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 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약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쓰러지며부르짖어야할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청산(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 / 양성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을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다림의 시 / 양성우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변의 밤,떨어져 쌓인/ 흰 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 양성우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부터 오르는 법이다./ 때로는 돌에 걸려 넘어지고,/ 깊은 수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느 골짜기나 다 낯설다./ 그렇지만 우연히 선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가는 곳이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아득히 멀고 큰 산을 오르기 전에는/ 낮은 산들을 오르고 내림은 당연하다./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오른 뒤에는/ 또다시 내려가는 길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러다가 / 양성우
이러다가 점점 답답해지고/ 이러다가 점점 허물어 지겠구나/ 도대체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렵다면야/ 어떻게 눈 뜨고 있겠느냐/ 이러다가 갑자기 쓰러진다거나/ 쓰러진 채 휴지처럼 짓밟힌다든지/ 짓밟혀서 진흙 속에 묻혀 간다면/ 억만년 메마른 씨앗으로/ 어디에서 힘차게 싹터 오르고 어디에서 힘차게 자랄 것이냐…/ 이러다가 별똥처럼 사라져가고/ 사라지며 한마디도 말 못한다면/ 영혼은 어디에서 흐느껴 울고/ 어디에 기대어 잠들 것이냐/ 어디에 기대어 잠들 것이냐//
산벚꽃나무 아래서 / 양성우
저기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나무껍질 속에 무엇이 있어서/ 눈 시린 흰 꽃잎들을 밀어 올리는 것일까/ 시샘하는 바람 끝에 소스라쳐 놀라듯이 한꺼번에 흐드러진/ 수천수만의 작고 귀엽고 앙증맞은 것들!/ 저것들은 다만 햇살 그친 어느 한 나절의 궂은비에/ 우수수 다 지려고 잎새보다 먼저 서둘러 피어나는 것이냐//
산문에 기대어 / 양성우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언덕에서 / 양성우
돌이 되리라./ 이 언덕에 선 채로 돌이 되리라./ 세월이 가도 아득히 오지 않는 그대/ 기다림에 지쳐/ 눈물에 젖은 채로 돌이 되리라./ 천년 만년 가다보면 끝날 없을까./ 저 푸른 물끝 너머 그대 오는/ 그 순간까지/ 이 언덕에 선 채로 돌이 되리라./ 하염없이 목이 메어 그대 이름 부르고/ 눈물에 젖은 채로 돌이 되리라./ 돌이 되리라./ 사랑하는 님아.//
송호리* 바닷가에서 / 양성우
나 차마 못 떠나겠네/ 비단같이 곱고 잔잔한 흰 바다, 뽀얗게 떠도는 물안개를 두고/ 나 차마 이 바닷가를 못 떠나겠네/ 서로들 마주보며 떠 있는 다소곳한 작은 섬들, 그 너머 저 멀리/ 둘러선 쪽빛의 산봉우리들을 어찌할꼬/ 보드라운 모래톱, 검푸른 솔밭, 긴 물결 부서지는 소리를 두고/ 나 못 떠나겠네/ 아무도 내 몸을 붙들지 않아도, 나 차마 못 떠나겠네/ 별처럼 찬연하게 깨꽃이 피고 고구마넝쿨 무성한 비탈밭/ 반짝이는 동백잎 배롱꽃 분홍꽃잎들을 두고 나 돌아가지 않으리/ 차라리 희부연 초승달 밑, 방파제 끝머리에 혼자 앉아서/ 내 오래된 슬픔을 내 손으로 누를까/ 나는 밀물에 떠밀려오는 바다풀인지도 몰라 지푸라기 나뭇가지/ 부스러기인지도 몰라/ 여태껏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내가 어딘가로 총총히 돌아가는 길, 거기에 또다시 덫이 있고/ 수렁이 있다면 그 무슨 인생인가/ 나 여기 떠나지 않으리/ 고즈넉한 산자락, 붉은 흙을 두껍게 다진 앞마당을 지나/ 호젓한 억새풀밭 엉겅퀴 꽃대궁 아래 두 손을 모으고 종일토록/ 저 흰 바다를 바라보겠네//
* 송호리는 최남단 해남 땅끝 마을로 仁松文學村吐文齎(인송문학촌토문재)가 있다.
사당역에서 / 양성우
나는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 저곳에서 전차를 갈아타듯이/ 모든 인생도 때로는 가는 길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우연히 사랑이 찾아오고,/ 이어지는 것들이 한결같이 넘치는 기쁨의/ 긴 시간들이라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어쩌면 또 다른 어제일 뿐인 오늘의 한 끝에서/ 내가 남들을 따라서 바쁘게 걷는 것은/ 오직 하나 먹고 마실 것을 줍기 위함만은/ 아니리라/ 지금 여기 환승역 좁은 땅 속 길을 오고가는/ 뭇사람들을 비롯하여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꿈이 있고 그 꿈의 힘을 믿는다./ 그것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주 가서 / 양성우
한 사람이 숨는구나/ 푸른 물가에 억새꽃 속에/ 굽이굽이 먼 길을 지나/ 옛 나루 건너/ 외진 숲 혼자 울고/ 붉은 달이 지는 곳/ 검은 산 둘러앉은/ 작은 들 끝/ 마른 풀 황토밭에/ 한 사람이 숨는구나/ 새 짐승 발자국/ 나란히 찍힌/ 모래톱 길게 누운/ 푸른 물가에 억새꽃 속에//
반구정에 올라 / 양성우
이른 봄날 반구정에 오르다./ 옛정승 황희가 빈손으로 돌아와/ 물새들과 놀던 곳,/ 아직도 잔 물결 반짝이며 흐르는/ 강언덕에 서서/ 벼슬 높은 도둑들로 어지러운/ 이 시절을 한탄한다./ 차라리 하루 세 끼니 거칠고/ 비 새는 초가지붕 찬 구들일망정/ 늘 스스로 만족하던 그./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티없는 이름 앞에 옷깃을 여미며,/ 힘 가진 큰 도둑들로 인하여/ 기우는 이 나라를 근심한다.//
정읍을 지나며 / 양성우
당신의 죽창 스치는/ 바람소리 들리네./ 나락 팬 들판 휘젓고 가는/ 당신의 큰 함성소리 들리네./ 시절이 병들어/ 그 아픔을 누르며/ 장성 갈재 한걸음에/ 넘어오신 임./ 당신의 흰 옷소매/ 상투머리 적시는/ 밤이슬 내리는 소리 들리네.//
현저동 엘레지 / 양성우
별의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 비명을 듣는다./ 왜놈의 감옥에서 왜놈 손에 죽은/ 별똥처럼 사라져간 윤동주의 비명을 듣는다./ 겹겹이 쌓이는 아픔, 끝없는 불면을 앓으며/ 꽃 피는 이 4월 현저동에서 듣는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흰옷의 갈보들아./ 비단 같은 조국의 푸른 하늘 밑/ 꽃 피는 이 4월 현저동에서 듣는다./ 별도 없는 깊은 밤 후꾸오까 그 감옥,/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간/ 별의 시인 윤동주의 외마디 비명을 듣는다./ 왜놈인지 동족인지 분별 안되는/ 조무래기 간수들과 함께 듣는다.//
먼 그대 / 양성우
안타까워라/ 먼 그대./ 나 여기 바다 건너 가슴 조이며/ 발돋으며 바라느니/ 그대에게 단 하나의 소유이고저./ 세상의 그 무엇이 영원하랴마는/ 그대의 굳은 언약/ 저승까지 가리라 믿으면서도,/ 나 때로는 도리질함은/ 염려도 사랑인 까닭인가.//
그대의 별/ 양성우 / 양성우
오늘따라 저 별은 왜 유난히/ 빛나는가?/ 그대의 별./ 젊은 날 고스란히 세상을 위하여/ 몸 던지고,/ 때로는 숲에 숨고 땅 밑으로/ 천리를 오가던 사람./ 그대가 맨손으로 어둠을 이겼으니,/ 그대의 큰 이름 아래서는/ 집 밖에 누워도 두렵지 않고/ 다 같이 가난함도 결코/ 가난이 아니구나./ 아름다운 이여, 떠나가지 마라./ 그대의 눈부신 저 별빛,/ 한 세월 깊이 파인 모든 가슴에/ 물처럼 가득히 넘칠 때까지는//
그대들 깃발 되어 / 양성우
그대들 연달아 침묵의 늪에서 일어서고/ 무수한 죽음 위에 두 눈 부릅뜨고 여기까지 기어코/ 오긴 왔구나/ 공연히 남의 손에 갈라터진 땅과 몸과 마음과/ 세월의 크고 깊은 틈을/ 한결같이 티 없는 꿈으로 채우고/ 참으로 오랫동안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서 걸어온 길,/ 천길 만길 쌓이는 아픔 큰 그물을 찢고/ 그대들 어제처럼 오늘도 피 흘리며 또다시 떠나는가/ 부디 꿋꿋하라/ 서슴없이 거짓의 무리를 눕히고/ 언제나 지금처럼 소리치며 박히는 화살로 그대들/ 이 어둠을 뚫을지니,/ 어둠 뒤에 오는 찬란한 모든 날들 어느 하룬들/ 그 누가 무슨 낯으로 저 하늘을 모조리 가리울 것이냐./ 드디어 한번쯤 사람답게 살려는 이들을/ 가리지 않고 트집 잡아 누르고 짓이기는 피 묻은 손들을/ 일일이 쓸고,/ 벗들이여 서둘러 가자/ 때가 되었으니, 이미 못으로 다가오는 열망의 끝까지/ 올 때보다 더 뜨거운 몸 남김없이 던지며/ 한걸음 소리치며 발 구르며 가자/ 그대들 깃발되어 역사와 함께 지치지 않고/ 시퍼렇게 물결치며 살아서 가는 길에/ 하나 되는 내일로 날마다 솟는 땅 겹겹이 맺힌/ 안팎의 원한들 봄날처럼 풀리리라/ 봄날처럼 풀리리라//
그대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 양성우
바늘 끝 밟으며 그대 떠나고/ 나는 빈집에 내리는 어둠 모래언덕 위에/ 마른 풀뿌리로 절망을 견다니나,/ 어찌 숨기랴, 또 다시 일어서서/ 얼굴을 붉힘은/ 모두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을./ 그대 빛나는 날개로 허공을 가르며/ 결국은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깊고 끝없는 기다림의 뜻/ 소리치며 번지고/ 이 어두운 야만의 밤, 모조리 불태움을/ 그 누가 막으랴. 그 누가/ 어떻게 막으랴.//
그대 오시는 길에 / 양성우
그대 어느 아침/ 저 언덕을 말 달려 오시려는가?/ 한평생 주눅 들린 이 앉은뱅이,/ 날카로운 비수에 온몸을 찔리고/ 아무리 많은 피 흘린다 하여도/ 죽지 않고 그날까지 살아 있다면,/ 그대 오시는 길에/ 옷 벗어 깔며/ 사랑하는 이여 우러러/ 이 가슴에 감춰둔 기쁨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리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여 마지막 밤의 슬픈 노래여 / 양성우
그대여, 마지막 밤의 슬픈 노래여/ 하늘 위에 역사 위에 별이 되어 반짝이는 큰 넋이여/ 그대 빛의 나라에서 만나리라/ 그대의 피절은 땅 틈도 없이 스민 이 어둠의 끝에,/ 남 다 살리기 위하여 앞장서서 죽고 영원히 죽지 않는 그 넋으로/ 떠도는 그대 빛의 나라에서 만나리라/ 이 원한의 살 속 깊이 파고드는 가시바늘 한꺼번에 꺾고,/ 겹겹이 쌓이는 아픔을 넘어 그대 눈부신 아침의 빛의 굽이에서/ 산몸으로 만나리라/ 그대 이 오월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불처럼 뜨겁게 태우는/ 사랑 하나로 스스로 몸을 던져 재가 되신 이여/ 여전히 예처럼 안팎으로 넋 나간 뭇사람들의 손찌검에 거듭하여 죽고,/ 지금은 적막강산 가득히 떠돌며 오도가도 못하는 이여/ 그대가 뿌린 씨앗이 수풀을 이루고, 오오 그대가 붙인 열망의 불길이/ 세상을 태우리라 세상을 태우리라/ 아무도 모르는 그 어느 한 순간에/ 그대의 이름 아래 남과 북이 한몸이 되고, 누구든지 골고루 낱낱이/ 기쁨으로 배부를 그 날이 오리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피절은 땅 틈도 없이 스민 이 어둠의 끝에,/ 남 다 살리기 위하여 꼿꼿이 맞서고/ 우수수 수천 수만의 꽃잎으로 떨어진 그대 눈부신 아침의/ 빛의 굽이에서/ 산몸으로 만나리라 산몸으로 만나리라/ 그대여, 마지막 밤의 슬픈 노래여//
그대의 하늘 길 / 양성우
어디쯤 갔는가, 그대의 하늘 길/ 거기서는 눈부시게 물결치며 오는 날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가/ 여기 맨주먹 큰 싸움 매운 연기 속에/ 그대 앞선 자리 살아남은 형제들 그대의 이름으로/ 마지막 이 어둠을 뿌리 채 거두리로다/ 절대로 티 없이 칼날 앞에 한치의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넋들 몸을 던져 역사를 여는 눈물겨운/ 함성 속에/ 시뻘건 피 뿌리며 떠나간 이여/ 그대의 슬픈 그 이름 하나로 이 어둠을/ 뿌리째 거두리로다/ 응답하라 그대,/ 이 여름날 백양로에 불같이 일어선 형제들 땅을 치며/ 목을 놓아 그대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나니//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 양성우
사람으로 순간을 산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이 짧은 삶 속에서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모든 사물들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더우기 몸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아직도 여기 이승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이제 남은 시간은 도대체 얼마인가?/ 고즈넉이 사방에 깊이 모를 침묵이 있고,/ 그 안에서 참으로 외로운 자만이 외로움을 안다./ 보아라, 허물처럼 추억만 두고/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양성우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 소리 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 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골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네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 끝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혹은 군화 끝에 밟히는/ 끈끈한 눈물로/ 잠시 머물다가 갈지라도/ 불보다 뜨거운 깃발로/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을 깨우고/ 남과 북이 온몸으로 소리칠 수 있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엄동설한에 재갈 물려서/ 여기저기 쫓기며 굶주리다가/ 네가 죽은 그 자리에 과녁이 되어/ 우두커니 늘어서서 눈 감을지라도/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 그리고/ 증오가 아니라 포옹으로/ 네가 일어서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아침 꽃잎 / 양성우
오늘따라 그가 내 안에 가득하다, 밀물이듯이/ 밤새 내 머리맡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치 터질 것만 같이 가슴이 벅차오르다니/ 내가 그의 거처가 되고 그릇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의 이름만 불러도 내 눈에 금세 눈물이 넘쳐흐름은,/ 이미 그가 내 안에 아침 꽃잎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까닭이리//
꽃꺽어 그대 앞에 / 양성우
그대 큰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 꺽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 꺽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꽃상여 타고 / 양성우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에 궂은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버드나무/ 숲 사이로/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어이 큰 눈물을/ 땅 위에 뿌리며,/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 양성우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모든 들풀과 꽃잎들과 진흙 속에 숨어사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신비하다/ 바람도 없는 어느 한 여름날,/ 하늘을 가리우는 숲 그늘에 앉아보라/ 누구든지 나무들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무수한 초록잎들이 쉬지 않고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이 순간에,/ 서 있거나 움직이거나 상관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오직 하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은 무엇이나 눈물겹게 아름답다//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 양성우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없는 것/ 네 안에서 고스란히 영혼을 태운 뒤에는/ 이름없는 들꽃 한송이로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도/ 이 뜨거운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어느 날 아침 내 몸이 안개처럼 흩어져 버릴지라도/ 뜨겁고 붉은 이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그래도 너와 나의 운명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니/ 언젠가는 아득히 홀로 가는 먼 길을 어쩌리/ 사랑한다는 아픔이여/ 아픔이여// |
꿈은 사라지고 / 양성우
사람이 어찌 한 치 앞을 아는가?/ 우연이 필연이 되고 필연이 우연이/ 되는 것은 흔치 않다./ 특별한 욕망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아서/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보일 뿐이다./ 오늘에 이어 내일이 있음은/ 누구에게나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두려움도 함께 준다./ 그렇지만 알 수 없게도 무수한 꿈들은/ 거듭하여 사라지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비 오는 날 / 양성우
둥지 없는 작은 새들은 이런 날/ 떻게 지낼까?// 나비들은, 잠자리, 풍뎅이, 쇠똥구리들은/ 이런 날 어떻게 지낼까?// 맨드라미, 나팔꽃, 채송화...... 그리고/ 이름 모를 풀꽃들은 어떻게 지낼까?// 그칠 줄 모르고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오는 날에는/ 죽도록 사랑하다가 문득 헤어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봄 눈 / 양성우
길고 큰 밤, 덫을 향하여/ 울부짖고/ 이 시절에 살아서/ 돌아가는 자여./ 서러운 주먹으로 이 나라의/ 땅을 치며/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들/ 오히려 몸 속에 가시처럼/ 파고드는 아픔,/ 두눈에 맺혀 흐르는 피눈물을/ 어찌하리, 돌아가는 자여./ 봄눈 내리는 산비탈/ 옷자락 날리며/ 이 시절에 살아서/ 돌아가는 자여.//
눈오는 날 광주에서 / 양성우
눈쌓인 산 위에 또 다시 죽음처럼/ 흰눈이 내리고,/ 나는 이 겨울에 내 길을 나 혼자 간다./ 그렇지만 염려마라./ 나 비록 이렇게 빈손이지만/ 그 어찌 우두커니 마른 입술만/ 깨물고 있겠느냐?/ 아직은 무릎 위에 아이들은 철없고,/ 가시지 않은 상처 온몸을/ 조여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가슴속에/ 끝도 없이 넘치는 큰 뜻이/ 있으므로/ 염려마라. 이미 머나먼 길/ 떠나간 사람아./ 저 눈쌓인 높은 산 가득히/ 소리치며 오는 봄을/ 그대와 함께 여전히 살아서/ 보리라.//
눈오는 밤에 / 양성우
그대여, 밤이 깊으니 아이들은/ 잠들고/ 이 어둠 속에서도 눈이 내린다./ 언제나 그렇듯이 눈이 내리면/ 나는 먼저 그대의 큰 이름을/ 허공에 쓰고,/ 사랑하는 이여/ 오죽하면 듣는 이도 없는 노래를/ 혼자 부를까?/ 그렇지만 밤이 깊으니/ 아이들은 잠들고,/ 그대여. 소리 없이 이 어둠 속에서도/ 흰눈이 내린다.//
입춘 / 양성우
어서 오게, 이 친구/ 모진바람 한 세월/ 백수건달로 떠도는 이/ 어디가서 한마디/ 소식 없더니// 이제 오는가 그대,/ 반갑고 서러운 이/ 끝도 없는 침묵의 땅/ 소리소리 지르며/ 이제 오는가 그대,/ 무정한 사람아//
우수(雨水) / 양성우
겨울이 가도 어둡고/ 답답한 산천,/ 안개낀 우수에/ 끓어오르는 가슴의 피 누르며/ 나는 그대를 손꼽아 기다리고,/ 내가 이 세상/ 잠깐동안의 나그네이듯이/ 사람들은 북을 치며/ 모두 떠났다./ 말하라 그대,/ 안개낀 우수에/ 나는 여기 지금도 갇혀 있으니/ 저 벌판을 그대 없이/ 어떻게/ 물같이 흐르랴.//
여름날 / 양성우
그대의 넋 내 슬픈 가슴에 있네/ 이 여름날 꿈으로 솟는 그대의 넋/ 내 슬픈 가슴에 있네/ 하늘을 가리운 깊은 수풀 지는 꽃잎 따라/ 마지막 몸부림의 긴 노래 뒤에 다시 오기 위하여/ 스스로 먼 길을 혼자서 떠나간이/ 내 겹치는 눈물 위에 그대/ 반짝이는 이슬 되어 온 들판을 적시고/ 그대의 사랑 깃발 되어 펄럭이며 아직도/ 내 슬픈 가슴에 있네/ 그대 지금은 잔 물결 시퍼런 강물 아래/ 그림자로 지고/ 드디어 오는 날 그 아침에/ 가득히 들풀로 어우러져 돌아올 이여/ 때때로 열리는 저 회색구름 작은 언덕들을 넘어/ 이 여름날 끝에서 끝까지/ 꿈으로 솟는 그대의 넋/ 내 슬픈 가슴에 있네.//
가을에 / 양성우
슬퍼마라./ 우리 다시 기다림의 시를 쓰자./ 가을은 이미 그릇에 넘치고/ 보아라, 새벽달도 바람에 기우는구나./ 정든 사람들 모두 길 떠났으니,/ 이 거칠고 마른 나이에/ 그 누가 아니 근심하랴./ 꿈이 아님에도 오히려 내 땅에서/ 낯설고,/ 그러나 허리 굽혀 이삭을 주우며/ 우리 연가를 부르듯이/ 기다림의 시를 쓰자//
님에게 / 양성우
그대가 못 오는가/ 내가 못 가는가/ 밤새워 뒤척여도/ 이 가슴에 가득히 차오르는 님/ 혼자라도 둘처럼/ 속삭여 볼까/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울어나볼까/ 그대와 함께 타고/ 재가 되리라/ 이 소원 하나로 세월을 보내네//
삶 속으로 / 양성우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전혀 낯선 인연이 나를 이 거친 삶 속으로/ 밀어넣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내 운명과 맞서지 못하고,/ 내 자신에게까지도 늘 진다./ 어쩌면 내가 걷는 이 길은/ 처음부터 내 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줄곧/ 희망과 절망을 넘나들 것이다./ 온갖 더럽고 사나운 것들이/ 내게 오는 기쁨을 가로막을지라도......// 영원한 시간 위에서,/ 사람으로 순간을 산다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
내 삶의 고비에서 / 양성우
나에게는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무슨 까닭으로 이곳에 머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쉴새없이 흐르고/ 나는 단 한순간도 붙잡을 수 없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고행이다.// 더욱이 나 홀로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좌충우돌 허덕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참으로 우연히 만난 내 삶의 고비에서/ 뜻밖에도 내 마음은 고요하고,/ 나의 해묵은 인연들이 그물처럼 나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결코 뿌리칠 수 없는 나의 운명이지,/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이 아니다.//
하루가 천날 같아도 / 양성우
네 마음이 너무나도 어둡구나./ 네 가슴을 돌같이 누르고/ 네 눈을 구름같이 가리는 것이/ 많으니,/ 네 마음이 몹시 무겁고/ 숲처럼 아직도 그늘이 깊구나./ 사는 것 같지도 않은 네 삶속에서/ 겹으로 쌓인 가시 위에/ 날마다 거듭하여 네 몸을 던지고,/ 넋마저 벼랑끝에 흩날리느냐?/ 그렇지만 은빛 물결 출렁이는/ 눈물의 강에/ 네 운명의 작은 배를 띄우지 마라./ 한가닥 거친 바람에/ 네 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네 모든 하루가 천날 같아도.//
산 너머 산 / 양성우
사람이 죽을 문은 하나요 살문은/ 아홉이라 했다/ 아직은 손발이 다 성한 데/ 산 입에 거미줄을 치겠느냐?/ 아무리 산 너머 산 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아야지./ 누구에게나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거친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도/ 중심을 잃지 마라./ 오늘은 캄캄절벽인 것 같지만/ 내일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산 그림자 저절로 일그러지는 것도 / 양성우
저 강물이 잔물결로 쉼 없이 흐르는 것도/ 나와 같이 너를 한순간도 잊지 못하는 까닭이리./ 물안개 스치는 연초록 긴 둑길,/ 여린 풀잎들이 저마다 뒤척이며 두런거리는 것도/ 나와 같이 너를 몹시 그리워하는 까닭이리./ 희고 붉은 꽃잎들은 어찌하여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는 것이냐/ 저 꽃잎들이 소리 없이 피었다가 지는 것도/ 나와 같이 너를 가슴 깊이 사랑하는 까닭이리./ 저 강물에 산 그림자 저절로 일그러지는 것도/ 나와 같이 너의 모습 머리카락 하나도 지우지/ 못하는 까닭이리.//
희망으로 / 양성우
그곳에는 아직도 비바람이 치는가?// 네가 가는 가파른 길/ 짙은 어둠 눈앞을 막는// 험한 길 걸어도// 너는 외롭지 않아라/ 너의 영혼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니// 한세상 힘들고 괴로운 날만 올 수 없어라// 네 앞에 어진 꿈만 가득히 넘치게 하자// 아무도 막지 못해라// 너의 가슴 안에 솟는 것// 그 밝은 희망으로 네가 사는 것이니// 지금은 거칠고 먼 길 걸어도/ 너는 외롭지 않아라// 너는 외롭지 않아라//
마음하나 / 양성우
내 손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으므로/ 뜨거운 내 마음 하나 너에게 주마/ 아직은 먼 길 위에 지친 내 몸이지만/ 그래로 함부로 꺽지 못할 꿈이 있다/ 네 안에서 다 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여도/ 불타는 내 마음 모두 너에게 주마/ 외로워 하지마라, 붉은 내 마음 하나// 너에게 준다면,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 아니겠느냐?// 지금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너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이므로/ 뜨거운 이 마음을 모두 너에게 주마//
마음을 비울 수만 있다면 / 양성우
나는 내가 아니고 내 삶은 내 삶이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내 마음을 비울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마다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는 나를 찾아서/ 내가 쉬임없이 허덕일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보아라, 험하고 아득한 길 살아서 돌아온 내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고 내 눈빛은 내 눈빛이 아니다./ 내가 여기에서 티끌 하나 없이 온 넋을 씻고/ 내 마음을 모조리 비울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마다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는 무수한 나를/ 찾아서 내가 굳이 몸던질 까닭이 어디 있겠는냐?/ 저 소리없는 작은 바람 끝에도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처럼/ 내 마음의 바닥까지 맑고 밝을 수만 있다면//
누르지 못할 그리움 / 양성우
누르지 못할 그리움이 나를 태운다/ 풀숲에 숨어 혼자 삭이는/ 몸짓 없는 사랑도 사랑인가?/ 무수한 잔물결 이루며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너에게 사로잡히고,/ 때로는 한밤처럼 길을 잃는다./ 진흙을 밟을 때에는 누구나/ 마음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흔적도 안 남기고 지워보지만/ 머리칼 하나 지워지지 않는 너./ 불 같은 네 품안에 고스란히 타고 남은/ 재가 되고 싶다.//
오늘 같은 날에는 / 양성우
오늘 같은 날에는 어느 고즈넉한 숲으로 가서/ 작은 풀잎 끝에 반짝이는 이슬로 맺히고 싶다/ 여린 바람결이 스쳐 지나가는 산골짜기/ 허공을 가리우는 키 큰 나무들 사이/ 참 밝은 햇살로 스며들고 싶다/ 너무나도 맑아서 오히려 수줍은 계곡물/ 푸른 이끼 덮인 바위들을 돌아서 흐르는/ 그칠 줄 모르는 그 물소리이고 싶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같은 날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숲에 숨은 이들의 슬픈/ 노래이고 싶다//
내 마음의 천사 / 양성우 하늘은 너를 왜 이제 나에게 보냈을까?/ 연두빛 봄수풀 사이로 다가오는 너./ 너의 사랑이 나를 적신다./ 짙고 애틋한 너의 사랑이./ 이슬이 되어 빗물이 되어 나를 적신다./ 몸속 깊이 영혼까지도// 황토빛 얕은 산자락 어린 풀 눕는/ 작은 들 자욱한 물안개가 되어 나를 적신다/ 눈물겨운 너의 절절한 사랑이 내 가슴을/ 적신다 함초롬히/ 너, 눈부신 내 마음의 천사// |
바람을 따라가는 길에 / 양성우
죽는다는 것은 다 타고 재가 되는 것!/ 무엇이 급하여 저 잎들은 한꺼번에 땅에/ 눕는가?/ 바람을 따라가는 길에 흔적을 남겨서// 무엇 하리./ 살아서 이미 살이 썩고 뼈들이 마디마디/ 녹아 흐르는 것을./ 물에 젖고 부서져 가루가 되기 전에/ 몸부림치며 사랑하고 슬퍼하라./ 사람도 저 마른 잎들과 같이 때가 되면/ 산그늘에 속절없이 누우리라./ 새 우는 소리도 그친 쓸쓸한 빈 골짜기에.//
길에서 시를 줍다 / 양성우
나는 길에서 시를 줍고 숲에 가서 낳는다./ 숲 속에서 아기를 낳던 옛 여인들처럼./ 매우 뼈아픈 삶이 시를 만들고/ 깊은 시름이 노래가 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로 인한 허망함이여./ 나늘 흔들지 마라./ 내가 어둔 길을 홀로 걷고,/ 얼음 위에 누워서도 꿈을 꺾지 않음은/ 굳이 한순간만을 살고자 함이 아니니./ 눈물을 머금고 숨죽여 읊은 나의 시들이/ 손톱만큼도 세상을 못 바꿀지라도 무슨 상관이냐./ 아무도 없는 거친 길 위에서 줍고,/ 오랜 몸부림 끝에 내 몸으로 낳은 것들이라면.//
가고 싶은 곳 / 양성우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사랑만 있는 곳./ 근심걱정이 없고 슬픔도 없고/ 눈물 같은 것은 단 한 방울도 없는 곳./ 내가 먹고 입을 것들이 조금쯤은/ 모자랄 만큼만 있는 그런 곳./ 미움도 전혀 없고 싸움도 없는 곳./ 높은 산 밑 깊은 물가에 맨살로 살지라도./ 이별은 아예 없고 언제나 반가운/ 만남만 있는 곳./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손꼽아 나를 기다리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만 있는 곳./ 내가 죽어 그곳에 하얗게 흩어져도/ 다시 가고 싶은 그런 곳.//
평화의 섬 제주도 / 양성우 내 마음에 섬 있네./ 내 마음 속에/ 아름다운 섬 하나 있네.// 푸른 바다 한가운데/ 그리움이 머무는 곳./ 온 세상으로 열렸어라.// 한라산 산자락에/ 시로 만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리.// 붉은 해 뜨는 곳./ 꿈과 희망이 넘치는/ 평화의 섬 제주도여.// 내 마음에 섬 있네./ 내 마음 속에/ 아름다운 섬 하나 있네.// |
혼자 밥 먹는 사람 / 양성우
혼자 밥 먹는 사람에게 복이 있으라/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목이 메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흰 밥 한 입도 모래알 같고 김치 한 가닥도/ 나무껍질 같은가/ 거친 하루를 끝내고 돌아와서 먹는/ 눈물에 만 찬밥 한 덩이가 희망이라면……/ 사랑이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혼자 앉은 밥상 앞은 사막이니/ 오직 살아있다는 까닭만으로/ 배가 고프기보다는 마음이 허기져서 먹는 것/ 아무도 없는 어스름 깔린 마루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외롭고 쓸쓸함이 오히려 남이 모르는/ 기쁨이기를//
새우잠 / 양성우
적수공권일 때에는 모래바람 진흙길도/ 두럽지 않다/ 아무리 허뎍여도 줄지 않는 힘든/ 일들까지도,/ 차라리 남루는 운명이라고 치자./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저 꿈들은 유난히/ 빛나고,/ 어둔 수렁 속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구부려 자는 새우잠도 너무나 달다./ 어디에 괴로움이 없는 인생이 있는가?/ 참 깊은 사랑의 마음이 고단한 몸을/ 붙들어준다./ 흰 물살 굽이치는 큰 강을 건너고/ 시퍼렇게 날 선 칼 위에 맨발로 설지라도.//
어린 날의 겨울밤 / 양성우
바람 잔 동백숲에 부엉이 울고/ 나는 애쓰고 눈물을 참으며/ 강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큰눈이 쌓이면 어찌하리./ 마르고 지친 말 그 어디에 세우고/ 속옷 찢어 부어오른 깊은 상처 싸매며/ 긴 노래 소리 죽여 신음처럼 부르는/ 강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허허벌판 남북 만주 밤새워/ 절뚝이며/ 산비탈 돌자갈밭 붉은 피 흘리는/ 타는 가슴 젊은 아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믐날 밤 개울가에서 / 양성우
우스워라./ 못 마땅한 일이 너무 많아서/ 나 여기 혼자 왔다/ 쓸개를 씹으며./ 물아. 그믐날 밤/ 소리치며 흐르는 물아./ 그 어찌 이 시절에 한마디로/ 내 목숨을 내 목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차라리 잘드는/ 칼끝이 아니라면,/ 우스워라. 눈물의/ 바람,/ 죽은 나무 숲을 지나/ 나 여기 혼자 왔다./ 밤이슬 털고.//
돌아와 눕는 날 밤이면 / 양성우
늘 쫓기다가 돌아와 눕는 날 밤이면/ 낯모르는 넋들도 따라와/ 내 곁에 눕는다./ 혹은 소리치며, 혹은 한숨으로/ 피묻은 옷섶 풀어 헤치며/ 낯모르는 넋들도 따라와/ 내 곁에 눕는다./ 늘 쫓기다가 돌아와 눕는 날이면,/ 오오 마른 나무 껍질같이 갈라져/ 터벅터벅 돌아와 눕는 날 밤이면,/ 이미 죽어 열 두 번 다시 죽은 넋들도 따라와/ 그 뜨거운 살 맞대며/ 내 곁에 말없이 눕는다./ 썩은 길바닥 헤매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와 눕는 날 밤이면/ 벌써 지워졌지만, 잊을 수 없는 억울한 이름들도/ 따라와/ 내 곁에 나란히 누워/ 입술 깨물며 소리 없이 흐느낀다./ 손가락질 당하며, 돌에 맞으며/ 헝겊처럼 찢어져/ 돌아와 눕는 날 밤이면.//
나는 없다 / 양성우
내가 나를 눈부신 꿈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갇힌 것을 즐기고 있다./ 이 틈에도 불가사의한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나의 시간은, 사랑을 하기에도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웬일인지 나 아직은 먼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 않으니,/ 운명이 나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 누구도 나를 찾지 말라./ 그 어디에도 나는 없다.//
사랑의 힘 / 양성우
알 수 없어라, 사랑의 힘./ 어디에서 어떻게 솟아나는 것일까?/ 그것은 불인가 바람인가?/ 아니라면 환상인가?/ 아아, 끝도 시작도 없는 기쁨의 바다에/ 눕고 싶다./ 차라리 그 자리가 깊이 모를 늪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알 수 없어라./ 몸과 넋 다 태우고 흔적도 없이 지우는/ 사랑의 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옛사랑에게 / 양성우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 무척 오랜 뒤에도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만나서 두 팔로 너를 힘껏 껴안고 싶다.// 그때는 네가 귀 기울여 듣고자 해도/ 내 입으로는 한마디 말하지 않으리.// 내가 어찌 마음의 어둔 길을 걸었는지를./ 그래도 내 안에 가득히 설움이 차오르면/ 눈물 대신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야지.// 너는 내 영혼의 변하지 않는 긴 그림자./ 너와 나의 하루가 아무리 고단해도/ 사랑만 있으면 사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앉은뱅이 연가 / 양성우
그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오는 이여./ 여기 흰 서리 내리는 황토 언덕,/ 사금파리처럼 햇살에 번쩍이며/ 그대를 위하여 북을 치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열두길 물 속에 잠기고/ 흩어져 다리 절며 잡목 숲을/ 쫓기는 동안에도,/ 그대의 큰 이름을 외쳐 부르고/ 그대를 위하여 한줌의 재도 없이/ 타오르게 하라./ 오죽이나 긴 세월 피 묻은 채찍 아래/ 이 몸을 두고,/ 그렇지만 꿈속에도 오지 않는 이여//
북한강 / 양성우
네 뜻으로 내 가슴을 삽질하라./ 4월에도 그늘져 눈물만 스민/ 내 가슴을 삽질하라 여자여./ 새벽은 이렇게 더디 오고/ 칙칙한 어둠 속에서 매암돌면서/ 나는 무엇으로 물결치며/ 어디까지 눈감고 흐를 것이냐?/ 비가 숨는 모래밭에서 나는 병들고,/ 보이지 않는 먼지로 허공에 떠서/ 나는 안타깝게 목마르다 여자여./ 네 손톱으로 내 눈을 삽질하라./ 네 손톱으로 내 눈을 삽질하라./ 여자여.//
미움 / 양성우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사랑이 크면 미움도 크다// 만남의 뒤에는 헤어짐이 있고/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는 법이다// 돌아보지 마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뼛속에 스며드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랑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무슨 상관이랴// 긴 싸움 회오리바람 끝/ 혼자 남아 뒤척이는 가슴에/ 스미는 미움,// 그 이름은, 외롭고 슬픈 넋속에/ 타오르는 파란 불꽃이려니.//
허물 / 양성우
밤이 되면 나는/ 허물을 벗는다./ 한마리 철 잃은/ 배암처럼 마르고 때 절은/ 남모르는 아픔의 허물을 벗는다./ 울다가 지쳐 잠든 아이옷을 벗기듯이/ 아득히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속으로 혀를 차고/ 허물을 벗는다./ 산다는 것은 역시 꿈이 아니므로/ 세상은 언제나 번거롭고,/ 나는 홀로 벽 속에/ 깊이 숨어/ 남모르는 아픔의 허물을/ 벗는다.//
오월제 / 양성우
부활하라/ 마른 땅 겹겹이 스민 피,/ 여기저기 아직도 허공에 떠도는/ 젊은 넋들/ 모조리 부활하라/ 이제는 어둠의 손아래 무단히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끝 날까지 빛의 이름으로 정정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그대들/ 하늘에서 땅에서 물결처럼 어울려 북을 치며/ 한순간에 부활하라/ 드디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발을 구르며,/ 살아생전 매맞고 굶주린 이들/ 눈을 뜨고 모조리 부활하라/ 부활하라/ 피여 넋이여//
우리 살았다 하지 말자 / 양성우
우리 살았다 하지 말자/ 검붉은 피 가득히 흘리며 떠난 젊은 넋들 앞세우고/ 무리지어 지르는 함성 속에/ 우리 결코 살았다 하지 말자/ 너도나도 온몸에 촉촉히 기름을 붓고/ 스스로 당긴 불, 원한의 불길 속에/ 숯이 되어 떠난 벗들 앞에/ 우리 결코 입을 열어 살았다 하지 말자 살았다 하지 말자/ 저 피 묻은 칼 끝에 갈가리 찢기고/ 지금도 하늘 너머 남북으로 떠도는 넋,/ 아직도 여기저기 오갈 곳 없는 뜨거운 넋들과 함께/ 우리 한 시대를 쪼개고 나누니,/ 그 무엇이 있어 전날처럼 그다지 두려울 것인가/ 우리 그림자도 없는 무수한 손찌검 뒤에/ 혹은 모래가 되고 흙이 되고 혹은 별이 되어/ 다시 살아 원한 위에 부단히 벌이는 맨주먹 싸움 앞에/ 어찌 우리 한 마디로 살았다고 말하랴/ 우리 살았다 하지 말자/ 아직은 참으로 오는 새벽이 아니니,/ 죽으나 사나 몸을 던져 역사를 여는 빛으로 넘치고/ 또다시 어둠 속에 물이 되어 스미는/ 그 여리디여린 몸 남김없이 던져 내일의 눈부신/ 큰 기쁨을 위하여/ 꼿꼿이 일어선 전사,/ 살 찢어 허공에 꽃으로 뿌리며 가는 피넋들을 두고/ 그 누가 입을 열어 우리 모두 사람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돌아오게 하라 돌아오게 하라/ 앞뒤도 없이 닫힌 땅 깊은 그늘에 창끝으로 솟고,/ 드디어 불이 되어 허공에 치솟으며 뭇가슴에/ 박힌 못 남김없이 뽑는 힘으로 물결치며 돌아오게 하라/ 오직 하나 이 어둠을 거두기 위하여 이미 먼 길 아득히 떠난 이들/ 곳곳에 눈부신 깃발 휘두르며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시절에 어찌 우리 사람으로 살았다고 말하랴/ 이 시절에/ 우리 결코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 말자/ 우리 살았다 하지 말자//
삼수갑산 갈지라도 / 양성우
황룡강 강바닥에 설움을 묻고/ 아비들도 장성갈재 넘어갔으니/ 어찌 빈집에 이불 쓰고 누워/ 밟힌 가슴만 앓고 있겠느냐/ 삼수 갑산 갈지라도 죽창을 다듬고/ 진눈깨비 속에서도 일어서서 말하리/ 한 세월을 꿈 속에서도 오지 않는 날을/ 어찌 앉아서만 기다리겠느냐/ 맞아 죽은 아비들의 넋을 부르며/ 진눈깨비 속에서도 일어서서 말하리/ 진눈깨비 속에서도 일어서서 말하리//
백두산 / 양성우
저 백두산에 못 가게 하네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다/ 물이란 물은 다 내 물이고, 산이란 산은/ 다 내 산인데/ 저 백두산에 내 어찌 못 가리/ 내 손으로 이 깊은 밤을 으스러지게 찍고/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이/ 나를 부르니, 남과 북의 말뚝 뽑은 꽃 피는 길을/ 다리 절며 손뼉치며 내가 가리라/ 흙이란 흙은 다 내 흙이고, 풀이란 풀은/ 다 내 풀인데/ 내 땅에서 내 발바닥으로 저 백두산에 내 못 가네/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에/ 내 어찌 못 가리/ 벙어리 한 시절이 드디어 끝나고/ 남과 북의 말뚝 뽑은 꽃 피는 길을/ 얼싸안고 덩더러쿵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에/ 못 가게 하네 저 백두산에 내 어찌 못 가리/ 내 손으로 이 칼날의 숲을 불 놓아 태우고/ 살아서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젊은 견훤 / 양성우
아직은 우리 다 죽지 않았으니,/ 살아 남은 사람들아 염려하지 마라/ 억새풀 무등산 깊은 골짜기/ 그을린 돌무더기 저 수풀을 헤치고/ 젊은 견훤이 서둘러 오고 있지 않느냐?/ 여기저기 살붙이들의 말없는 무덤 위에/ 상처 위에 때가 차니,/ 피를 피로 갚고/ 원한을 원한으로 갚기 위하여/ 그 가슴에 가득히 비수를 품고/ 작고개 너릿재 넘어 화살처럼 오는 이/ 저 젊은 견훤을 두고/ 우리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기뻐하라/ 좀도둑 칼날 아래 갈 곳도 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 음침한 산그늘 밑, 진흙탕 무진벌에/ 못 죽어 숨어사는/ 백제의 아비들아//
만석보 / 양성우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눈 쌓인 배들평야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머리 짙은 안개 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그때 그 아비들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들은 것도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날 저문 남의 땅 황토언덕 위에 눈물뿐인 오목가슴/ 주먹으로 치며 달을 보고 울었다/ 그때 그 아비들 가을걷이 끝난 허허벌판에/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굶주려도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주눅들고/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주눅들어서/ 죽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고/ 빌어먹을 이놈의 세상 밤도망이라도 칠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숨만 쉬었다/ 제 똥 싸서 제 거름 주고/ 제가 거둔 곡식은 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뉴월이면 송장메뚜기라도 잡아먹지/ 오 동지섣달 길고 긴 밤 그 허기진 배 오죽했으리/ 모진 목숨이 원수였고 조병갑이 원수였다/ 이방 포졸 떴다 하면 닭 잡고 개 잡아라/ 쑥죽 먹는 신세라도 사또조상 송덕비 세워주고/ 사또에미 죽었으니 조의금 천 냥을 어서 내라/ 못살겠네, 못살겠네 보리쌀 한톨이 없어도/ 억새풀 묵은밭 천수답 다랭이 물세를 내고/ 죽자사자 낸 물세를 또 내고 또 내라고 하고/ 못 내면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만석보 긴 둑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고부 장내리 사람들. 차라리 마을마다 통문이나/ 돌릴까? 이 야윈 가슴팍에 비수를 꽂을까?/ 아비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고 아 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피눈물만 있었다 그 산비탈/ 밤은 밤으로만 남아 있었고/ 칼은 칼로만 남아 있었다 겉늙은 전라도/ 굽이굽이에 굶주림은 굶주림으로만 남아 있었고/ 증오는 증오로만 남아 있었다 먼지 낀 마루 위에/ 아이들은 앓고 신음소리 가득히/ 그릇에 넘쳤나니 오라 장돌뱅이 어둠 타고 오라/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장성 갈재 훌쩍 넘어/ 서둘러 오라 맞아죽은 아비 무덤 두 손으로 치며/ 전봉준은 소리 죽여 가슴으로 울고/ 분노는 분노로만 남아 있었고/ 솔바람소리는 솔바람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 손님들을 찬바람 서릿길 깊은 밤이면 썩은새/ 감나무집 작은 봉창에 상투머리 그림자들/ 몇몇이던가를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은 알았다 아이들까지도/ 김도삼이 정익서 그리고 앉은뱅이 두루마기/ 펄럭이며 왔다가 가고 그 밤이면 개들이/ 짖지 않았다 개들도 죽은 듯이 짖지 않았다/ 장날이 되어야 얼굴이나 볼까?/ 평생을 서러움에 찌든 사람들 찰밥 한 줌/ 못 짓는 무지렁이 대보름 진눈깨비 내리는/ 대목장터에 큰바람이 불었다 쇠전머리에/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때가 차고 부스럼딱지 개버짐 피었으니/ 가자 가자 용천배기 손뼉치며 가자/ 김제 태인 알렸느냐? 최경선이를 불렀느냐?/ 지푸라기 날리는 저녁 말목장터에/ 으스름 보름달 서럽게 밟고 낫 갈아 아비들은/ 침대를 찍었다/ 드디어 때가 찼으니/ 증오를 증오로 갚기 위하여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안개 낀 새벽 해묵은 피고름 비로소 터지고/ 증오를 오히려 증오로 갚기 위하여 아비들은/ 몰려갔다 살얼음 거친 들판 꽝꽝 울리며/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그 겨울 노령남북/ 모여든 아비 아비들은 몰려갔다/ 곰배팔이도 눈비바람 칼날같이 몰아칠지라도/ 그 누가 무단히 죽어간다더냐?/ 동트는 고부읍내 천둥번개로/ 두둥둥 북치고 꽹과리치고/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꽹과리치고/ 보아라 말발굽소리 크게 울리며/ 흰말 타고 달려오는 전봉준을 보아라/ 남은 처자 불쌍하여 눈 못 감고 죽은/ 만 사람의 붉은 피 두 손에 움켜쥐고 어이 어이/ 말잔등 찬바람 뚫고 한걸음에 여기 왔다/ 이노옴 조병갑아/ 자네 손화중이 동문으로 가고/ 자네 김개남이 남문으로 가게/ 한 번 지른 함성으로 삼문이 부서지고/ 또 한 번 지른 함성으로 동헌 지붕이 불에 탔다/ 창고문을 열어라 감옥문을 부숴라/ 조병갑이를 놓치지 마라 갈기갈기 찢으리라/ 죽창이 없으면 괭이로 찍고/ 몽둥이가 없으면 발로 밟으리라/ 자네 김개남이 앞뜰로 가고/ 자네 손화중이 뒤뜰로 가게/ 앉은뱅이 이빨 물고 치는 북소리/ 고부산천 회오리치며 크게 울렸나니/ 여우 같은 조병갑이 옷 바꿔 입고/ 어디론가 흔적 없이 뺑소니치고, 분바른 계집들/ 후들후들 떨며 목숨을 빌었다 맨땅에 엎드려/ 이제 와서 그 흙탕물 어찌 두고 보랴/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 터진 봇둑 밀치며 핏물이 흐르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차라리 노래보다/ 몸부림으로 그 한나절 용천배기 어깨춤 추고/ 어절씨구 곰배팔이 곰배춤 추며/ 어절씨구 어절씨구 곰배춤 추며/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한쪽에선 만석보 허물고 온 이야기/ 조병갑이 허겁지겁 도망친 이야기로/ 모두들 오랜만에 신명이 났다/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이윽고 산마루에 큰 달이 뜨니/ 해묵은 어둔 밤을 비로소 끝내기 위하여/ 아비들은 빼앗은 관청마당 높은 담장 밑에/ 날선 죽창 세워 두고 모닥불 쬐며/ 아이들이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를 들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양성우(梁性佑) 시인, 교육인, 정치인
1943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5년 광주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군사독재를 비판한 <겨울공화국>을 낭독하여 교직에서 파면되었다. 1977년 6월 일본 잡지 '세카이'에 <노예수첩>이라는 저항시를 써, 일명 노예수첩 필화 사건이 터졌다. 1979년 건강악화로 가석방 될 때까지 감옥에서 지냈다. 1988~1992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2009~2012 제5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시집으로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노예수첩》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북치는 앉은뱅이》 《오월제》 《그대의하늘길》 《세상의 한가운데》 《사라지는 것은 사람일뿐이다》 《길에서 시를 줍다》 《내 안에 시가 가득하다》 《물고기 한 마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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